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보면 홍계리洪溪里 유래
석보에서 가장 놓은 산이 솟아 있으며, 북쪽으로 약 1.3킬로쯤에 있는 마을이다. 새마을 사업을 하는 바람에 마을 길이 넓어졌고 협동이 잘 되는 마을로 알려져 있다. 본래 영양군 석보면의 지역으로서 두 내가 합하여 홈이 나 있으므로 하여 홈거랑ㆍ홈거리ㆍ흥거리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1914년 행정 구역을 고칠 때 양구동과 다외동의 일부를 따다가 합하여 홍계리로 하여 석보면에 들게 했다.
[마을의 특징]
석보면에서 가장 높은 주산(主山,681m)이 있으며 산의 맑고 깨끗한 경관은 가히 일품이다. 못에서 흘러 내리는 물을 긴 홈을 이용하여 수로(水路)로 삼았음은 다른 마을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못을 낀 논배미가 많이 있다. 일찍부터 수리시설에 대한 유비무환의 대비가 철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유래]
*홈거리ㆍ홍거리ㆍ홈거랑ㆍ홍계(洪溪)
홍계 주위를 흘러오는 두 줄기의 물이 있다. 하나는 다외쪽에서, 또 하나는 주산동 못배미쪽에서 흘러 내리다가 합쳐져서 긴 홈을 이루는데 이 홈을 이용하여 논에 물을 대는 수로로 썼다 한다. 이 홈이 있다고 하여 홈거랑 거리라 부르다가 홍계라고 불리게 되었다(최익휴(52) 제보). 홍계는 홈거랑을 한자로 뒤쳐서 이르는 부름말이다. 내를 거랑이라 하는데 중세어로는 가람에 걸림을 둘 수 있다.
*다우ㆍ다외(多外)ㆍ다외동(多外洞)
조선 시대 임진왜란 때 동래 정씨들이 이 곳에 피난해 와서 개척하여 정착한 마을인데, 당시 이 곳 산에 다래가 많아서 다우라고 불렀다. 그러나 당초에 마을을 개척했던 정(鄭)씨들은 그 뒤 한두 집씩 다 떠나고 그 후손들은 남아 있지 않다(남종수(50) 제보). 다우와 다래의 소리가 비슷하다고 하여 이런 풀이를 붙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달외-다외에서 달의 끝소리가 떨어진 셈이 된다.
*웃다우ㆍ옷다외(上多外)
다외마을 중 위쪽에 있기 때문에 웃다외이며 홈거리에서 북동쪽으로 1킬로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전(田)씨들이 많이 살며, 새마을 사업을 잘 하여 마을 길이 많이 넓어졌으며, 협동이 잘 되는 마을이다(남종수(50) 제보).
*양지마ㆍ아랫다우ㆍ아랫다외ㆍ하다외(下多外)
다외 마을 중 아래쪽에 자리잡은 마을인데 햇볕이 잘 들고 양지바른 마을이어서 양지마라고 한다(김대근(57) 제보).
*못배미
홈거리의 한 모퉁이에 있는 마을로 못을 낀 논배미가 많이 있었다고 해서 못배미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이성태(52) 제보). 본래 못이란 여러 갈래의 물이 모여 드는 곳을 이른다. 못에 물이 넉넉하면 농사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어지게 된다.
*주산골(主山谷)ㆍ주산동(主山洞)
못배미골 남쪽에 삼밭골이라고 하는 산삼이 많이 나는 골짜기가 있다. 그 골짜기 북쪽에 있는 마을이 바로 주산골인데 이 마을에는 석보면에서 가장 높이가 높은 681미터의 주산(主山)이 있으며 주산의 수려한 정기를 받아서 공기가 맑고 바람이 시원하며 물이 맑고 깨끗하기가 그지 없다고 한다(최제숙(50) 제보).
*정지터
주산 바로 앞 산 중허리에 수만 평이나 되는 산림이 울창한 평원이 있었는데 이 곳을 벌채하고 나니 아주 좋은 개간지가 되었다. 이웃 마을의 사람들이 옮겨 와서 이 곳에 정착해서 살 만한 곳이라 생각하여 한두 집씩 모여 들면서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정지터라고 했다(김덕년(45) 제보). 본래 정리라 함은 이바지 먹거리를 만드는 곳이다. 미루어 보건대 농토를 일구던 시절 한곳에다 먹거리 만드는 곳을 삼아서 일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 하여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한다.
*질등
새텃골에서 칠성봉으로 올라가는 긴 등성이 위로 새로 만들어진 마을이다. 리어카가 다닐 만큼의 길이 있는 윗 둔덕에 위치 하였으므로 질등이 되었다. 고추ㆍ담배를 많이 경작한다(장호장(59) 제보). 길과 걸림이 있는 말이라면 길-질이 된 것이니 '길'의 소리가 약해지면 질이 되기에 그리 풀이할 수 있다.
칠성봉(七星峯)이 마을 뒤쪽에 봉우리가 일곱 개 있는 산이 있는데 그 산이 칠성봉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칠성봉의 정기를 받아서 수명이 길고 인심이 순후하다고 하는데, 뒷산의 이름을 받아서 마을의 이름으로 삼았다 한다(장호장(59) 제보).
칠성신앙은 민간 신앙 가운데에서 아주 뿌리 깊은 신앙 형태이다. 모든 인간의 운명이 바로 별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걸로 알고 점도 치고 제사를 드리기도 하였다. 이르자면 일월산(日月山)의 일월도 가장 큰 별 이상의 다른 게 아니기 때문에 칠성신앙은 더욱 뜻있는 것으로 보인다.
*흥두들ㆍ흥구(興邱)요원리 입구 마을인 배남정 북쪽 뒷 언덕에 새로 만들어진 좋은 마을이라고 하여 흥구들이다. 약초를 많이 재배하고 염소를 많이 먹일 정도로 좋은 풀이 있으며 농가 소득이 높아서 살림이 윤택하다(최봉진(74) 제보).
*배남정ㆍ배나무쟁이
요원리의 제일 첫 어귀에 있는 마을인데 옛날에는 이 마을에 배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해서 배나무쟁이라 불렀다. 지금도 오래된 아주 큰 배나무 한 그루가 동네에 남아 있는데, 해마다 정월에 동민들은 이 나무에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최봉진(74) 제보). 여기 배나무는 동네 사람들이 섬기는 걸로 보아 동신목(洞神木)이다. 일종의 숲을 생명의 고향으로 하는 신화의 뿌리와도 같은 보기이다. 숲은 실용성으로 보아 먹거리와 입을 거리 그리고 집거리 모두를 만들어 주는 공간이기에 그러하다.
[참고문헌 : 영양군지]
※되집어 보는 영양말(사투리)※
그랑, 엄체, 맹근, 게락, 마카, 모티, 모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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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말캉 마실소개 /171) 석보면 홍계리(洪溪里)가 궁금니껴?
홍계(洪溪)는 석보에서 젤로 높는
주산(主山/681m)이 있니더.
두 그랑물이 엄체져가 그랑빠닥에 홈을
질따라케 내게 됬따꼬
홈거랑, 홈거리라꼬 카니더.
(홈거리ㆍ홍거리ㆍ홈거랑ㆍ홍계)
주산쪽캉 다외쪽에서 흘러오는
두 그랑이 엄체지는데로
그랑빠닥이 질따한 홈이 생기면서
그 홈을 이용해 논에 물을 댈수 있는
수로로 사용한 홈이 있따 케가꼬
홈거랑, 홈거리, 홍계(洪溪)라 카니더.
홍계(洪溪)는 홈거랑을 한자로 쓴거시더.
(다우ㆍ다외)
임진왜란 때 동래 정씨들이 피난와가
맹근 마실로.
근바에 다래낭기 게락이라꼬
다우 혹은 다외(多外)라꼬 카니더.
(웃다우ㆍ웃다외)
다외 우쪼구에 있는 쪼메한 마실이라꼬
웃다우 혹은 웃다외(上多外)라꼬 카니더.
과거에는 전(田)씨들이 살았찌만
지금은 홍소저수지가 맹글어지면서
마실은 마카다 수몰된니더.
(양지마ㆍ아랫다우ㆍ아랫다외ㆍ하다외)
다외 아랫쪼구에 있는 마실이라꼬
아랫다우, 아랫다외, 하다외(下多外)라
카기도 했었꼬.
햇볕이 잘 드는 양지바른데라케가꼬
양지마라꼬도 켔니더.
하지만 홍소저수지가 맹글어지면서
마실은 마카다 수몰된니더.
(못배미)
홈거리의 모티에 있는 마실로
많은 논들이 따락따락 붙어 있찌만
마카 못을 끼꼬 있따꼬 못배미라 카니더.
못은 모티, 배미는 마실을 의미하니더.
(주산골ㆍ삼밭꼴)
석보면서 젤로 높따란 681미터의 주산이
있는데라꼬 주산꼴(主山谷) 혹은 주산
이라 카기도 하고.
산삼이 많이 나는 골짜기라꼬
삼밭꼴이라꼬 카기도 하니더.
(정지터)
주산 바로 앞 산중턱에
빽빽한 산림을 개간해가꼬 농토를
맹그면서 마실이 생겨 났니더.
농토를 개간시
끼니 해결을 위해 정지(부엌)를 맹글고
그 중심으로 마카 모디게 되었따꼬
정지터라꼬 카게 된니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