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영선생문집(濯纓先生文集)
제6권(卷之 六) 소(疏)
3. 請復昭陵再疏 丙辰正月丙午
소릉 복위를 청하는 두 번째 상소문 병진년(1496) 1월 병오일
伏以 孔子以繼志述事 爲武王周公之達孝 蓋謂先人志事 可以繼述者 繼述之也 非謂其不必繼述者 亦繼述之也 夫事固有可行 有不可行 時亦有可行 有不可行 豈可泥於古而行之 委於古而不行也
삼가 생각건대, 공자(孔子)는 선인(先人)의 유지(遺志)를 이어 받들고 선인의 사업을 이어 완성한 주(周)나라 무왕(武王)과 주공(周公)을 달효(達孝 한결같이 변함없는 효도)라 하겠습니다. 대체로 이 말은 선인의 유업이라도 계승할 만한 것이어야 계승하는 것이며, 불필요한 것까지 계승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대저 일이란 본디 실행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실행할 수 없는 것이 있으며, 시기 역시 실행할 수 있는 때가 있고 실행할 수 없는 때가 있는 법인데, 어찌 옛일에 구애되어 행하고 옛일을 핑겨하여 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臣竊伏惟 顯德王后 卽文宗元妃 而德儀兼備 大爲英廟眷慈 年二十四 誕魯山致病 七日而薨 葬于安山 是爲昭陵
신이 삼가 생각건대, 현덕왕후(顯德王后) 즉 문종(文宗)의 원비(元妃)께서는 덕망과 예의를 겸비하여 세종(世宗)의 사랑을 많이 받았었는데 24세에 노산(魯山)을 낳고 병을 얻어 7일 만에 별세하자, 안산에 장사 지내고 소릉(昭陵)이라 하였습니다.
昭陵之廢已四十年矣 其廢也 臣未知其綠何事端 而事在難言 臣敢下爲國諱 爲尊諱 以法春秋之義乎
소릉이 폐위된 지 이미 40년이나 지나 신은 그 폐위가 무슨 사단(事端)에서 연유된 것인지 잘 모르며, 그 사건에는 말하기 어려운 점도 있습니다. 신이 감히 나라를 위하여 숨기지 아니하고 높은 이를 위해 숨기면서 춘추필법(春秋筆法)의 정신을 본받는다 하겠습니다.
然臣伏念 顯德王妃 初不得罪於宗社 則黜之太廟 可乎 亦非見黜於文宗 則葬以庶人 可乎
그러나 신이 삼가 생각하니, 현덕왕후는 처음부터 종사(宗社)에 죄를 지은 바 없는데 종묘에서 내쳤으니 이 어찌 옳은 일이겠습니까. 또한 문종에 의하여 내침을 당한 사실이 없는데 서인(庶人)으로 장사함이 어찌 옳은 일이겠습니까.
生不見黜於文宗 而配體至尊 後乃被廢於光廟 而禍及重隧者 雖由於六臣謀變 而后之母弟俱誅 勳臣密贊 卽 魯山中道隕逝之故
생전에 문종에게서 내침을 당한 바 없어 배위의 몸으로 지존(至尊)한데, 뒤에 세조 때 폐함을 당하였고, 화는 무덤길까지 거듭하여 미쳤습니다. 비록 육신(六臣)의 모변(謀變)에 연유한 것이기는 하나 왕후의 어머니와 동생은 모두 처형을 당하였고, 훈신(勳臣)들의 밀고로 노산군(魯山君)도 중도에 서거하는 변고가 있었습니다.
而此誠有人國以來所無之大變也 竊伏聞 發陵之時 夜有哭聲 遷瘞海濱 頗著靈異 土人村氓 只傳一抔
이는 진실로 사람의 나라가 생긴 이래 전례가 없는 대변고(大變故)였습니다. 신이 은밀히 들은 바로는 능을 파헤칠 때 밤에 곡성이 이었고, 바닷가에 옮겨 묻을 때에는 매우 신령스러운 이상한 일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지금은 토착 촌백성들이 단지 언덕 같은 한 무덤을 전하고 있을 뿐입니다.
秋江竹淚 長入騷人之句 寒食麥飯 空呑野老之聲 蓬蒿荒沒 孤兎躑躅 天荒地老 哀恨難旣
남추강(南秋江)의 죽루시(竹淚詩는 오래도록 문인들의 시구(詩句)에 오르고 한식날 보리밥은 속절없이 시골 늙은이의 탄식 소리를 삼켰습니다. 그 무덤이 쑥대풀에 파묻혔고 여우와 토끼들이 어슬렁거리니 하늘이 황폐하고 땅이 늙어도 애절한 한(恨)은 끝나기 어려울 것입니다.
安知夫無限幽寃 飄蕩無依 不盤礴欝結於泉臺之下 又安知文宗在天之靈 其肯安於心 而洋洋陟降 獨享夫禴祠烝嘗 不飮泣垂憐於煢然之孤耶
그러나 한 많은 원혼(寃魂)이 의지할 곳 없이 떠돌다가 지하에서 답답해함이 없는지 어찌 알겠으며, 또 하늘에 계신 문종의 혼령이 편안한 마음으로 오르내리며 사시(四時)의 제사에 홀로 흠향하실 때 눈물을 삼키며 고혼(孤魂)을 불쌍히 여기지 않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禮本於情 情施於禮 古今之通義也 自天子至於庶人 立廟之制 雖有五廟七廟一世三世之殺焉 然未聞有無配位之廟矣
예(禮)는 인정(人情)에 근본을 두었고 인정은 예로써 베푼다는 사실은 고금을 통하여 통용되는 이치입니다.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사당의 제도를 세우고 있는데, 비록 오묘(五廟)와 칠묘(七廟)에서 일세(一世), 삼세(三世)를 줄일 수는 있지만 배위(配位)가 없는 사당이 있다는 말을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惟我東方 素稱禮義之邦 而聖祖受命 五禮畢擧 列聖相承 是繼是述 典章法度 侔擬中華 獨於太廟之內 乃有無配位之室 人情斁矣 廟禮缺矣 因循三世 迄未追復
생각건대, 우리 동방은 평소 예의의 나라로 일컬어져 왔습니다. 성조(聖祖)께서 천명을 받아 오례(五禮)[1]를 모두 갖추어 거행하시었고, 열성(列聖)께서 대대로 이를 계승 발전시켜 중국의 그것과 비견되는 전장(典章), 법도(法度)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종묘 안에 배위가 없는 묘실(廟室)이 있어서 인정이 무너지고 묘례(廟禮)의 흠결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미적미적 미루어 3세대에 이르도록 아직 추복(追復)하지 못하였습니다.
[1]오례(五禮) : 길례(吉禮 : 祭祀), 흉례(凶禮 : 喪葬), 빈례(賓禮 : 賓客), 군례(軍禮 : 軍旅), 가례(嘉禮 : 冠婚)의 다섯 가지 의식을 이른다.
而殿下不恠其失 羣臣不言其非 臣實恥之 父母 一天地也 天地 一父母也 人未有有天而無地者矣 子未有有父而無母者矣
그러나 전하께서는 이 과실에 대하여 괴이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뭇 신하들도 이 잘못을 말하지 않고 있으니, 신은 참으로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부모는 천지와 같고 천지는 부모와 한가지입니다. 하늘이 있고 땅이 없는데 사람이 있을 수 없듯이 아버지가 있고 어머니가 없는데 자식이 있을 수 없습니다.
帝王 臣民之父母也 享其父而不享其母 尊其父而不尊其母者 自古及今 未之嘗聞
제왕은 백성의 부모입니다. 그 아버지에게는 향사(享祀)하고 그 어머니에게는 향사하지 않으며, 또한 그 아버지에 대하여는 존경하고 그 어머니에 대하여는 존경하지 않는다는 것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使母有罪而見黜於父 則父命不可違 莫可奈何 而公然追廢其無罪之母 使不得入廟 似未合於情禮之正矣
가령 어머니에게 죄가 있어서 아버지에게 내침을 당했다면, 아버지의 명을 어길 수도 없는 일이니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할 수 있으나, 죄 없는 어머니를 추폐(追廢)하고 사당에서 내치고 받들지 않는다면 이는 정례(情禮)의 정도(正道)에 어긋나는 것이옵니다.
昔者 儒臣南孝溫之論此事 僅及於諸條之末 而奸臣任士洪 李瓊仝輩 從而沮毁之 以爲復昭陵事 非臣子所敢言 剙爲朋黨之說 羅織其罪 至請鞫之 以起士林之禍
예전에 유신 남효온(南孝溫)이 이 일을 여러 조목의 말미에 간신히 끼워 소론(疏論) 하였는데 간신 임사홍(任士洪)과 이경동(李瓊仝) 같은 무리들이 가로막고 헐뜯으며 말하기를 “소릉 복위 문제는 신하 된 사람들이 감히 언급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하고 붕당(崩黨)을 조성하려 한다는 억설로 없는 죄를 얽어 꾸미고 그 죄가 지극하다며 국문할 것을 청하여 사림(士林)의 화(禍)를 일으키려 하였습니다.
賴我成宗明並日月 置至不問 然自是以來 無敢復進言者 環東土數千里 凡爲我國臣子者 孰不爲昭陵歎之 孰不爲太廟惜之
그러나 다행히 성종께서는 일월(日月)과 같이 밝으시어 이를 불문에 부치셨습니다. 그런데 이로부터 감히 다시 복위 문제를 진언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동방에 둘러진 국토 수천리에 살고 있는 우리나라의 모든 신하 된 사람 가운데 어느 누가 소릉에 관한 일을 탄식하지 않으며 어느 누가 종묘의 일을 애석해하지 않겠습니까.
世宗立崇義殿 封王氏後 賜之士田臧獲 以奉其祀 此大聖人之至仁盛德 出於尋常萬萬 而百世之所欽仰者也
세종께서는 숭의전(崇義殿)을 세우시고 왕씨(王氏 고려 왕족) 후손을 봉하여 전토(田土)와 노비를 하사하고,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습니다. 이는 지극히 평범한 일에서 나온 대성인의 지극한 인(仁)이며, 성덕으로 오랜 세대를 두고 흠모 숭앙하고 우러러볼 일입니다.
勝國之廟 猶尙待之如此其仁厚 况我先王之廟 禮之當行而無疑者乎
전조(前朝)의 사당이 오히려 이와 같이 후하게 대접받고 있는데, 더구나 우리 선왕(先王)의 사당에 대한 예우야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일인데 의심의 여지가 있겠습니까.
權自愼 昭陵之兄也 宋玹壽 魯山之舅也 睿宗嘗原玹壽之子姪琚瑛 使參朝籍 成宗亦以自愼家所籍家産臧獲 還給魯山夫人宋氏 資其餘生
권자신(權自愼)은 소릉의 오라버니이고 송현수(宋玹壽)는 노산군의 장인이온데 예종(睿宗)은 일찍이 송현수의 아들 거(琚)와 조카 영(瑛)을 조적(朝籍 관리 명부)에 올려 등용 하였으며 성종 역시 권자신의 가산(家産)과 노비들을 환급시켜 주어 노산군 부인 송씨의 여생의 생계 자산으로 쓰게 하였습니다.
由此而兩聖之微意 大可見矣 若曰三世所未行 今不可追擧 則臣亦遵孝溫之說 請以光廟之訓明之
이에 관련한 두 성상(聖上)의 숨은 뜻이 매우 컸음을 가히 알 수 있습니다. 만약 3대에 걸쳐 행하지 못한 일을 지금에 와서 거행할 수 없다 한다면 신 역시 남효온의 주장대로 세조의 훈계(訓誡)를 살피시기를 간청합니다.
其訓睿宗曰 予當屯 而汝當泰 若局於吾迹 不知變通 則非所以順吾志而繼吾事也 豈非以事有不可行之時 亦有可行之時歟
세조께서 예종에게 훈계하시기를 “나는 험난한 때를 맞았지만 너는 태평한 시대를 맞이할 터인데 만약 나의 행적에 구애되어 변통할 줄 모른다면 그것은 나의 뜻을 따르고 내 사업을 계승하는 바가 아니다. 일이란 어찌 행할 수 없는 때가 있고 또 행할 수 있는 때가 있지 아니 하겠는가.” 라고 하신 바 있습니다.
恭惟 殿下欽明仁孝 臨御之初 凡所以修擧損益 以爲繼述之宏規弘謨者 莫或不歸於正 而惟此一事 難愼未決 臣不知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흠명(欽命)하시고 인효(仁孝)하시어 등극하신 초기에는 모든 면에서 휼륭하게 닦아 덜고 더함으로써 선왕의 위업을 계승하셨으며, 모든 시책이 정도에 귀결되지 않는 바 없었는데 유독 이 일만은 어렵사리 신중하여 결말을 보지 못하는 까닭을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殿下何所憚而不能 何所待而不爲也 以其可行之事 又當可行之時 而沮於邪議 不能斷然行之 是所謂不爲也 非不能也
전하께서는 무엇을 꺼리어 할 수 없으며, 무엇을 기대하여 하지 않으십니까? 행할 수 있는 일을 마땅히 행할 수 있는 시기에, 간사한 논의(論議)에 저지당하여 단연(斷然)히 결행을 감행하지 아니함은 이른바 할 수 없음이 아니라, 하지 않음이옵니다.
昔 我憲宗皇帝 追復景泰之仁 炳炳如日星在天地間 雖與此事 稍不相類 亦可倣而行之矣 神理人情 本不相悖 人情安然後 神理亦安
전자에 명(明)나라 헌종(憲宗) 황제가 경태제(景泰帝)를 추복한 선행은 천지간의 일성(日星)과 같이 밝고 빛납니다. 비록 이 일과 견주어 서로 같은 점이 적기는 하오나 가히 본받아 행할만한 일입니다. 신명의 도리와 인정은 본래 서로 어긋나는 것이 아닌 인정이 편안한 연후에 신의 도리 또한 편안할 것입니다.
神理不安而人情安 人情不安而神理安者 未之有也 伏聞 去夜 文宗室有光恠 至遣禮官 行祭慰安
신의 도리가 불안한데 인정이 편안하다든지 인정이 불안한데 신의 도리가 편안하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삼가 듣건대, 지난 밤 문종(文宗)의 묘실(廟室)에 심히 괴이한 불빛이 나타나 예관(禮官)을 보내어 위안제를 올렸다고 합니다.
臣愚以爲 文廟神靈 必有所未安於冥冥之中 而所以示警於殿下者 顯顯無間矣 臣以請復旣疏 又箚至于再三而不知止者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문묘(文廟)의 신령이 어두운 저승에서 필시 편치 못한 바 있는 것이고, 전하에게 신호를 보인 것은 분명히 무간한 사이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신은 이미 청복(請復)의 소와 차자(箚子) 올리기를 재삼차 하였사오며 앞으로 언제 그치게 될지 모르옵니다.
誠欲我聖朝行此盛德事也 伏願殿下遵光廟之微訓 體文宗之孤心 察先后之幽寃
진실로 바라옵건대, 우리 성조(聖朝)에서 이 성덕의 일을 행하여 주옵소서. 전하께 엎드려 원하옵건대, 세조의 뜻깊은 가르침을 따르시어 문종의 외로움과 돌아가신 왕비의 원통한 저승의 원한을 마음으로 살피소서.
法中廟盛制 亟使廟室陵園之禮 追於今日 則殿下此擧 卓冠百王 卽可以建天地質鬼神 允合乎孔聖所稱善繼善述 而爲武王周公之達孝也
그리고 중국 조정의 성대한 제도를 본받아 묘실(廟室)과 능원(陵園)의 예(禮)를 속히 추복하게 하소서. 전하, 이 거사는 백왕(百王)의 으뜸이 되어 가히 천지(天地)의 기강을 세우고 귀신을 바로잡는 일로서 공자 성인께서 말씀하신 바를 잘 계승하여 무왕(武王)과 주공(周公)이 달효(達孝)한 일과 참으로 부합되는 일이옵니다.
臣以疎賤 不揆僭越 冒瀆聖聰 罪當萬死 伏不勝激切祈懇之至
신이 미천한 몸으로 외람됨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성총(聖聰)을 모독한 죄 만번 죽어 마땅하오나 간절히 기원하는 격절한 마음 이기지 못하여 삼가 올리나이다.
출전 : 탁영선생문집 중간본, 역주본
편집 : 2015. 01. 12. 죽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