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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화의 수필 모음 >
전봇대는 아프다 / 정성화
칠십대의 노점상 할머니가 대통령의 가슴에 기대어 울고 있는 신문 기사를 보았다. 매일 자정쯤 나와 열 두 시간동안 시래기와 무청을 주워 팔아도, 먹고 살기가 힘들다는 하소연을 하며 울었다고 한다. 우는 할머니의 어깨를 감싸 안은 대통령의 표정도 무척 착찹해 보였다.
사는 게 너무 고달파서 한바탕 울고 싶던 사람들의 마음을 툭 건드리는 사진이다. 사진 속 배경이 된 배추더미는,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잠깐 잠이 든 시장 상인들의 모습을 연상케 하고, 졸린 눈빛으로 배추를 내려다보던 알전구들은 갑작스런 대통령의 행차에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다. 새벽이라기엔 어둠이 너무 두터워 보여 아침이 쉬 올 것 같지 않다. 지금의 경제 상황이 그러하듯이.
국민소득이 십 년 만에 최대 폭으로 감소했다더니 어느 노숙자는 따뜻한 교도소에 가고 싶어 일부러 절되죄를 저질렀다고 한다. 이 세상이 마치 빈 쌀독처럼 느껴진다. 내가 정말 복이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북한 공산당이 쳐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어른들 말 때문에 자다가도 가위에 눌리곤 했었는데, 어른이 된 뒤로는 걸핏하면 경제 위기나 구조 조정을 들먹이는 사회 분위기에 눌려 나도 모르게 소심증 환자가 되어?가고 있다. 정말 이 힘든 시절을 병풍 접듯이 쉽게 접을 수는 없는 걸까.
이런 상황이 닥쳐오리라는 것을 전봇대는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급매, 급전세라는 전단지를 바람에 흔들어 보이며 점차 부동산 값이 하락할 거라고, 눈물의 고별전이니 '창고 대방출'이라고 적힌 전단지를 내걸며 몇 개의 공장과 회사가 곧 문을 닫을 거라고 귀띔해 주었던 것 같다. 다만 우리가 상황을 알아차리지 못했거나 아니면 보고도 무시했거나 무신경하게 보았을 뿐이다. 여기 저기 남아 있는 벽보 테이프 자국과 떼다만 전단지 자국, 그리고 남의 전단지 위에 겹쳐 놓은 구직 광고를 보니 왠지 상황이 급속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손 닿는 데까지 전봇대에는 빈 곳이 없다. 힘든 이들이 그래도 믿고 의지할 데는 전봇대뿐인 모양이다. 그래서 전봇대는 세상을 읽어주는 책이 되고 있다. '빈 방 있음', '병원 경매', '하숙생 구함', '무담보 싼 이자', '아기를 봐 드립니다' , '치매환자 돌봐드림', 명문대 출신이 명문대 보장' 등, 전단지들끼리 서로의 끝을 잡아주며 세상의 바람을 견디고 있다. 이런 게 가족이라는 듯이.
전봇대에 이 시대 가장(家長)들의 모습이 들어있다. 전봇대가 어깨에 둘러맨 덩치 큰 변압기는 가장들이 먹여 살려야 할 부양가족으로, 전봇대가 열 손가락 벌려 붙들고 있는 전선줄은 가장들이 보살펴야 할 부모 형제와 친지로 보인다. 끊임없이 전단지가 날아드는 것까지 닮았다. 공과금 고지서, 관리비 납부서, 보험료 청구서, 학원비 봉투, 공과금 납부용지 등.
전봇대의 하루는 참는 것에서 시작되어 참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느닷없이 돌을 던져 전봇대의 등을 깨는 사람, 다짜고짜 전봇대의 아랫도리를 걷어차는 사람, 전봇대의 종아리에다 질금질금 오줌을 싸는 술 취한 남자들까지. 아마 이 시대의 가장들도 자신의 '전봇대'가 있는 자리에서 이렇게 참아내고 있을 것이다. 제 식구들에게 세 끼 밥을 먹이려고 자식들 하던 공부라도 제대로 마치게 해 주려고 오늘 하루도 부처님보다 예수님보다 더 많이 참으면서 견디고 있을 것이다. 너무 낡고 삭아서 뽑아내기 전에는 바닥에 드러누울 수도, 그 어디에 기댈 수도 없는 전봇대들, 그들이 바로 이 시대의 가장들이다. 바람이 세차게 부니 전선줄들이 일제히 요동을 친다. 그 순간 전봇대는 전선줄을 더 팽팽히 부여잡는다.
때로는 전봇대에 붙어있는 전단지들이 시합을 마친 권투선수가 몸에 잔뜩 부치고 있는 '파스'처럼 보이기도 한다. 전봇대처럼 의연하게 보였겠지만, 이 시대의 가난한 가장들은 그동안 자기 몸 하나로 맞고 때리며 돈을 벌어 왔다. 권투가 위험하다고 링에 오르지 않는 복서는 없다. 맞고 또 맞아도 위축되지 않으며 상대방의 주먹 속으로 더 파고드는 게 복서다. 어쩌면 그는 지금 이 시간에도 찢어진 눈덩이를 손으로 가린 채, 다음 시합을 알아보러 다니고 있는지 모른다.
번개탄 두 장을 집어 삼키고도 불이 제대로 붙지 않는 연탄을 보고 있는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다. 대장간에서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무쇠덩이를 쇠망치로 두드려 연장을 만든다. 쇠망치로 내려칠 때마다 쇠가 단련되기 때문에 백번 이상을 두들겨야 좋은 연장이 된다고 한다. 우리의 경제 상황이 이렇게 힘들어진 것도, 어쩌면 우리를 좋은 연장으로 만들기 위해 하늘이 두드리고 있는 게 아닌지. 아프다는 것은 아직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 그리고 희망이 살아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한전 직원이 아침부터 전봇대에 올라가 수리를 하고 있다. 한 시간도 더 되었다. 전봇대가 많이 아픈 모양이다.
미얀마 선원 / 정성화
드라마를 보다가 가끔 황당해질 때가 있다. 갑자기 쫓기는 신세가 되거나 실의(失意)에 빠진 극중 인물이 무슨 해결책이나 되는 것처럼 "몇 년 배나 타고 와야겠다"고 말하는 경우다.
평소에 바다를 동경해 온 것도 아니고 그동안 해운 물류 사업에 관심을 가져온 것도 아니면서 느닷없이 배를 타겠다니, 참으로 생뚱맞은 소리다. 배라는 곳은 죄를 짓고 잠시 도피하러 가는 곳이 아니다. 생의 의욕을 잃었을 때 쉬러 가는 것도 아니다. 가족이란 이름의 안전띠를 매고 바다 위로 매일 번지점프를 하는 사람들이 모인, 그야말로 '삶의 현장'인 셈이다.
어제 남편이 배에서 보내온 메일이다.
태풍이 지나간 뒤에 생긴 너울 때문에 열여섯 시간의 드리프팅(driftiong)을 한 뒤 막 항해를 시작했을 무렵이었소, 다급한 연락이 왔소. 미얀마 출신의 조리수가 주방 바닥에 쓰러져 있다는 연락이. 달려가 보니 그는 입가에 거품을 물고 의식을 잃은 상태였소. 배는 이미 육지로부터 멀리 와 있는 상황이었고.
위성전화로 의사를 연결해 응급조치를 물으니, 일단 링거를 한 병 튀여한 뒤 빠른 시간 내에 병원으로 후송하라는 거였소. 스무 명의 선원 중 링거를 놓을 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결국 선장인 내가 나섰소. 돋보기로 정맥을 들여다보며 링거 바늘을 꼽는데, 혹시 바늘이 혈관을 관통해 버릴까봐 손이 떨렸소. 주사 바늘을 몇 번씩이나 찔렀다 뺐다 하는데도 그는 여전히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소. 두 시간 전만 해도 생글생글 웃으며 내 앞에 스테이크 접시를 놓아 주던 그였는데.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손끝에 힘을 주어 바늘을 밀어 놓는 순간, 바늘이 쑥 들어가는 느낌이 전해져왔소. 그리고 수액이 삼분의 일쯤 들어갔을 무렵, 그가 고맙게도 눈을 뜨며 의식을 찾았다.
배 안에 몰아친 태풍은 이제 무사히 지나간 것 같소.
배에서 병이 나면 하늘이 의사이고 바다가 간호사다. 배란 원래 그런 곳이다.
미얀마는 1983년 아웅산 묘소 폭발 사건이 있었던 나라 '버마'의 새로운 국명이다. 대학을 졸업해도 일자리가 없어서 그 나라의 많은 젊은이들이 선원으로 해외 취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법대(法大) 졸업생이 우리나라에 오면 선실 바닥을 닦고 녹슨 선체에 페인트칠을 하며, 상대(商大) 졸업생들은 배의 밧줄을 정리하거나 주방에서 설거지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선내 휴게실에 모여 기타 반주에 맞추어 미얀마 노래를 부르는 걸 들었다. 외로움을 이겨보려는 듯 목청을 한껏 돋우고 있었는데, 오글오글 모여 있는 그들의 작업화를 보는 순간, 나는 목이 메여왔다. 그 작업화들이 푸른 바다 위에 애써 내고 있는 길이 보이는 듯해서다. 그것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종이를 구겨서 휴지통에 집어넣고 돌아서는데 무슨 소리가 들려 살펴보니, 구겨진 종이가 제 몸을 펴느라고 '바스락바스락'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었다. 종이 한 장도 원래의 모습, 원래의 제 자리로 돌아가고 싶어 그렇게 몸을 가누는데, 가족을 다 두고 떠나온 선원들의 마음이야 오죽하랴. 그들은 푸른 바다를 보면서도 자신을 기다리는 '푸른 지붕'을 연상하고 있지 않을까.
긴 승선을 마치고 마침내 집으로 돌아가기 전날 밤, 선원들은 대개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한다. 사 놓은 선물들을 선실 바닥에 죽 늘어놓고 내려다 보면서, 풀어진 선물꾸러미를 넣었다 꺼냈다 하면서, 그렇게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비정규직 남편에서 다시 정규직 남편으로 복권(復權)되는 날을 그들은 그렇게 맞이하는 것이다.
그들을 위해 나도 뭔가 해 주고 싶었다. 그들이 떡을 좋아한다고 해서 배가 입항할 때마다 떡을 해 가져갔다. 배 위에서 당직을 서고 있다가도 내 모습이 보인다 싶으면 그들은 즉시 배 아래까지 달려와 내 짐을 받아 들었고, 나를 친누이처럼 반겼다. 어쩌면 나는 전생에 그들과 이웃 마을에 나란히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픈 기억도 있다. 심근경색증의 증세가 보인다는 의사의 판정 때문에 선원 생활을 그만 두고 돌아가야 했을 때, 말없이 굵은 눈물을 떨구던 어느 미얀만 선원, 추운 겨울날 갑판 위에서 순찰을 돌고 있는 미얀마 선원에게 다가가 기름때 묻은 그의 손에다 종이에 싼 팥빵 두개를 쥐어 줬던 남편, 그들은 세상의 오지(奧地)에서 만나 서로를 젖은 눈으로 바라보며 서로의 아픔과 외로움을 보듬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여우같은 영악함으로 단련되어 가고 있을 때 그들은 곰 같은 순박함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부터인지는 모른다. 남편이 왠지 미얀마 선원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져간 떡을 보고 아이처럼 좋아하는 모습이라든지, 승선 수당으로 받은 달러를 돌아앉아서 세고 또 세는 모습이라든지, 그리고 출항하는 배 위에서 나를 향해 양 손을 흔드는 모습까지도, 어느 한 사람의 모습이 때로는 다른 사람의 모습 속에서 현상되고 인화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선원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등대가 되어 세상의 파도를 헤쳐 나간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닮을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그것이 어쩌면 그들이 함께 바다를 건너가는 방법인지도 모른다.
그들의 망향가(望鄕歌)가 선내에 울려 퍼지던 그 날, 배는 한 마리 순한 고래가 되어 조용히 바다를 헤엄쳐갔다. 들려오는 노래 소리에 한 번씩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면서.
크레파스가 있었다 / 정성화
마음이 울적할 때 나는 곧잘 동요를 부른다. 처음에는 마음의 편을 들어주기 위해 약간 슬픈 곡을 택한다. 연이어 두 곡쯤 부르고 나면 마음의 물기가 절반은 걷힌다. 마음이 내 성의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부르는 노래가 '아빠와 크레파스'다. 노래 한 소절 끝에 나오는 '음 음' 이라는 후렴구가 처져 있는 내 마음을 살짝살짝 들어 올려 준다.
"밤새 꿈나라엔 아기 코끼리가 춤을 추었고, 크레파스 병정들은 나뭇잎을 타고 놀았죠.(음 음)"
크레파스 통에 들어있던 크레파스들이 일제히 뛰어나와 나뭇잎을 타며 노는 정경을 상상하면 이내 마음이 보송보송해진다.
크레파스에 대한 기억들이 내 마음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것도 그 즈음이다.
우리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몇 가지 소지품만으로도 그 집의 형편을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운동화와 고무신, 보온밥통과 양은 도시락, 책가방과 책보, 크레파스와 크레용 등. 운동화를 신고 다니면서 미술 시간에 36색 크레파스를 펼쳐놓고, 점심시간마다 보온밥통을 꺼내는 아이라면 틀림없이 부잣집 아이였다.
다른 것은 그다지 부럽지 않았는데, 36색 왕자크레파스만큼은 욕심이 났다. 이층 양옥집처럼 위 아래층에 색색의 크레파스가 빼곡히 채워져 있는데다 금색, 은색도 들어 있었으며 크레파스 통 위에는 금빛 왕관을 쓴 왕자님이 언제나 웃고 계셨다. 내가 그것을 가질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그것에 대한 갈망을 더 키웠는지도 모르겠다.
초등학생이 셋인데도 불구하고, 우리 집에는 크레파스가 한 통밖에 없었다. 그것도 우리가 살고 있는 단층 슬래브 집을 닮은, 옆으로 한 줄에 그치는 20색 크레파스였다. 불평을 해 대는 우리들에게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셋이 돌아가면서 쓰라고, 학용품도 아껴 써 버릇해야 나중에 잘 산다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디 어머니의 말이 맞는지 두고 보자. 시집가서 내가 못 살기만 해 봐라.'하고. 서로 미술 시간이 겹치는 날이나, 크레파스를 받으러 갔으나 못 만나는 날은 정말 막막했다. 지금도 '크레파스'하면 황급히 교실 복도를 뛰어가는 내 모습부터 생각난다.
크레파스로 그리는 그림이 좋았다. 조금만 부주의해도 물감이 엉뚱한 곳으로 번지거나 붓을 잡은 손에 힘 조절하기가 힘든 수채화에 비해, 크레파스 그림은 나를 재촉하지 않으면서 도화지 크기 백배쯤은 자유를 주었다. 내가 원하는 대로 가고 멈추고 드러눕는 크레파스야말로 확실한 내 편이었다. 나는 풍경보다 사람을 즐겨 그렸다.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으면서도 쉽게 섞이지 못하는 내 마음을 크레파스는 착실하게 표현해 주었다.
크레파스는 자신의 색 위에 다른 색을 받아들임으로써 새로운 색을 만들어 낸다. 보라가 없을 때는 빨강과 파랑이 만나 걱정을 나누고, 초록이 없으면 노랑과 파랑이 서로 힘을 합친다. 노력을 하면 20색 크레파스만 갖고도 색상이 풍부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걸 나에게 보여 주었다. 어쩌다 물컵을 엎질렀을 때에도 크레파스 그림은 물기를 툭툭 털어 내며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었다. 더러 슬픈 일이 생기더라도 마음까지 푹 젖어선 안된다는 말을 하려는 듯했다.
미술 시간을 마치고 크레파스를 제자리에 정리하는 시간도 좋았다. 열심히 뛰어다닌 크레파스의 몸에 남아 있는 온기를 느낄 때면 가슴이 뭉클했다. 머리에 다른 색을 잔뜩 뒤집어 쓴 크레파스는, 때 묻은 점퍼를 입고 귀가하는 아버지를 생각나게 헀다. 약주 기운이 있는 아버지를 부축해 이부자리에 눕혀 드리고 나면, 아버지는 이내 코를 골며 잠이 드셨다. 크레파스들도 그렇게 달게 한숨 잘 것 같았다. 나란히 누운 크레파스 위로 하얀 종이를 덮어 주고 크레파스 뚜껑을 닫아 주는 순간의 고요함이 나는 좋았다.
그 무렵 우리 집 식구들은 한 방에서 같이 잠을 잤다. 누운 모습이 한 통의 크레파스였다. 우리 육남매의 색도 제각각이었다. 언니는 우리들의 밑그림을 그려 주는 노랑이었던 것 같다. 밑그림이란 표현하고 싶은 형사이의 바깥 선을 그려 주면서 전체적인 구도를 잡아 주지만, 그림이 완성된 후엔 짙은 색에 묻혀 버린다. 그렇다고 그 선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지금도 그 노랑 선은, 우리들 마음이 선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지켜주고 있는 것이다. 언니에 비하면, 나는 아마 연두와 초록이었지 싶다. 새잎을 내고 다시 무성한 잎으로 키우기 위해 우리 집의 녹색 계열을 다 끌어다 썼던 것 같다. 어머니는 어떤 색이었을까. 자신의 색을 버린 채 그저 자식의 바탕색으로만 한 평생 살아오신 것 같다. 어머니를 생각할 때면 자주 내 눈에 차오르는 눈물로 미루어 볼 때, 어쩌면 눈물과 같은 색이 아니었을까 짐작할 뿐이다.
어제는 사물함을 정리하다 아들의 이름이 적힌 크레파스를 발견했다. 두꺼운 책 밑에 놓여 있는 바람에 통이 조금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얼른 크레파스를 꺼내 들었다. 같은 부서에서 일하는 직장 선배가 사사건건 시비조에다 노골적인 구박을 해 댄다는 아들의 말이 생각나서였다. 아들의 마음도 그렇게 일그러져 있을까봐 걱정이 되었다. 아들이 이 크레파스를 마지막으로 쓴 게 언제였을까 생각하며 천천히 뚜껑을 열었다. 몇 개의 자리는 비어 있었고, 몇 개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듯이 보였으며, 나머지 것들은 크기가 제각각이었다. 크레파스를 싼 종이가 찢어진 것, 종이가 아예 벗겨진 것, 두 동강이 난 것, 너무 닳아버려 이젠 손에 쥘 수도 없는 것 등, 그 모든 것이 같은 통에 들어 있었다.
크레파스처럼 우리도 자신만의 색을 갖고 태어난다. 아무리 비슷하다고 해도 절대 똑같을 수는 없다. 그동안 나는 나 자신의 색이 가장 좋다고 우기면서 살아온 게 아닐까. 다른 색의 크레파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흉보거나 업신여긴 적도 많았던 것 같다. 혹시 아들이 나를 그대로 닮은 것은 아닌지.
아들도 크레파스처럼 제 몸에 닳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다른 색과 잘 어우러지면서, 세상이라는 도화지 위를 열심히 뛰어다녔으면 한다. 부디 크레파스 병정처럼 씩씩하고 당당하게.
착지(着地) / 정성화
갖다놓은 보리차 한 병이 어느새 다 비워져 있었다. 내가 다가서는 기척을 느꼈을 텐데도 남편은 벽을 향해 누운 채 아무 말이 없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적요였다. 그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가장 멀리 가 있는 듯이 보였다. 같은 방에 있으면서도 그와 나 사이의 거리가 천리도 더 되는 것 같았다.
아침 식사를 하던 그가 슬며시 수저를 내려놓으며, 아무래도 이번 시험도 제대로 못 본 것 같다고 했을 때, 나는 그저 수험생 특유의 엄살이려니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얼굴에는 불안한 기색이 짙어져갔다. 배가 고프지 않다며 점심을 거르더니 급기야 안방 벽 아래에 길게 누워버린 것이었다. 남편만을 이 세상에서 오려내어, 거기 침대 위에 얹어둔 듯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몸 위로 누군가 절망이라는 소금을 켜켜이 뿌려둔 것 같았다.
그가 외롭고 힘든 승선생활을 이십 년 이상 할 수 있었던 것은 마음속에 도선사가 되려는 꿈이 있어서였다. 도선사란 부두로 입항하거나 부두에서 출항하는 선박을 안내하고 접안과 이안을 지휘하는 사람이다. 육천 톤 이상의 선박에서 오년 이상을 선장으로 근무한 사람들만이 응시할 수 있는 시험이기에, 그 시험을 치러온 사람들은 대개 사십대 중반을 넘긴 나이에 있다. 집 주소와 집 전화번호도 가물가물해 지는 나이, 냉장고 문을 열고도 자신이 뭘 꺼내러 왔는지 한참 생각해 봐야 하는 나이. 팽팽하던 자신감도 오래 입은 팬티 고무줄처럼 어느덧 느슨해지고, 끓어오르던 삶의 의욕마저 잠잠해지기 시작하는 나이다.
무더운 칠월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그 시험을 치러갈 때마다 소매가 긴 옷을 꺼내 입었다. 자꾸 한기가 든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만 그런 게 아니라 많은 응시생이 그렇게 입고 오더라고도 했다. 한여름에 소매 긴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 온종일 벌벌 떨어가며 치는 시험이라니…
오랫동안 시험공부를 해온 그였기에, 제 때 원서나 내고 시험 치는 날짜만 놓치지 않는다면 재깍 붙을 시험이려니 생각했다. 그러나 도선사라는 열매는 그리 만만한 게 아니었다. 그가 두 번째 시험을 치러갈 때만 해도 나는 여유 있게 웃으며 말했다.
“보소, 장대 길이가 좀 짧다 싶거들랑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보소. 그러면 안 되겠능교.”
그의 장대가 짧았던지 아니면 휘두르는 힘이 약해서였는지, 그는 다시 낙방을 했다. 그리고 며칠 뒤 그는 짐을 꾸려 바다로 되돌아갔다.
합격자 명단에서 그의 이름을 지운 이는 어쩌면 바다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아직은 바다가 그를 놓아주려 하지 않는다고. 그러는 동안 내 마음 속에 한 가지 믿음이 생겨났다. 그를 위한 열매가 아직 그대로 매달려 있을 거라는 믿음이, 성실한 그를 위해 신(神)이 어느 가지 끝엔가 까치밥 하나쯤 남겨두었으리라는 믿음이.
그가 오랫동안 고생하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나는 단 한 번도 그에게 도선사가 안 되어도 좋으니 더 이상 고생하지 말라고 한 적이 없다. 그의 충실한 러닝메이트가 되겠다고 약속은 했었지만, 사실 나는 그를 돕는 협력자가 아니었다. 나야말로 남편을 입시 감옥에 감금해둔 채 절대 풀어주지 않은 냉정한 형리였던 것이다. 오히려 그가 그 감옥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할까봐 오며가며 철저히 감시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감옥 안의 그가 몸을 비트는 기미라도 보일라치면 나는 얼른 감옥 안을 향해 속삭여대곤 했다, 당신은 곧 풀려나게 될 거라고. 이를테면 ‘희망 고문’을 했던 셈이다.
절망이라는 나무는 하루 만에 다 자라는 나무였다. 아침나절만 해도 어린 줄기를 보이던 나무가 저녁 무렵에는 어느새 온 집에 절망의 가지를 드리울 정도가 되었다. 나는 그 가지에 열린 회한의 열매를 보았다. 그가 만일 이번에도 낙방을 한다면 아무래도 나의 박덕함 때문이리라. 내가 그에게 너무 큰 부담을 주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나는 보았다, 잔뜩 모양이 일그러진 채 시퍼런 빛을 띤 분노의 열매를. 보상 받지 못한 노력, 그리고 열외로 밀려났을 때의 소외감이란 것도 오래 묵혀두면 분노로 변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지에 매달려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체념의 열매들, 나는 그 앞에서 다시 목이 메었다. 나도 그냥 누워버리고 싶었다, 그 절망의 나무 아래에.
두려움과 막막함이 만드는 격자무늬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밤이었다. 날이 밝으면 시험 결과가 나온다고 했다. 오랫동안 이어져온 그의 고생을, 물고기 입에서 뽀글대며 올라오는 기포 몇 방울마냥 그냥 날려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상처 입은 한 마리 짐승처럼 웅크린 채 눈도 뜨지 않는 그를 다시 바다로 내보낼 수는 없었다.
상을 펴고 정한수 한 그릇을 올렸다. 집에 있는 과일도 모두 꺼내어 씻은 뒤 상에 올렸다. 그리고 나는 그 앞에 엎드렸다. 정한수 한 그릇보다 더 많았을 그의 땀을 부디 기억해달라고 신에게 빌었다. 붉은 과육 속에 또렷이 들어있는 씨처럼 그의 오랜 노력이 부디 결실을 맺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 사람도 남들처럼 땅을 디디며 살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신이 원하신다면 나는 그를 위해 기꺼이 노둣돌이 되겠노라고 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와 한솥밥을 먹고 그와 한 이불속에 잠들기를 감히 바란 그 ‘죄’를 용서하시고, 이제 제발 저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떼를 썼다.
쉼 없이 절을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양쪽 허벅지가 바위처럼 단단하게 굳어져왔다. 이제 그만 조르고 바위처럼 침묵한 채 있어보라는 신의 말씀 같기도 했다.
다음날 아침,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누군가 그의 낙방을 위로하기 위해 한 전화일 듯싶었다. 망설이다 수화기를 들었다.
“여기 해양수산부입니다. 축하드립니다. ……”
그것은 이제 그가 땅 위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였다. 망망대해가 아닌 땅위에서 자동차도 보고 사람도 보고 꽃과 나무도 마음껏 보며 살아도 된다는 허락이었다.
고맙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합격을 알려준 그 사람이 고마웠고, 또록또록한 음성을 무사히 내 귀까지 전해준 우리 집 전화기도 고마웠다.
전화기를 든 채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어느새 거실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의 두 다리가 먼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동생을 업고 / 정성화
박수근의 그림 ‘아이 보는 소녀’를 보고 있다. 이마를 일직선으로 가로지른 상고머리에다 까맣게 그을린 얼굴의 소녀는 동생을 업은 채 해맑게 웃고 있다. 앞코가 둥그스름한 까만 고무신이 소녀가 입고 있는 무명치마와 어우러져 더욱 소박한 모습이다. 소녀는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내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동생을 연이어 낳아주셨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나의 동생은 넷으로 불어났다. 동생이 자꾸 생긴다는 것은 한창 놀고 싶어 하는 내 또래의 아이들에게 그리 신나는 일이 아니다. 나가 놀 수 있는 자유가 이분의 일에서 사분의 일로, 다시 팔분의 일로 줄어든다는 의미다.
우리 집은 아기를 길러내는 협동조합이었다. 언니는 어머니와 함께 기저귀 빨래를 했으며, 나는 아기가 목을 가눌 수 있을 때부터 아기를 업어 재우는 일을, 내 아랫동생은 기저귀를 개는 일이나 방청소를 도왔다. 아기도 어른처럼 가만히 누워서 이 생각 저 생각에 잠겨 있다가 조용히 잠이 든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꼭 등에 업혀서 바깥나들이를 저하고 싶은 만큼 한 다음에야 동생은 잠이 들었다.
업힌 자세를 투시도로 그리면 거의 앉은 자세에 가깝다. 그런데도 방바닥에 눕기보다 굳이 등에 업히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뭘까. 어른이 되면 아무리 잠이 온다 해도 눕지 못하고 앉은 채로 선잠을 자야할 때가 많다는 사실을, 아기가 미리 알고서 일찌감치 연습을 해 두려는 것은 아닐 텐데 말이다. 등에는 방바닥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음을 아기도 본능적으로 느끼는 모양이다. 등 너머로 전해져오는 숨결과 체온에서,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의 편안함을 다시 느껴보려는 것은 아닐까.
동생을 업고 집을 나서면 갈 데가 별로 없었다. 동생의 잠을 탁발(托鉢)하러 나서는 그 일이 나에게는 꽤 힘들게 느껴졌다. 집 주위를 빙빙 돌다가 골목에 피어있는 분꽃의 개수를 헤아려보기도 하고, 옆집 옥상에 널린 빨래가 몇 개인지 세어볼 때도 있었다. 이따금 들려오는 엿장수의 가위 소리가 우리 집 골목의 정적을 더욱 깊게 하고 있었다.
좀 너른 공터로 나오면 친구들이 모여서 놀고 있었다.
“이 강산 침노하는 왜적의 무리를, 거북선 앞세우고 무찌르시니… ”
노래를 부르며 나풀나풀 고무줄을 넘거나, 바닥에 석필로 하얀 금을 그어놓고 사방차기(돌차기)를 하고 있었으며, 때로는 시원한 그늘에 모여 앉아 공기놀이나 소꿉놀이를 하기도 했다. 그럴 때는 동생을 재우는 것보다, 뛰어 놀고 싶은 내 마음을 재우는 것이 더 힘들었다. 내게 있어 ‘자유’란 등에 아무것도 업지 않은 홀가분함을 의미했고, 그 때 만큼 자유가 부럽고 빛나 보인 적도 없었다.
친구들이 어울려 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으면, 등에 업힌 동생이 이내 포대기 속에서 몸을 뒤틀었다. 한 자리에 오래 서 있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언젠가 고무줄놀이를 너무 하고 싶어서, 옆에 있던 빈 사과상자에다 어린 동생을 담아놓고 아이들이랑 고무줄놀이를 했다가, 누군가 어머니에게 일러주는 바람에 단단히 혼이 난 적도 있다.
동생을 업어 재우는 것 못지않게 잠든 동생을 내려놓는 것도 힘들었다. 잠이 깊게 들었다 싶어서 집에 돌아와 동생을 방바닥에 살포시 내려놓는 순간,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다시 팔팔하게 되살아나는 수가 많았기 때문이다. A/S(After service)는 전자 제품에만 있는 게 아니다. 나는 다시 동생을 업고 밖으로 나와야 했다. 그 때, 지나가던 이웃집 아주머니가 “아이고, 덩치도 작은 게 제 동생을 잘도 업어주네” 라고 했을 때, 공연히 서러움이 북받쳐와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던 기억도 있다.
먼 데 산을 보면, 산이 산을 업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산의 등 뒤에 납작이 엎드린 산은 살풋 잠이 들었는지 아슴해 보인다. 산등성이가 아름다워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림 속 아기 보는 소녀의 어깨선 또한 부드러운 산의 능선을 닮은 듯하다. 그래서인지 소녀는 모든 생명체를 넉넉히 품어내는 산의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동생을 업고 있으면 동생의 살 냄새, 새근거리는 숨소리, 동생의 꼼지락거림, 그리고 통통한 두 다리의 감촉 등, 그 모든 것이 나의 등에 그대로 전해져 왔다. 등에 느껴지는 체온이 여느 날 같지 않다거나 심하게 보챈다 싶으면, 대개 그 뒷날 병원에 데려갈 일이 생겼다. 바로 밑의 동생을 빼고는 다들 내 등 뒤에서 옹알이를 연습했고, 내 등에 오줌을 싸기도 했으며, 잠투정을 하느라고 내 뒷머리 가락을 쥐어뜯으면서 손아귀의 힘이 세어져 갔다. 막냇동생이 저 혼자 잘 걷게 되어 더 이상 업히지 않으려고 내 등을 밀쳐내었을 때, 나는 웬일인지 해방의 기쁨보다는 서운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동생을 업었을 때의 느낌은 나의 등에 그대로 내장(內藏)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내 아이를 낳아 처음으로 등에 업었을 때, 그 느낌은 한결 증폭되어서 내게 되돌아왔다. 아이의 숨과 나의 숨이 포개지면서 살과 살이 함께 호흡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어딜 가든지 내 아이를 업고 다녔었다.
서양에는 우리와는 달리 업고 업히는 문화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외국의 전쟁영화를 보면, 부상자라 해도 업어 나르는 게 아니라 들것에 싣던가 아니면 겨드랑이를 부축하여 질질 끌고 가는 수가 많다. 업는다는 것은 한 생명체의 무게를 고스란히 내가 감당하겠다는 의미이며, 한 사람의 걸음으로 둘이 나아가겠다는 뜻이다. 부모가 아이를 업어주고, 형이 아우를 업어주고, 다 큰 자식이 노모를 업는 풍습은 우리 문화에 있어 하나의 아름다운 결을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미 독수리는 새끼를 그냥 업어주는 게 아니라고 한다. 독수리는 새끼를 등에 업고서 높은 곳으로 올라간 뒤 사정없이 아래로 떨어뜨린다고 한다. 그러면 새끼는 살기 위해 날개를 너풀거리게 되고, 어미 독수리는 새끼가 땅에 닿기 전 아래로 내려와서는 다시 업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어미의 등줄기에 엎드려 어미의 가뿐 숨결을 느낄 때, 새끼 독수리는 더 힘찬 날갯짓을 다짐하게 될 것이다.
아이들의 날개에 이젠 제법 힘이 올라 나의 등을 찾지 않게 되면서, 나는 자꾸만 등 언저리가 허전해져 왔다. 등이 먼저 ‘빈 둥지 증후군’을 앓는 듯 했다. 그 때 누군가 내게 문학을 공부해보라고 권했다.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감겨오는 지금의 자유를 굳이 마다할 이유가 있겠느냐고 가슴이 속삭였을 때, 뒤쪽의 등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듯 했다. 문학이란 등짐을 질 때는 스스로 그만한 무게를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고 등은 내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오늘도 글 한 편을 업고 대열에 끼여서 가고 있다. 지금 업고 있는 이 글을 푹 재울 수 있을지, 그리고 방바닥에 제대로 내려놓을 수 있을지 잔뜩 걱정을 하면서.
벽보 붙이는 밤 / 정성화
집 나간 강아지를 찾는다는 벽보가 어느새 치워지고 대신 그자리에는 다른 벽보가 붙어 있었다.
"칠년 전 반여동 S아파트에 살았던 영어 선생님을 찾습니다."
이번에는 강아지 대신 사람을 찾는구나 생각하며 무심코 사연을 읽어 내려갔다. 한순간 내 귀가 저절로 쫑긋 섰다. 그것은 분명 나를 찾는 벽보였다.
벽보에 적힌 연락처로 바로 전화를 했다. 짐작한 대로 내가 이전에 가르쳤던 학생의 어머니였다. 아이가 부산 시내의 중학교에 교사 발령을 받았다는 기쁜 소식을 옛 선생님께 꼭 전하고 싶었다면서, 정확한 주소를 몰라 선생님이 살고 있다는 아파트 게시판에다 벽보를 붙이게 되었다고 했다. 벽보를 만들어 여기까지 들고 와 붙인 그분의 마음을 생각하니, 내가 한 것에 비해 너무 과분한 사랑을 받는구나 싶었다. 벽보는 어느듯 내 마음을 싣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양탄자가 되었다. 기분 좋게 속이 울렁거렸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나는 벽보를 손에 꽉 움켜쥐었다.
잊어버리고 싶은 벽보도 있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방학을 기다리지 않는 아이였다. 방학이 되면 나는 늘 서울에 있는 외삼촌댁으로 보내졌다. 많은 식구에 한 입이라도 덜어보기 위해 내린 부모님의 결정이었다. 마치 배추를 솎어내듯 나를 '솎아내는'부모님이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안 가겠다고 떼를 쓸 분위기도 아니었다.
어머니는 가끔 늦은 밤에 서울로 전화를 하셨다. 외숙모와 통화를 한 뒤에는 이어서 나를 바꾸게 했다.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늘 목이 메여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외숙모가 들을까봐 그러는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아무 소리 말고 잘 붙어있어야 한데이. 엄마가 데리러 갈 때까지는. 알겠제."
나는 어머니가 서울에 붙여놓은 벽보였다. 하얀 쌀밥에다 쇠고기 장조림을 먹고 또 매일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잠을 자면서도 나는 집에 돌아갈 날만 기다렸다. 남루하고 좁아터지고 고함소리가 가득한 우리집이 그리워, 밤이면 아무도 몰래 눈물에 젖는 벽보였다.
벽을 등에 지고 엎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벽에서 떨어져서는 안 되는 게 벽보다. 풀기를 잃으면 찢어지기 쉽고, 바람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을 허락하면 이내 벽에서 떨려 나가는게 그것의 운명이다. 어머니가 나를 '떼러' 올 때까지. 나는 그때 비교적 착실한 벽보 생활을 했다.
'잘 붙어 있어야 한다'는 어머니의 말이 문득 떠오를 때가 있었다. 내 마음이 심하게 펄럭거리고 있을 때였다. 고등학교 시절 딴생각을 하며 방황하고 있을때, 직장생활이 힘들어 그만 두고 싶었을 때, 남편과 크게 다툰 뒤 어디론가 휑하니 가고 싶었을 때 등. 어쩌면 어머니의 그 말에 배어 있는 간절한 모성이 이제껏 나를 지켜온 게 아니었을까 싶다.
세상이란 벽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나 또한 한 장의 벽보인 셈이다. '나'라는 벽보로 인해 이 세상 벽의 표정이 어두워지거나 벽의 한숨이 더 늘어나는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도, 내게 드리운 모든 것이 헐값의 운명 같다는 느낌이 들 때면 서슴없이 벽에다 대고 내 머리를 쿵쿵 찧는 나는 그야말로 '못난 벽보'다.
내가 울고 화내고 애태우는 것은 나의 벽보가 남들의 것보다 더 번듯하길 바라서일 것이다. 내 마음이 어지러운 것은 내가 등을 대고 있는 벽이 더 따뜻하고 아늑하길 바라서일 게다. 모든 게 벽보에 대한 욕심 때문이라 하겠다.
벽은 한때 햇살로 가득했다가 조금씩 그늘이 지고 때가 되면 어둠에 묻혀버린다. 그것이 벽의 하루다. 이 세상에 온종일 햇살이 비쳐드는 벽이란 원래 없는 법. 그래서 해가 다시 뜰 때까지는 어떤 벽보든지 벽의 냉기를 묵묵히 견뎌내어야 한다. '견딘다는 것'은 쓸쓸한 일, 혼자라는 것을 전제로 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곧잘 운명이 가혹하고 비정하다며 수군댄다. 그러나 끝까지 참고 견디는 자에게는 운명도 무심치 않으리라고 나는 믿고 싶다.
자신의 벽보 한 장을 제대로 만들기 위해 고심하고, 죽을 때까지 끌어 안은 채 고치고 손질하다 가는 게 우리네 인생인 것 같다.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 곧장 떨어지고 말 벽보인데도 말이다. 다들 자신의 벽보에 대한 집착 때문에 다른 이의 벽보에는 따뜻한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또 이 세상의 아름다운 벽을 제대로 둘러볼 새도 없이 허겁지겁 살다 가는 것은 아닌지.
이 세상에 내가 진정 붙이고 싶은 벽보는 무엇인가. 나는 손때가 묻은 벽보 앞에서 나는 나를 보려고 애쓴다. 그러면서 너풀거리는 나의 귀통이에 다시 풀칠을 하고, 찢겨지 부분에는 종이를 덧대어 바르며, 지워진 글씨는 다시 선명하게 써 넣는다. 그래서 벽보 붙이는 밤은 조금도 졸리지 않는다.
국제 전화를 걸어온 남편이 대뜸 말한다.
"어 요즘은 집에 잘 붙어있네."
은근슬쩍 내게 풀칠을 하고 있다.
버드나무 / 정 성 화
장터 한복판에 점포도 없는 가정집이 있다는 것은 싱거운 일이다. 왁자지껄한 시장바닥에 양쪽 귀를 틀어막고 앉아 있는 모양새의 집이 바로 우리 집이었다. 그래서 닷새에 한 번씩 장날이 되면 시장판으로부터 온갖 실랑이와 악다구니가,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와 육두문자 석인 욕지거리가 방안까지 차고 들어왔다.
우리 집이 '버드나무집'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집 앞 양쪽에 지붕 높이 만한 버드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방바닥에 누워 창문을 올려다보면 버드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천막을 붙들어 맨 줄에 스칠려서 군데군데 나무껍질이 벗겨지고 윗쪽으로 갈수록 성한 가지가 없는 나무였다. 때로는 매어놓은 줄이 팽팽해서 나무는 중심을 잃은 채 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기도 했다.
나무는 우리가 그 집으로 이사오기 전부터 있었던 것 같았다. 나무아래의 둥치 부분이 빤빤질한 게 처음에는 왠지 되바라져 보였는데, 그것은 장터 사람들이 자주 기대어 앉은 탓이었음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장터마다 새로 뿌리를 내려야 하는 장꾼들의 삶이란, 가지를 꺽어 땅에 꽂아놓기만 해도 얼마 안 있어 뿌리를 내리는 버드나무를 닮아야 했다. 그 바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가늘지만 부러지지 않는 버드나무 가지가 되어야 했다. 그래서인지 거칠게 갈라져 있는 버드나무 껍질을 보게 되면, '장돌뱅이' 그들 삶의 질곡을 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바람이 거세게 부는 날, 버드나무는 천막이 날아갈까 봐 천막주인보다 더 안절부절 못했다. 또 무더운 날에는 얼마되지 않는 그늘로 장터사람들을 불러들이기도 했다. 버드나무는 그렇게 장터 식구가 되어 있었다.
우리집 앞에는 고구마장수가 늘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뙤약볓에 그을려 고구마 보다 더 짙은 구리빛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한 손에 대저울을 들고 있었는데 장사가 그리 잘 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손님이 없을 때면 자기 혼자 그 저울을 들고서 접시에 추를 하나 얹어놓고 막대눈금을 맞추어보고 또 추를 하나 더 얹고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거기 있는 쇠 저울추를 다 합쳐도 잴 수 없을 듯이 무더워 보였다. 어둑어둑해질 무렵 그는 웅크리고 앉은 채, 팔지 못한 고구마 푸대 자루에다 도로 주워 담았다. 자루 속으로 우두둑 고구마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고구마 자루는 금세 그의 덩치만 해졌다.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우두둑 소리를 내는 듯한 우리 삶의 무게를 생각했다. 삶이란 도대체 얼마나 무거운 것이기에 하루를 짊어지기에도 저토록 힘들어 보이는 것일까.
삶이란 아무 짐 없이 가볍게 나서는 산책일 수는 없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이 되어서야 버드나무는 장꾼들의 악다구니에서 풀려났다. 긁힌 자국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가지를 한 번 털어 보이고는 이내 저녁바람을 탔다. 마치 저녁무렵 놀이터에 나와 아무 걱정없이 그네를 타는 아이처럼, 그때 버드나무에게 무슨 말인가 해보라고 했더라면 버드나무는 아마 제 몸을 배배 꼬면서 "이 정도는 괜찮아요" 라고 말했을 것이다.
부러진 버드나무를 봐도 그렇다. 다른 나무보다 훨씬 빨리 수액이 굳어지고 생채기가 아문다. 그것이 바로 버드나무의 힘이 아닌가 싶다. 부드럽게 가닥가닥 풀어지면서도 껍질 속으로는 무섭도록 내공內功을 쌓아가는 나무다. 삶의 가지 하나만 부러저도 그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버리지 못한 채, 부러진 가지 끝만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 자신에 비하면 나무는 참으로 의연하게 제 몫을 꾸려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시장바닥을 비질하는 소리와 함께 장터에도 어둠이 내렸다. 그러면 나는 우리 집 버드나무가 오늘 장날에도 무사한가 걱정이 되어 슬며시 나가 보곤 했었다. 그때의 습관 때문인지 요즘도 어디서든 버드나무를 보게 되면 반가워 하며 나무를 쓰다듬는 버릇이 있다.
시인 정호승은 그의 시에서 '껴안고 있으면 나무가 되는 사람과 결혼하라'고 했다. 사람도 그처럼 나무를 닮을 수는 없는 걸까. 나무처럼 베풀고, 나무처럼 견디고, 나무처럼 제자리를 지킨다면 우리네 삶도 그렇게 신산(辛散)하지는 않을 텐데.
사람의 몸은 신기하게도 몸속에 어떤 성분이 부족해지면 그 성분이 들어있는 음식물 생각이 간절해진다고 한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버드나무에 대한 기억을 촘촘히 짚어내고 있는 것도 내게 그런 버드나무 인자(因子)가 필요하기 때문이 아닐까. 누군가가 나의 가지를 필요로 하고, 나의 그늘을 아쉬워하며, 나의 듬직한 등치에 기대고 싶어 나를 찾고 있는 게 아닐까.
가지가 꺽기어도 노래를 부르는 버드나무, '삘릴리리 삘리리' 버들피리가 되어 소리 공양(供養)까지 바친다. 나의 가지 속에는 정녕 어떤 노래가 들어 있을까.
버드나무 속에는 열(熱)을 내려주고 염증과 통증을 완화시켜주는 아스피린 성분도 들어 있다고 한다. 그 즈음 내가 거의 병을 앓지 않고 지냈던 것은 그 버드나무가 내 방 앞을 언제나 지키고 서 있었기 때문일 게다. 나 역시 정말 그런 성분까지 갖추고 있어야 좋은 버드나무가 될 수 있을 텐데.
나는 지금 가벼운 감기를 앓으며 마음속으로 그때 그 버드나무를 쓰다듬고 있다.
버티고(Vertigo) / 정성화
아이섀도우를 바르는 손끝이 떨렸다. 눈썹을 너무 치켜 그리면 팔자가 드세 보인다는 말이 생각나서 다시 눈썹 끝을 얌전히 주저 앉혔다. 헤어스타일은 또 어떻게 하나, 미용실에 가면 한 오 년쯤은 젊어 보이게 해 줄텐데…. 망설여졌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든 부분에 신경이 쓰였다. 얼굴은 얼굴대로 굵은 허리는 허리대로 여기는 어떻게 할 거냐며 한꺼번에 내게 보채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이 모든 휘둥거림은 며칠 전 받은 전화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거기 정성화씨 댁 맞습니까?”
“네, 그런데 누구세요?”
“저… H입니다.”
그 순간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일제히 날개를 펴고 날아올랐다.
그는 한동안 내가 눈부시게 바라보았던 사람이다. 나의 중학교 동창이면서 내가 강의를 들었던 어느 교수님의 동생이었던 그 사람. 그는 늘 유쾌했고 자신감에 넘쳤으며 세련된 매너에 유복한 가정환경까지 갖춘 부러운 존재였다.
그러나 많은 여학생이 그에게 다가서는 걸 보고, 나는 일찌감치 그에 대한 내 마음을 접어버렸었다. 담백한 말투와 태연한 행동으로 그를 견제하며, 친구라는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떼지 않았다. 나에게 향한 그의 마음에도 얼마쯤 핑크빛이 번지기 시작했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도 나는 애써 모른 척 했다.
간간이 그에 대한 소식이 들려왔다. 내 여고 후배와 결혼했다는 소식에 조금은 서운했으나, 아들만 둘에 삼십대의 나이로 대기업의 이사가 되었다는 소식에는 오히려 무덤덤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십사 년 만에 느닷없이 걸려온 그의 전화 앞에서 나는 균형을 잃고 기우뚱거렸다. 말을 더듬으며 간신히 대답 정도만 하고 있었다. 그는 친구 편에 내 연락처와 근황을 알게 되었다며 부산에 가면 한번 만나볼 수 있겠느냐고 물어왔다.
“그래요, 친구니까 만날 수 있지요.”
라고 대답했다. 차 한 잔 나누는 정도쯤은 그 누구라도 이해해줄 것 같았다. 전화를 끊고 달력의 약속 날짜에다 얼른 별표(★)를 해두었다. 안방에 들어갈 때마다 나도 모르게 그 별이 잘 있는지 먼저 살펴보게 되었다. 그 별은 나의 마음에 어떤 생기를 부어넣어 주고 있었다. 그를 만난다는 설렘에 며칠이 가뿐하게 지나갔다.
약속한 날 아침, 무사히 해가 뜨고 날이 밝아왔다. 화장대 앞에 앉아서도 연신 시계를 보았다. 옷을 차려입고 차를 몰아 해운대까지 가는 동안 줄곧 그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풋풋하던 그 얼굴에
중후한 멋을 곁들인다면 어떤 모습일까, 아니면 여전히 동안(童顔)의 모습일까 하며. 어느새 호텔 로비 앞이었다.
커피숍 창가 자리에서 한 남자가 일어서며 내게 손짓을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옛날의 H가 아니었다. 갸름하던 얼굴은 둥글넓적해졌으며, 어느새 희끗희끗한 머리칼에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는 양복 상의의 앞단추는 곧 튕겨져 나올 듯이 보였다. 예전에 내 가슴을 태우던 그의 모습은 어디로 다 가버린 걸까.
하늘 색 와이셔츠를 산뜻하게 받쳐 입은 그의 상의가 왠지 눈에 익었다. 지난겨울 남편과 내가 백화점 매장에서 몇 번이나 쥐었다 놓았다 했던 바로 그 옷이었다. 비둘기의 목덜미같이 윤기가 자르르한 벨벳 소재의 그 옷을 남편은 꽤 마음에 들어 하며 서너 번이나 걸쳐보았었다. 그러나 남편은 계산대로 걸어가며 가격표를 확인해 보고는 그냥 말없이 옷을 제자리에 걸어두고 나왔었다. 그 때 그 모습이 잠깐 내 마음을 흔들고 지나갔다.
외모는 변해 있었지만 듣기 좋은 바리톤 음성만은 여전했다. 그는 나에게 아마 여자 동창생 중에서 제일 나이가 안 들어 보일 거라며, 아직도 선생님의 이미지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했다. 동창들 소식과 은사님에 대한 얘기를 했고, 직장 생활과 가족에 대한 얘기도 두루 나누었다. 이제 남은 얘기는 그와 나 둘 사이의 옛 얘기뿐인 듯싶었다. 잠시 말이 끊어졌다. 그가 뭉그적대며 시간을 끌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무슨 얘기든 어서 해보라는 눈짓을 했다.
그는 이내 여유 있는 표정을 지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동창생 한 명이 위암으로 투병중이면서도 가정 형편이 어려워 수술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서, 그의 수술비 마련을 위해 동창회에서 기금을 모으는 중이라고 했다. 동창회장으로서 부탁하는 것이니, 내가 부산지역의 동창회를 맡아 연락을 좀 해 달라는 거였다. 그 순간 가슴속에서 헛바람이 조금씩 빠지면서 내 속을 서서히
쭈그렁 망태기로 변해갔다.
전투기 추락사고 중 상당 부분이 버티고(Vertigo:비행착각)라는 착시 현상 때문이라고 한다. 자신과 비행기의 자세를 착각하는 바람에, 바다 위를 비행하면서도 바다를 하늘로 착각하여 거꾸로 날아간다는 것이다. 고중력 상태에서 수평 감각을 잃은 탓이다. 내게도 그런 버티고 현상이 일어난 셈이다. 기수를 급하게 돌려야 했다.
“그래요, 좋은 일 하는데 도와야지요.”
차르르 내려와 눈썹에 걸리는 앞 머리카락의 감촉이 느껴지는 순간, 헤어 드라이값 육천 원 생각에 속이 쓰렸다. 그가 내민 동창생 명단을 얼른 가방에 집어넣었다. 가방을 움켜쥔 손바닥에서 땀이 비질비질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가 얼른 시계를 보며 조금만 더 있다 가라고 했다. 집사람과 같이 내려왔다며 곧 커피숍에 오기로 했으니 어디 가서 점심식사라도 함께 하자는 것이었다. 마지막 한 방에 완전히 비틀대는 복서(Boxer)의 모습이 떠올랐다.
벌떡 일어나고 싶어 하는 엉덩이를 억지로 주저앉히며 나는 간신히 말했다.
“아니 됐어요. 부부끼리 오붓하게 드세요, 모처럼 부산에 왔을 텐데.”
부산은 어디 어디가 가볼 만하냐는 그의 말에, 나는 닥치는 대로 마구잡이식으로 대답을 해주었다. 괜히 성질을 내고 있었다.
나는 어서 그 자리를 뜨고 싶었다. 그 녀석의 아름다운 아내와 그 녀석의 행복에 겨운 모습을 보아낼 자신이 없어서였다. 그래 맞아, 사십대 여자는 까마귀도 뒤돌아보지 않는다고 했잖아. 나는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뒤에서 무언가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스타카토의 발자국 소리를 내며 커피숍을 걸어 나왔다.
“새됐어.”
누군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 했다.
어시스트 / 정성화
언니는 나보다 한 살 위였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 재수를 하는 바람에 나와 같은 해에 대학입시를 치르게 되었다. ‘대학예비고사’에서 좋은 점수를 받은 언니는 자신이 원하던 대학에 무사히 합격했고 입학할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장례를 마치던 날, 언니는 담담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니는 그대로 대학에 진학해라. 나는 일단 취직자리부터 알아봐야겠다. 대학은 나중에 가도 되니까.”
하루아침에 소녀가장이 된 언니는 식구들 앞에서 대학합격통지서를 구겨버렸고 그 길로 회사원이 되었다. 다섯이나 되는 동생들과 어머니를 위해 자신의 꿈을 포기한 언니는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어머니는 내가 중학교 영어교사가 된 것을 친척들에게 자랑삼아 얘기하곤 했는데, 나는 그때마다 언니 몫의 행운을 내가 가로챈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언젠가 내가 언니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느냐고. 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니가 언니였더라도 나와 같은 선택을 했을 거다.”
그때 내가 언니 입장이었더라면 어떻게 했을까. 아무래도 나는 내 욕심에 받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 같다. 어쩌면 나는 언니의 희생을 ‘어시스트(축구의 도움 골)’라는 명목으로 받아 챙긴 게 아니었을까. 언니는 내가 더 확실하게 슛을 쏘아올리고 반드시 ‘골인’ 시킬 수 있을 거라고 믿었기에 그런 결정을 하지 않았을까. 형만 한 아우가 없다고 하는 말이 정말 맞는 것 같다.
항아리에 참게를 여러 마리 넣어두면 밖으로 한 마리도 기어 나오지 못한다. 한 마리가 항아리 벽을 기어오르면 그 아래에 있던 참게가 바로 끄집어 내리기 때문이다. 인간의 심리도 마찬가지다. 서로 비슷한 처지에 있거나 동급의 대우를 받고 있을 때는 별문제가 없다. 그러다 어느 한 사람이 조금 나은 대우를 받거나 앞서 가기 시작하면 그들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른다. ‘내가 못하면 너도 못해야지.’ 하는 심리 때문이다. 남의 슬픈 일을 위로하기는 쉽지만 그의 기쁜 일을 내 일처럼 기뻐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래서 좋은 일이 있을 때 비로소‘ 사람’이 보이는 게 아닐까. 그러고 보면 ‘어시스트’는 아무나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몇 년 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들에게 함께 뛰고 싶은 동료 이름을 적어보라고 했더니, 박지성 선수가 단연 으뜸이었다고 한다. 언어도 서투르고 국적도 다른 그가 뽑힌 걸 두고 많은 사람이 의아해했다. 이유가 있었다. 그는 자기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는 동료에게 공을 패스함으로써 슛할 기회를 만들어 주는, 이른바 ‘어시스트’를 가장 잘 하는 선수였던 것이다.
야구와는 다르게, 축구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시합이 진행된다. 퍼붓듯 내리는 빗속에서 질주하는 선수들을 보고 있으면, 삶도 저렇게 토 달지 말고 날씨 탓하지 말고 살아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이전에는 축구를 볼 때 골을 넣는 선수에게 주목하곤 했는데, 요즘은 어시스트를 잘하는 선수를 눈여겨보고 있다. 개인의 영광보다 팀의 승리를 먼저 생각하는 선수가 더 진정성 있는 것 같아서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 선수의 어시스트 역시 다른 선수의 어시스트를 받아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된다. 삶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알든 모르든 많은 어시스트가 쌓여서 그 사람의 현재를 만드는 것 같다. 그동안 그의 가족뿐 아니라 친지들과 친구, 지인들까지 수시로 그에게 도움 골을 보내 주었을 것이다. 그것이 많은 위로와 용기가 되고 든든한 자산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 주위는 ‘어시스트’형보다 ‘골잡이’형이 더 많다. 자신의 골 결정력이 약하다 싶어도 웬만하면 골대 근처까지 공을 몰고 가서 슛을 하려고 든다. ‘내 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용의 꼬리보다는 뱀의 머리가 되라.’는 말을 들으며 자란 탓도 있을 터이고, 자식을 하나나 둘만 낳다 보니 어떻게든 내 자식을 선두에 내세우려는 부모의 욕심도 제법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골잡이가 제대로 된 슛을 쏘아 올리려면 선수들이 각자 포지션에서 열심히 뛰면서 많은 어시스트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어시스트가 많을수록 골인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축구공은 둥글어 누구에게든 굴러가고 누구에게든 슛할 기회가 주어진다. 골망 안에 꽂히지 못하고 빗겨가는 공이 많다 해도, 그래도 가끔 골망이 힘차게 흔들리는 순간이 있어 우리가 이럭저럭 삶을 버텨나가는 게 아닐까. 골대 안에 들어간 그 공도 누군가 나를 위해 양보해 준 어시스트임을 기억할 일이다.
첫댓글
정성화의 수필 <동생을 업고>와 <크레파스가 있었다>는
중학교 1학년 교과서에 수록된 작품이라고 합니다.
수필이란 문학 장르의 한 전범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들이라 할 수 있겠네요.
수필 공부의 텍스트로 삼아도 좋을 작품들이라 모아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