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으로 가는 것은 과거와 만나는 일이다.
고속도로를 달려 한 시간이면 충청이요 또 한 시간을 더하면 남도의 경계에 닿는다.
도로를 따라 지나가고 다가오던 산의 능선들이 문득 사라지고 하늘이 낮아지는 곳,
낮아진 하늘이 툭 트인 들판의 아스라한 끝에 닿아있는 곳,
기댈 데 없어 그늘 한 점 만들지 못하는 햇빛이 무참하도록 환하게 쏟아지는 곳,
거기는 백제의 땅, 동학군의 고향, 그리고 남도 빨치산의 뼈가 묻힌 곳이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그 곳에 들어서는 것은 과거로 가는 일이다.
늙었든 젊었든 그 땅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예사로 보이지 않는 것은
그들이 내 가슴 속에 찍혀있는 과거 사건들의 어떤 장면 속에서 걸어나온 듯한 느낌 때문이요,
그가 틀림없이 그 장면의 어느 한 모퉁이에 말없이 서있던 이의 자손일 것이라는 상상 때문이다.
곡성은 빨치산의 고장이다.
하긴... 남도치고 빨치산의 옷깃이 스치지 않은 마을, 빨치산의 발길이 닿지 않은 산이 있으랴마는
전남도당 본부와 유격대 총사령부가 자리잡았던 백아산 동북사면을 아우른 곡성은
백아산 서남사면에 안긴 화순, 백아산과 지리산을 이어주는 구례와 함께 전남빨치산 투쟁의 중심부였다.
구례에 자리잡고 9년째 빨치산 영화를 만들고 있는 조성봉감독은 자신의 블로그에서,,,
“남으로 화순 동복에서 시작하여 곡성 오산에 이르는 기동로, 서쪽으로 무등산 비탈에서 시작하여 담양 남면을 거쳐 화순 이서와 북면에 이르는 지역 안의 계곡과 마을들, 백아산 능선 동쪽의 곡성군 겸면, 삼기면, 석곡면에 걸치는 띠모양의 영역이 빨치산들이 장악하는 해방구였다. 백아산은 전남 빨치산 유격투쟁에서 서쪽으로는 광주, 북쪽으로는 곡성군, 남으로는 화순을 막아내는 중요한 거점이자 백운산, 지리산과 함께 빨치산의 최강부대인 전남 빨치산의 본거지이다. 1950년 9월 28일 이후, 용곡2구 약수마을에는 빨치산의 총수인 전남도당위원장 박영발이, 용곡1구 용촌마을에는 전남도당부가 있었으며 수리에는 전남유격대 총사령부가, 원리에는 광주부대와 북면당이, 송단3구 평지마을에는 곡성군당부가, 송단2구 강례마을에는 전남도당학교가 있었다. 산속 곳곳에 발동기와 연자방아를 두어 탄약과 식량의 자급조달을 하였다.” 고 썼다.
순식간에 사람들을 까만 숯으로 구워버리는
악명높은 대량살상무기인 네이팜탄을 미군이 처음으로 사용한 것도 백아산이었고,
한 유격대원이 M1소총으로 로켓탄을 퍼붓는 제트기를 쏘아 떨어뜨린 것도 모두...
백아산에서의 치열한 전투가 남긴 전설 같은 실화다.
2005년 회문산에서 처음 열렸던 추모제에 참석했던 어떤 분은,,,
"50년전 피맺힌 절규가 7부능선 자락타고 결결이 흘러내려 산에 사는 모든 것들의 뿌리로 스며,
그 넋들이 지금도 봄이면 진달래로 흐드러지다가, 여름이면 잡풀들로 우거지다가,
가을이면 소슬한 바람되어 나뭇가지를 하염없이 흔들어대다가,
겨울엔 눈쌓인 투구봉 정상에 서슬퍼런 칼바람으로 휘몰아친다"고 애도했다.
우리나라 산의 대부분이 빨치산의 유격전구였음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백두대간 구석구석이 빨치산의 대오와 연락선들이 오고가는 루트였음을 아는 사람도 없다.
불과 60여 년이 지났을 뿐인 현대사의 선명한 장면들이 삼국시대보다도 더 오래된 일처럼 잊혀졌다.
하지만 아무리 묻으려 해도 묻혀지지 않는 일들이 있다.
기어코 잊으려 해도 잊혀질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이 땅에 사람들의 씨가 마르지 않는 한.
남쪽으로 가는 것은 또한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다.
옥과IC를 나와 왼쪽으로 10분이면 별꽃님 외얏골 농장이고 오른쪽으로 5분이면 다랭이님 농장이다.
그러니까 두 집은 15분 거리를 두고 이쪽 저쪽에 자리한 것인데, 우리는 이런걸 보고 이웃이라고 그런다.
아직 서로 통성명도 못한 이웃을 제끼고 멀리서 간 내가 먼저 양쪽으로 안면을 텄다.
인터넷 지도에서 표지로 찍어놓은 빨간 지붕이 애먹이지 않고 대번에 나타나 반갑기 그지없다.
시골길이야 포인트가 되어줄 건물도 이정표도 없어 헤매기 쉽상이니 말이다.
황토벽과 붉은 지붕, 대나무 지주를 타고 오르는 덩굴까지 빛깔들이 잘 어우러진데다
아이들 자전거와 나무의자 소품까지 등장하니 마치 동화 속에라도 들어온 듯하다.
사진은 없지만 독특한 내부공간 역시 동화 속이라 하기에 손색이 없다.
어여쁜 공주와 왕자라도 나올 것 같은 풍경인데,
보니까 이 집 주인장들이 꼭 마춤하다.
사람을 집에 맞추어 놓은 듯, 집을 사람에 맞추어 놓은 듯......
하지만 집을 거두고 밭을 가꾸어놓은 모양새가 공주 왕자로는 어림없게 야무지다.
집 앞에 ‘동빈이꽃밭’과
‘솔빈이텃밭’에서 시작하여...
표고재배 움막도 단출하고,
주먹만하게 예쁜 수박도 주인장들을 닮은 듯...
층층이 만들어진 밭에는 갖가지 채소 작물들이 아기자기하다.
밭구경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고... 했지만...
끝까지 미련이 남는 건 깔끔하고 고소하고 맛있는 콩국수... 양이 좀 적었다.
저 돌담길은 구면이다. 사진에서 봤으니까.
큰 길에서 농로로 접어들어 올라가다 보면, 길 끝에 저런 멋진 마을이 나오리라 짐작도 할 수 없다.
그러하니… 올라가면서 잘못 들어온 게 아닐까 두 번이나 의심했었다.
마치 첩첩 산중에라도 들어온 듯,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불과 5분 거리에 이런 동막골 같은 마을이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하다.
역시 구면인 대문을 통과하는데 기둥에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뭘까?
넓지 않은 집터를 세심하게 가꾸어 놓았는데 사진보다 훨씬 인상적이다.
안주인은 외출 중이시고...
다랭이님이 손수 마련해주신 개똥쑥차를 앞에 놓고 나무결이 선명한 마루 위에 올라앚아
훌쩍 자라 앞마당을 울타리처럼 두르고 있는 옥수수들의 흔들림을 바라보고 있자니,
잘 설계되고 솜씨있게 꾸며진 무대 위에라도 오른 듯하다.
본채 옆에 자리한 옛집은...
전통가옥 체험이나 치유와 휴식을 원하는 손님들을 위해 마련되었다.
막사발처럼 붙여진 이름과는 달리 믿을 수 없이 향긋한 맛이 우러나오는 개똥쑥과
가지가지 약초와 들풀과 채소가 자라는 밭은...
100년만이라는 이 극한 가뭄에도 먼지 하나 없이 청청하다.
이 아름다운 무대를 가꾸는 주인공들의 손에서 차와 효소와 장이 만들어져 나올 터인데...
아무데서도 맛보기 어려운 드물게 독특한 차 맛은 물론,
정성들여 꾸며진 대문을 감상하기 위해서라도 한번 가볼 일이다.
아무래도 후회가 가시지 않는 것은 장맛을 못보고 떠나서이다.
첫댓글 별꽃님, 다랭이님, 반갑게 맞아주셔서 감사하구요... 많이 배웠습니다.~
바다비님이 배가 좀 아프시겠어요...ㅎㅎ
평일날을 잡아서 연락 못드렸어요. 담에 함께 가요~^^
헉... 개마고원님 이럴수는 없습니다. 엉엉~~
다랭이님 왠 소홀이요?? 준비까지 하시면 굉장하겠네요. 바다비님 모시고 느긋하게 다시 가야겠어요.
준비된 대접받으러요~ㅎㅎ
바다비님 죄송! 울지 마세요. 맴이 아퍼요. 꼭 모시고 갈께요~^^
긴가뭄때문에 함께 길을 나서지 못한 섭섭한 마음이 울컥 되살아납니다. 어제부터 변산은 비가 오기 시작했어요. 가랑비처럼 오다말다 바람만 온갖 문이란 문은 다 부술듯 불어제끼고 조금 오는 비마저 말려버리려는듯 밤새 조마조마 하지요. 오늘은 아침부터 비바람이 거셉니다. 아무튼 이런 모양이든 저런모양이든 비가 흠뻑 왔으면 좋겠습니다. 다랭이님. 곡성거쳐서 신비원에 들어선 주샘... 자랑을 두어시간 늘어놓아서 또 제 속을 살짝 뒤집어 놓으셨지만,, 좋은분을 더 가까이 모셔서 놓은 든든한 마음에 용서했습니다. 담에는 꼭 저도 한번 가볼게요.
하하 용서하셨군요. 미안해요 혼자만 갔다와서... 담에 같이 가요. 같이 갈 사람 많아 좋네요~
방에서 한숨 자고 싶어요.
광영씨 일하느라 힘이 많이 든가봐요. 맞아요. 한숨 자고싶은 방이에요.
사진이 실물보다 낫네요. ㅎㅎ 우리집 맞아? 했답니다.
먼길 오시는길 잊지 않으시고 이쁜 바구니도 선물해주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편안하게 나눌 수 있어서 참 좋았어요.
다음번에 또 내려오시면 그땐 꼭 콩국수 곱배기로 준비해놓을께요.
처음뵈었는데도 마치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이인듯 참 편안했습니다.
가까이에 사신다면 참 좋을텐데요... ㅎㅎ
저두요~ 마음이 참 좋았어요. 곱배기~ 잊지마세요. 난 잘 잊어먹으니까 장부에 적어놔야지 ㅎㅎ
앗! 15분거리에 사시는 다랭이님을 한번도 못뵈었다는건 이거 말도 안되는거지요. ㅎㅎ
조만간 놀러가겠습니다. 연락처좀 남겨주시와요.
ㅋ~ 사진도 글도 참 예술입니다. 좋은 분들이 사는 모습에 예술이 더하니 ......
오늘 왜 이리 제가 초라해지는지......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