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玉川)서원을 다녀와서
선조 유적지 탐방이라는 가슴 벅찬 여행을 떠난다는 기쁨으로 지난밤을 설쳤다. 평소 서면으로만 보던 선조 대현의 귀향지인 順天에 와서 이곳을 방문 하는 것은 정말 기쁜 일이다. 2007년 10월21일 釜山宗親會 회장이신 榮六회장님의 협찬으로 이렇게 종원 여러사람이 함께 나들이를 하게되니 흥분된 마음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아침 일찍 동래 메가마트앞에서 출발하여 順天으로 향하는 관광버스는 거침없이 달린 끝에 順天시 향동사무소 앞까지 도착하였다. 현지 일가 宗員의 안내를 받아 유적지에 이르니 옥천계곡의 물은 지금도 깨끗하여 옥같이 흐르니 그 옛날 이곳에서 귀향살이를 하실 때는 얼마나 맑고 푸르렀을까. 臨淸臺(임청대)는 대현이신 한훤당(1454-1504)선생의 늠름하신 모습이 그때의 기상과 함께 보이는 듯 하다. 한훤당선생의 전원생활을 담은 시조 한 수가 옥천서원 책자(펴낸이:송병관 옥천서원문화재지킴이)에 소개되어 있어 읽어본다.
삿갓에 도롱이 입고 細雨(세우-가랑비)중에 호미 메고
山田(산전)을 흩매다가 녹음에 누웠으니
목동이 牛羊(우양)을 몰아 잠든 나를 깨우다
이처럼 평소 전원생활의 평화로움을 즐기시는 선생의 일상을 보는 듯 하다. 臨淸臺(임청대)의 유래는 臨淸이란 항상 마음을 깨끗이 가지라는 뜻으로 귀향살이에서 그 무서운 고통을 받을망정 스스로 자위하여 생활했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사적자료가 되고 있다.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따온 말이며, 여기서 함께 귀향살이를 하시던 曺偉(조위,1454~1503)가 이름을 짖고 훗날 퇴계선생이 친필로 크게 썼던 것을 그 후 60여년이 지난 후에 당시 태수 龜巖 李楨(구암 이정,1512-1571)이 세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옥천서원과 함께 순천향교에서 소유하고 있으며 옥천서원은 순천시 옥천동 165번지에 소재하며 순천향교에서 소유관리하고 있으며 문화재자료 제4호로 1984년 2월29일 지정되었으며 조선 연산군 4년(1498년) 무오사화때 희생된 한훤당선생을 추모하는 書院이다.
도학정신으로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선비의 거룩한 모습을 보이면서 순천의 유배지에서 효수형을 당하신 선생은 형장에서도 얼굴빛을 편안히 하시고 수염을 같우려 입에 머금고 산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이 수염은 부모에게 물려받아서 칼날에 다치게 할 수 없다)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돌아가셨다. 선생은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에 임하는 선비의 엄숙한 모습을 보였으며 죽음 앞에서도 수염하나까지 부모를 생각하는 孝의 실천을 잊지 않았다.
선생은 유배지에서 학문연구와 인재양성에 힘쓰시어, 마침내 영남 사림의 도학을 경기도 전라도 등 전국으로 확대한 업적을 이루었다. 특히 평안도 희천에서 靜庵 趙光祖(정암 조광조,1482~1519) 선생에게 도학을 전해서 조선에서 도학이 뿌리내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하였다.
慕齋 金安國(모재 김안국) 思齋 金正國(사재 김정국) 형제와 琴軒 李長坤(금헌 이장곤), 新堂 鄭鵬(신당 정붕) 등 이른바 기묘명현(己卯名賢)들도 선생의 문인들로서 중종대왕 때 실행하였던 왕도정치에서 주역을 맡게 되었다. 한훤당은 우의정으로 추증 받았고, 문경(文敬)으로 시호를 받았다. 광해군 2년에 선생은 일두 鄭汝昌(정여창), 靜庵 趙光祖(정암 조광조), 晦齋 李彦迪 (희재 이언적), 退溪 李滉(퇴계 이황) 선생과 더불어 조선 5현의 首賢으로서, 조선의 선비로서는 최초로 성균관 문묘에 배향을 받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玉川書院(옥천서원)은 명종 19년(1564)에 부사 李楨(이정)이 처음 세워 景賢堂이라 불렀으며 한훤당 선생의 신위를 모실 사당을 지으면서 玉川精舍(옥천정사)라 했는데, 선조1년(1568)에 순천부사 金啓(김계)의 상소로 전라도에서는 처음으로 옥천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한 때 화재로 불탄 것을 1928년 유림들이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른다.
건물 배치는 경현문을 들어서면 강당인 집의당, 내삼문 그리고 사당인 옥천사가 있다. 사당은 앞면 3칸, 옆면 1칸반 규모이며 앞면에 뒷마루를 깔아 개방하였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강당은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로 가운데는 대청마루를 깔고 양쪽 문에는 온돌방을 놓았으며 지붕은 맞배지붕이다라는 설명을 향교 관리소장 및 문화재지킴이로부터 들으면서 이곳은 후손이 아닌 향교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다는 말씀에 후손으로서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향후 후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시는 원장님의 말씀이 귓전에 남으니 더더욱 부끄러운 생각으로 숙연해진다.
참배를 마치고 주위 환경을 살펴보니 정말 부러울 정도로 깨끗하게 정돈된 공원이며 서원 앞 을 흐르는 옥천은 비취계곡으로 보여 질 정도이니, 그 옛날에는 얼마나 한적한 곳이었을까?
옥천서원지킴이이신 송병관선생의 말씀처럼 한훤당 선생의 유적이나 유품을 찾을 수 없어 당시 선생의 높은 학문이나 사상을 연구하지 못하고 베일에 쌓여 있어 안타까움을 다시한번 확인하며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시다가 사사 되신 선생의 업적을 밝히는 것이 후손된 도리다.
선조의 유적지를 탐사하면서 망각 속에서 있었던 선조의 값진 문화유적이 이곳 여기에서 고이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에서 무궁한 자긍심을 느끼며 조상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식(二埴·26世孫·仲派) 부산사하구청 세무팀장
《서흥김씨대종보 제47호|2008년2월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