바흐가 서거한 뒤 50년 후, 멘델스존의 하인이 정육점에 다녀와서 고기를 싼 종이가 오래된 음악 악보인 것을 발견하고 주인에게 가져간다. 피묻은 악보를 펼쳐 본 멘델스존은 바로 피아노로 다가가 건반을 두들겨 보는데 놀랍게도 이 곡은 바흐의 <마태수난곡>인 것이다. 음악사에서 길이 남을 이 극적인 순간은 <바흐 이전의 침묵>이라는 영화 속의 한장면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마태수난곡>은 바흐의 아들 카를에 의해 온전히 보존되다가 나중에 베를린 징아카데미에서 보관되었고, 이 악보를 멘델스존이 입수하게 되어 초연이 이루어진 것이다. 어찌되었건 멘델스존에 의해 이 위대한 <마태수난곡>은 사장되지 않고 우리 앞에 선명하게 재탄생되었으니 바흐 다음으로 멘델스존에게 고마움을 전할 뿐이다. 영화에서는 <마태수난곡> 악보를 보며 경이로운 감동에 전율하는 멘델스존 뒤로 성토마스 합창단의 합창소리가 아름답게 흐른다.
지난 주 이 성토마스 합창단과 단짝인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가 한국을 찾았다. 바흐가 27년이나 토마스칸토르로 재직하며 지도했던 성토마스 합창단은 신임 토마스칸토르 고톨트 슈바르츠와 함께 내한했는데 그 자신도 소년시절 성토마스 합창단의 일원이었다고 한다. 그는 전통 깊은 도시 출신답게 겸손하고 바흐 작품에 대한 열정이 있어 보였다. 다만 서울공연이 이번 아시아 투어 마지막 일정이어서 그런지 합창단원들은 몹시 피곤해보였다. 공연이 진행되면서 꾸벅꾸벅 졸거나 옆사람과 단짓을 하거나 장난을 치는 듯 지루해하는 단원들이 눈에 띠었다. 공식적인 연주장인데 놀랍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그래도 자기 차례가 오면 발딱발딱 일어나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단원들을 보고 있노라니 바흐 시절에도 어린 성가대 단원들은 그랬을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도 창단 초기부터 성토마스 합창단과 협연을 했다고 하니 세월이 선사한 선물처럼 두 단체는 신뢰가 두텁게 느껴졌다. 비올라 다 감바, 하프시코드 등 시대학기를 포함한 오케스트라의 소노리티는 한치의 오류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완벽한 연주를 보여주었다. 연주의 긴장감은 극도로 팽팽한데 이상하게 그 속에서 말할 수 없는 슬픔과 안식을 느꼈다.
음반으로만 들을 때는 미처 몰랐는데 막상 실연으로 보니 <마태수난곡>은 입체적인 오라토리오였다. 복음사가로 등장한 테너가 배경을 설명해주고 코랄, 서창, 합창, 아리아가 이어지면서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둘러싼 인류 최대의 극적드라마가 펼쳐진다. 특히나 지난주가 고난주간이었기에 가사 하나하나가 사무치듯 가슴에 와닿았다. 아~나의 예수여. 편히 잠드소서....우리는 눈물에 젖어.....
이날 공연에서 솔리스트들의 활약도 대단하였다. 복음사가로 출연한 테너 벤야민 브룬스는 곡의 흐름을 잘 이끌어주었고, 예수로 등장한 바리톤 클리우스 헤거도 멋진 기량을 보여주었다. 다만 알토 솔리스트는 다소 약하다는 느낌이었다. 특히 유명한 47곡 알토 아리아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는 기대이하여서 적잖이 실망감이 들었다. 1부에서는 19곡 소프라노 아리아 "제 마음을 당신께 드리오니"와 35곡 코랄 "오 사람아, 너의 죄가 큰 가를 통곡하라"가 좋았고, 2부에서는 57곡 소프라노 서창, 66곡 베이스 아리아, 69곡 알토 서창, 72곡 코랄, 75곡 베이스 아리아, 그리고 77곡 서창&합창 등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처음으로 경험한 <마태수난곡> 실연은 공연 자체를 보는 것만으로도 벅찬 감동이었고, 음반으로 들을 때 흥미를 못느낀 레치타티보 부분도 매우 극적으로 느껴졌다. 연주장이 예당이 아니라 성당이라면 경건한 아우라를 더욱 생생하게 경험했을텐데....다음에는 성당에서 연주하는 <마태수난곡>을 보고 싶다. 라이프치히 성토마스 교회이면 더욱 좋겠지만...
첫댓글 지금은 b단조 미사와 더불어 서구종교음악의 한 기둥으로 자리잡았지만 멘델스존이 아니었다면 이 곡은 더 오랫동안 묻혀있거나 재조명되지 않았을 지도 모를 일이었겠죠. 카잘스와 더불어 멘델스존의 역할이 작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연으로 3번 이상은 본것 같은데 볼때마다 형언하기 힘든 정화의 느낌이 생깁니다. 퓨어님 말씀처럼 성당 혹은 유럽의 어느 교회에서 볼 기회도 생긴다면 좋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멘델스존과 카잘스 모두 바흐와 연관된 극적인 스토리를 갖고 있는 거로 봐서 더욱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스토리의 진위를 떠나, 바흐 음악에 대한 이 두 음악가의 공헌을 기리고 싶은 욕망이 에피소드로 투영된 것이라고 여겨지니까요.
멋진 후기 감사드립니다.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저도 <바흐 이전의 침묵>을 봤습니다만 그닥 인상적이지 않았는데 퓨어님 글을 보고나니 다시 보고싶어지네요.
그리고 멘델스존은 본인의 작품활동보다 바흐를 발굴한 공로가 여러모로 훨씬 크죠.^^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바흐 이전의 침묵>은 바흐 음악의 특징을 모르면 만들 수 없는 매우 훌륭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전혀 다른 이야기들이 조각보처럼 하나의 그림을 이루고, 특히 현대인에게 바흐의 음악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마지막에 바흐 음악에서 리게티의 현대음악으로 연결되면서 마무리되는 점도 기가 막힌 연출이라 생각되구요. 사운드 좋은 곳에서 카페 회원들과 같이 보면 넘 좋을 것 같아요~~
@pure 바흐 이전의 침묵... 하면 지하철 안에서 바흐 무반주 첼로모음곡 1번 프렐류드를 연주하는 장면이 떠올라요. 다시 보고싶네요.^^
@Karajan 맞아요. 그 장면 제일 유명하죠....너무 인상적이라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장면입니다.
내일 통영에서의 연주 기대됩니다~
아하~~바흐 콜레기움 재팬의 <마태수난곡>보러 가시는군요? 완전 좋으실 것 같아요^^ 잘 보고 오셔서 감상평 올려주세요^^
불과 며칠 간격으로 마태수난곡을 그것도 일급의 연주단체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참 멋진 일이네요. 통영은 그 풍광만으로도 가볼만한 곳인데 음악과 함께라면 더 잊지 못할 추억이 될것 같습니다. 통영에 가시는 분들, 모두 잘 다녀오세요~
맞아요.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너무 행복한 일이죠. 허나 제일 바쁜 이번주에 왜 이렇게 좋은 공연이 많을까요? 통영에서는 바흐 콜레기움 재팬의 <마태수난곡>, 광주에서는 크리스토프 마탈러의 <테사 브롬슈테트는 포기하지 않는다>... 너무 안타깝고 아쉽습니다 ㅠㅠ
@pure 이 광주 공연 꼭 봐야하는거죠?
@산유화 네에~ 꼭 보셔야하는 음악극입니다. 평생 보기 어려운 대단한 작품입니다. 아마 음악도 멋질거에요. 무대디자인도 안나비브룩이 만든 명품이구요~
@pure 광주아시아문화전당은 왜 가기 싫은지...지하철로 8분거리인데...극장이 너무 어둡고 폐쇄적이고 지하에 콱 묻어있어 밤에 가면 정말 암흑이어요...조명도 음향도 꽝이고요..앙~ㅠㅠ
@사랑이 내게 이야기하는 것 어머나! 정말요? 저는 정말 가보고 싶은 공연장인데...
@pure 흑흑..제대로된 음악홀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정말 부끄럽습니다.어찌된 게 저는 아시아문화전당 개관 동시에 전당 건너 학원이 문을 닫는 바람에 직장도 내려놓고...그 아시아문화전당 근처에서만 이십 여 년 가까이 출퇴근을 했는데...이래저래 아픔이 밀물처럼 밀려오네요..^^::
@사랑이 내게 이야기하는 것 어흑 ㅠㅠ 저도 같이 슬퍼지네요...
아시아문화의전당은 돈을 그렇게 많이 들여 지어 놓고 지역주민에게도 사랑을 못받으니 안타깝기 이를데 없네요....
@pure 사실 한참 전부터 이 공연을 볼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는데 냉큼 예매했습니다. 이것으로 통영에 못간 아쉬움을 달랠 수 있을 것 같네요. 고맙습니다.^^
@산유화 별말씀을요. 즐겁게 보시길 바랍니다. 아 글구 베르너 페스빈더 감독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에 나온 임 허만이 출연한다고 합니다. 참고하세요~
네..흑흑..그러게 말입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