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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한산악연맹 경상북도 안동시연맹
안동산맥산악회 백두대간3기-제33차산행
◇ 산 행 지 : 조침령~한계령
◇ 산행코스 :
조침령(640m)--7.25km--북암령(940m)--3.1km--단목령(750m)--4.5km--오색삼거리--2.0km--점봉산(1,424.2m)--1.4km--망대암산(1,236m)--5.65km--한계령(920m)(약23.9km / 10시간)
진동삼거리➠조침령➠900.2m봉➠1,018m봉➠자연휴식년제안내판안부➠1,136m봉➠북암령➠875m봉➠단목령➠843.1m봉➠"점봉08"위치목➠오색사거리➠"점봉03"위치목삼거리➠점봉산➠망대암산➠쉼터➠1,157.6m봉➠분기점➠암봉)➠공원지킴터➠도로➠한계령 (약23.9km / 10시간)
◇ 출발일시 : 2018년 06월 02일 일요일 00시
◇ 출발장소 : 안동시청앞 우주고속관광 (강성운)
◇ 준 비 물 : 기본등산장구.여벌옷.도시락.충분한식수. 간식외목욕준비
◇ 참 가 비 : 70,000원
회비입금계좌 : 농협 352-1109-2878-83
예금주 :서 윤 경
◇ 연 락 처: 산행대장 강 순구 (☞010-3508-2033)
진행준비 김 영희 (☞010-9794-1500)
산행기록 신 종희 (☞010-4840-4461)
대간총무 이 재학 (☞010-9372-8866)
대간재무 서 윤경 (☞010-8797-1909)
※.안동산맥산악회는 등산을 좋아하는 친목동호회로서 비영리 모임입니다.
산행시 일일여행자 단체보험은 자필서명등의 까다로워진 절차로 별도로 가입하지 않으므로 필요하신분들은 개인적으로 여행자 보험에 가입하시길 바랍니다. 산행중에 발생되는 모든 책임은 본인에게 있으며 당 산악회에서는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아울러 단체 행동에서 벗어난 행동을 삼가해 주시길 당부드리며 항상 안전하고 즐거운산행하시길 바랍니다.
◇ 주요산행지소개
◆[조침령] 曺枕嶺 877m
강원도 양양군 서면 서림리와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를 연결하는 조침령은 원래 소금을 지고 오던 길이었지만, 일제 강점기 자원 수탈을 위해, 유신 당시에는 고관대작의 정원 조경수와 원석을 실어나르는 데 이용되었다고 한다. 증보문헌비고에서는 '떨어질 조阻', '가라앉을 침沈'자를 써서 험준하다는 뜻의 조침령(阻沈嶺)이라 하였으나, 산경표에는 조침령(曺枕嶺), 근래의 백두대간 종주자들은 '새도 자고 넘는다는 고개'라는 뜻으로 조침령(鳥寢嶺)으로 표기하고 있다.
양양문화원에서 발행한 <양양의 땅이름>과 <양주지>에서는 증보문헌비고와 표기는 같으나, 다만 침자만 '베개 침枕'자로 표기하고 있다. 하여튼, 한계령이 1004m이고, 구룡령이 1013m인데, 그보다 훨씬 낮은 조침령을 새도 자고 넘는다고 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예로부터 조침령은 말을 타고 다니기는 쉽지만 실제론 먼 길이라 했던 걸로 봐서는 구절양장 먼 길이라 그리 부른 듯싶다. 그래서 조침령을 '좆칠령'이라고도 했다 한다.
조침령도 구룡령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길이 본래의 옛길이 아니다. 본래의 옛길은 현재의 조침령보다 남서쪽에 위치한 쇠나드리 근처를 넘었다. 지금의 조침령은 20여 년 전 군부대가 놓은 새길이며, 83년 6월~84년 11월 제3군단 공병여단이 21km 군사도로를 개설한 것이다. 예전에는 '반평고개'라 불렀다 하며, 지금도 주민들은 반평고개로 부른다. 반평고개라 한 까닭은 서림마을에서 조침령으로 가는 중턱에 5만여 평에 달하는 평지가 있는데, 소반 같이 평평하다 하여 '반평(반부둑')이라 부른 데서 따온 것이다. 그 반평고개에 지금은 동홍천-양양간 고속국도를 닦느라 터널도 뚫고, 포장공사도 하고 해서 옛길의 정취를 모두 삼켜버렸다.
- 양양의 다섯 고개
양양과 백두대간 너머 지역을 잇는 고개 중 한계령과 구룡령 외의 고개를 제외하고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은 고개들이 조침령, 북암령, 단목령이다. 양양에 있는 이 다섯 개의 고개 모두가 양양군 서면에서 인제 혹은 홍천으로 넘어가는 길에 자리 잡고 있다. 서면뿐 아니라 양양군 현북면 또한 백두대간과 접해 있지만, 유독 서면에만 고개들이 나 있는 까닭은 대간 너머에 마을과 주민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침령, 북암령, 단목령은 대간을 가운데에 두고 양양, 인제, 홍천에 살던 선질꾼, 마꾼과 같은 생선장수, 소금장수, 젓갈장수들이 양양장을 보거나, 수산물을 팔기 위해 왕래했던 고개이다. 선질꾼은 등에 바지게나 통지게를 지고 물건을 싣고 다니며 팔던 이들이고, 말을 가지고 물건을 실어 날랐던 이들은 마꾼이라 한다. 서림에서 조침령으로 올라가다 보면 초입의 새림골부터 굴아우골까지 11개의 골들이 고개길 좌우로 있는데, 이 골들에 이들이 쉬어가던 주막이 십여 개 남짓 있었다고 한다.
◆[북암령] 北岩嶺 925m
한계령을 사이에 두고 설악산 대청봉(한계령을 기준으로 할 때 북쪽)과 마주보고 서 있는 점봉산의 동쪽 산줄기에 해당하는 북암령은 세계적인 희귀식물인 한계령풀의 집단 분포지로 알려진 곳이다. 백두대간상에 위치해 있어 대간 종주인들이 점봉산을 앞두고 꼭 거쳐가야 할 고개로도 유명하다.
조침령이 도로공사로 옛길이 사라져 버렸지만, 그 북쪽에 위치한 북암령과 박달령은 아직도 옛길 그대로이다. 북암령은 양양군 서면 북암리에서 서쪽 2km가량 지점에 있으며, 북암리는 미천골 선림원지에서 북쪽에 위치한 암자가 있었다 하여 북암리라 했다. 양양을 사투리로 '예양'이라 부르는 것처럼, '북애미'라고도 부른다.
-국내 최대 한계령풀 군락지
매자나무과의 이 식물은 국내에서는 그 이름과 달리 설악산 일부 지역과 점봉산에서만 서식하는 희귀식물로, 중국 동북부와 러시아 연해주지방에서도 있으나 그곳에서의 것들과 달리 이곳 한국에서의 서식지 영향으로 또 다른 개체종으로의 성격을 띄게 된 종이다. 제철에 잠깐 노란색 꽃을 피웠다가 이내 몸째로 녹아 없어져 뿌리로서만 동정이 가능한 한계령풀은 전세계에서 내노라는 초본식물원(herbatium)들도 그 표본을 제대로 갖고 있지 못하고 있다.
지난 ‘90년대 중반 점봉산 양양 양수발전댐 건설반대 운동중 이 지역을 조사했던 우이령보존회의 식물학자들에 의해 북암령 일대에 대규모 서식 군락을 발견 당국에 천연기념물 지정이나 보호구역 설정을 건의했으나 아무런 조치가 따르지 않고 있다.
[875봉]
설악산 국립공원이 시작되는 곳이다
◆[단목령] 檀木嶺 809m
박달나무가 많아 박달령이라고도 불린다.
박달령은 점봉산에서 내려온 잘록한 고개목으로써 조침령, 북암령과 마찬가지로 양양군 서면 오색의 마산에서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를 잇는 고개이다. 1217년(고려 고종 4년) 김취려 장군이 거란군을 제천, 원주에서부터 추격하여 이 곳 박달령에서 섬멸했다고 양양지방에 전해내려 온다. 그러나 실제로는 1216년에 침범한 거란군을 1217년에 김취려 장군이 전군병마사가 되어 충북 제천군 박달령에서 크게 무찔러 격퇴시킨 것으로 옛 문헌에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고개 이름이 같은 것에 주목한 누군가 이야기를 와전시킨 것이 지금껏 전해 내려오는 듯하다.
옛적부터 박달령을 넘는 길은 현재 오색초등학교가 있는 박달마을에서 시작한다. 오색마을 사람들은 '박다룩'이라고도 하고, 학교가 있다 하여 '학교마을'이라고도 한다. 옛적에는 산 형국이 말 같기도 하고, 조선 초에 오색역을 거쳐 갈 때 이 곳에서 말을 갈아타고 갔다고 해서 '마산(馬山)'이라고 불렀다.
오색초등학교 맞은편 오색천에 놓여진 돌 징검다리를 건너 박달골을 따라 넉넉히 2시간이면 박달령 정상에 도착할 수 있다. 한참 오르다 보면 우거진 풀숲에 가려진 길을 찾기가 쉽지 않는 곳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한낮에도 어두컴컴한 원시림 숲 속을 산책하듯 걷다보면 중턱쯤에는 장년의 두 팔 폭 정도의 난치나무가 있는 난치고개에 이르게 된다. 이 고개에 대한 오색리 홍창해 이장님의 설명이 재미있다.
'난치나무란 오래된 단풍고목을 이야기하며 박달령 오르는 길 주위에는 박달나무와 단풍나무가 유난히 많습니다. 난치고개 주변에는 머릿짐이나 지게를 올려놓기 좋을 만큼의 돌들이 쌓여 있는데 고개를 오르던 아낙네들은 혼자서 머릿짐을 내리고 다시 올리기 좋도록 높이를 맞추어 놓은 돌들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가쁜 숨을 죽이고 다시 단목령을 오릅니다.'
그렇게 가쁜 숨을 죽이고 오르다 보면 가파른 경사가 시작되는 데 정상까지 약 1km 정도 남겨둔 지점이다. 정상에 오르면 활엽수림이 나타나는데 이 구간이 바로 남한 최대의 원시림구간이다. 박달령 마루턱에서 서북쪽으로 보이는 우뚝 솟은 산이 바로 점봉산이다.
- 민초들의 고개 조침령과 박달령
소동라령은 한동안 오색령이라는 반쪽의 이름으로 쓰이다가 국도가 넘어가는 오늘날에는 또 다른 반쪽의 이름인 한계령으로 소통되는 운명을 지녔다. 옛날처럼 다시 서울길이 열렸으니 소동라령으로 돌아가면 되겠지만 그도 한 세월에 하릴없이 되는 일은 아니다. 정작 고갯마루에서 내려다보면 한계와 오색은 그저 내리막 길 양쪽에 걸린 땅이름에 다름 아니지만 부르기에 따라 한쪽은 소외(疏外)로 여기는 일이 고개 이름에는 흔하다. 고개 또한 사람의 생리를 닮아 한쪽 이름만 부르면 또 한쪽은 냉큼 토라져 돌아앉는다.
역로가 소동라령에서 미시령으로 옮겨간 다음부터 개화기 무렵까지 근동의 민초들이 내린천 물길을 중심으로 백두대간을 넘나들던 고개는 조침령과 박달령이다. 조침령은 양양의 서림에서 인제의 기린으로 넘는 고개인데 본래 옛길을 피해 엉뚱한 곳에 새로 흙먼지 길을 닦고 지명비를 세웠다. 박달령은 오색의 들 목에서 인제의 으뜸 오지 진동리로 넘는 고개이니 고려 고종 4년에 김취려 장군 이 충북의 제천에서부터 추격한 글안족을 마지막으로 섬멸했다는 곳이다.
◆[점봉산] 點鳳山 1424m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과 양양군 서면에 걸쳐 있는 산. 한계령을 사이에 두고 설악산 대청봉과 마주보며 점붕산이라고도 하며, 옛이름은 덤붕산이다. ‘덤’은 둥글다는 뜻으로 이것이 한자화하면서 점봉으로 변한 것이다. 또한 부드러운 육산과 날카로운 암봉이 조화를 이룬 점봉산은 등벙산 또는 등붕산(登朋山)이라 불리기도 한다. 설악산국립공원 중 남설악의 중심이 되는 산으로, 설악산의 최고봉인 대청봉을 오르는 시발점이기도 하다. 북동쪽에 대청봉이 있고, 북서쪽에 가리봉, 남서쪽에 가칠봉 등이 솟아 있다. 산의 동쪽 비탈면을 흘러내리는 물은 주전골을 이루어 오색약수를 지나 백암천에 합류한 뒤 양양의 남대천으로 흘러든다. 산자락에 12담계곡·큰고래골·오색약수터·망월사·성국사터 등 명소가 많으며, 오색약수를 거쳐 오르는 주전골은 단풍명소로서 흰 암반 위를 흐르는 계곡물과 단풍이 어우러져 매우 아름다운 풍경을 빚어낸다.등산로는 약수터와 온천이 있는 오색에서 시작하고 정상에 오르면 대청봉·가리봉 등 설악산의 영봉과 푸른 동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산 일대에 펼쳐진 원시림에는 젓나무가 울창하고, 모데미풀 등 갖가지 희귀식물을 비롯하여 참나물·곰취·곤드레·고비·참취 등 10여 가지 산나물이 자생한다. 특히 한반도 자생식물의 남북방한계선이 맞닿는 곳으로서 한반도 자생종의 20%에 해당하는 8백 54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어 유네스코에서 생물권 보존구역으로 지정하기도 하였다. 주전골 성국사터에 보물 제497호인 양양 오색리 삼층석탑이 남아 있다.
부드러운 육산과 날카로운 암봉이 조화를 이룬 점봉산은 등벙산 또는 등붕산(登朋山)이라 불리기도 한다. 정상에 올라 설악의 장대한 연릉과 동해바다의 드넓음을 조망하는 것은 점봉산 산행의 백미다. 가을 단풍으로 유명한 주전골도 이에 뒤지지 않는다. 12담 구곡으로도 불려지는 주전골은 옛날 위폐범들이 계곡에서 불법으로 염전을 만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오색약수(五色藥水)
약150여년 전 성국사 승려가 반석위에서 용출되는 천맥을 발견하고 무심히 한모금 마신 결과 약수로 판명되었다. 당시에 성국사에 오색화가 피는 특이한 수목이 있기에 이후 오색약수라 칭하게 되었다. 설악산의 최고봉인 대청봉과 그 남쪽 점봉산 사이의 깊은 골짜기에 있다. 오색천(양양남대천의 지류) 개울가의 한 너럭바위 암반에서 약수가 솟는다. 3개의 구멍에서 솟는데, 위쪽의 약수는 철분이 많고 아래쪽 2개의 구멍은 탄산질이 많다. 하루 용출량은 1,500ℓ 정도이고, 물맛이 특이한 것으로 유명하며, 위장병 ·신경통 ·피부병 ·빈혈 등에 효력이 있고 특히 메밀꽃 피는 가을철에 탁효가 있다고 한다. 약수터에서 온정골 쪽으로 2 km쯤 올라가면 오색온천이 있다.
- 점봉산은 식물의 남북방한계선이 만나는 곳
점봉산의 총체적 가치는 이곳이 한반도에서 자라는 식물의 남북방한계선이 만나는 곳이라는 점이다. 북에서 서식하는 바람꽃류가 설악산을 거쳐 이곳에 내려와 있으며 남에서 자라는 모데미풀이 여기서 멈춘다. 목본식물로는 북에서 자라는 이노리나무를 이곳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하늘소의 숙주로도 알려진 서어나무의 경우 설악산과 함께 이곳이 북방한계이다. 남쪽 더서 지방의 난대림 식물을 제외한 대부분의 식물을 이 한곳에서 볼 수 있는 자리이다.
북국의 식물들이 태고로부터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오고 남쪽의 친구들이 올라와 한 데 사는 식물들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망대암산] 望對岩山 1236m
인제 동쪽 21km 지점, 양양 서쪽 18km 지점에 있다. 태백산맥 설악산 군봉(群峰) 중의 하나로, 북동쪽에 최고봉인 대청봉, 남쪽에 점봉산, 남서쪽에 시선봉(侍仙峰) 등이 같은 산체 안에 있는 형제봉으로서 삼각형을 이루어 대좌하고 있다. 대청봉 북쪽의 한계령은 남쪽 대관령과 함께 영동·영서 간 교통의 요로이며, 북동 산록에는 오색약수·오색온천이 있어 휴양지로 알려져 있다. 산은 정상이 첨봉(尖峰)이고 망대암과 금표암 등 기암괴석으로 덮여 있다. 소양강과 양양 남대천의 분수령으로서, 사면에서 발원하는 하천이 좁고 긴 협곡과 폭포, 벽담(碧潭)을 이룬 데다 삼림이 울창하여 설악산국립공원의 일부를 이룬다.
점봉산 능선에서 발원한 천이 여신폭, 12폭, 선녀탕등의 명소가 되어 주전골이 오색약수를 경유 남대천으로 유입된다. 주전골 바위굴에서 사전(私錢)을 주조하려고 놋그릇을 부셔 위조주전을 만들다 적발되어 이후로 이곳을 주전골이라 하였다. 망대암산은 이를 감시하던 봉우리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한계령] 寒溪嶺 1004m
강원 인제군 북면(北面) ·기린면과 양양군 서면과의 경계에 있는 고개.
인제~양양 간 국도가 통한다. 설악산국립공원에 속하는 고개로, 영동·영서 지역의 분수령을 이룬다. 옛날에는 소동라령(所東羅嶺) 또는 오색령이라고 했다. 이중환의 택리지 산수총론에 보면 백두대간 여섯령을 소개하는 부분이 있는데, 철령, 추지령, 연수령, 오색령, 대관령, 백봉령이 그것이다. 오색령이 지금의 한계령이다. 동해안 지역과 내륙지방을 잇는 교통의 요지가 되어왔다. 1971년 12월에 양양과 인제를 연결하는 넓은 포장도로가 고개 위로 뚫려 내설악 및 외설악의 천연관광자원 개발에도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대청봉과 그 남쪽의 점봉산을 잇는 설악산 주능선의 안부이며, 영동지방과 영서지방의 분수령을 이룬다. 과거에는 양양군에 해당하는 산을 설악산이라 하고 인제군에 해당하는 산을 한계산이라 했다. 고개의 이름은 한계산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양양군에서는 오색령. 소동라령(所東羅嶺)이라고도 했으며, 양양군 사람들이 설악산을 넘어서 인제군이나 서울로 갈 때 주로 이용되던 험한 산길이었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산도둑이 들끓어, 해가 지면 이 고개를 넘지 말라는 뜻으로 고개의 길목인 양양군 서면 오가리의 길 옆 바위에 금표라고 새겨두었다. 지금도 그곳에 바위가 있으며, 한계령에 오르는 길에는 금표교가 있다.
남동쪽 사면에서 발원하는 오색천은 많은 지류를 합류하며 계곡과 폭포를 이루고 동해로 유입하는 남대천에 흘러든다. 서북쪽 사면에서 발원하는 물 또한 일대 계곡을 형성하면서 소양강 상류를 이루는 북천으로 흘러든다. 내설악은 산세가 수려하고 계곡이 아름답지만, 내륙 깊숙이 있고 교통이 불편하여 등산객 외에는 찾는 이가 드물었다.
그러나 1971년 한계령을 지나는 44번 국도인 한계령도로가 닦이고, 설악산 및 동해안을 찾는 관광객의 증가에 대비하여 1981년 인제군에서부터 양양군과 속초시까지 이어지는 도로가 확장, 포장됨으로써 설악산의 북쪽으로 돌아 진부령이나 미시령을 넘던 자동차들이 이 고개를 이용하게 되었다.
한계령도로를 따라 옥녀탕·대승폭포·장수대·소승폭포·여심폭포·십이폭포·발폭포·오색온천·오색약수·선녀탕 등의 명승지가 이어지며, 서쪽 기슭 안산의 남쪽 사면에는 한계산성의 일부가 남아 있다. 이 도로는 설악산을 지나기 때문에 주변의 빼어난 경관을 구경할 수 있다. 서울에서 한계령까지는 서울-양평-홍천-인제-한계령 코스와 서울-가평-춘천-홍천-인제-한계령 코스가 있다.
- 인제 기린면
인제는 본래 오사회(烏斯回)라 부르던 맥국의 땅이었다. 고구려는 저족현(猪足懸)이라 하고 신라가 희제현(蹄縣)이라 부른 것은 생김이 돼지 발굽을 닮은 탓이었고, 오늘날의 인제(麟蹄)란 이름을 얻은 것은 고려 초엽이었으니 돼지보다는 기린이 영물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기린이야 어차피 풍문으로만 듣던 짐승이고 보면 '사슴이 백년 묵어 기린이 된다'는 전설에 기대어 한껏 신비감을 자아낸 이름이다. 내린천이 인제로 흘러오는 길목의 지명은 조선 태종 이래 오늘도 변함없이 기린(麒麟)이다.
- 마의태자의 전설이 깃든 한계(寒溪)
인제 읍에서 설악의 들목으로 만나는 원통(元通)은 본래 원통역(圓通驛)이 그 근원인데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이름 내력이 바뀌었다. 사람들이 오가며 흔히 우스갯소리로,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라고 한다. 어떤 이는 한 임금이 설악에 파천(播遷)하여 도성으로 차사를 띄울 적에 매양 돌아오지 않으므로 생겨난 말이라 하나
그리 따를 만한 전설은 아니다. 일설에는 첩첩산중 휴전선 근처로 배속받은 군인들 사이에서 생겨난 말이라고도 한다.
명산이란 본래 유람에나 좋은 땅이지 터를 두고 살기에는 불편한 곳이다. 탈속의 나그네야 더없이 즐거운 설악의 풍광이지만 생계를 작정으로 산중에 깃든 민생들의 호구지책이야 논밭 한 뙈기가 마뜩찮은 명승을 어디에 쓰겠는가. 그렇듯 사는 일이 내내 고단하였지만 그래도 명산 그늘이라고 한껏 멋을 부린 이름이 바로 한계 마을이다. 한계는 풍진 영화를 한낮 베옷 품에 감추고 세속를 떠나던 마의태자의 전설이 곳곳에 서린 곳이다. 「신라김씨대종원」의 기록에는 '태자 일행이 서울을 떠난 것은 935년 10월 하순이고, 한계에 닿은 것은 살을 에는 추위와 눈보라 몰아치는 혹독한 겨울이었다'고 한다.
한계령 길과 미시령 길은 한계리 재내(瓦川) 마을에서 갈린다. 옛날에 기와를 구워 사람들이 줄지어 날랐다는 내력으로 얻은 이름이다. 재내에 사는 홍기주(65)옹은 내설악의 고갯길과 더불어 늙어온 사람이다. 지금의 한계령이야 소문도 부산한 관광길이 되었지만 그의 어린 시절에는 그저 사람 하나 걷기에 맞춤한 잎새 우거진 오솔길이었다. 1971년, 군장비로 고갯길을 뚫고 한계의 지명을 따라 새로 붙였다는 한계령의 이름에 대하여 물었더니, "웬걸, 우리 에려서 왜정 때두 그렇게 부른 걸" 하면서 고개를 젓는다.
- 소동라령과 오색령, 그리고 한계령
'왜정 때'도 불렀다는 그 한계령이 좀처럼 옛 글에는 보이질 않는다. 다만 한계는 옛 이름이되 한계령은 그리 오래 묵은 옛 이름이 아닌 탓이다. 한계령의 본명으로 유력하게 들먹이는 이름이 소동라령과 오색령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양양도호부 편에는 소동라령에 대하여, "부 서쪽 60리에 있으며 산줄기가 겹치고 포개져 지세가 험하고 궁벽하다. 예전에는 서울로 통하는 길이었으나 지금은 없 어졌다" 하였고, 『증보문헌비고』「여지고」의 양양 편에는 "오색령은 인제의 영로이며 소동라령, 조침령, 구룡령은 모두 강릉으로 통하는 길"이라고 적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 간행되는 중종 25년(1530년) 무렵은 소동라령이란 이름으로 부르던 한계령 길이 너무 험하다는 이유로 폐하고 이미 미시령 길을 새로 개척한 다음이다. 조선시대 초엽까지 한양 길로 삼았던 소동라령이 풀숲에 묻히면서 점차 그 쓰임새를 잃고 마는 것이다. 다만 같은 책에 실린 남대천의 설명으로 "강릉부 오대산에서 나오며 소동라령의 물과 합쳐 부의 남쪽으로 바다에 들어 간다"는 대목을 보면 적어도 소동라령이 지금의 한계령 길을 의미하고 있음은 뚜렷한 사실로 보인다. 훗날 『동국여지승람』의 근간이 되는 『세종실록지리지』 (1454년) 양양도호부 편 역시 소동라령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전의 문헌이 오직 소동라령을 고집하는 반면, 조선시대 말엽에 간행되는 문헌에는 오색령의 출현이 두드러진다. 『여지도서』(1760년), 『대동여지도』(1861년), 『증보문헌비고』(1908) 같은 기록에는 모두 한계령을 오색령으로 표기하고 있다. 짐작컨대, 이는 분명 오색약수를 비롯한 명승을 탐방 하는 길과 관련된 이름일 터이다.
이미 오래 전에 흔적을 잃은 소동라령의 존재는 잊혀지고 남설악으로 통하는 고갯길에 대한 새 이름으로 오색령이 등장한 것이다. 다만 오색령과 소동라령이 더불어 쓰인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은 얼핏 신뢰성을 잃고 있다. 왜냐하면, "소동라령, 조침령, 구룡령은 모두 강릉으로 통하 는 길"이라고 쓴 것은 틀림없이 어림에 의한 오기(誤記)이기 때문이다.
- 다섯 빛깔 전설의 땅, 오색(五色)
한계령이라 부르니 그저 서운한 땅이 바로 남설악의 오색이다. 소동라령을 한양 길로 삼았던 시절에는 오색역(五色驛)이 있었다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미 '지금은 없어졌다'는 간략한 기록으로 남는다. 역로는 비록 끊어졌지만 남설악의 절경에 앞장을 서는 오색의 명성이 사람 발길을 끊임없이 불러들여 예나 지금 이나 인파가 모박이를 하는 곳이다. 호사스런 건물을 줄지어 지어놓고 아예 마을 하나가 몽땅 관광으로 밥을 먹고 산다.
오색에서는 그저 모든 것이 다섯이다. 신통하게도 골물이 흐르는 골짜기 너럭바위에서 솟아나는 오색약수 역시 그 맛이 다섯이라 하고, 보물 제 497호 삼층석탑 이 남아 있는 성국사터의 다른 이름 또한 돌빛마저 다섯 빛깔을 낸다하여 오색 석사(五色石寺)다. '다섯 전설'의 백미는 뭐니뭐니해도 다섯 빛깔의 꽃이 핀다는 오색화(五色花) 전설이다. 오색이란 마을 이름도 다섯 빛깔의 꽃이 피는 나무가 있어 생겨났다는 이야기가 거의 정설이 되었다. 구체적으로는 1937년 양양의 전 재우 군수가 세 빛깔의 꽃이 피는 나무를 옮겨 심었다는 기록이 전하고, 해방 무렵까지도 지금의 관터 마을 앞의 길턱에 있었던 세 빛깔의 꽃이 피는 나무를 보았다는 사람은 아직도 곳곳에 흔하다.
◇산행지도 및 참고사진
첫댓글 1번~~~
산행공지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수고 하셨지 말입니다^^
2.엄기원
3.김정진
4.이미숙
5.박성희
6.이규락
7.신종희
3번~
강영숙 갑니다~
박상현, 이재학 올립니다.
헐~~
8번~
열번 이네욤~~^^
당근 갑니다용~^^
갑니다~~^^
황학모.권창혁.이병구 입금 합니다.
산맥산악회 백두대간 제33차 종주 하실분~~^^
1-10
강순구.엄기원.김정진.이미숙.박성희.
이규락.신종희.강영숙.박상현.이재학.
11-20
채영근.서윤경.황학모.권창혁.이병구.
김영희.박태임.김상준.권오철.김장현.
21-30
최경희.장재호.김경숙.정광수.김상기.
김용원2.김명숙.손경애.오상봉.박형규.
31-40
이승현.권준대.
함께 해야죠.ㅎㅎ
김상준, 권오철 갑니다
김장현 신청합니다
함께갑니다..^^
백두대간 제33차 입금하신분(존칭생략)~~^^
1-10
김상준.장재호.이재학.박상현.김경숙
김장현.엄기원.정광수.김상기.최경희
11-20
황학모.권창혁.이병구.김용원2.김명숙
김영희.서윤경.손경애.박태임.오상봉
21-30
채영근.박형규.권오철.권준대.박성희
강영숙.이승현.강순구.이미숙.신재성
31-34
이규락.권태건.김정진.신종희.
정광수
김용원2 참석합니다.
참석합니다
참삭합니다.
오랫만에 뵈네요~~
준비 잘해서 나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