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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85
창세기 31:1-16
하란을 떠나는 야곱
야곱은 삼촌 라반에게서 품삯을 자기 의로 이루는 것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리가 없는 이 땅에 오셔서 신부 된 자기 교회를 이루실 것을 나타내었다. 이때 ‘야곱의 의’란 언약 안에서 하늘의 의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죽음을 이루심으로 완성될 것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튼튼한 양”(30:41)(히, ‘카샤르’)은 언약의 아들 야곱과 함께 묶여있는 존재, 곧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기 백성들을 지칭한 것이고 “약한 양”(30:42)(히, ‘아타프’)이란 외면하고 죽어 있다는 존재로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비언약 백성들을 가리킨다.
그렇게 하여 야곱은 “이에 그 사람이 매우 번창하여 양 떼와 노비와 낙타와 나귀가 많았더라”(30:43)라고 하였다. 성경은 이제까지 계속하여 “야곱이”(30:2, 4, 16, 25, 29, 31, 37, 40, 41)라고 불렀다. 그리고 31장 이후에도 계속 “야곱이”라고 칭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유독 “그 사람이”라고 언급한 이유는 무엇일까? 히브리어로 보면 ‘하잇샤’로 표현하였는데 ‘하’는 정관사이고 ‘잇샤’는 ‘남자, 사람, 남편’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우리 성경에는 “매우 번창하여”라고 하였는데 히브리어로는 ‘심히, 매우, 대단히, 굉장히’라는 뜻의 단어 ‘메오드 메오드’라고 두 번을 반복하여 ‘번창하여’라는 말의 ‘파라츠’를 강조하였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언약을 주셨을 때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히, ‘파라츠’)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28:14)라고 하신 말씀대로 언약을 이루셨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단순이 야곱이 재물이 많아졌다는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그 언약을 이루신 대상을 야곱이라고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즉 ‘그 남자’라고 표현하여 언약을 성취할 자로 자기 교회를 신부로 부르실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 주는 것이다. “양 떼”란 양과 염소를 포함한 작은 가축 전체를 의미하고 종들과 낙타와 나귀가 많았다고 하였는데 이는 야곱 집의 소유가 되었음을 나열한 것으로 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집이 되는 교회로 성도들을 비유한 것이다.
1 복 있는 사람은(하잇샤 : 그 사람, 그 남자)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1-2)
“1 야곱이 라반의 아들들이 하는 말을 들은즉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말미암아 이 모든 재물을 모았다 하는지라 2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1-2절). 문자적으로 보면 라반의 아들들은 야곱이 자기 아버지의 재산을 빼앗다고 보고 또한 그런 야곱을 시기하고 경계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언약적 관점에서 보자면 진리가 없는 이 땅에서 가진 것은 진리가 아닌 것이기에 다 빼앗겨야 마땅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부르시는 것은 죽음 가운데서 부르시는 것이다. 즉 땅의 것을 가지고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땅의 것을 다 빼앗긴 상태가 곧 죽음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야곱은 자신이 뺏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가축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9절)라고 말하는 것이다.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라는 표현에서 “전”으로 번역된 말은 히브리어로 ‘쉴숌’으로 ‘삼일 전, 그저께’라는 뜻이고 “같지”라는 말은 ‘테몰’이라는 말인데 ‘이전에, 어제, 최근에’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문자적으로 번역한 그대로 보자면 라반의 야곱을 대하는 태도가 좋지 않았다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언약적 관점에서는 ‘삼일 전, 어제’라는 표현을 반복함으로 야곱이 삼일 길, 즉 구원을 이루는 길로 언약을 땅을 향해 가는 일이 가까웠다는 것을 계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라반에 의해서가 아니라 야곱이 약속의 땅으로 가야 할 상황을 하나님께서 만들고 계신다는 뜻이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3절)라고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졌음을 말씀한다. 여기서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라는 표현은 여기 하란의 땅은 진리가 없는 땅이므로 결코 라반의 가족이 네 조상, 네 족속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네 조상, 네 족속은 결코 혈육적인 관계가 아니라 언약적 차원에서 같은 언약 안에 있는 존재를 표현한 말씀이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마 12:50)
“4 야곱이 사람을 보내어 라헬과 레아를 자기 양 떼가 있는 들로 불러다가 5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그대들의 아버지의 안색을 본즉 내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러할지라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4-5절). “라헬과 레아”라고 레아가 언니이고 라헬이 동생이지만 라헬을 먼저 언급한 것은 라헬을 통해 하나는 더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한 계시를 온전히 드러내기까지 라헬을 먼저 언급하여 언약 안에서 하나됨을 보여 준다. 이런 점에서 “그대들의 아버지”와 “내 아버지의 하나님”을 대조하여 표현하였다. 야곱은 언약 안에서 자신과 하나 된 자들과 함께 언약의 땅으로 가야 한다. 언약의 땅으로 간다는 것은 “그대들의 아버지”라는 육에서 벗어나 “내 아버지의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 하나 되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야곱과 함께해 주셔야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야곱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라고 고백한다.
“6 그대들도 알거니와 내가 힘을 다하여 그대들의 아버지를 섬겼거늘 7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경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막으사 나를 해치지 못하게 하셨으며”(6-7절). 야곱이 라반을 섬겼다는 것은 20년 동안 야곱은 언약의 아들로서 라반에게 진리를 드러내고 보여주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라반은 야곱을 속였다. 라반이 야곱을 속였다는 것은 비진리로 일관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언약이 아들 야곱이 약속의 땅을 떠나 하란으로 와서 보여준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죽음으로 하나님의 언약의 온전한 성취를 나타내셨다. 그것을 섬김이라고 말씀한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열 번이나 변경하였느니라”라는 표현을 통해 출애굽 때 바로가 이스라엘을 애굽에 붙잡아 두기 위하여 열 번이나 가도록 허락하였다가 번복함으로 열 재앙이 내려진 것과 같은 의미이다. 즉 야곱이 자신의 가족과 재물들이 하나 되어 언약의 땅으로 가는 ‘출하란’은 출애굽 사건과 같은 것으로 죄의 권세에 매인 자들이 십자가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야곱을 이루실 언약의 말씀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보호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막으사 나를 해치지 못하게 하셨으며”라고 야곱은 고백한다. 야곱은 거대한 하나님의 언약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언약의 아들이지만 진정한 실체는 아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죽음으로 언약을 완성하신다.
“8 그가 이르기를 점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가 낳은 것이 점 있는 것이요 또 얼룩무늬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가 낳은 것이 얼룩무늬 있는 것이니 9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가축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 10 그 양 떼가 새끼 밸 때에 내가 꿈에 눈을 들어 보니 양 떼를 탄 숫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과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이었더라”(8-10절). 야곱은 주술적으로 품삯을 챙긴 것이 아니었고 또한 오늘날 과학적인 차원에서 시도하는 설명은 무의미하다.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야곱에게 점 있는 것, 얼룩무늬 있는 것, 검은 것이 품삯이 되었는가? 그것은 흠 있는 것, 검은 것으로 죄악 가운데 있는 존재를 자기 언약 안으로 불러 하나 되게 하는 계시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율법적 행위로 의를 만들려고 하는 죄인을 빼앗아 생명의 자리에 두시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하시는 십자가 은혜이다.
“11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하기로 내가 대답하기를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이르시되 네 눈을 들어 보라 양 떼를 탄 숫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이니라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13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11-13절).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라는 표현 역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실 때 하시는 표현이다. 출애굽기에 보면 이렇게 말씀한다.
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24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25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출 2:23-25)
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8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출 3:6-8)
이스라엘이 부르짖었기 때문에 구원을 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기억하셨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구원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 언약을 기억하시고 일하시기 위하여 이스라엘로 하여금 부르짖게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에 의해 이루신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부르짖음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때 구원은 “내가 내려가서”(출 3:8) 이루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이루시는 구원이다.
야곱이 돌아가야 하는 명분은 하나님의 계시로 인한 것임을 밝힌다. 결국 야곱을 이끌고 계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으로 야곱을 이끌고 계시기에 이루어지는 구원이다. 여기에 야곱은 자기 힘으로 장자가 되려고 하였고 그것을 자기 의로 여기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야곱은 자기 힘으로 이루는 죄성을 마음껏 발산하지만 하나님은 철저히 자기 언약을 기억하시고 이끌고 가시는 “벧엘의 하나님”이시다.
“14 라헬과 레아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우리 아버지 집에서 무슨 분깃이나 유산이 있으리요 15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어버렸으니 아버지가 우리를 외국인처럼 여기는 것이 아닌가 16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에게서 취하여 가신 재물은 우리와 우리 자식의 것이니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14-16절). “라헬과 레아”라고 표현하여 다시 언약 안에서 하나 되고 육의 관계를 단절하는, 다시 말해서 육의 것을 빼앗기는 상태가 된다. “우리가 우리 아버지 집에서 무슨 분깃이나 유산이 있으리요”라고 고백함으로 성도에게 육의 것을 기업으로 삼을 수 없음을 나타낸다.
결국 라헬과 레아는 언약이 아들 야곱이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라고 한 것은 언약의 말씀이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야곱의 길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것은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에 동참되었다는 뜻을 나타낸다. 교회 된 자, 성도는 그렇게 날마다 말씀에 이끌려 십자가의 죽음 안에 끌려가는 자이다(20240811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