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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행복충전소♥대명 원문보기 글쓴이: DMpastor
장로교 |
감리교 |
성결교(동양선교회) |
안식교 |
침례교* |
구세군 |
러시아정교 |
플리머스 형제단 |
PCUSA 1884 |
감리교 1885 |
1907 |
1904 |
1889 펜윅 1895 공식적 |
1908 |
1898 |
1888 |
PCUS 1892 |
남감리교 1896 | ||||||
Victoria 18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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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adian 18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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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 기독교」로 시작(펜윅). 침례교 명칭은 1895년부터.
< 결론 >
(1) 한국 선교는 거의 동시에 시작됐다(1894-1910)
(2) 다양한 교파가 한국선교를 시작
(3) 그럼에도 장,감이 주도했다.
3) 선교정책
(1) 의료, 교육 선교 - 광해원 설립으로 자연스럽게 시작
* 하루에 백명 이상이 진료를 받음(알렌의 보고 : 1년 2만명이라는 숫자는 엄청난 것)
-> 왕실과 백성들의 마음을 동시에 얻을 수 있게 됨.
* 1910년, 중등교육기관 37개 이상 설립. 북장-8, 남장-9, 호주-5, 카나다 선교회-3, 북감-8, 남감 4등.
(2) 성서번역 :
① 존 로스
1882년 눅,요 발행
1884 마,막,
1885 롬,고전후
1888 신약 완간.
* 네개의 번역본(한문,헬라,KJV,RV) 참조.
* 복음확장에 공헌하였으나, 성경의 질이 낮고, 평안도 사투리가 사용됨.
② 이수정 : 일,한문 참고정도, 체계적이지 않다. 하나의 사실로서만 의미를 지닌다.
③ 성서번역위원회 :
1887년 발족
1893 장로교 공의회 결성후 연합성서 번역위원회로 확대
1895년 행,막,마,요을 시험번역
1900 신약 완간, 5년간 개정
1910년 신구약 완간(구역)
1937년 개역
* 참고성경 : 헬라어, 히브리어, 라틴어, 독일어, 불어성경 및 한문, 일본어 성경. KJV, RV 및 존 로스와 이수정의 번역본
* 번역진 : 언더우드,이눌서,게일,스크랜톤,아펜젤러등 5명
후에 아펜젤러는 제물포항에서 사망하고, 스크랜튼은 의료선교사역에 전념. 결국 3명의 장로교 선교사들이 번역을 완간.
* 한글성경의 공헌 : 한글의 보편화,대중화. 한글사에 있어 역사적인 전환점을 갖게 함.
3) 연합활동
1893년 장로교 선교사의 제안으로 장로교 공의회 발족.
1905년 장.감 연합공의회로 발전 - 3가지 안으로 시작
① 네개의 장로교는 하나의 장로교, 두개의 감리교는 각각 하나씩의 감리교를 만든다
② 네개의 장로교는 하나의 교회, 감리교도 하나의 교회
③ 장 감 통털어 하나의 교회를 세운다.
-> 본국 선교본부에서 이를 제지. 특히 남장로교. 결국, 하나의 교회는 이루어 지지 못함.
그러나, 연합활동의 결과,
1887 성서번역
1905 선교지, KOREA MISSION FIELD(Korea Field + Korea Mothodis를 합함) 창간
신문 (그리스도 신문)을 하나로 제작
1906년 숭실대,
1914 세브란스 병원, 주일학교 공과 교제 공동 사용
1916 연희전문
1918 새 찬송가
* 이런 작업의 핵심 = 언더우드(Avinson 선교사는 감리교인이었는데, 언더우드의 감화로 장로교인이 됨)
4) 선교지 분할 정책 - 선교의 효율을 극대화시킨 세계의 유래없는 제도
* 내용
① 5000명 이상 도시 - 공동선교
② 5000명 미만 도시 - 기득권 인정. 단 6개월이상 포기땐 선교 가능
③ 장-감 서로 존중해 준다
④ 신자의 교회 이전시 교회 추천(자유의사), 이때 목사 추천서 발부
⑤ 각 선교회 소속 조사 - 선교회에서 직접 보수를 주지 않는다
⑥ 모든 문서는 통일한다
⑦ 지역 분할
PCUSA : 평안, 대구
PCUS : 전라도
VICTORIA : 부산
CANADIAN : 함경도
ME(N) : 중부의 남부
ME(S) : 중부의 북부
* 긍정적 역할 - 선교의 효율을 극대화하여 선교의 열매를 가져옴
* 부정적 영향 :
① 지방색 가속
② 한 신앙을 이데올로기화함. 카나다 선교지역에서의 자유주의 발흥, 전라도나 부산, 대구, 평양은 보수적인 양상을 보여주는 등 각 지역이 그 신앙을 이데올로기 화함.
③ 군소교단이 소외됨. 장.감 주도로 나가게 하였다.
< 결론 >
(1) 한국 선교는 다양한 선교단체가 거의 동시에 시작함
(2) 천주교와 개신교는 선교방법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천 - 직접적, 개 - 간접적(의료, 교육) 선교 방법.
(3) 주변의 환경이 선교의 상황에 일치 - 하나님의 개입으로 해석할 수 밖에 없다.
▶ 1910-20년대 한국이 급성장한 요인은 무엇이었는가?
: 곽안련의 대답
1) 한국인의 강한 종교적 심성
2) 한국인의 유순성
3) 한국 사람들은 리더쉽에 잘 따른다.
4) 시대적 상황 속에서 평안함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5) 국왕의 선교에 대한 호의
6) 여성들의 지위 : 인간대접을 받지 못하던 여성들에게 평등이 제시된 복음,부흥의 기회가 됨.
7) 애국심 : 기독교 민족주의가 기독교를 확산시키는 계기
8) 새 것에 대한 추구
9) 일반 교육이 한국의 마음을 여는 계기
10) 문자 해득력이 높다 : 한글로 복음을 전하여 전파에 큰 도구
11) 암흑의 시대 :
12) 물신 숭배의 신앙 :
13) 평화에 대한 갈망
* 이 모든 요인들이 한국성장에 기여하였으나, 이 급성장은 네비우스 선교정책(자립, 자치, 자전의 배후에 있는 성경강조정책)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었다고 곽 선교사는 결론하고 있다.
사 52:11
이러한 1900년대 초의 부흥운동의 요체인 말씀과 기도는 오늘도 침체기에 있는 우리에게 동일한 부흥의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 네비우스 선교정책
1) 선교사 순회전도
2) 성경 중심
3) 한국인 스스로 전도
4) 한국인 스스로 치리
5) 경제적으로 자립
6) 모든 신자는 조직적인 성경공부
7) 성경적 권징을 시행한다
8) 다른 선교단체와 협력
9) 법정 문제등은 관여치 않는다
10) 민중의 어려움을 가능한 한 돕는다
* 긍정적인 영향 : 교회 성장
교리 중심의 신앙교육
세대주의적 종말 사상
반 자유주의 사상의 확산
* 부정적 영향 : 사회적 책임을 간과, 타세적인 경향(세대주의적)을 낳게 됨
▶ 한국교회와 자유주의
* 19930년대부터 정통주의와 자유주의(김재준), 문화 자유주의(정경옥) 등 3개의 신학 조류가 형성.
이외에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이용도의 신비주의등 5개의 현상이 한국교회에 오늘까지 남아 있다.
* 이 시기는 「역사의 전환점」,「혼돈의 시대」등등으로 표현됨.
이러한 신학적 변천의 시작 : 1919의 양면성을 지닌 삼일운동
-> 일본은 한국통치의 무력에서 문화정치로 전환. 한국인의 엘리트를 일본화 교육을 시켜 그들로 한국을 다스리게 한다는 것이다. 사범학교 육성정책을 통하여 일본화된 탁월한 교사들을 양육하려고 함. 아울러 20년대에 일본과 미국으로 유학을 많이 보냈는데, 20년대 말에 대부분 귀국 ① 박형룡 박사 : 프린스톤, 메이쳔 아래서 공부
② 정경옥 교수 : 게렛신학교, 롤 교수의 영향으로 문화 자유주의
③ 김재준 교수 : 청산학원, 웨스턴신학교 수학.
청산학원에서 바르트에 매료,바르트의 초월론에 대하여 논문,
웨스턴에서 진보주의에 많은 영향을 받음.
④ 백낙준 교수 : 프린스톤 대학, 예일, 일반고등교육을 통하여 폭넓은 사고, 기독교 세계관
⑤ 채필근 목사 : 일본 청산학원, 진보
⑥ 송창근 목사 : 일본 청산학원, 진보
⑦ 남궁혁 목사 : 프린스톤, 유니온 : 정통주의 입장에 서 있으나, 에큐메니칼적 태도.
그들이 받았던 신학교육은 자연스럽게 한국에서 나타날 수 밖에 없었다.
* 19930년 이전에도 자유주의는 있었다.
⑴ 전성천 : 1955년 예일에서 논문 : 시즌 엔드 유니트
한국 장로교 파송 선교사 안에 4명의 선교사 중 신학중 동의한 선교사는 언드우드만 신학적으로 동의하였다. 나머지는 성경의 무오성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진술.
⑵ 부르스 헌트 : 1897년에 한국에 파송되었는데, 그는 파송 이후 장로교 공의회 안에 성경의 무오를 믿지 않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고 증언
⑶ 스코필드(캐)는 은퇴후 한국에 와서 기독교 사상지에 발표한 논문 : 삼일운동 논쟁 당시 근본주의와 현대주의의 논쟁이 장로교 선교사들 사이에 있었다고 말한다
⑷ 1918년 김장호 목사의 사건. 평신 출신이나, 현장에서 급진적인 가르침을 지도.
자유교회를 세움. 그는 윌리암 커 선교사 밑에서 5년간 조사생활을 했는데 이에 원인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 자유주의의 원인들
1) 소수의 pcusa의 선교사가 이미 현대신학을 가지고 있었다.
2) 국내의 타 교단(감리교) : 처음부터 진보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음. 지역 분할로 감리교의 신앙이 장로교 안으로 유입
3) 캐나다 선교회 : 1925년 캐나다가 연합교회로 합병후, 한국 파송 선교사는 자유주의 성향의 선교사를 파송. 점점 한국의 신학을 변화시켰다. 예: 스캇 선교사, 그 밑에서 공부한 조희겸도 동일
4) 일반고등교육
5) 일본, 미국에서 교육을 받아 왔던 사람들의 입국
▶ 김교신의 무교회 주의◀
1901년 함남 함흥 출생(캐나다 선교회 지역)
1918년 함흥농업 졸업 ; 농민에 대한 감정이 나라사랑으로 이어짐.
1919년 일본행
1920년 성결교에 입교 -> 담임목사 축출사건을 만남 -> 무교회주의에 영향 -> 이후 우찌무라 간죠를 만나 성서연구 시작(간죠의 두 Motto = 「나라 사랑」 + 「기독교 정신의 회복」)
이 역시 김교신의 관심. 이 둘을 「조선」과 「성서」로 집약
1927년 조선성서 발간
1942년 조선성서 폐간
폐간의 이유 : 「개구리의 죽음을 슬퍼함」2)을 성서 조선에 게재함으로.
그의 사상은 경건주의, 모라비안 운동의 정신과 맞닿아 있다.
이후, 1944.7.까지 함흥 비료 공장 노무담당
1945.4.25. 사임
* 김교신의 사상, 인격 발달
그는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다.
조기결혼(12세)으로 인격적 성숙이 빨랐음.
* 무교회 주의
제도적 교회를 거부
성서의 교회는 제도적 교회가 아니라, 신앙인을 공동체로 이해(오직 2, 3 사람이 모인곳 = 교회)
성직, 세례도 인정치 않고, 교회 안의 성서연구 거부 <- 경건주의의 영향
결국, 반조직, 반선교사, 반신비주의 그리고 분파적으로 발전
조선성서의 사상은 오늘의 UBF에서 드러나고 있다.(정준기 박사)
▶ 정경옥◀ 문화자유주의
-> 한국교회의 자유주의 신학의 초석을 놓은 신학자.
1. 그의 신학적 특징
1)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다. 체험의 종교=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 -> 도덕적 인격성
- 슐라이에마허의 「절대의존의 감정」에 뿌리 -> 존 웨슬리를 오늘에 각색한 사람=정경옥
2) 기독교는 도덕적 - 리츌
3) 사회적 참여 -> 하나님과의 관계가 필연적이라면 사회적 참여가 요구된다고 봄.
2. 생애
1903년 전남 진도 출생
1923년 20세에 예수 영접 <- 김교신, 김재준도 20세에 예수 영접
1928-31년 미국 유학(게렛 신학교 출신 -- 노스 웨스턴 신학교3))
1931-39년 협성신학교 강의(거의 월 한편의 논문 발표)
1939년 건강상 낙향 -> 이때 설교집 「그는 이렇게 살았다」
1939년 만주 신학교 교장 취임.
1945. 4. 사망
3. 신학사상
* 신학의 삼구분(역사 - 이론 - 실천) <- 슐라이어마허의 영향(역사, 철학, 실천신학의 구분)
역사신학 : 과거의 경험
이론신학 : 현재의 적용
실천신학 : 미래에의 제시
즉, 기독교 신학은 과거의 경험에서 시작해야 하며 이를 현재의 내적 반성을 통해 이론화하여, 미래에 실용적인 실천에 사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① 기독교의 절대성을 강조하되, 타종교에 대한 포용을 주장
②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이다.
③ 신앙은 보수, 신학은 자유4) 라고 말함
④ 경험과 도덕이 그의 신학을 지배 -> 현실참여의 발향으로 촉발됨.
그럼에도 오늘날 말하는 급진적 신학자는 아니다.
▶ 실존주의자, 김재준◀ 진보주의
1. 생애
1901년 함북 경흥, 독실한 유교가정에서 출생 -> 4서3경에 심취(문학적 자질을 보여줌)
1920년 승동교회 김익두 목사님의 부흥회에서 예수 영접.
회심 후 일본 기독교 책을 탐독. 이때 일본 기독교는 바르트주의 시대
1925년 도일, 얼마 후 청산학원에 입학 : 송창근과 친밀한 접촉
* 청산학원의 신학 사상 : “미 뉴욕 유니온 신학교의 출장소였다.”, “급진적이었다”라고 스스로 술회. -> 바르트의 초월론 논문
1929-32년 프린스톤에 유학, “(프린스턴 신학은) 숨막힐 듯 했다.”고 말하나, 프린스턴의 공부를 통해 자유주의가 중화됨. 프린스톤의 정통주의와 중화하여 진보주의 노선을 걷게 됨
1933년-1936 상고의 교사, 평신에서 발견하던 신학지남에 기고
1937년 간도의 용정중학교 교사. 그의 오른팔이던 강원용 박사(당시 학생)를 만남.
2. 그의 신학
* 1925년에 일본에서, 「십자군」 잡지 발간, 한국의 정통주의에 반대하는 글을 쓰기 시작함.
* 그의 역사 의식이 그의 출발점 : 역사는 무대와 주인공이 있는 데, 자신이 그 주인공이라고 생각
미국에서 귀국 후 소선지서를 연구하면서 더 확대(예언자적 책임을 가지고 역사의식을 소유한 자신를 통해 한국교회를 조망하려고 함)
* 한국교회를 미선교사사의 교회라고 보고,미국의 사상적 노예로 봄.
* 1929-1932년의 도미기간은 미국에서 메이쳔이 프린스턴에서 나와 웨스트민스트를 창립하는 것을 보면서 이를 정통주의의 실패로 인식, 이런 정통주의가 한국으로 침투하였다고 함.
3. 그의 신학사상
1) 정통주의에 대한 비판 적극적
고등비평 소개에 적극적
2) 정통주의 항거의 핵심적 논거 = 기독론(정통주의의 반대의 축은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이다)
ㄱ. 초자연주의 거부
ㄴ. 성경의 권위보다 그리스도의 권위가 앞선다.
ㄷ. 객관적 사실보다 주관적 체험이 중요하다.
ㄹ. HISTORIE는 거부하면서 그 실존적 의미 GESCHICHTE는 얼마든지 도출.
-> 그는 항상 그 말씀이 “과연 나와 무슨 관계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 즉 그는 말씀의 객관성보다는 그것이 개인에 encounter할 때 의미가 있다고 본 것.
▶ 죽산 박형룡 박사◀
1. 현대 한국의 신학자들의 평가
1) 부정적 시각
- 1938년 정경옥 교수 : “근본주의의 대언자”로 평가.
그는 메이첸과 그 풍의 칼빈주의를 근본주의로 이해하고 기준으로 삼았다.
- 민경배 교수는 : “전형적인 근본주의자”.
그의 전제 - 메이쳔을 근본주의자로 분류하고 있다.
한국 파송 선교사가 근본주의자라고보아, 그를 따르는 박박사를 이같이 평함.
더욱이 박박사가 한국적 신학의 가능성을 다 막아버렸다고 평.
- 이종성 박사 : “프린스톤 정통주의 후예”, “메이첸의 영향을 받아 칼빈주의적 정통주의를 반복하는 Tape Recorder이다”라고 평가
- 유동식 교수 : “근본주의”로 범주화하고 있다. 즉,박박사를 근본주의의 전형으로 봄.
그는 한국 신학의 대변자를 3으로 분류, 즉 자유주의의 김재준,진보주의의 정경옥, 근본주의의 박형룡. 그리고 근본주의의 특징을 성경의 무오성, 축자영감(기계적 영감론)이라 보았다.
* 이들의 이러한 평가는 박형룡 박사의 저서를 직접 읽지않고 범주화된 박형룡으로 박형룡 박사를 판단하기 때문이다.
영감의 정의 : Verbal Plinary, Oganic inspiration
2)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
- 김양선 목사 : “정통주의자”
한국교회를 자유주의와 정통주의로 구분하여 정통주의의 대변자로 봄
- 신복윤 목사는 “근본주의적 칼빈주의자”
그는 1920년대 메이첸의 신학을 근본주의로 1930년대 이후의 근본주의를 신근본주의로 구분
- 박아론 교수는 “한국의 메이첸”
2 .박형룡 박사의 근본주의 이해
1940년대 - “칼빈주의 정통신학”이라고 자신의 신학을 표현.(고신 신학교 교장 취임식사)
50년대 : “칼빈주의 정통신학”과 함께 “복음주의 보수신학”이란 말을 사용 :
당시 Context가 바뀌었다. 이 당시의 상황은 WCC를 중심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반 WCC의 흐름을 대변할 수 있는 것이 복음주의 보수신학이었다(52년 고신분리, 53년 기장분리, 55년 WCC 문제 등장 등)
60년대 : 처음으로 “근본주의” 천명. 근본주의 = “정통파 기독교”로 정의
즉, 근본주의-> 정통주의 -> 기독교 자체의 논식.
결국, 그의 논의에서 근본주의=사도적 신학으로 보는 구도지, 역사 속에 태동한 한 Movement로 보지 않는다. 그는 근본주의=「전통을 지켜가는 것」으로 이해.
따라서 그는 초기 한국선교사를 근본주의로 보았다.
70년대 : “청교도적 개혁주의”라 표현. <- 근본주의 = 기독교 자체라는 신복윤교수의 등식에 대한 박윤선 박사의 반발의 영향.
결국, 그에게 가장 적합한 표현은, “정통주의”, 그러나 전투적 정통주의로 본다.
3. 박형룡 박사의 신학의 배경
1908년 출생
1920년 중국 금릉대 유학
1923년 미 프린스턴 유학
이때의 미국은 1293-1297의 근본주의 논쟁의 정점에 있던 시절
1922년 Fosdick설교
1923년 메이첸 「기독교 자유주의」 저술 및, 장로교 5대교리 천명
1924년 “Auburn Affirmation" - 5대 교리 거부
1925년 EERDMAN(프린스턴 신학교수) 총회장
1925년 PCUSA 급변시작 : 진보적인 사람들이 다수
1927년 프린스턴 교과과정 개편
1930년 한국에 귀국, 한국에서도 논쟁이 재현되기 시작
박박사는, 메이첸의 영향으로 「정통주의 변호」에의 자의식
1940년
1950년
1960년대, 1970년대 “New Evangelicalism"의 등장 -> KETS등장
박박사는 「신복음주의」를 “신자유주의”로 잘못 이해
1936년, 메이첸의 OPC가 분리되고 1937년 1월 메이첸이 죽었다. 이후 Westmisters는 Faith로, Covenant로 계속 분리되어 나갈 때, 사람들은 정통주의를 분리주의로 보게되자 이에 각성하여 새로운 운동이 제시되는 데, 이후 이 운동은 두가지로 진행. 즉
1941년 ACC - 메이첸의 추종자들이 중심으로한 근본주의 대변기구
1942년 NAE - 좀 더 폭 넓은 사람들 중심한 복음주의 운동 -> ICC로 발전 -> New Evangelicalism으로 발전.
1970년대, 신정통주으의 “Neo”에의 부담으로 Evangelicalism으로 됨. 이들은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되 신학적으로 보수주의적이었다.
continuity=보수적 신학, Discontinuity = 사회적 책임
David Wells의 C.Hodge 평가 “그는 미국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 하나였지만, 그는 역사가는 아니어서,그의 정통신학을 수호하기 위하여 자기 주변의 문화는 간과했다.”고 했는 데, 우리는 이를 박형룡박사에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4. 결론
1) 현대 한국 신학자들의 실패
⑴ 근본주의와 근본주의 신앙을 혼동하였다.
⑵ 축자영감이나 성경의 무오성을 믿는 사람을 전부 근본주의로 매도하는 것은 문제.
⑶ 근본주의 신앙의 변호를 무조건 부정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문제
⑷ 근본주의 5대원리를 옹호하는 사람을 근본주의로 보는 견해는 문제. ∵ 역사적으로 과거 200년동안 다 이를 믿어왔다.
⑸ 근본주의와 복음주의를 구분하지 않는다
미국 : 복음주의 영역 안에 근본주의가 일부로 존재하나, 우리나라에서는 근본주의 안에 복음주의가 일 개 영역으로 존재한다.
2) 박형룡 박사는 근본주의자인가?
⑴ 스스로 근본주의자로 인식.
⑵ 근본주의자들의 특성중 하나인 전투적 정통주의적 모습견지 <- 근본주의 카테고리
⑶ Anti-Evangelicalism의 입장
⑷ 교단분리 불가피한 입장 <- 근본주의 카테고리
그럼에도 박박사는 자의식적인 근본주의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근본주의 이해는 정통의 보수, 유지라는 측면이었기 때문이다.
3) 그에 대한 평가 - 1940년대 1970년대까지 박형룡 박사의 전 생애를 지배하는 자의식은 “정통주의”. 그는 메이첸의 자의식을 가졌다.
근본주의와 복음주의 비교
근본주의 |
복음주의 |
1. 근본 진리 |
이 둘은 양보하지 못한다. |
2. 이신 칭의 | |
3. 세대주의 종말론 |
이에 대한 다양성을 인정하자 - 관용 |
4. 분리 주의 |
이들은 복음고 다른 부분으로 우리는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자고 주장. |
5. 반지성 주의 | |
6. 반문화 주의 | |
7. 반 사회주의 |
Ⅰ. 한국 교회의 종말론의 발흥과 신사 참배 반대 운동 (1935-1945)
Ⅱ. 신학 논쟁과 분열 (1945-1960)
1. 한국 교회의 종말론의 발흥과 신사 참배 반대 운동 (1935-1945)
* 종말론의 논쟁은 계 20장의 해석의 다양성에서 비롯되는데, 성경신학에서의 어려움은, 역사신학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즉, 요한서신을 받아 보았을 당시의 소아시에서 가르치던 종말론을 알아본다면 요한의 종말론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1. 시대별 종말론
1) 초림에서 313년까지 - 3학파 : 공통된 종말론 - 천년왕국 사상
(1) 알렉산더리아 학파 : 저스틴, 필로, 클레멘트, 오리겐
(2) 소아시아 학파 : 이레니우스, 힙폴리투스
(3) 라틴 학파 : 터툴리안,키프리안
* Papias - 부활후 천년왕국 인정
* Justin - 죽은 자의 부활과 예루살렘에서의 천년왕국 인정
* 오리겐(200-260)에 의하여 천년왕국은 상징적으로 보기 시작하였다 -> 이 전통을 313년 이후 Eusebius가 수납
2) 313(기독교 공인)부터 종교개혁 전까지
* 유세비우스는 계 20장을 symbolic하게 보았으며, 기독교 공인이 이루어진 콘스탄틴 대제의 시대를 천년왕국으로 보고자 했다. -> Post-Mil 사상을 시작하였고 A-Mil 사상의 길을 열어놓았다.
* 어거스틴 역시 시대 속에서 그런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후천년 사상)
* 431년 에베소 공의회 - 천년왕국 사상은 거부됨
3) 1517 : 종교개혁 - 3 그룹
(1) 대륙의 종교개혁(칼빈/루터) : 어거스틴의 후예로 무천년설.
(2) 아나벱티스트 : 초대교회로 돌아가고자 함 : 천년왕국 사상
(3) 청교도 : 후천년설 -> 신대륙을 하나님의 왕권의 실현으로 보게 됨 -> 프린스턴의 종말론으로 정착
4) 1789 : 프랑스 혁명 -> 기독교에 가장 도전적인 사건
-> 이때로부터 현대주의가 계몽주의를 등에 엎고 일어나고,경건주의가 발흥하며,세대주의도 영국에서 등장(vmPlymouth Brethren의 John Darby가 시작)
-> 18세기 현대주의의 도전에 대한 보수주의의 반동 - 세대주의적 종말론 수납케 됨.
5) 19세기 말(1861) : 미국의 독립
* 미국 : 산업화, 진화론...의 도전으로, 신앙 변호의 움직임은 보수성을 띄게 되고, 세대주의가 적극 수용되게 됨.
* 화란 : 무천년설
* 프린스톤 : 후천년설
* 세대주의 등장 - 이 세대주의는 전천년설 속에 유입, 전천년설은 역사적 & 세대주의적 두가지로 구분.
* 19세기 한국에 온 선교사들 : 헤밀톤, 크랩 등은 메이쳔의 영향으로 무천년설, 무디의 영향 하에 있던 많은 선교사들은 전천년설
◉ 세대주의적 종말론의 문제점
1> 역사관 : 인류의 역사를 7세대(무죄, 양심, 족장, 약속, 율법, 은혜, 천년왕국 시대)로 구분
-> 역사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봄.
2> 신구약의 불연속성을 강조 -> 구약 : 성령의 간헐적 임재, 신약 : 성령의 완전한 내주로 설명.
십계명도 예수님이 해석해 놓은 범위 내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하며 광야 교회도 신약을 중심으로 본다. -> 그러나 구약의 사울과 관계된 것은 왕직과 관계된 것이지, 구원과 관계된 것이 아니다. 다윗의 성령을 거두지 말라고 하는 내용도 같다.
언약신학은 연속성을 강조하는 것이므로 양립할 수 없다.
3> 이원론적 세계관 : 하나님의 왕국의 현재성은 완전히 배제, 미래성만 인정. -> 현세계를 부정 -> 문화를 부정 -> 부정적인 세계관
그러나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의 경우는 종말론적인 관점만 세대주의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고 그 외에는 세대주의와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은 다행이라 할 수 있다.
래드는 계 20을 그대로 보는 것이 훨씬 정확하다고 말하고 이는 교수님의 의견과 같다.
무천년설을 사랑하면서도 역사적 전천년설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계 20장이 문자 그대로라고 하는 사실 때문이다. 무천년설도 상당히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 계 20장이 역사적 전천년설이 지원해 주고 있으나, 다른 성경에서는 뚜렷하게 지원해 주고 있지 않다. 다른 책에서는 무천년설을 지원하는 것 같은 곳이 많다. - 박용규 교수
◉ 1935-1945년 기간 한국교회의 종말론의 발흥 이유
1) 한국 파송 선교사의 상당한 사람들은 복음주의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역사적 재림을 강조. 또한 VSM 출신 선교사들의 사경회인도 -> 세대주의가 확산
2) 네비우스의 성경공부 운동과 사경회를 통한 선교 정책
3) 일제의 통치 -> 1919년 이후 정치적 소망의 상실로 더욱 관심.
선교사들의 종말론 - 신앙유산의 Chain
언더우드7) -> 모펫 -> 레이놀드8) -> 길선주9) -> 김익두10) -> 박형용11) -> 박윤선12)
* 언더우드 - 스코필드 관주성경(미, 1909년)을 1914년에 신약을 번영 ∴세대주의적 이해있었다.
* 길선주 - 스스로 세대주의자로 자처
* 박형룡 - 전천년설을 구분하려고 함. Historic & Dispensational
박박사는 이눌서를 역사적 전천년설자로 평가
* 박윤선 - 계 20장주석에서 역사적 전천년설을 견지 -> 이후 역사적 전천년설이 등장
◈ 결론
1935-1945년 종말론의 발흥의 주요 원인 : 신학 사상의 보수성 -> 성경공부가 종말론을 가속화 시키는 원인이 되었고, 종말론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이어졌다.
신사참배에 대한 입장과 신학사상
1) 찬성한 사람 : 진보주의적 성향
2) 반대한 사람 : 보수주의적 성향
3) 국외 도주한 사람 : 박형룡등
결국, 1938년 평신 폐교, 1939년 조신 설립 -> 이후 1945년까지 신학의 혼란
1945-1960년의 신학논쟁은 예정된 것이었다.
전체적인 정리
1. 한국개신교의 선교준비(1884-1900)
1) 국내 정치적 배경 속에서 준비 : 위정척사파,동도서기파,개화파
2) 만주 - 두 명의 선교사 : 맥킨타이어와 로스
3) 일본에서의 준비 - 이수정
2. 한국 개신교의 수용과 확장(1884-1918)
1) 국내에서 순수한국인에 의해 확장(의주 청년들)
2) 선교사들에 의한 확장
3) 선교사들의 선교정책 - 의로, 교육, 성서번역, 연합선교
3. 선교사들의 신학사상
1) 복음주의적 계열의 Old School 계열
2) 맥코믹 출신들 - Old School 계열이되 부흥운동에 긍정적
3) 일부 New School 출신이 한국에 와 있었다.
4.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의한 복음의 확장(1918-1930)
자립, 자치, 자전이 아니라, 성경공부가 핵심(곽안련 선교사)
5. 1930년대의 전환 - 자유주의 도전과 보수주의 응전(1930-1935)
김교신 - 무교회 주의
정경옥 - 문화 자유주의
김재준 - 진보주의 등
6. 종말론의 발흥(1907년 시작)과 신사참배(1935-1945)
신사참배는 기독교의 도전으로 이해
1) 선교사들의 종말론
2) 네비우스 선교정책
3) 일제시대의 상황
7. 혼란과 분열의 시대(1945-1960)
8. 정체성 파악의 시대(1960-현재)
7. 혼란과 분열의 시대(1945-1960)
= 근본주의와 현대주의의 논쟁의 시대
1. 분열의 배경 - 3차의 분열
1) 조선신학교의 설립 (1940)
⑴ 설립 모토 :
① 평양신학교와의 단절 - 신학교 주체의 변천
② 신학의 변천 : 성경의 무오성에 대해 전투적으로 반발.
김재준 - 성경은 구원의 진리의 계시에 초점이 있으며, 자연교과서가 아니기 때문에 이 부분에 오류가 있다. 성경의 영감을 16세기에 태동한 것으로 보았다. 이는 바르트의 생각이기도 하다.
③ 세계적 조류에의 합류 - 일반적이었던 고등비평을 수용하면서 정경옥의 “신앙은 보수, 신학은 자유”라는 모토를 수용. 새로운 세계적 신학자들의 소개
2) 고려신학교의 설립
⑴ 설립 배경 : 조선신학교의 리액션
⑵ 신사참배 반대하는 사람들(53명)이 조선신학교에 교육을 맡길 수 없다는 취지하에 한상동 목사와 성경학교 시작 -> 박윤선 목사, 사후에 합류
⑶ 역사적 의의
① 평양신학교와의 연속성 추구
② 구 프린스톤, 화란의 개혁주의 신학 수용 <- 박윤선목사
Westeminster의 Old Princeton은 Common Sense Realism
Vantil은 Presupposition 변증방식(화란 개혁주의 방식)으로 유명
⑷ 외국의 선교회와의 교류 : 칼 맥킨타이어의 ICCC와 연결 -> 분리주의, 근본주의로 낙인됨
3) 51인 진정사건(1947년) : 대표자 - 조동진, 김준곤, 최훈, 정기호 목사 등)
-> 박형룡의 귀국의 한 원인이 됨. 박박사 : 고등비평의 수용, 성경의 무오와의 상치를 지적.
4) Johm McKay와 에밀 부룬너의 한국 방문(1949)
* 맥케이 : 어번 선언 가담 교수를 채용할 정도로 폭이 넓은 사람으로 WCC를 확산. 그는 바르트를 대안으로 생각
* 신학적 논쟁이 진행되고 있었을 때 두 석학은 조선신학의 손을 들어 주고 말았다. -> 서울대학교에서의 강의 “성경의 무오성을 주장하는 나라는 전세계에 없다”고 주장
* 부룬너는 한국교회에 근본주의의 팽배를 미국 선교회에 편지를 썼다.(박형룡을 근본주의자로 지정)
* 대세는 김재준을 지지하는 분위로 흘러갔다.
* 김재준 “1949년은 전환점이었다”
2. 교회의 분열
1) 1차 분열 - 1952 고려파의 분열
⑴ 이 분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사건의 이해가 필요하다.
① 1946년 신사참배 반대자의 모임으로 신사참배자에 대한 실질적인 처벌을 요구
② 1947년 박형룡 박사가 왔다가 6개월 만에 사임 : 그만 둔 이유는
* 신사참배 때문에 독립적인 선교회와만 관계를 유지하려 함. - 박박사는 주도적인 신학교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4개 선교회와 관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
* 신사참배의 총회 인준을 받기 거부함(한상동 목사)13)
* 신사참배의 문제에 대하여 총회가 물리적으로 해결토록 요구함.
⑵ 1948년 경남노회(유일하게 고신 인정 노회)에서 인준 취소 <- 박형룡박사가 떠난 고신을 총회가 인준할 것인가에 대해 이의 -> 총회, 김관식 목사의 제의로 학생을 고신에 위탁교육하지 않기로 결정
⑶ 총회 - 기존의 경남노회를 폐회, 1951년 기존경남노회 총대 불인정
⑷ 1952년 - 고려파, 경남독노회 결성
⑸ 분열이유에 대한 양측의 이해 차이
고신측 - 신학적 문제였다고 봄. ∵ 신사참배 = 자유주의자들의 행위였기 때문
반대측 - 정치적 문제였다고 봄. ∵ 신사참배 = 자의적 문제였기때문 <- 1946년 남부 총회에서 이미 번복하였던 점에 근거함.
2) 2차 분열 - 1953
* 분열배경 - 1947년 51인 진정사건
1948년 조신 개혁안 제출 : 보수적 교수 영입 결정 및 총회신학교 설립 결정( = 장로회 신학교)
1951년 조신, 고신, 장신 세 개의 신학교가 있었는데, 조신과 장신의 합류란 의미에서 총신을 만드는데, 장신만 총신으로 오고, 조신은 대부분의 교수가 합류하지 않음.
1952년 김재준, 서고도선교사 면직
1953년 교단의 분열, 법통 총회를 연다.
3) 3차 분열 - 1959 : 합동 통합의 분열 <- WCC문제
* WCC(미 에반스톤)에 명신홍 박사와 김현종 박사를 파견, 조사케 함.
김현종 - 이 시대에 필요한 운동으로 긍정적 평가
명신홍 - WCC의 신학적 문제를 간파하여 반대 의견
* 상반된 의견을 총회에 보고 -> 총회는 조사위원회를 결성(회장:한경직,서기:정기호 목사)
한목사는 찬성측,정목사는 반대측이어서 조사위원회의 결정은 계속 유보됨.
* 1959년 대전총회에서 경기노회 총대건(WCC찬성 총대가 사실보다 많게 파송되었음)으로 휴회
연동총회 ; WCC 찬성 - 기필코 통합하겠다. 통합측
승동총회 ; WCC 반대 - 기필코 합동하겠다. 합동측
* 이후 「합동 추진위원회」가 구성, 1967년 12월 총회 함께 하기로 결정
그러나 한경직 목사가 이에 대하여 반대하며, “합동 총회가 이루어 지면 통합측 탈퇴”를 선언, 결국 무산됨.
8. 정체성 파악의 시기 (1960년-현재)
선교사들, 신학적 논쟁가운데 스스로 반성하기 시작 -> 1960년대 자기정체성 문제 제기 -> 3부류로 나누임
1. 토착화 신학 - 기장 김재준, 연세대 민족주의
⑴ 배경 - ① 정통주의에 대한 Reaction : 정통주의를 폐쇄주의, 분리주의로 봄
② WCC를 등에 업은 해방신학적 토착화 신학
③ 시대적 상황 - 인권,유신,노동력 착취등
⑵ 발전 과정
1960년 - 유동식 교수 : 한국복음화를 위한 기독교의 토착화 당위성 주장
이에 대해 전경연 교수 ; 전통적 기독교와 토착화 신앙은 다르다고 반기
1970년 - 윤성범 교수 : 誠의 신학 - 환인,환웅 등을 3위1체로 주장
이에 대해 박봉랑 교수 반대
이런 논쟁의 촉진제 ; 이장식교수(윤, 유교수에 긍정적), 이규호(“복음이 철학적 옷을 입고 한국에 왔다.”)
* 誠의 신학 = 율곡 + 충무공의 사상 : 성 = 기독교의 계시요, 동양문화에 형성된 하나님이라고 주장 -> 토착화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 -> 한국신학에 영향
1980년 - 두 신학자
* 서남동 ; 恨의 신학
* 안병무 ; 민중신학 - 예수를 oklos를 위한 메시야로 생각
* 과정신학 ; 김경재 <- 거의 사신신학과 방불
* 종교다원주의 ; 변선환 교수 : 모든 종교는 하나로 모든 종교 속에 예수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
1990년 - 새로운 토착화
* 相生신학 - 모든 신학과 제 종교를 꿰뚫는 通神學이 뭐냐고 묻고 이걸 誠으로 봄 -> “誠신학의 복고”
1991년 - 이제 정리가 필요해 제 기독교 사상의 재조명
1992년 - 목회와 신학에서 재조명(7, 8월호) -> 토착화 신학의 전환점 ∵ 문민정부의 등장으로 토착화신학의 Context가 없어졌기 때문 -> 이제 복음주의쪽으로 mainstream이 선회
2. 근본주의 공동체 - 고신과 총신
3. 복음주의 공동체 - 위 1, 2의 절충점으로 대안 제시
⑴ 외국과 연계된 복음주의 기구들 ; 한국복음주의 신학회(KETS), 한국복음주의 협의회(KEF) 및 CCC등
⑵ 복음주의 출판 - 생명의 말씀사, 엠마오, 아가페등
학생운동과 밀접한 연관, 패커, 쉐퍼, 죤 스타트 등
⑶ Model 교회의 등장 - 사랑의 교회, 남서울 교회, 온누리 교회, 지구촌 교회
제자훈련을 통해 개인의 경건뿐 아니라, 개인의 삶까지 Touch해줌
⑷ 선교 -> WEF -> Lausane으로 연결, 그리고 Billy Graham -> ACTS 설립으로 연결
⑸ 21세기에는 점점 확산될 것으로 보임.
* 복음주의(Evangelicalism)이란? - 근본주의가 갖고 있던 반지성,반문화,분리주의를 극복하여 나온 그룹
* 토착화의 영향 - ① Doing Theoligy ② 문화에 대한 관심 ③ 학문의 폭을 넓힘 ④ 지금까지 소외된 부분에의 관심 유도
* 토착화의 단점 - ① 반동주의로 흐름 ② Context 극대화로 Text 약화 ③ 종교 혼합주의로 빠짐.
* 근본주의도 긍정적인 영향이 있었다.
* 이런 배경 속에 21세기의 대안 = “Reformed Evangelicalism" <- Doctrine,Peitism,그리고 사회적 책임 등의 균형을 이루는 청교도 주의
미국 복음주의 써클의 주요학자는 대부분 개혁주의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