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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도산십이곡비陶山十二曲碑
陶山六曲之一 * 한글 옛글자가 타이핑 되지 않아 빠졌습니다
其一
이런엇다며뎌런엇다료草野愚生이이러타엇다료며泉石膏肓을고텨므슴료
其二
煙霞로지블삼고風月로버들사마太平 聖代예病오로늘거가뇌이듕에라이른허므리나업고쟈
其三
淳風이죽다니眞實로거즈마리人性이어디다니眞實로올마리天下애許多英才를소겨말솜가
其四
幽蘭이在谷니自然이듣디됴해白雲이在山니自然이보디됴해이듕에彼美一人를더옥닛디곧얘 一云이듕에고온니믈더옥닛디몯뇌
其五
山前에有臺고臺下애有水ㅣ로다만며기오명가명거든엇다皎皎白駒머리고
其六
愚夫도알며거니긔아니쉬운가聖人도몯다시니긔아니어려운가쉽거나어렵거낫듕에늙주를몰래라
도산육곡의 첫 번째
[1]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하리.
시골에 묻혀 살아가는 어리석은 사람이 이렇게 산들 어떠리.
하물며 자연을 사랑하는 이 병을 고쳐서 무엇 하리.
[2]
안개와 노을로 집을 삼고 풍월로 벗을 삼아
태평성대에 병으로 늙어 가네.
이러한 가운데 바라는 일은 허물이나 없고자 한다.
[3]
순풍이 죽었다 하는 말이 진실로 거짓말이로구나.
사람의 성품이 어질다 하는 말이 진실로 옳은 말이로구나.
천하에 허다한 영재를 속여서 말씀할까.
[4]
그윽한 향기의 난초가 골짜기에 피어 있으니 자연히 좋구나.
백운이 산에 걸려 있으니 자연히 보기가 좋구나.
이러한 가운데 저 한 아름다운 분을 더욱 잊지 못하는구나.
[5]
산 앞에 대(臺)가 있고 대 아래에 물이 흐르는구나.
떼를 지어서 갈매기들은 오락가락 하는데
어찌하여 새하얀 망아지는 멀리 마음을 두는가.
[6]
어리석은 사람도 알며 하거니와 그것이 아니 쉬운가?
성인도 못 다 행하니, 그것이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쉽거나 어렵거나 간에 늙어가는 줄을 모르노라.
陶山六曲之二
其一
天雲臺도라드러琓樂齋蕭洒듸萬卷生涯로樂事ㅣ無窮얘라이 듕에往來風流를닐어므슴고
其二
雷霆이破山야도聾者몯듣니白日이中天야도瞽者몯보 니우리耳目聰明男子로聾瞽디마로리
其三
古人도날몯보고나도古人몯뵈古人를몯봐도녀던길알잇녀던 길알잇거든아니녀고엇뎔고
其四
當時예녀던길흘몃를려두고어듸가니다가이제도라온고 이제나도라오나나년듸마로리
其五
靑山엇뎨야萬古애프르르며流水엇뎨야晝夜애긋디아니 고우리도그치디마라萬古常靑호리라
其六
春風에花滿山고秋夜애月滿臺라四時佳興ㅣ사롬과가지라 며魚躍鳶飛雲影天光이어늬그지이슬고
도산육곡의 두 번째
[1]
천운대를 돌아서 완락재가 맑고 깨끗한데
많은 책을 읽는 인생으로 즐거운 일이 끝이 없구나.
이 중에 오고가는 풍류를 말해 무엇 할까.
[2]
벼락이 산을 깨쳐도 귀먹은 자는 못 듣나니
태양이 하늘 한가운데 떠 있어도 장님은 보지 못하나니
우리는 눈 귀 밝은 남자로 귀먹은 자와 장님 같지는 말아라.
[3]
옛 어른이 나를 못 보고 나도 옛 어른을 뵙지 못하네.
고인을 뵙지 못해도 가시던 길이 앞에 놓여 있으니,
가시던 길 앞에 있으니 나 또한 아니 가고 어떻게 하겠는가?
[4]
그 당시에 학문에 뜻을 두고 실천하던 길을 몇 해나 버려두고
어디에 가서 다니다가 이제야 돌아왔는가?
이제라도 돌아왔으니 다른 곳에 마음을 두지 않으리라.
[5]
청산은 어찌하여 항상 푸르며,
흐르는 물은 어찌하여 밤낮으로 그칠 줄을 모르는가.
우리도 그치지 말아서 오래도록 높고 푸르게 살아가리라.
[6]
봄바람에 꽃이 산을 덮고 가을밤에 달은 누각에 가득 차누나.
네 계절의 아름다운 흥이 사람과 마찬가지라
하물며 천지조화의 오묘함이야 어느 끝이 있을까.
도산십이곡비는 퇴계종택으로 가는 길 입구에 세워져 있다.
안동시에서 2001년 퇴계선생 탄신 500주년의 기념사업으로 조성한 퇴계선생 시비공원과 함께 설치하였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사람들이 많이 볼 수 있는 장소는 아닌 것 같다. <후육곡後六曲>중 다섯 번째 시조는 부산어린이대공원 구역 내 ‘시가 있는 숲’이라는 곳에도 근현대 시인들의 작품과 함께 돌에 새겨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목판을 만들어 도산서원 장판각에 보관하면서 탁본拓本을 하였으나 2004년부터 화재와 도난의 우려가 있어 한국국학진흥원 장판각에 위탁보관하고 있다.
비석은 자연석에 한자의 예서와 비슷하게 황재국黃在國(서예가, 강원대 교수)씨가 써서 새겼다.
선생께서 도산서당에서 공부하는 제자들에게 노래로 부르게 하여 성정 순화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선생 65세(1565년)에 도산에 은거隱居하신 뜻을 밝힌<전육곡前六曲(言志)>과 학문과 수양으로 성정性情 순화를 위한 <후육곡後六曲(言學)>지으시고, 3월16일에 지은 경위와 이유 그리고 활용방안까지 밝힌 발문은《퇴계선생문집권지사십삼退溪先生文集卷之四十三》에 수록되어 있으나 시조는《청구영언靑丘永言》에 실려 있다고 한다.
위(右)의 도산십이곡은 도산노인이 지은 것이다. 노인이 이를 지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우리나라 가곡이 대체로 음란한 소리가 많아서 말할 수가 없다. 한림별곡과 같은 종류는 문인의 입에서 나왔지만, 자랑하고 뽐내며 방탕한데다가 하는 짓이 무례하고 장난삼아 가까이 하는 것이니 더욱 군자가 숭상할 바가 아니었다.
다만 요즘 이별李鼈의 육가六歌라는 것이 있어 세상에 많이 전하는 데 오히려 그것이 이것보다는 낫지만, 또한 애석하구나. 그것은 따뜻하고 부드러움이 적고 세상을 희롱하니 공경하고자 하는 뜻이 있지 않으며 온유돈후한 내실이 적다.
노인이 본디 음률[雅樂의 五音六律]을 이해하지 못하나 세속적인 음악을 듣기는 싫어하였다. 한가하게 살며 자연을 좋아하다가 무릇 성정性情에 감응하는 것이 있으면 매번 시로 표현하곤 하였다. 지금의 시는 옛날의 시와 달라 읊조릴 수는 있어도 노래할 수는 없다. 만일 이를 노래하고자 하면 반드시 우리말로 엮어야 하는데, 이는 대개 우리말 음절이 부득불 그렇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별의 육가를 대강 모방하여 도산 육곡 두 편을 지었다. 기일其一에는 '지志'를 말하고, '기이其二'에는 '학學'을 말하여, 아이들로 하여금 아침저녁으로 익히어 노래하게 하고 또한 아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노래하고 스스로 춤추게 하였다.
바라건대 가히 더럽고 인색한 마음을 말끔히 씻어 느낌이 나오게 되고 융통하게 되면 노래하는 자와 듣는 자가 서로 유익함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스스로 돌아보건대 (나의) 자취가 (세속과) 매우 어긋나서, 만일 이러한 한가로운 일로 말미암아 시끄러운 꼬투리가 일어날지 모르겠다. 또한 그것이 곡조(腔調)에 잘 들어맞을지 미덥지 않고 음절音節에 잘 어울릴 지도 알지 못하겠다. 우선 한 부를 베껴 상자에 보관하며 때때로 꺼내어 봄으로써 스스로 반성하고, 또한 후일을 기다려 현명한 자가 버리거나 거두기를 기다릴 뿐이다. 1565년 3월16일 도산노인(李滉) 씀.
[飜譯 : blog.naver.com/min652]
선생의 수많은 저술 가운데 한글로 지은 글은 많지 않다. 더욱이 당시의 한글 표기 등 국문학상 중요한 작품으로 연구되고 있으며, 또 최근에는 현대음악으로도 작곡되어 발표하기도 하였다.
<도산십이곡>해설
퇴계선생은 스스로 <도산십이곡>을 <이별육가李鼈六歌>를 모방해서 지었다고 밝히고, 아울러 전육곡前六曲 후육곡後六曲으로 나눈 후 전자를 ‘언지言志’, 후자를 ‘언학言學’이라고 규정했다. ‘언지’의 ‘지志’는 성정의 올바름으로서 정감이 아닌 이성理性을 의미하고, ‘언학’의 ‘학學’은 주자학의 심오한 이치이거나 혹은 배움의 자세와 태도를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도산십이곡>은 현대의 서정시와 같다고 하거나, 아니면 그 같은 시각으로 접근하면 작품의 본질을 훼손시키기 쉽다. 퇴계선생은 <도산십이곡발(후기)>을 지어 독자에게 그 시세계詩世界를 밝혔다. 시를 창작한 것이 아니다. 가곡歌曲의 노랫말을 지었다. 동방가곡東方歌曲의 주제가 대체로 음란하고 건전하지 못한 점을 안타깝게 여겨, 백성들이 남녀노소가 함께 불러도 좋을 건전가요를 보급시키고자 하는 의욕을 가졌다. 당시 가곡의 음란성은 물론이고 당대 현실을 지나치게 폄하하고 비판하는 주제의식에 대해서도 불만스러워 했다. 따라서 퇴계선생은 당시의 대중가요인 세속의 음악을 듣는 것을 꺼렸다. <도산십이곡>을 완성한 후 아이들에게 익히게 하여 아침저녁으로 부르게 하고, 춤까지 추게 하고자 하셨다. <도산십이곡>은 노래 부르는 사람과 듣는 사람들 모두가 정서가 순화되고 원만한 심성을 작게 하는 가곡이며, 마음속에 쌓인 찌꺼기를 씻어내어 온유돈후溫柔敦厚의 경지로 이끄는 힘이 있다고 퇴계선생은 생각했다. <도산십이곡>에 대한 작자의 대단한 자부심을 읽을 수 있다. 그는 동방가곡의 음란성과 <한림별곡>류의 교만 방자함과 <이별육가>의 세상을 비아냥거리는 따위의 성격을 지닌 당시 속악俗樂을 개혁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우리의 가곡을 속악으로 인식한 것은 아악雅樂을 염두에 든 시각이다.
<도산십이곡>은 동양의 예악사상禮樂思想과 연결된 단가短歌의 가사歌詞이다. 퇴계선생은 조정의 아악이 아닌 향당鄕黨의 가곡으로 <도산십이곡>이 자리매김하기를 기대했고, 또 그 기대가 십분 충족되었을 뿐 아니라 시대가 진행됨에 따라 영남의 가곡으로 되었으며, 아울러 선비들의 대표적 가곡으로 발돋움했다. <도산십이곡>은 명종 20년(1565) 퇴계선생의 65세에 완성된 만년의 작품이다. 원숙의 경지에 이른 대석학의 심오한 학문과 고매한 인격이 고도의 미적 구도 속에 용해되어 있다. 퇴계선생은 전육곡 언지 네 번째 “유란幽蘭이 재곡在谷하니 자연自然이 듣디됴해, 백운白雲이 재산在山하니 자연이 보디됴해, 이듕에 피미일인彼美一人을 더욱 닛디 못하애”라고 노래했다. 도산은 은둔지隱遁地가 아니다. 임금님(彼美一人)을 그리워하는 인간의 연장선상이다. 깊은 숲 속의 난초는 자기를 보는 사람이 있든 없든 간에 그윽한 향기를 발한다. 남들이 주변에서 자신을 보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향기를 발하지 않은 법은 없다. 산마루를 넘나드는 흰 구름 역시 그렇게 있는 것이다. 깊은 숲속의 난초와 산마루의 구름처럼 의연한 자세를 지닐 것을 당부하고 있다.
후육곡 여섯 번 째의 “춘풍春風에 화만산花滿山하고 추야秋夜에 월만대月滿臺라, 사시가흥四時佳興이 사롬과 한가지라, 하말며 어약연비魚躍鳶飛 운영천광雲影天光이야 어느 그지 이슬고”에서 봄날 산을 뒤덮은 흐드러진 꽃들과 정대亭臺에 교교하게 비치는 달빛을 묘사하면서 물아일체物我一體를 구가했다. 사계절의 가흥이 사람과 같다라고 노래한 구절은 정호程顥(1032-1085)의 시<추일秋日>의 “사계절의 흥취가 사람과 같다(四時佳興與人同)”와 거의 흡사하다. 물아일체는 흔히 서정자아抒情自我가 강호江湖의 미경美景에 몰입하는 경지로 이해되고 있는데, 이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강호에 존재하는 갖가지의 자연물 하나하나는 모두가 그들 나름의 흥이 있다는 인식은 고대의 만물유령萬物有靈의 사유思惟와 관계가 있다. 그러나 중세에 들어와서 모든 자연물에 있다고 여겼던 ‘영혼’을 배제하고, 그 자리에다 성리학적 ‘리理와 ’흥취‘를 넣었다. 위에 인용한 단가에 등장하는 꽃과 고기 등의 자연물도 작품 속에 나오는 사람과 함께 대등하게 리理를 가졌거나 또는 흥취를 공유하는 경지가 바로 물아일체이다. 연못에 뛰노는 고기와 하늘을 나는 솔개 등은 사람의 종속물이 아니고 대등한 독립체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 같은 외물인식外物認識을 바탕으로 한 작품은 서양의 서정시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 그러므로 우리의 단가문학(時調)을 서양의 서정시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언학의 후육곡 여섯 번 째 “우부愚夫도 알며하니 긔아니 쉬운가, 성인聖人도 몯다하시니 긔아니 어려운가, 쉽거나 어렵거낫듕에 늙난주를 몰래라”에서 퇴계선생은 학문의 특성을 극명하게 밝혔다. “쉽고도 어려운 것이 학문이다”라는 속설俗說을 시로 형상하여, 스스로 어리석고 재주가 없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도 학문에 뜻을 두게 했다. 그러나 범부凡夫가 물색없이 학문을 쉽게 생각하고 함부로 나대는 것을 막기 위해 성인聖人도 다하지 못할 만큼 광대무변함을 깨우치게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마도 ‘학문’을 제재로 하여 쓴 시가작품 중에서 동서고금을 통틀어 <도산십이곡>을 따라잡을 작품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근래에 분방한 감성을 노래한 작품들을 무리하게 추켜세우고, 단아端雅한 이성理性을 형상한 시가들을 지나치게 폄하한 감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온유돈후溫柔敦厚한 품격品格으로 창작된 <도산십이곡>은 현대에서도 재평가될 충분한 이유가 있다.
<도산십이곡>은 한국의 시조, 즉 단가문학사短歌文學史에 있어서 큰 획을 그은 작품이다. 단가를 여흥 차원에서 격상시켜 정서 순화는 물론이고 진일보하여 교화의 수단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예禮와 악樂으로 백성百姓을 교화하고 이끌어 간다는 중세의 예악사상이 깔려 있다. 퇴계선생은 백성들이 함께 부를 수 있는 건강한 민족가요民族歌曲을 만들어야겠다는 사명감을 지녔다. <도산십이곡>은 이 같은 퇴계의 악무인식樂舞認識을 바탕으로 하여 창출되었다. <도산십이곡> 발문에서 ‘아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노래하고 춤추게 했다(自歌而自舞)’라고 밝혔다. <도산십이곡>을 노래할 때의 춤이 어떤 것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세속에 유행하는 춤과는 거리가 있었을 것이다.
<도산십이곡>의 주제는 ‘지志’와 ‘학문’이다. 신바람 나는 정감도 아니고 이른바 남녀상열男女相說의 애정도 아니다. 이같이 딱딱한 주제를 형상했는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읽히고 있을 뿐 아니라 문학사에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이유는 단순히 퇴계선생이 창작했기 때문만은 아니고 작품으로서 성공했기 때문이다. 퇴계선생은 탁월한 미의식美意識을 지니셨다. 당시 범 동양권의 주된 주제의식主題意識은 문이재도文以載道였다. 문학은 성리학적 도道를 형상해야 한다는 풍조는 조선조 사단詞壇의 주류였다. 이는 자칫 시가를 사변적인 도학의 도구로 전락시킬 위험이 뒤따른다.
퇴계선생은 이 같은 유가적 문예의식의 약점을 강호의 미경美景을 매체로 활용하여 생경生硬에 흐를 소지를 제거했다. <도산십이곡> 은 주리적 성정主理的 性情을 강호를 매개로 하여 형상形狀한 단가로 규정할 수 있으며 조선조 시조문학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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