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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樂民(장달수)
남주유심회 2019년 1월 월례회 자료
< 方臺亭次李蒼石韻 >(방대정의 창석 李埈공 시의 운으로)
紫巖 李民寏(1573-1649) 永川人 의성 산운
登臨臺上正秋風 방호대상 오르니 때 마추어 추풍 부는데,
丹葉黃花映峽中 붉은 잎 노랑꽃이 골짜기 물에 비취는구나,
絶壑更幽迷洞府 깊은 산골 아득해 신선 사는 곳 흐미하고,
層崖如削倩神工 층층바위 깍은 듯이 신공의 조화 예쁘구나,
千山白雨森銀竹 왼 산에는 소나기가 세차게도 쏟아 지는데,
一派淸川遶玉虹 한줄기 맑은 개울엔 흰 무지개 둘렀구나,
終日澄心靜觀處 하루 종일 마음비우고 조용히 바라보노라니,
不須頻喚主人翁 주인을 찾을 것 없이 혼자 있어도 족하구나.
< 方臺亭蒼石公原韻 >
蒼石 李 埈(1560-1635) 興陽人 상주 유천
曾從天柱御冷風 일찍이 하늘기둥 따라 찬바람 어거하더니,
道骨眞宜著此中 선풍도골로 이곳에 들어남 참으로 마땅하네,
一片靈源天祕勝 한조각 신선이 사는 곳은 하늘이 감춰둔 승지요,
半空飛閣鬼輸工 반공에 솟은 정자는 귀신이 지은 듯 공교하네,
窓前列岫翔金鳳 문 앞에 늘어선 봉우리엔 봉황새가 날고 있고,
階下寒流遶玉虹 뜰 앞의 서늘한 물엔 흰 무지개 둘러있네,
欲續舊遊吾老矣 옛날놀이 하고프나 내 몸은 이미 너무 늙어,
謾將詩句謝僊翁 부질없이 한수 시로 주인옹에게 사례하네.
己亥正月初四日 南州儒心會 鄭 亮 元 準備
형조참판 자암(紫巖) 이민환[李民寏] 선생 신도비명(碑銘)
-외증손 호조참판 이옥(李沃) 찬
(刑曹參判紫巖李公神道碑銘) 幷序
가대인(家大人)의 외할아버지[外王考] 형조 참판 자암(紫岩) 이공(李公)이 돌아가신 지 45년이 되었는데 묘에 비석이 없었다. 그 손자 이중염(李重燫)씨가 행장을 나 이옥(李沃)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우리 할아버지의 탁월한 공렬과 많은 덕망을 위하여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도록 꾀하는 데 자네 같이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할 사람이 없으니 자네는 그 일을 도모해주게나.” 하였다. 내가 생각해보니 공은 이미 문장과 정치력이 있고 벼슬도 아경(亞卿)이며 나 또한 외손[外裔]이 되니 의리상 사양할 수가 없었다.
삼가 상고하건대 공의 휘(諱)는 민환(民寏)이고 자(字)는 이장(而壯)이며 성씨의 계통은 영천(永川)이다. 상조(上祖) 이전(李磚)은 고려조(高麗朝)의 영동정(領同正)이었고 증조(曾祖) 이세헌(李世憲)은 증 좌승지(左承旨)이며 조(祖) 이여해(李汝諧)는 증 이조 참판(吏曹參判)이고 고(考) 이광준(李光俊)은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증 예조 참판(禮曹參判)인데 3대를 추은(推恩)한 것은 공의 부자(父子)가 귀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비(妣) 정부인(貞夫人)은 평산 신씨(平山申氏)로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의 후손이요 선무랑(宣務郞) 신권(申權)의 딸이다. 만력(萬曆) 계유년(癸酉年, 1573년 선조 6년)에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의젓하고 속이 깊어 보통아이와 달랐다. 문장을 일찍 통달하여 10세에 ≪춘추(春秋)≫를 정통하였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에 왜구가 침략해 와서 흉측한 칼날이 날로 기승을 부리자 여러 지방의 고을이 기와더미가 무너지듯이 흩어졌다. 공이 중씨(仲氏) 경정공(敬亭公)과 더불어 엄친을 따라 임영(臨瀛)의 임소(任所)에서 군사를 모집하고 병기를 손질하여 기다렸다. 이웃의 어리석은 백성이 격문(檄文)을 가지고 와서 서로 공갈하려 하자 공이 즉시 그를 참(斬)할 것을 아뢰고 적이 옴에 미쳐서는 공이 말을 달려나가서 적 몇 사람을 쏘아 죽이니 적이 두려워서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니, 이웃 고을들이 그 힘을 많이 입었는데 공의 나이 20세였다. 도신(道臣)이 아뢰어 엄공의 품계를 통정 대부(通政大夫)로 올렸다. 공이 경자년(庚子年, 1600년 선조 33년) 과거에 상제(上第)로 올라 괴원(槐院, 승문원)을 거쳐 한원(翰苑, 예문관)에 들어갔다. 그때에 경정공(敬亭公)이 춘방(春坊)에 있었는데 형제가 휴가를 고하고 엄공을 관동의 얼영(臬營)에 가서 뵈니 옥절(玉節)과 채복(彩服)이 다함께 금강(金剛)에 모였다. 간이(簡易) 최입(崔岦)과 석봉(石峰) 한호(韓濩)가 도(道)로써 수종하며 기록하고 썼는데 세상에서 부러워하며 삼소(三蘇)가 촉교(蜀橋)에 “높은 수레를 타지 않으면 이 다리를 지나가지 않겠다[不乘高車不過此橋]”고 쓴 것에 비교했다고 한다. 사서(司書)ㆍ정언(正言)ㆍ병부랑(兵部郞)에 올랐다.
을사년(乙巳年, 1605년 선조 38년)에 암행어사로서 부월(斧鉞)을 가지고 관서(關西)를 안렴(按廉)하여 잘 다스린 관리와 잘못 다스린 관리를 내치기도 하고 올리기도 하되 사정을 두지 않았다. 왕자 집에 사나운 종놈이 있어 횡포가 심하였으나 그 지방의 감사[岳牧]도 감히 죄를 묻지 못했는데 공이 장살(杖殺)시켰다.
무신년(戊申年, 1608년 선조 41년)에 고을의 수령으로 나가기를 청하여 영천(永川)으로 나가게 되었고, 그 다음 해에 부친상[外艱]을 당하여 변에 순종하였다. 중주(中州)에 제수되었다. 중주는 상류(上流)들이 살고 땅이 크고 풍속 또한 다스리기 어려운 곳인데 공이 위엄과 인정으로 가지런히 하였다. 관리를 일치하고 백성을 자리잡게 했으며 조정 귀인들의 청탁을 배척하니 치적이 호서 좌도(湖西左道)에서 제일이었다. 무오년(戊午年, 1618년 광해군 10년)의 부역에 공이 원수막(元帥幕)을 따르게 되자 공이 말하기를, “편리하고 위험하며 죽고 사는 것에 관계하지 않는 것이 나의 임무이다.” 하였다. 그 다음 해 2월에 우리 군사가 압록강을 건너서 명나라 군사와 갈령(葛嶺)에서 만났다. 이보다 먼저 원수가 광해군의 뜻을 받아 수서(首鼠)인 관향사(館餉使) 박엽(朴燁)을 체포하고 우선 곡식을 늦춰서 굶주린 사졸을 먹이게 하였는데 명나라 장수가 우리에게 군사를 늦게 발동한다고 힐책하였다. 3월에 마가채(馬家寨)에 진차하였고, 9일에 더욱 굶주리게 되자 공이 군량을 담당한 비장(裨將)을 참하고 글을 보내어 박엽을 질책했는데 지적한 말이 매우 준열하였다. 박엽이 공을 원망하게 된 것이 이 때문이었다. 4월에 부거(富車)에 당도하여 졸지에 적과 만났다. 굶주리고 훈련되지 않은 우리 군사로 10만이나 되는 강성한 적의 군사를 만나서 진(陣)도 이루지 못한 채 무너지자, 공이 자인하고 의절(義節)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자 하였는데 곧 원수가 적과 화친을 이루었다는 말을 들었다. 당초 군사의 일에 나간 것은 우리 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었고, 공의 계획은 뒷날을 도모함에 있었으므로 원수를 따라 가려고 하는데, 적이 온갖 방법으로 달래고 협박하며 공의 비장과 종을 참하면서까지 위협하였으나 공은 적의 칼날 보기를 까는 자리같이 여기고 사기(辭氣)가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며 앉으나 일어서나 인수(印綬)가 잠시도 몸에서 떠나지 않게 하였다. 그리고 선유의 글을 적어서 강송하기를 그치지 않았고, 그 책에 쓰기를 ‘조문록(朝聞錄)’이라고 하였다. 적이 17개월이나 구유(拘幽)하고 방수(防守)했으나 공을 끝내 굴복시키지 못할 것을 알고 구속된 자의 성명을 적어 섞어서 빼내어 머물러 둘 자와 보낼 자를 정하였는데 공의 이름이 보내는 자 속에 들어있었다. 그래서 공이 두 사람과 함께 돌아와 용만(龍灣)에 다다랐는데 박엽은 전에 이미 공이 자기를 꾸짖은 데 앙심을 품었고, 또 공이 광해군에 대할 백장(白狀)에 저들 실정을 비방하고 진달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였고, 또 액정(掖庭)과 비밀리 도모하니 일이 할 수 있는 것이 없게 되었다. 공은 할 수 없어 도신(道臣)에게 인수를 바치고 관서(關西)에 4년간을 머물렀는데 인조 대왕(仁祖大王)이 개옥(改玉)을 하자 공이 곧 관직에 임명되어 돌아왔다.
갑자년(甲子年, 1624년 인조 2년)의 이괄(李适)의 난과 정묘년(丁卯年, 1627년 인조 5년)의 호란에 임금을 행재소(行在所)에 호종(扈從)하였고, 병자년(丙子年, 1636년 인조 14년)에 북인(北人)이 압록강을 건너오자 여헌(旅軒) 장 선생(張先生)이 영남 호소사(嶺南號召使)로서 공을 종사관으로 불렀다. 난이 평정되자 군자감 정(軍資監正)에 제수 되었다가 통정 대부(通政大夫)에 승진되었고 동래 부사[東萊伯]가 되었다. 부임하자 과조(科條)를 엄하게 하고 번폐(煩弊)를 제거하고 교화를 돈독히 하고 사류(士類)를 격려하며 청백(淸白)과 신근(愼謹)으로 스스로의 다스림을 삼으므로 기회를 보아 속이는 자들이 숨을 죽이니 변방이 편안하였다. 체직되어 판결사(判決事)와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임명되었다. 얼마 있다가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발탁되었는데 모두 특명이었고 부임하는 관청마다 훌륭한 성적이 있었다.
을유년(乙酉年, 1645년 인조 23년)에 경주 부윤[鷄林尹]에 임명되어서는 법규(法規)를 중주(中州)와 내산(箂山)과 똑같이 하였다. 공이 일찍이 변란을 만나면서부터 이름이 하류에 있었는데 성주(聖主)가 발탁하여 좋은 벼슬[顯仕]에 등용하니 성은의 깊음이 하늘과 같았으므로 몸을 버려 나라에 보은할 계획을 하였다. 그러나 힘을 다 할 수 없는 나이가 되어 병으로 옮겨 일을 하직하고 돌아갔다. 기축년(己丑年, 1649년 인조 27년) 2월 24일에 감기 병으로 세상을 버리니 향년(享年) 77세였다. 비단과 부의를 내리기를 법식과 같이 하였다. 그해 여름에 의성산(義城山) 운리(雲里)에 장사를 지냈다가 27년 전 을묘년(乙卯年, 1675년 숙종 원년)에 영양(英陽)의 풍산(豊山) 갑좌(甲坐)의 언덕에 이장[移窆]했는데 이는 가대인(家大人)이 영남 관찰사로 있을 때였다.
공의 초취(初娶)는 광릉 이씨(廣陵李氏)인데 일찍 세상을 떠났고, 후취(後娶)는 군수 홍귀상(洪龜祥)의 딸로 성품이 부드럽고 아름다웠으며 부도(婦道)가 있었고 모의(母儀)에 부족함이 없었다. 5남 4녀를 길렀는데 장남 이정상(李廷相)은 문과(文科) 군수이고, 다음은 이정숙(李廷橚)이며, 다음 이정기(李廷機)는 문과 목사(牧使)인데 죽었고 호가 경정공(敬亭公)이요, 다음 이정재(李廷材)ㆍ이정빈(李廷彬)은 일찍 죽었다. 장녀는 나의 할아버지 증 찬성(贊成) 이심(李襑)에게 시집왔고, 다음 사부(師傅) 박공구(朴羾瞿), 판결사(判決事) 신홍망(申弘望), 사인(士人) 송세빈(宋世彬)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외부(外婦)에서 낳은 아들 이정지(李廷枝)ㆍ이정오(李廷梧)는 다 무과에 급제하였고, 이정주(李廷柱)ㆍ이정표(李廷杓)는 진사(進士)이다. 이정상(李廷相)은 아들이 없어서 첩의 아들 이만흥(李晩興)으로 뒤를 이었다. 이정숙은 4남을 두었는데 장남 이중현(李重炫)은 생원(生員)으로 일찍 죽었고, 다음은 이중염(李重燫)ㆍ이중경(李重熲)ㆍ이중전(李重烇)이다. 3녀는 사인 신이징(申以徵)ㆍ조진윤(趙振胤)ㆍ이형주(李亨柱)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목사는 아들이 없어서 이중경을 아들로 삼았고, 5녀는 현감 윤선경(尹善慶), 사인 최경함(崔慶涵), 홍서규(洪敍揆), 장령 최경중(崔慶中), 정랑 유임중(兪任重)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이정재는 외동딸을 두었는데 참봉 신명귀(申命龜)에게 출가하였다. 이정빈은 2남을 두었으니 이중형(李重炯)ㆍ이중익(李重熤)이요, 2녀는 사인 최경유(崔慶濡), 최경만(崔慶漫)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왕부(王父)는 2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나의 가대부(家大夫) 이관징(李觀徵)인데 문과(文科)로 벼슬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이며 치사(致仕)하여 봉조하(奉朝賀)이다. 차남 이정징(李鼎徵)은 문학에 종사하였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두 딸은 사인(士人) 윤이문(尹爾文)과 현감 이운근(李雲根)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박공구(朴羾衢)의 두 아들은 박원형(朴元亨)ㆍ박원영(朴元榮)이고, 네 딸은 사인 조진창(曺震昌), 참봉(參奉) 홍덕이(洪德彛), 진사(進士) 김상옥(金相玉), 사인 이도제(李道濟)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신홍망은 1남 신한로(申漢老)와 8녀를 두었는데 사인 유중하(柳重河), 김시임(金時任), 진사 이조형(李朝衡), 사인 임세준(任世準), 도이설(都爾卨), 권걸(權杰), 박문약(朴文約), 현감 박망지(朴望之)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송세빈(宋世彬)의 3남은 장남 송욱(宋煜), 다음으로 진사 송식(宋烒), 무과에 급제한 군수 송후(宋厚)이며, 2녀는 사인 이휘(李暉)와 진사 이달신(李達新)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내외손과 증현손을 합하여 모두 2백여 인이다.
공은 자질이 호방하고 기풍이 굳세되 국량이 넓고 너그러웠다. 시서(詩書)에 두루 통했고 역사에 해박하여 고금의 변화를 통달하였다. 이른 나이에 벼슬길에 올라 현달해서 크게 세상에 쓰일 것 같았는데 불행하게도 이역(異域)에서 윤몰(淪沒)되었으나 소인처럼 구독(溝瀆)에 시체로 버려지는 방법을 따르지 않았다. 그러자 글로 헐뜯고 비방하며 간혹 공을 더럽히고 그것을 스스로의 쾌락한 일로 삼는 자들이 많았으나 듣는 자들은 살피지 아니하고 전하는 말에만 익숙하여 오래도록 어두운 구석에 버려 두었다. 그러나 임금의 살피심은 매우 밝아서 발탁하여 경재(卿宰)로 삼고 가르쳐 타이르기를, “사람 중에 혹 말하는 자가 있으나 나는 실로 경을 알고 있노라.” 하였으니, 이 말이 죄를 조장하는 자들의 날카로운 부리를 깨뜨리기에 족하고 천만세의 밝은 법으로 삼기에 넉넉하다 하겠다. 공은 가정내의 행실이 갖춰졌고 친척에 돈독하게 화목하고 이웃에 은혜롭게 했으며 선대의 제사를 받듦에 있어 예로써 하였다. 성현의 긴요한 말을 편집하되 극복(克復)의 공부를 첫머리로 하고 4대(代)의 예악(禮樂)을 중간으로 했으며 우직(禹稷)과 도(道)를 한가지로 함을 끝으로 삼고 이름을 박약(博約)이라 하였다. 또 향약(鄕約)을 두어 자제를 가르쳤으니 모두 후세에 법으로 삼을 만한 것들이다.
이옥(李沃)은 늦게 태어난 소손(小孫)으로서 비록 공을 알 수가 없다고 하더라도 산남(山南)의 선비는 선비를 논평함에 있어 매우 고자세였으나 감히 공을 법가(法家)의 필사(拂士)에 넣지 않을 수 없었으니 이것이 새길 만한 것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문장이 있고 정치가 있는데 하늘이 공의 재능에 갖춰 주셨으니 국가의 이로움을 위해서였네. 어찌하여 변방에 버렸으며 어찌하여 둔하고 차질이 되었는가? 주고받는 것은 운명이요 거두고 이루는 것은 의지이다. 임금님이 환하게 알고 있었으니 저 소인들의 참소가 그칠 수 있었네. 영산에 높직한 저 무덤, 신명과 사람이 보호해주리라. 공의 내력을 상고할 자, 어찌 이 석자 비(碑)를 보지 않겠는가?
숭정갑신후 오십년 계유 외증손 가선대부호조참판 이옥 삼가 짓다
崇禎甲申後五十年癸酉 月 日。外曾孫嘉善大夫戶曹參判李沃。謹撰
창석 이준[李埈]의 행장(行狀) -번암 채제공 찬
공(公)의 휘(諱)는 준(埈)이요, 자(字)는 숙평(叔平)이며, 성(姓)은 이씨(李氏)로 흥양인(興陽人)이다. 고조(高祖)는 집의(執義) 이수간(李壽干)이고, 증조(曾祖)는 판관(判官) 이조년(李兆年)이며, 할아버지는 이탁(李琢)이고, 아버지는 이수인(李壽仁)이다. 공은 가정(嘉靖) 경신년(庚申年, 1560년 명종 15년)에 태어났는데, 어릴 때부터 신묘하게 빼어나고 영특하였다.
경진년(庚辰年, 1580년 선조 13년)에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유 선생(柳先生)이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있을 때 공이 찾아가 뵙고 가르쳐 주기를 청하니, 선생이 한번 보고 훌륭함에 감탄하며 원대한 인물(人物)이 될 것으로 기필하여 따르게 하고 의심되는 것을 논란하며 묻는 것을 답변해 주었다. 임오년(壬午年, 1582년 선조 15년)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신묘년(辛卯年, 1591년 선조 24년)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교서관 정자(校書館正字)에 제수(除授)되었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 여름 4월에 왜노(倭奴)의 병란(兵亂)이 갑자기 일어나자 공이 서울에서 도보(徒步)로 달려 돌아오니 발이 부르터서 피가 흘렀다. 고향에 갔으나 부모(父母)가 있는 곳을 몰라 공이 밤낮 울부짖으며 다니다가 서로 효곡(孝谷)의 산중(山中)에서 만나 피난하는 사람 수천 명과 함께 안령(鞍嶺)에 웅거하고 왜적을 막을 계획을 하였는데, 뜻하지 않은 왜적의 기습을 당하여 사대부(士大夫) 집에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6월에 대혹(大酷, 대고(大故)와 같은 뜻)을 만났으나 의병을 일으킬 것을 모의하니 무리들이 공과 우복공(愚伏公, 정경세(鄭經世))을 추대하여 의병의 소모(召募)를 주관하게 하여 의병 수천 명을 모집해서 충의(忠義)로 격려하고 고모담(姑姆潭)에 의려(義旅)를 설치하였다.
계사년(癸巳年, 1593년 선조 26년) 2월에 적(賊)이 의병의 진(陣)을 습격하여 살육과 약탈을 자행하니 공은 그 형 월간공(月澗公, 이전(李))과 적중에서 겨우 탈출하였는데 공이 갑자기 어지럼증으로 땅에 쓰러졌다. 공이 백씨(伯氏)에게 말하기를, “결코 둘 다 안전할 수 없으니, 형님은 급히 달아나십시오.” 하자, 백씨가 울먹이며 말하기를, “둘 다 안전할 수 없으면 함께 죽으면 된다.” 하고, 즉시 등에 공을 업고 백화산(白華山)에 다다르니 갑자기 두 명의 왜적이 칼을 빼어들고 앞으로 다가오자 백씨가 활을 당기어 겨누고 소리쳐 꾸짖으니 적이 마침내 그냥 가버려 끝내는 둘 다 안전하였다.
갑오년(甲午年, 1594년 선조 27년)에 의병을 일으킨 공으로 전적(典籍)에 승진되었으나 복(服)이 끝나지 않았으므로 나가지 않았다. 9월에 복을 마치자 형조(刑曹)와 예조(禮曹)의 좌랑(佐郞)에 제수되었으나 다 부임하지 않았다. 을미년(乙未年, 1595년 선조 28년)에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에 제수되어 조량(調糧)ㆍ어염(魚鹽) 등의 일을 겸관(兼管)하게 되니 온갖 책무가 뒤엉키어 어지러웠으나, 공이 막부(幕府)를 도와 서무(庶務)를 참관(參觀)하여 이리저리 계산을 하고 계획을 세우니 기의(機宜)에 들어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공이 중흥 귀감(中興龜鑑)을 지어 임금에게 올렸다. 하(夏)나라 소강(少康)에서부터 송(宋)나라 고종(高宗)까지의 일을 가지고 먼저 군덕(君德)의 득실(得失)에 대해 논하고 다음으로 신하(臣下)들의 사정(邪正)에 대해 논했는데, 환하기가 촛불을 밝히고 수를 계산하는 것과 같으니, 임금이 가상하게 여기고 기뻐하여 수교(手敎)를 내려 특별하게 포상을 하였다.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김 선생(金先生)이 그것을 보고 말하기를, “단의잠(丹扆箴)을 만든다 해도 이 한 글로 족하겠다.” 하였다. 이때 영해수(寧海守, 영해부사) 정인홍(鄭仁弘)에게 매우 두터운 명망이 나 있어서 사대부(士大夫)들이 앞을 다투어 따라붙었으나 공은 이르기를, “그 사람은 안색은 씩씩하나 더없이 간사한 사람이다.” 하였다. 가는 길이 그 고을을 지나게 되었는데 정인홍이 길가에 나와서 맞이하였으나 공은 들어가지 않고 갈도(喝道)를 외치게 하고 지나가니, 정인홍이 매우 성이 나서 이를 깨물기까지 하였으므로, 듣는 자들이 위험하게 여겼다.
정유년(丁酉年, 1597년 선조 30년) 여름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었다. 그때에 서로 헐뜯는 풍조(風潮)가 한창 치성하였다. 지평(持平) 이병(李覮)이 시의(時議)에 붙어 서애 선생(西厓先生)을 힘을 다해 헐뜯으며 공이 서애 선생을 위주로 함을 미워하여 탄핵해서 체직(遞職)시키니 공이 즉시 남쪽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그해 가을에 왜적이 재차 침략해 왔다.
이에 앞서 임금이 나라 안에 영을 내리기를, “왜적(倭賊)과 원수진 일이 있는 자들은 한 부대를 만들어 왜적을 쳐서 원수를 갚으라.” 하고, 군대의 이름을 ‘분의복수대(奮義復讐隊)’라고 내렸다. 이때에 이르러 공을 소모관(召募官)에 차임(差任)하였다. 당시 적이 연달아 호남(湖南)을 함락하고 쉬지 않고 휘몰아 오는데 그 선봉이 매우 날래어 임금이 다시 피난을 가려 했는데, 공이 상소(上疏)하여 조령(鳥嶺)으로 진주(進駐)할 것을 청원하니 임금이 가상히 여겼으나 끝내 행할 수가 없었다.
여름에 공이 마침내 명(命)을 받고 남쪽으로 가서 의병(義兵)을 규합(糾合)하니 체찰사(體察使) 이공(李公, 이원익(李元翼))이 방어사(防禦使) 곽재우(郭再祐)에게 소속시켜 협력하여 서로 응하게 하므로, 마침내 석문(石門)에 들어가 성지(城池)를 수선하고 참호(塹壕)를 파고 군량(軍糧)을 모아 쌓고 병기(兵器)를 수리하니, 군중(軍衆)이 모두 성(城)이 반드시 지켜질 것을 알고 죽을 것은 잊었다. 얼마 안되어 조정(朝廷)에 근거 없는 논의가 일어나 석성(石城)으로 옮기라 하더니, 조금 있다가 임금의 명으로 의병을 파하였다. 그러자 공은 공(功)이 이뤄지지 않을 것을 알고 분개하고 통탄스러운 마음에 상언(上言)하여 아뢰기를, “신(臣)이 창자가 타고 입이 마르도록 성을 수리하고 군량을 모아 공무(公務)를 구처(區處)하고 손이 닳고 입이 부르트도록 쉴새 없이 일을 하여 자잘한 것도 버리지 않고 모두 쌓아놓았었는데, 이에 이르러 낙동강 물과 더불어 함께 흘러가 버리게 되었습니다. 이는 하늘이 실지로 한 것인데 말한들 무엇하겠습니까?” 하였으나, 비답을 내리지 않아 군진(軍陣)이 드디어 파하고 말았다. 겨울에 명나라 군사가 남쪽 지방으로 내려오자 검찰사(檢察使) 성영(成永)이 공을 불러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아 군량(軍糧)을 독책(督責)하게 하였다.
무술년(戊戌年, 1598년 선조 31년)에 예조 정랑(禮曹正郞)에 임명되고, 이듬해인 기해년(己亥年, 1599년 선조 32년)에는 단성 군수(丹城郡守)에 제수되었는데 고을이 막 난리를 겪은 터에다 또 영남(嶺南)의 요충지(要衝地)라서 명나라 군사의 왕래가 끊임없이 많아 고을 백성들이 견디어 낼 수가 없었다. 공이 부임하자 지성으로 어루만지고 쓰다듬어 마침내 장차 없어지려던 고을이었지만 고을의 면모(面貌)가 다시 갖춰지게 되어 조정에 장계(狀啓)를 올려 보고하니, 임금이 가상하게 여겨 특명(特命)으로 5년간의 세금과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또 생각하기를, “백성의 수고로움이 조금 쉬게 되었으니, 이른바 여가의 날에 효제(孝悌)를 가다듬는 것이 이런 때에 하는 것이다. 진 고령(陳古靈, 송(宋)나라 진양(陳襄))의 세속을 깨우치는 글이 명백 간결하고 쉬워서 백성으로 하여금 알게 할 수 있겠다.” 하고, 세속의 말로 번역하여 백성들을 깨우치게 하였다. 그래서 매달 초하루마다 여러 부로(父老)들을 공문(公門) 청사에 모아 놓고 일제히 읽기를 마치면 다시 친절하게 가르치기를 달마다 정상적으로 하니, 백성들이 노래 삼아 부르며 북을 치고 춤을 추면서 서로 더불어 붙잡아 주고 이끌어주며 경하하였다.
단성군(丹城郡)에는 산과 물이 많아서 공무를 보고 난 나머지 시간에는 동복(童僕) 한 명을 명하여 말 한 마리를 끌게 하여 훌쩍 어디론가 혼자 가서 하루종일 노닐다가 돌아오곤 하였다. 서애 선생이 서신을 보내기를, “산과 물이 있는 고을을 맡아 수령으로 나갔으니, 소나무와 계수나무 숲에서 글을 읽겠구려.” 하였고, 또 말하기를, “들으니 부임한 지 오래 되지 않았는데 지방의 아전과 백성들이 기뻐하며 황폐되었던 고을이 앞으로 낙토(樂土)로 변하게 되었다고 하니, 군자(君子)가 가서 다스리는 곳에는 참으로 응당 이와 같아야 한다.” 하였다. 신축년(辛丑年, 1601년 선조 34년)에 지제교(知製敎)로 피선(被選)되었다. 군(郡)에 5년간 있었는데 교화(敎化)가 크게 행해지니, 감사(監司)가 치행 제일(治行第一)로 올렸다. 일찍이 병으로 군수직(郡守職)을 버리고 돌아가자 군민(郡民)들이 울면서 머물게 하니 공이 떠나지 못할까 두려워서 일부러 늦추었다가 가는 날에는 백성들이 알지 못하게 하고 떠났는데, 그것을 안 백성들이 뒤쫓아가서 말머리를 끌어안고 7, 8일간을 놓아주지 않으니 할 수 없이 되돌아왔다.
당시에 서애 선생이 여러 소인(小人)들에게 배척당한 바 되어 먼 곳으로 피하여 은거해 있었는데, 공이 수천 마디 말로 글을 초(草)하여 소인들의 간악한 정상(情狀)을 극언(極言)하여 밝히니 말의 뜻이 통렬하고도 절실하였다. 서애 선생이 그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공이 기필코 이 늙은이의 다리가 분수령(分水嶺)에서 빨리 한 발짝을 지나가게 하려는가?” 하고 힘써 말리니, 공이 보탬은 없고 다만 화(禍)와 비난만 더 보탤까 염려하여 그 글을 찢어 버렸다. 계묘년(癸卯年, 1603년 선조 36년)에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에 임명되고 부름을 받아 올라오니 백성들이 노래하기를, “단성군의 산이 수려하고 기묘하며 단성군의 물이 깊고 또 맑으나, 공으로 하여금 머물게 할 수는 없고 다만 공의 이름을 머물러 둘 수 있네.”라고 하였다. 소재지(所在地)에서 아전이 지고 가는 것을 가리키면서 여종이 말하기를, “저 사람이 지고 가는 것은 우리 군수를 빼앗아 가는 것이다.” 하였다.
여름에 입시(入侍)하여 강(講)할 적에 문의(文義)를 추연(推衍)하여 설명하고 나아가 아뢰기를, “당(唐)나라 덕종(德宗)은 초정(初政)에 청명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강(剛)하게 스스로 지혜를 쓰고 살피기를 너무 지나치게 해서 위와 아래가 어긋나고 막힘을 초래하여 마침내는 파천(播遷)되는 욕을 당하였고 한 사람 육지(陸贄, 당나라 덕종(德宗) 때의 명신)가 있었으나 끝내 헌신짝 버리듯이 하였는데, 전하(殿下)께서 유성룡을 대우하는 것이 불행하게도 그 일과 가깝습니다” 하니, 임금이 불쾌하게 여기고 파하였다. 그 후 수일이 지나 연릉(延陵) 이공(李公, 연릉 부원군 이호민(李好閔))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요즘 부드러운 태도로 아첨하는 것이 풍속(風俗)을 이루고 있는데, 유독 이준(李埈)이 감히 남이 하기 어려운 말을 하였으니 상을 줘야 하고 노엽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하니, 임금이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마침내 형조(刑曹)ㆍ공조(工曹)의 정랑(正郞), 통례원 상례(通禮院相禮), 실록청 겸춘추(實錄廳兼春秋)로 좌천(左遷)되었다.
갑진년(甲辰年, 1604년 선조 37년)에 세자책봉주청사 서장관(世子冊封奏請使書狀官)에 충원되어 북경(北京)에 갔다가 이듬해인 을사년(乙巳年, 1605년 선조 38년)에 돌아와 어떤 일로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때에 우복(愚伏, 정경세)도 벼슬을 않고 집에 와 있었으므로 날마다 서로 대하고 지내면서 공이 매번 말하기를, “우복은 바로 나의 형제(兄弟)인데 성(姓)만 같지 않을 뿐이다.” 하였다. 정미년(丁未年, 1607년 선조 40년) 봄에 우복과 북산(北山)에 들어가 ≪심경(心經)≫을 읽기로 약속을 하였는데, 서애 선생이 시(詩)를 붙여 오기를, “은둔 생활 하며 빠르게 지나가는 세월이 아까운데, 생각은 공리와 명예의 갈등을 던져 버렸네. 한천에서 글 읽던 일 지금 다시 할 만한데, 뜻이 같은 친구와 만나기 어려움이 한될 뿐일세.[林下光陰惜易闌 心期不在利名間 寒泉舊事今能續 只恨同人會面難]”라고 하여, (은둔 생활을 접고) 달포 만에 돌아왔다. 처음에 공이 우복에게 일러 말하기를,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ㆍ한훤(寒暄, 김굉필(金宏弼))ㆍ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ㆍ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ㆍ퇴계(退溪, 이황(李滉)) 다섯 선생(先生)은 모두 영남(嶺南)에서 나왔는데, 또 우리 고을이 낙동강(洛東江)의 교회지(交會地)에 있으니, 마땅히 다섯 선생을 합하여 제향(祭享)을 올려 사람들에게 도(道)가 높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한다.” 하니, 우복도 그렇다고 하여 마침내 낙동강가에 자리를 정하고 제때에 맞추어 사당의 낙성(落成)을 하고 합향(合享)을 하게 되었는데, 이곳이 바로 도남 서원(道南書院)이다.
무신년(戊申年, 1608년 광해군 즉위년)에 선조[宣廟]가 승하(昇遐)하고 광해군[光海]이 즉위하여 수찬(修撰)으로 부르자 사양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가을에 휴가를 얻어 돌아와서 성묘(省墓)하고 겨울에 조정에 돌아와 질병으로 체직(遞職)을 고하니 제용감 정(濟用監正)에 제수되었다가 도로 교리(校理)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기유년(己酉年, 1609년 광해군 원년) 봄에 중국에서 사신을 보내어 선조[宣廟] 상사에 부의(賻儀)하고 제사를 지냈다. 묘호(廟號)는 ‘종(宗)’ 자를 썼는데 예관(禮官)이 조사(詔使)에게 저촉되어 힐책을 받을까 두려워서 가주(假主)를 설치하도록 청하고 조사를 맞아들였다. 공이 동렬(同列)을 거느리고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우리나라가 ‘종(宗)’ 자의 호를 사용하는 것이 예(禮)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 연습(沿襲)되어 온 지가 오래 되어 수백 년이 되도록 고치지 않은 것은 대개 신자(臣子)가 군부(君父)를 높이는 정성에서 나온 것인데, 만약 앞을 막고 뒤를 가리어 그 잘못을 보호한다면 이는 실례(失禮) 중에 또 실례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인군(人君)은 지성(至誠)으로 마음을 삼고 일호(一毫)도 사정과 허위를 용납하지 않는 것으로 인국(隣國)과 사귀고 이적(夷狄)을 대우하는 데 있어서도 오히려 안되는데 하물며 중국은 우리 조정에 비교하면 그 높기가 하늘과 같습니다. 사신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는 것이 하등의 성대한 예(禮)인데 감히 지엄(至嚴)하고 지경(至敬)한 자리에 허위를 행한단 말입니까? 설혹 그 때문에 힐난을 당하게 되더라도 다만 마땅히 사실에 근거하여 대답하기를, ‘종(宗)’ 자의 호(號)를 더한 것은 참람되고 외람됨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승습(承襲)해 온 지가 오래 되어서 귀와 눈에 익어서 스스로 감히 못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대(事大)하는 정성만은 하늘의 해가 내려다보고 있습니다.’라고 하면, 그 말이 순하고 사리가 곧으니, 오히려 가주(假主)를 설치하고 거짓을 행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연거 십잠(燕居十箴)을 올렸는데, 체천(體天)ㆍ법조(法祖)ㆍ존현(尊賢)ㆍ애민(愛民)ㆍ신습(愼習)ㆍ원려(遠慮)ㆍ청간(聽諫)ㆍ거사(去邪)ㆍ존성(存誠)ㆍ무학(務學)으로, 잠(箴)마다 주(註)를 달아 널리 선유(先儒)의 설(說)을 인용하여 뜻을 밝혀서 올리니, 광해군이 아름답게 여기고 기뻐하며 표피(豹皮)를 내려서 권장하였다. 그리고 와내(臥內)에 펴놓으라고 명하여 살펴보기 편리하게 하였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이공(李公)이 그것을 보고 글을 보내기를, “논한 잠설(箴說)은 의리(義理)가 정밀하고 절실하며 간략하고도 마땅하니, 오늘에 계상(溪上)의 서론(緖論)를 볼 수 있을 줄은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소.” 하였다. 당시 책사(策士) 임숙영(任叔英)이 열 가지 폐단[十弊]을 책대(策對)했는데 광해군이 그의 절실하고 솔직함을 미워하여 내치라 명하니 양사(兩司)에서 심하게 간언을 했으나 되지 않자 모두 물러갔는데, 공이 상소(上疏)하여 극간(極諫)하였다.
경술년(庚戌年, 1610년 광해군 2년)에 교리(校理)로 문학(文學)을 겸임하였다. 이때에 산릉(山陵)의 역사가 겨우 지났는데 조사(詔使)의 행차가 몰려왔으므로 부역(賦役)이 번다하고 무거워서 백성들이 크게 곤궁한데다 광해군이 또 토목 공사(土木工事)를 일삼아서 비용이 만금(萬金)으로 계산되니, 공이 동렬(同列)을 인솔하고 차자(箚子)를 올려 간언(諫言)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해년(辛亥年, 1611년 광해군 3년) 2월에 정인홍(鄭仁弘)이 상소하여 회재(晦齋)와 퇴계(退溪) 두 분 선생을 헐뜯었는데 지평(持平) 박여량(朴汝樑)이 아첨하여 붙어서 그 주장을 북돋우니, 상하가 놀라고 통분해 하였다. 동렬이 공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것을 변명할 수 있는 이는 유독 공이 있을 뿐이다.” 하였다. 공도 또한 뜻을 떨치고 일어나 자기의 책임으로 여기고 연달아 차자를 올려 공격하여 그 주장을 깨뜨리고, 태학(太學)의 제생(諸生)들은 청금록(靑衿錄)에서 정인홍의 이름을 깎아내고 방(榜)을 붙여 중외(中外)에 고하니 광해군이 대로(大怒)하여 제생(諸生)들을 금고(禁錮)하라 명하니, 제생들은 성균관을 비우고 사방으로 흩어져 나갔다.
공은 또 동렬들을 거느리고 차자를 올려 극간(極諫)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때에 광해군의 정치가 날로 어지러워져서 구제할 수 없을 것을 알고 퇴거(退去)를 결심하고 휴가를 얻어 남쪽으로 돌아가면서 상소하기를, “신은 지금 떠납니다만, 조정에 돌아올 날은 기약할 수 없습니다. 오직 바라는 것은 안일과 욕심을 억누르고 참소와 아첨을 멀리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였다. 공이 물러가자, 사대부(士大夫)들이 그가 떠나가는 것을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 오봉(李五峰, 이호민(李好閔))이 나와서 전송하였는데, 그 시(詩)에 “상소에 적심(赤心)을 드러내어 임금 처소에 머물러두고, 몸은 백발을 이끌고 호수의 배에 오르네.[疏出赤心留御所 身携白髮上湖舡]” 하는 구절이 있었다. 또 광해군에게 말하기를, “이준(李埈)은 곧은 성품 때문에 조정에 용납되지 못하고 편주(片舟)를 타고 남쪽으로 돌아가니, 애석합니다.” 하였다.
임자년(壬子年, 1612년 광해군 4년)에 집안에서 한가하게 지냈다. 사는 곳에 소나무와 암석(巖石)의 경치좋은 데가 많았다. 계곡 시냇가에 쌍송(雙松)이 마주보고 서 있는데 세월이 오래 되어 늙고 푸르렀는데, 그 아래에다 시내를 끼고 축대(築臺)를 쌓고 정사(精舍)를 짓고서 이름을 ‘소옥 정사(漱玉精舍)’라 하고, 항상 그 사이에 거처를 하며 ≪주역(周易)≫을 읽되 머리를 구부려서는 글을 읽고 머리를 들고서는 뜻을 생각하며 자고 먹는 것을 잊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거의 잘못 인생을 지낼 뻔하였구나!” 하였다. 우복(愚伏, 정경세)이 날마다 나아가 번번이 상대하여 강론(講論)하였다. 그리고 분매(盆梅) 한 본(本)을 보내면서 시(詩)를 붙이기를, “내가 가꾼 분중매를 보내 드리니, 그대 책상 위의 ≪주역≫과 짝을 지우소.[送我盆中梅 伴君床上易]”이라 하였다. 겨울에 외직으로 나가 경성 판관(鏡城判官)에 보직(補職)되었는데, 그때 정 동계(鄭桐溪, 정온(鄭蘊))가 일을 말하다가 기휘(忌諱)에 저촉되니, 광해군이 노하여 축출하면서 이르기를, “이준[李某]이 외지(外地)에 있으니 체직시키고 정온(鄭蘊)에게 제수하라.” 하니, 공이 마침내 부임하지 않았다. 계축년(癸丑年, 1613년 광해군 5년)에 풍기 군수(豐基郡守)로 제수되니, 문치(文治)를 크게 일으켰다. 을묘년(乙卯年, 1615년 광해군 7년)에 파직되어 돌아왔다.
계해년(癸亥年, 1623년 인조 원년)에 인조(仁祖)가 반정(反正)하고 공을 즉시 교리(校理)에 임명하고 검상(檢詳)ㆍ사인(舍人)으로 옮겼으며, 6월에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임명되었다. 처음에 임금이 즉위하자 서인(庶人) 이지(李祬, 광해군의 세자임)를 강화(江華)에 안치(安置)하라 명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굴을 파고 나왔다가 일이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귀(李貴)공이 기필코 죽이는 죄목에 두려고 하자 공이 합당하지 않다고 논의하니, 우복(愚伏)이 옥당(玉堂, 홍문관)에 있으면서 서찰을 공에게 보내어 말하기를, “성징(聖徵, 이정귀(李廷龜))ㆍ윤경(潤卿, 이수광(李晬光))ㆍ시회(時晦, 정엽(鄭瞱))ㆍ유일(幼一, 윤지경(尹知敬))ㆍ중경(重卿, 이현영(李顯英)) 등 모든 사람이 다 그 뜻을 따르는 것이 옳다고 하는데 따르지 않는 것은 아주 우려되는 일입니다. 이는 이해(利害)에 관계된 것으로 본인은 따르고자 하지 않는 자에게는 화(禍)가 두려운 협의가 있고, 제인(諸人)들의 의논은 또한 화의 원인이 될까 하여 걱정하는 것이라면 본인도 또한 그 일이 반드시 없다고 보장할 수가 없으며, 임금께서도 후일의 염려가 없지 않을 것인데 옥당(玉堂)이 죽을 각오로 이론을 세워 평(評)을 군부(君父)에게 돌아가게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으니, 따르는 것이 사리(事理)에 맞겠습니다.” 하니, 공이 답장하기를, “저가 화얼(禍孼)을 만듦에 유사(有司)가 죽이기를 청하는 논의가 있었으나, 다만 성상(聖上)의 뜻을 따르는 것을 아름답게 여기고 구차스레 시의(時議)에 뇌동(雷同)하려 하지 않고자 한 것은 이는 형(兄)의 처음 생각이었는데, 어찌 중심이 견고하지 못하오? 유일(幼一) 제공(諸公)들이 화본(禍本)을 우려하기 때문에 평(評)을 군부(君父)에게 돌아가게 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하기까지 하고 있으니, 이는 크게 사리에 해로운 것이오. 오직 의(義)와 이(利)는 호리(毫釐)의 차이로 나누어지는 것임을 어찌 형이 환하게 알 수 없는 것이었겠소. 충신(忠臣)은 도(道)를 따르는 것이지 임금을 따르지 않으며 임금의 뜻이 움직임이 있을지 움직임이 없을지에 대해서는 아마도 논의함이 부당할 듯하오.” 하였다. 연평(延平, 연평 부원군 이귀(李貴))이 또 공에게 서찰을 보내기를, “공은 반드시 서인(庶人)을 위하여 절개를 세우려고 하십니까?” 하니, 공이 답하기를, “옛날부터 일로 인하여 반드시 군부(君父)와 다투는 것이 또한 그 일을 위하여 절개를 세우기 위한 것이겠습니까? 나의 견해가 공과 같지 않은 것은 공의 견해가 나와 같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이니, 끝내 반드시 동일해야 할 이치는 없습니다.” 하였다. 그때에 공은 더위를 먹어 병고(病告, 몸의 병으로 얻은 휴가. 병가(病暇)) 중이었는데, 으레 병고를 하면 처치(處置)로 내보내기를 청하게 되어 있으므로 공이 나가기를 기다리려고 한 것이었다.
공이 사(辭)를 썼는데, 그 대략에 “무릇 죄가 드러난 자는 비록 성인(聖人)이라도 또한 보전할 수가 없는 것이니, (주(周)나라) 주공(周公)이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에게 주벌을 행한 것과 같은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정적(情迹)에 조금이라도 원통하고 억울한 것이 있다면, 성왕(聖王)은 그가 죽음에 빠질까 두려워하고 반드시 살릴 방법을 찾을 것입니다. 이는 이른바 죽을죄에 들었어도 살려낼 길을 찾는 일은 있어도 살 수 있는 데에 들어 있는 것을 죽음에 들어가게 하는 길을 찾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강도(江都)의 죄수가 담 밑에 굴을 파고 나온 변고는 비록 밝히기는 어려우나, 그 정적은 보기가 쉽습니다. 토굴이 안에서 파서 바깥으로 뚫려 있다면 이는 밖에서 도운 자가 없다는 것을 볼 수가 있고, 서찰을 쓴 것이 가짜이고 진짜가 아니면 밖에 응원한 자가 없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는 단지 갇혀 있는 처소가 좁은데다가 이 무더운 여름철을 만나 사방이 막혀서 바람 한 점 들어올 곳이 없으니 우울하고 답답해서 마침내 미친 병이 났을 것이고, 하늘과 햇볕을 보고 싶은 마음과 부모(父母)를 보고 싶은 생각이 가슴속에 꽉 차서 그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고 망령되게 갇힌 곳에서 나올 계획을 하여 스스로 왕명을 어기는 죄를 불렀으니, 깊이 그 심정을 따져보면 이는 슬프게 여길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 죄가 죽을 죄에 이른 것이겠습니까? 죽을 죄에는 이르지 않았는데 반드시 죽음에 이르게 한다면 어찌 성덕(聖德)에 한 가지 누(累)가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 법을 담당한 자는 다만 법을 집행하되 그의 도망한 죄만을 다스려서 마땅히 그전과 같이 구속하여 가둬 두기만 하면 됩니다. 폐조(廢朝) 십수 년간의 허물과 악행을 찾는다면 한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골육(骨肉)을 죽여 해친 것이 더욱 심하여 끝내는 하늘의 강상(綱常)을 멸절(滅絶)시키고 그 덕기(德器)를 전복(顚覆)시켰으니, 이는 모두 시기(猜忌)하고 잔인(殘忍)한 데서 말미암은 변고(變故)로서 차마 입에 담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참으로 오늘날에 깊이 경계해야 할 바입니다.” 하였다.
교리(校理) 심광세(沈光世)가 우복(愚伏)에게 말하기를, “이공(李公)이 만약 나와서 인혐(引嫌)을 하면 반드시 크게 발길질과 주먹질을 당할 것이니, 이공을 아끼는 자라면 그가 나오지 않았을 때에 미쳐 체직(遞職)을 시키는 것만 못합니다.” 하니, 우복도 그렇게 여기고 마침내 체직을 청하니 전에는 이런 예(例)가 없었으므로 중외(中外)가 자못 의심하였다. 그러자 우복이 비로소 크게 놀라 즉시 자책(自責)을 하였으나 이미 미칠 수가 없었다. 연평(延平)은 공이 자기를 따르지 않는 것에 분노하여 외직(外職)으로 좌천시켜, 6개월 남짓 철원 부사(鐵原府使)로 있었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신흠(申欽)공이 낭관(郎官)을 불러 묻기를, “이공(李公)이 왜 갑자기 외직으로 나가는가? 수십 년간 은둔 생활은 바로 용납되지 못해서 그랬던 것이었는데 또 배척되어 가는 것인가?” 하였다.
공이 이미 외직으로 나갔는데 조야(朝野)가 시끄러웠다. 8월에 이조 판서(吏曹判書) 신공(申公)이 말하기를, “이준[李某]이 외직(外職)에 오래 있는 것은 조정(朝廷)의 복(福)이 아니다.” 하고, 사인(舍人)으로 돌아오게 하자고 청하였다. 그때 과거(科擧)가 공평하지 못한 것이 많아서 대간(臺諫)이 그 과거를 없었던 것으로 하라고 논핵(論劾)하니, 임금이 그때의 고관(考官)을 핵실(覈實)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급제자 모두를 없었던 것으로 하라고 명을 하였는데, 공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대사간(大司諫) 정엽(鄭曄)공이 등대(登對)하여 아뢰기를, “이준[李某]은 문장(文章)과 덕의(德義)를 갖추고 있어서 평일(平日) 일을 행함에 있어 처신(處身)이 방정(方正)하고 마음이 곧은 자인데, 여러 사람과 똑같이 취급하여 함께 없었던 것으로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도 그것을 알고 있으나, 다만 취하고 버림에 있어 편벽되게 하기가 어려워 그렇게 할 따름이다.” 하였다.
갑자년(甲子年, 1624년 인조 2년) 정월에 부원수(副元帥) 이괄(李适)이 사자(使者)를 죽이고 거병(擧兵)하여 반란을 일으키니, 여러 고을이 바람에 쏠리듯 달아나고 무너지니 적(賊)이 마침내 대궐을 범하였고 임금은 출궁(出宮)하여 공주(公州)로 떠났다. 공이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밤낮으로 걱정하고 분개하여 즉시 여러 동지들과 근왕병(勤王兵)을 모아 난에 달려가기로 모의하고 눈물을 뿌리면서 무리들과 맹세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천여 명을 얻어 이름을 ‘의승군(義勝軍)’이라 하고 날짜를 정하여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가려 했는데, 관군(官軍)이 적을 토벌하여 격파하고 임금이 서울로 되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의병을 파하였다. 서울에 올라와서 조회하고 늦게 온 죄를 청하였다. 2월에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임명되고 곧바로 홍문관 부응교(弘文館副應敎)에 임명되었다. 3월에는 사인(舍人)으로 옮겨 임명되었다가 곧바로 응교(應敎)에 임명되었고, 4월에는 전한(典翰)에 승진되었다.
이보다 앞서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의 이름이 역적(逆賊)의 초사(招辭)에서 나오자 임금이 묻지 말라고 명하였는데, 연평(延平)이 상소(上疏)하여 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이공(李珙)에 대해 논하지 않은 것을 크게 논척(論斥)하고 또 말하기를, “이공의 죄는 윤리(倫理)와 기강(紀綱)을 범한 것이다. 모든 조신(朝臣)이 그 죄에 참여된 자는 모두 이미 죽였거나 귀양을 보냈는데 유독 이공만 빠졌으니 조정(朝廷)에 사람이 있다고 하겠는가?” 하였다. 공이 조정에 말하기를, “이미 역적의 입에서 자기 이름이 나왔는데 나오지 않으니 아마도 의존하는 것이 심한 듯한데 우선 그 죄로 나오게 하는 것만 못하다. 이것이 또한 왕자(王子)를 보전(保全)하는 한 방법이다.” 하였으나, 조정에서 또한 따르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공의 이름이 역적의 입에서 나오자 여러 신하가 입시(入侍)하여 연평(延平)이 ‘이공을 대내(大內)에 두고 체포를 막으라’고 청하니 임금이 준열하게 물리쳤다. 그러자 이귀(李貴)가 아뢰기를, “신(臣)이 청하는 것은 왕자(王子)를 보전하려고 해서 그렇게 하자는 것일 뿐입니다. 당초에 신의 말을 듣지 않고 이미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는데 지금은 또한 대내에 두지 않으면 보전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여러 신하들은 바람에 쏠리듯이 따랐으나 오직 공과 우복(愚伏)만은 옳지 않다고 하자 연평(延平)이 화난 기색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공이 천천히 말하기를, “공이 보전한다는 것으로 명분을 삼으니 듣기에는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자고(自古)로 신자(臣子)가 혐의로 핍박당하는 입장에 처하여 위험스럽고 의심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지존(至尊)과 더불어 함께 거처하면서 스스로 편하게 여긴 자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리고 공이 대내(大內)에 두려고 하는 것은 바로 그를 의심해서인데, 이 ‘의심 의(疑)’ 자 한 글자를 버리지 못하는 한 비록 중성(重城)과 복벽(複壁)으로 보호하더라도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왕자(王子)는 여기서부터 보전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또 진강(進講)으로 인하여 이공(李珙)의 일을 언급하며 정성과 의심에 대한 변명을 거듭하니 언관(言官)이 마침내 논척(論斥)하고 파직(罷職)하라고 청하자, 임금이 준열하게 물리치며 이르기를, “훈신(勳臣)이 한번 말을 내놓으면 감히 그의 그릇된 점을 바로잡지 못하는 것은 국가(國家)의 복(福)이 아니다. 그대들은 이귀(李貴)처럼 자기의 의견과 다른 사람의 논의를 공격하는 버릇을 배우지 말라.” 하였다.
10월에 응교(應敎)로 승진되었다. 뇌성(雷聲)의 변(變)이 있자 차자(箚子)를 올려 여섯 가지의 일을 개진(開陳)하였는데, 첫째는 천도(天道)를 본받을 것이며, 둘째는 성학(聖學)에 힘쓸 것이며, 셋째는 사기(士氣)를 길러 줄 것이며, 넷째는 종족(宗族)을 친히 할 것이며, 다섯째는 인재를 기를 것이며, 여섯째는 재용(財用)을 절약할 것이었다. 또 며칠 있다가 또 뇌성의 변이 일어나므로 또 차자를 올려 극진히 논의하니, 임금이 모두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였다. 다른 날에 임금이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저번 날 옥당(玉堂)에서 겨울 뇌성에 대해 두 번이나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그것이 누구에게서 나왔는가? 문장(文章)이 좋고 의논(議論)이 정직하였다. 임금에게 고하는 말은 이와 같아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12월에 전한(典翰)으로 승진되었고, 갑자년(甲子年, 1624년 인조 2년)에는 사간(司諫)과 보덕(輔德)을 역임하였고 8월에는 집의(執義)에 임명되었다. 이때에 정자(正字) 유석(柳碩)공과 대교(待敎) 목성선(睦性善)공 등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이공(李珙)의 귀양은 어떤 죄입니까? 외지에 있는 지 이미 오래 되었으니, 청하건대 석방해 주소서.” 하니, 임금이 아름답게 여기고 받아들여 이공을 용서해 주라 명하니 훈신(勳臣) 등이 크게 놀라서 사사로이 서로 무리를 지어 모여서 날마다 소동을 피웠다. 연평(延平)이 또 대로(大怒)하여 말하기를, “감히 나와서 유석(柳碩)을 편드는 자가 있으면 역모(逆謀)로 논할 것이다.” 하자, 이에 양사(兩司)에서 합동으로 이공을 석방하라고 한 명(命)을 없던 것으로 하라고 청하니, 임금이 물리쳤다. 공이 아뢰기를, “당초에 다들 이르기를 이공이 나오지 않으니 기찰(譏察)이 쉬지 않고 난(亂)의 싹이 끊어지지 않으니, 인심(人心)이 의심하고 두려워하며 물의(物議)가 격렬하게 발동한다고 하였습니다. 신(臣)도 할수없이 변(變)을 처리하는 방법으로 처리하였는데, 지금 또 기찰이 쉬지 않고 난의 싹이 끊어지지 않는다면 환란(患亂)의 근본을 방지하는 것은 이공을 옮기지 않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유석(柳碩) 등의 당언(戇言)은 실로 나라를 걱정하는 심정에서 나온 것이니, 신의 앞뒤의 말이 다르다하여 혐의로 여기지 마소서.” 하니, 완평(完平) 이공(李公, 완평 부원군 이원익(李元翼))이 그 말을 듣고 탄식하기를, “나도 이 늙은이가 하는 모계(謀計)를 알지 못했었는데, 지금 와서야 자못 사람의 마음을 통쾌하게 한다.” 하였다. 11월에 부호군(副護軍)에 제수되고 얼마 있다가 도로 부응교(副應敎)에 임명되었다.
병인년(丙寅年, 1626년 인조 4년) 정월에 응교(應敎) 겸 보덕(輔德)에 임명되었다. 이때에 인헌 왕후(仁獻王后, 원종비(元宗妃) 구씨(具氏))가 돌아갔는데, 연평(延平)이 말하기를, “임금은 마땅히 삼년상(三年喪)을 행해야 된다.”고 매우 강력하게 주장하니, 공이 동렬(同列)들과 논의하고 삼년상을 행하는 것은 예(禮)가 아님을 극론(極論)하고 강력하게 간쟁(諫爭)하니, 예관(禮官)이 마침내 부장기복(不杖朞服)으로 행할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그 청을 억지로 따랐으나 의장(儀章)과 절문(節文)은 모두 왕후(王后)의 예(禮)를 사용하였으므로, 공이 동렬들과 날마다 간쟁하였다.
정묘년(丁卯年, 1627년 인조 5년) 정월에 청인(淸人)이 거병(擧兵)하여 쳐들어와서 여러 고을이 잇달아 함락되니, 임금이 강도(江都, 강화(江華))로 거둥을 하면서 동궁(東宮)에게 명하여 호남(湖南)으로 나가 순행하면서 사방의 장정(壯丁)을 불러모으라고 하였다. 공이 난리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행장(行裝)을 재촉하여 출발했다. 길에서 유 수암(柳修菴, 유진(柳袗))을 만났는데 유공(柳公)이 말하기를, “공이 지금 가는 것은 계책이 아닙니다. 지금 적군이 가득하여 길이 이미 끊어졌으니 반드시 행재소(行在所)에 도착할 수 없을 것이고, 혹시라도 불행하여 잘못되는 일이라도 있게 된다면 그것이 좋은 방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에 일을 도모하는 자는 안과 밖을 둘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송(宋)나라 때) 충사도(种師道)가 성(城)에 들어오자 주자(朱子)가 애석하게 여겼던 것인데, 그것은 성으로 들어오면 힘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공을 위해 계교를 해보건대, 동남(東南) 지역에서 의병(義兵)을 창솔(倡率)하여 격동적으로 일어나서 사람들의 마음으로 하여금 적을 토벌하는 일이 크다는 것을 환히 알 수 있도록 하는 것만한 게 없으니, 공의 덕망(德望)과 의리(義理)를 가지고 제공(諸公)을 위해서 앞장서서 인도한다면 사람으로서 그 누가 앞을 다투어 분기(奮起)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고 나서는 비록 위험을 무릅쓰고 난(難)에 달려가더라도 누가 옳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하니, 공이 그렇게 여기고 근왕(勤王)을 도모하니 무리들이 공을 주맹(主盟)으로 추대(推戴)하였다. 공이 개연(慨然)히 무리들과 맹세하니, 무릇 지시에 따르는 제인(諸人)들이 사기(士氣)가 솟고 의기(義氣)가 발동하였고 그 소문을 들은 자들이 앞을 다투어 달려왔다. 며칠이 되자 호소사(號召使) 장공(張公, 장만(張晩))이 격서(檄書)로 공에게 협조하게 하니, 또 온 고을의 부잣집을 타일러 격려하고 권장하여 곡식을 내도록 하여 열흘이 안되어서 군량 수천 석이 모아졌다. 그 무렵 동조(東朝)가 전주(全州)에 머물고 있었으므로 공이 말을 달려 전주로 가자 세자(世子)가 즉시 인견(引見)하고 조도사(調度使)로 제수(除授)하니, 짧은 시일[旬月]에 군량(軍糧) 만여 석이 모아졌다.
2월에 적(賊)이 평정되고 3월에 임금이 환도(還都)하니, 모은 군량을 관가(官家)에 돌려주었다. 4월에 경사(京師, 서울)에 와서 조회(朝會)하고 복명(復命)하니, 임금이 가상하게 여겨 직접 비답(批答)을 내리기를, “이준(李埈)은 경연(經筵)의 유신(儒臣)으로서 헌체(獻替, 임금을 보좌하여 선을 권하고 악을 못하게 함)한 정성이 늙을수록 더욱 독실하니 내가 늘 아름답게 여겨 기뻐하고 있었는데, 지금 다시 분주(奔走)한 공로(功勞)가 있으니 특별히 자급(資級)을 높여 총애를 표한다.” 하고, 마침내 절충 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지제교(知製敎)로 승진 제수하였다. 그리고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거쳐 승지(承旨)가 되고, 경오년(庚午年, 1630년 인조 8년)에는 삼척 부사(三陟府使)에 임명되고, 이듬해인 신미년(辛未年, 1631년 인조 9년)에는 체직되어 돌아왔고, 임신년(壬申年, 1632년 인조 10년)에는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임명되고, 계유년(癸酉年, 1633년 인조 11년)에는 휴가를 청하여 돌아갔다.
갑술년(甲戌年, 1634년 인조 12년) 여름에는 임금이 (생부(生父)를) 이미 대원군(大院君)으로 추숭(追崇)하고 장차 태묘(太廟) 부제(祔祭)를 논의하려 하자 (그 일에 대해 불가하다고) 말하는 자는 연달아 귀양 보내어 내쫓김을 당했다. 그래서 대신(大臣)도 감히 말하지 못하고 있던 터였는데, 공이 스스로 ‘임금의 은덕을 오래도록 받았으니, 몸이 비록 초야(草野)에 있으나 의리상 (잘못된) 일을 보고서도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곧바로 상소하여 극언(極言)을 하였다.
겨울에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고, 을해년(乙亥年, 1635년 인조 13년) 4월에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에 임명되었다. 지난 1월에 이기안(李基安)이란 자가 폐조(廢朝)의 여얼(餘孼)로서 여럿이 모인 중에 다니면서 패악(悖惡)한 말로 임금을 범하다가 체포되어 서울에 와서 신문(訊問)을 받았는데 그 초사(招辭)가 진신(搢紳)에 관련된 것이 매우 많았다. 임금이 특명(特命)으로 이준(李埈)ㆍ정온(鄭蘊)ㆍ최현(崔晛)에게는 묻지 말도록 하였는데, 서울 안의 친구들이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성은(聖恩)을 입었으니, 와서 사례하지 않을 수 없겠오.” 하니, 최공(崔公)이 즉시 달려가 공에게 들러 가야 하는가 그만둬야 하는가를 물으니, 공이 말하기를, “노신(老臣)이 죽을 나이에 이르러 불행하게 패역(悖逆)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왔으나 성상(聖上)께서 이미 그 무죄(無罪)함을 살피셨으니, 이는 하늘과 땅이 낳아 길러 주신 은덕인데, 어찌 사사로이 사례함을 용납하겠습니까? 비유하건대, 마른 풀뿌리의 보잘 것 없는 것이 비와 이슬에 젖은 것과 같은 것인데, 어찌 이것을 나에게만 내려 준 사사로운 은혜로 삼겠습니까? 이는 다만 사례하는 것이 은혜가 되는 것만 알고 감히 사례하지 않는 것이 지극한 은혜가 되는 줄은 알지 못하는 처사입니다. 노신(老臣)의 의리는 다만 해와 달을 우러러볼 수 있게 되었으니 성덕(聖德)을 노래하면서 스스로 산에서 나무하는 백성과 들에서 농사짓는 늙은이에 의탁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하니, 최공(崔公)이 깊이 그렇게 여겼다. 이때에 미쳐 임금의 총애하는 명(命)이 또 내렸다. 당시 공에게 병이 있었으나 명을 듣자 좌우의 부축을 받으며 나와서 절하고 명을 받고는 즉시 행장을 차려 길을 떠나 충주(忠州)에 이르러 병이 나서 되돌아왔다. 6월에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享年) 76세였다.
선취(先娶)는 선산(善山) 문수민(文秀民)의 딸로, 1녀 3남을 낳았다. 딸은 진성(眞城) 이겸(李馦)에게 시집갔으나 일찍 죽었다. 장남(長男) 이대규(李大圭)는 현감(縣監)이고, 차남(次男)은 일찍 죽고, 셋째 이원규(李元圭)는 병조 좌랑(兵曹正郞)이다. 후취(後娶)는 능성(綾城) 구충윤(具忠胤)의 딸인데 3남 2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이문규(李文圭)이고, 차남(次男) 이광규(李光圭)는 생원(生員)이고, 셋째 이정규(李貞圭)는 일찍 죽었다. 딸은 사인(士人) 조흥원(趙興遠)에게 시집갔고, 차녀(次女)는 사인(士人) 유천지(柳千之)에게 시집갔다.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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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樂民(장달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