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흥김씨대종회가 창립20주년을 맞은데 이어 금년에는 대종보가 창간20주년을 맞았습니다.
대종회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발전의 밑바탕에는 종보 발간 20년의 역사 또한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대종보 창간호(1995.4.20.)부터 종보 제43호(2006.4.28.)까지 12년을 전담해온 효영孝永 초대
종보편집주간의 직무를 기후基後 종보편집주간이 이어받은게 어느새 10년이 지나고 있습니다.
당시 63세의 적지 않은 나이도 그렇고 종사에 문외한이 신문제작의 막중한 임무를 맡는 것 자체가
두렵기 조차 했으나 이왕 맡았으니 최선을 다해보자는 마음 하나로 스스로를 달랬습니다.
편집위원회가 구성됐고 대종보의 편집방향을 대종회를 구심점으로 한 종친간의 결속,
서흥김문을 빛낸 현조님들과 유적지 등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일, 각 문중의 시제향 등 종사에 대한 종원들의 참여와 관심을 끌어내는 일에 주안점을 두고 진력해 왔습니다.
2011년 9월25일 경기도 안성 무열사에서 시조님을 봉안奉安하는 고유례告由禮를 올린데 이어
그해 10월30일에는 서흥김문瑞興金門의 시조始祖님이신 고려의 명장名將 휘 보寶공과
2世祖 휘 덕인德仁, 3世祖 서흥군瑞興君 휘 천록天祿 공의 유덕을 기리는 첫 제향이
전국 각지에서 모인 종친 2백여명의 참례속에 안성 무열사에서 엄숙히 봉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소식은 대종보 제58호(2011.9.12.)와 제59호(2012.1.23.) 1면에 크게 보도됐습니다.
뿐만아니라 조선의 도학지종道學之宗의 반열에 올라 국유國儒로 받들며 문묘종사文廟從祀로
백대의 참 스승[百代眞師]으로 추앙받으신 문경공 한훤당 김굉필 선생의 절의節義와 발자취를
세상에 알리고자 광제헌 종가댁 불천위제례의식, 달성도동서원, 순천옥천서원, 나주경현서원 등에서
봉향奉享되는 향사享祀, 도동서원에서 두 차례 실시된 뿌리교육을 현장을 찾아 취재보도했고,
전국 각지에 산재한 한훤당선생 유적지를 네 명의 종원이 세차례에 걸쳐 답사하고
제60호(2012.9.30.) 및 제61호(2013.2.10.) 지면을 통해 상세히 보도했습니다.
한편으로는 한훤당선생의 분신 소학小學을 「완전한 인간됨을 위한 동양의 도덕률-소학」이라는
큰 제목을 달고 전문을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뜻있는 독자들 중에 소학 속에 광풍제월光風霽月이 담겨져 있다는 한훤당선생의 깨달음이 조금이라도 전해지면 좋겠다는 바람 또한 컸습니다. 그러나 선조님의 현양사업과 함께 서흥김문이 앞으로 해야 할 숫한 과제가 숙제로 남아있습니다.
안성, 영광, 광양, 숙천, 대구, 창녕, 밀양, 나주, 진안, 해남, 합천 등 각 지역 문중마다 현안들이
산적한 것을 보았습니다. 종사 참여 및 종보 발전을 위해 각 지역 문중 현안에 대한 대안을 찾을
수 있다면 어떤 노력과 방법부터 찾아야 하는지 서흥인의 미래가 달린 문제가 아닐까 편집자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뿐만아니라 시조님 휘諱 보寶[고려조 명종13년(1183-?)], 2世祖 휘 덕인德仁[고려 고종 17년(1230-?)], 3世祖 서흥군瑞興君 휘 천록天祿[고려 고종37년 1250-?)(1250-?)공의 역사와 발자취를 부단히 찾아내는 노력과 성과가 종보에 보도되면 좋겠습니다.
서흥인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서흥문중의 현조이신 한훤당선생의 참된 가르침을 종보를 통해 후세에 전해 자긍심을 고취하는 것 또한 종보편집자가 맡아야 할 주요 책무의 하나라 생각되어 외람되지만 개인적인 생각을 삼가 글로 남겨 둡니다. 감사합니다.
종보편집주간 기후(基後 24世 진안) 謹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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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동안 너무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앞으로는 뒤에서 苦言, 忠言을 부탁드립니다.
첫번째 고언드립니다.
대종보 구독현황을 파악하는 중에 우리 종보가 타종친회만 보내지고
도동서원 달력과 「서흥군과 한훤당」 앨범을 배포했던
정부기관, 서원, 향교, 성균관 등 유관기관은 한군데도 보내지 않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서흥문중을 세상에 알릴 수 있도록 유관기관 등에도 우리 종보를 보내주시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