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세영 vs 미야자키, 야마구치 vs 와르다니 경기 하이라이트 영상은 이 글 중간 중간에 첨부
1. 귀여운 요정에게 더욱 무자비했던 냉혹한 여제(女帝)...... 이번 시즌 통틀어 가장 완벽했던 경기
위 중국 매체의 안세영에 대한 평가는 매우 적확하다. 그녀를 꺾기 위해 상대가 아무리 치밀한 비책을 들고 나와도 다양한 무기들을 적시적소에 사용하며 그 모든 전략들을 파훼하고 승리를 쟁취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어제의 와르다니처럼 완벽한 게임 플랜을 가지고 나와도 겨우 한 게임을 따낼까 말까인데, 오늘의 미야자키는 처음 입장할 때부터 경기 전략이 전혀 정리되지 않은 듯 자신감 없고 혼란스러운 표정이었으니 승부는 해보나 마나였다.
무엇보다도 제3게임 들어서야 겨우 안세영다운 움직임이 나왔던 어제 경기와는 180도 다르게, 오늘은 제1게임 첫 시작부터 기어(gear)를 올린 채 경기 흐름을 지배해 나간 부분이 고무적이었다. 그만큼 자신감이 있고 컨디션도 좋다는 방증이었고, 남은 경기 일정을 고려해 최대한 체력을 아끼기 위한 전략이기도 했으리라.
결론부터 말해, 오늘의 안세영은 공격과 수비 모두 완벽에 가까웠다. 우선, 전체적인 몸놀림이 어제의 야마구치를 능가할 만큼 빨랐고, 어제 많이 무뎌 보였던 스매시와 드라이브도 더없이 날카로웠으며, 엔드 라인을 노린 하이클리어에서 몇 번의 아웃이 나왔을 뿐 이렇다 할 공격 범실조차 거의 없었다.(아래 영상 속 영국 중계진이 제2게임 19 대 5 상황에서 나온 푸쉬 공격 아웃샷에 대해 "드디어 그녀가 자신도 인간임을 보여주는군요."라는 멘트를 날린 것만 봐도 오늘 안세영의 범실률이 얼마나 경이적으로 낮았는지 알 수 있으리라.) 수비도 언제나처럼 견고하여 빠른 스텝을 바탕으로 모든 공격을 받아내니, 설령 오늘 미야자키가 100% 완벽한 컨디션으로 좋은 전략을 들고 나왔다 한들 스코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리라 본다.
필자가 보기엔 이번 시즌 아니, 안세영의 선수 인생 전체를 통틀어 아마도 가장 자신의 마음에 드는 시합이 아니었을까 싶다. 미야자키로서는 아래 영상 제목처럼 악몽 같은 하루였으리라.
It's Nightmare Again! AN Se Young Vs Tomoka MIYAZAKI | HSBC World Tour Finals 2025
2. 이유 있는 와르다니의 선전, 그리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을 야마구치
어제 미야자키를 상대로 그토록 가볍게 날아다니며 좋은 컨디션임을 과시한 야마구치가 설마 오늘 0 대 2 패배 직전까지 내몰릴 걸 예상한 이는 거의 없었으리라.
사실 불과 몇달 전만 해도 와르다니는 스매시는 매우 강력하지만 그냥 그게 전부인 선수였다. 수비도 약했고, 긴 랠리에도 약했으며, 전반적인 경기 운영 능력이 한참 부족했다. 그러나 지난 호주 오픈 결승전에서 안세영을 상대로 제법 끈질긴 경기력을 선보인 데 이어, 이번 대회 들어서는 더욱 환골탈태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공격에 있어선 하이클리어와 드롭샷 등 모든 샷들의 정확성이 크게 향상된 덕에 상대 코트의 전후좌우 구석구석으로 능수능란하게 셔틀을 뿌릴 수 있게 되었고(덕분에 오늘 야마구치는 여러 차례 역동작에 걸리며 자신의 특기인 스피드를 전혀 살리지 못한 채 계속해서 끌려다녀야 했다.), 약점이던 수비력마저 크게 향상되었다.(덕분에 야마구치는 공격 성공률이 크게 떨어지며 랠리가 길어지면서 많은 체력을 소모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 경기 중에 야마구치는 여러 차례 허탈한 쓴웃음을 지어 보이며 패배를 예감한 듯한 모습마저 연출했는데, 설마 안세영 이외의 다른 상대에게 자신이 이토록 고전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으리라. 다행히 제2게임 결정적 순간에 몇 차례 나온 와르다니의 어이없는 범실이 있었기에 역전승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지만, 계산에 전혀 없던 체력 소모를 당한 야마구치로서는 이번 대회 우승을 위해 기존에 준비한 계획을 일부 수정할 필요성을 심각하게 느낄 것이라 본다. 즉, 오늘 B 그룹에서 초추웡이 다리 부상 재발을 이유로 기권한 덕분에 안 그래도 손쉬운 상대들만 꺾고 준결승에 올라올 왕즈이에게 하루 휴식까지 주어진 상황에서, 이미 자신과 안세영 모두 2승으로 준결승 진출이 확정되었는데도 굳이 내일 안세영과의 예선 마지막 경기에 전력을 다할 필요가 있겠는지에 대한 고민 말이다. 특히 준결승 대진 추첨에서 다시 안세영과 붙게 될 경우 연이틀 그녀를 상대해야 하는데, 상상만으로도 피곤한 노릇일 터이다.
야마구치에게도 안세영은 특별한 라이벌이고, 내일 경기에서 패하며 상대 전적에서 우위를 내주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예선에서 이기는 게 아니라 우승컵을 들어올리는 일이다. 그렇기에 만일 필자가 야마구치라면 내일은 절대 무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안세영은 어찌 해야 할까? 그냥 정상적으로 최선을 다하면 된다. 안세영에게는 이번 대회 우승뿐만이 아니라 시즌 최고 승률 기록 또한 걸려 있기에 그렇다. 그냥 우승만 하면 되는 야마구치와는 달리, 반드시 5전 전승으로 우승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만일 필자의 예상대로 내일 야마구치가 자존심을 접고 힘을 빼고 경기해 준다면 안세영 입장에서도 전혀 나쁠 게 없다. 오늘 미야자키와의 시합처럼 최대한 빨리 경기를 끝내고, 준결승에 대비하면 그만이다.
Akane YAMAGUCHI Vs Putri Kusuma WARDANI | HSBC BWF World Tour Finals 2025 - YouT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