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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의 월정서원은 1664년(현종 5)에 창건되었으며, 박순(朴淳)·김계휘(金繼輝)·심의겸(沈義謙)·정철(鄭澈)의 위패를 모셨다. 1669년에 사액서원이 되었으며, 1767년 홍천경(洪千璟)을 추가 배향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60년에 복원되었다. ○원래 서원의 위치는 현 나주고등학교 뒤편, 광목간 도로상에 있었는데, 훼철되었다가 복원하면서 나주 노안면 금안리 광곡마을로 정한 것이다. ○본 글은 1767년 홍천경을 추배하였는데, 훗날 관(官)에서 생폐(牲幣)를 하사해 달라는 건의문을 나학신이 지은 것이다. |
伏以羅州西有月井書院。卽文忠公 思庵 朴先生妥靈之所。而孝宗大王十年己亥因本州, 多士疏請而所宣額也。 間者太學諸生與洛下士大夫, 同聲相應以思庵之同德, 四賢黃岡、巽庵、松江、盤桓同享焉。皆有按道遺跡, 故已光州 月峯書院, 以文憲公 高峯 奇先生享豆之所, 回士論合享於文簡公 訥齋 朴先生, 文元公 沙溪 金先生, 慎獨齋 金 文敬公。諸賢則本院之爲亦其類也, 而追享諸位皆有自官牲幣之致, 獨於本院合享四位以致。官闕牲弊夫旣同德矣腏享矣, 而牲幣之儀, 特於舊而闕於新鳴乎。 一人向隅蒲堂, 猶且不樂況於三賢之非一, 而思庵之靈樂乎否乎? 民等請申擧思庵之德善事, 行而繼以四賢爲閤下大聲一呼, 而因伏乞積逋不敏之過焉。
복이나주서유월정서원。즉문충공 사암 박선생타영지소。이효종대왕십년기해인본주, 다사소청이소선액야。 간자태학제생여락하사대부, 동성상응이사암지동덕, 사현황강、손암、송강、반환동향언。개유안도유적, 고이광주 월봉서원, 이문헌공 고봉 기선생향두지소, 회사론합향어문간공 눌재 박선생, 문충공 사암 박선생, 문원공 사계 김선생, 신독재 김 문경공。제현칙본원지위역기류야, 이추향제위개유자관생폐지치, 독어본원합향4위이치。관궐생폐부기동덕의철향의, 이생폐지의, 특어구이궐어신명호。 일인향우포당, 유차불락황어삼현지비일, 이사암지영락호부호? 민등청신거사암지덕선사, 행이계이사현위합하대성일호, 이인복걸적포불민지과언。
엎드려 아뢰건대, 나주 서쪽에 있는 월정서원은 곧 문충공 사암 박선생의 영을 모신 곳입니다. 효종대왕 10년 기해(1659년)에 본주에서 유래되었는데, 많은 선비들이 상소로 고하여 사액(賜額) 한 것입니다. 이 사이 태학의 여러 학생과 더불어 서울에서 내려온 사대부들이 같은 목소리로 서로 응하여 사암과 마음을 같이 하는 네 사람의 어진이, 황강 김계휘(黃崗 金繼輝), 손암 심의겸(巽庵 沈義謙), 송강 정철(松江 鄭澈), 반환 홍천경(盤桓 洪千景)를 함께 향사(享祀) 하였습니다.
도(道)에 있는 모든 유적을 헤아려보니 이미 광주 월봉서원은 문헌공 고봉 기선생(文憲公 高峯 奇先生/奇正鎭)을 배향하여 제향 하는 곳으로, 선비들을 여론을 회유하여 문간공 눌재 박선생(文簡公訥齋朴先生/朴祥)과 문충공 사암 박선생(文忠公思庵朴先生/朴淳), 문원공 사계 김선생(文元公沙溪金先生/金長生), 신독재 김 문경공(慎獨齋金文敬公/金集)을 합향(合享) 하였습니다.
제현들도 본 서원이 그와 같은 비슷한 것이라 하며, 여러 위를 추향하는 것은 모두 관(官)에서 산 제물과 폐백(幣帛)이 보내져야 본 서원 단독으로 4위 합향을 끝까지 다한다는 것 입니다.
관의 생폐가 없으면 무릇 배향의 마음을 같이 하였지만, 산 제물과 폐백(幣帛)의 예의는 특별히 옛 풍습이므로 새롭게 하자고 소리는 못합니다.
누추한 집에서도 한사람이 근심이 있으면, 오히려 또 즐겁지 않는데 하물며 3현을 한곳으로 모시지 못하면, 사암(思庵)의 영혼은 즐겁겠습니까 아니하겠습니까?
청컨대 백성들도 사암(思庵)의 덕행과 선행의 일에 움직여, 4현의 일을 잇달아 행하도록 합하(閤下)께서 큰소리로 한번 호령하시기 바라오며, 그리고 관청의 물건을 사사로이 써 버린 것이 적체 되었는데 불민한 탓입니다.
蓋思庵先生卽文簡公 朴訥齊之從子也, 文康公 徐花潭之門人也。 退溪 李文純、 栗谷 李文成、 牛溪 成文簡, 與夫宋參贊、奇文憲同聲同氣之契也, 始焉貶百齡之謚, 中焉黜元衡之罪, 終焉白癸未三竄之交誣, 而國人依之士流, 宗之在內則溫申, 在外則伊洛。 故其曰 : "松筠節操水月精神"者, 上而受乎宣廟之所褒也。其曰宋人物唐詩調者, 遠而得乎天使之所稱也。 自是又有白沙 李文忠, 淸陰 金文正, 尤庵 宋文正, 長弟公誦, 則千秋萬歲, 斗如山如。
개사암선생즉문간공 박눌제지종자야, 문강공 서화담지문인야。 퇴계 이문순 、율곡 이문성、우계 성문간, 여부송참찬、기문헌동성동기지계야, 시언폄백령지익, 중언출원형지죄, 종언백계미삼찬지교무, 이국인의지사유, 종지재내칙온신, 재외칙이락。 고기왈 : "송균절조수월정신"자, 상이수호선묘지소포야。기왈송인물당시조자, 원이득호천사지소칭야。 자시우유백사 이문충, 청음 김문정, 우암 송문정, 장제공송, 칙천추만세, 두여산여。
사암 박선생은 곧 문간공 박눌재의 조카로 문강공 서화담의 문하에서 배운 제자입니다. 문순공 퇴계 이황(李滉), 문성공 율곡 이이(李珥), 문강공 우계 성혼(成渾)과 참찬 송순(宋純), 문헌공 고봉 기대승(奇大升)은 소리를 같이하고 기운을 같이 하는 계를 맺어 처음에는 임백령의 시호를 낮추자 하였는데 중간에 가서는 윤원형의 죄를 주자하고, 끝에 가서는 날이 새도록 계미년에 동인(東人) 송응개(宋應漑)ㆍ박근원(朴謹元)ㆍ허봉(許崶) 등 세 사람을 각각 회령(會寧)ㆍ강계(江界)ㆍ갑산(甲山)으로 귀양 보낸 일이 무고함을 주고받았습니다. 나라 사람들이 의지하는 것은 사류(선비)들로 종묘의 내부에 있어서는 송나라의 사마광 온국공(溫國公)과 여공저 신국공(申國公)이요, 종묘의 외부에 있어서는 이락 연원록(伊洛淵源錄)입니다.
옛날에 이르기를 “소나무 대나무처럼 꿋꿋한 절조요, 물과 달처럼 맑은 정신”이라고 하였듯이 위로는 선조(宣祖) 임금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송나라 인물이나 당나라 시의 음률로 말하면, 멀리 있어도 중국 사신들의 칭찬을 얻었는데, 이로부터 또 백사 문충공 이항복, 청음 문정공 김상헌과, 우암 문정공 송시열을 차례대로 공송(公誦)하기를 천추만세에 별 같고 산 같다 하고,
卓卓乎文成 文簡兩先生之主人者, 非思庵而誰要之? 又莫非《小學》《心經》《近思錄》所從出爾。 此尤孝廟所以不拘永平之享, 而一疏特允於本院者也, 不抑猗歟休哉。乃若黃岡先生以文成道義之交, 啓文元家庭之學。祠箕子而下汔于靜庵 趙文正之師生, 崇文純而追及於慕, 在金文敬之文集。邦禮是正, 則黨人是斥, 則沈貞 元衡之徒熄焉。卽國系辨誣, 厥功尤偉, 而文成所詡, 初不獨以是, 則申象村、李月沙、崔簡易所述, 今可覆按也。巽庵先生襲乃祖名謙之訓, 有自號巽庵之旨。雖居戚畹而扶士類有力則文成一隊所胥賴也。
탁탁호문성 문간양선생지주인자, 비사암이수요지? 우막비《소학》《심경》《근사록》소종출이。 차우효묘소이불구영평지향, 이일소특윤어본원자야, 불억의여휴재。내약황강선생이문성도의지교, 계문원가정지학。사기자이하흘우정암 조문정지사생, 숭문순이추급어모, 재김문경지문집。방례시정, 칙당인시척, 칙심정 원형지도식언。즉국계변무, 궐공우위, 이문성소후, 초불독이시, 칙신상촌、이월사、최간이소술, 금가복안야。손암선생습내조명겸지훈, 유자호손암지지。수거척원이부사류유력칙문성일대소서뢰야。
문성(이율곡)과 문간(박눌재) 두 선생도 우뚝한 주인공이었으니, 사암(朴淳)이 없다면 누구를 책망하겠습니까? 또 《소학》과 《심경》, 《근사록》이 사암에게서 나오지 아니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더욱 효종 때에 영평(永平)의 향사(享祀)에도 불구하고, 한 번의 상소로 특별히 본 서원을 윤허한 것이니 거룩하고도 아름다운 일에 억누를 수 없습니다. 만약 황강(김계휘,1526-1582)선생이 문성(이율곡, 1536-1584)과 도의로 교우관계를 맺었다면 문원(김장생, 1548-1631)은 가정의 학문을 가르쳤을 것입니다.
기자(箕子) 이하로 문정공 정암 조광조(1482-1519)의 사생(師生)에 이르기까지, 존경했던 문순공(李滉,1501-1570)이 흠모하여 뒤쫓아 갔던 것이 김문경(金集,1574-1656)의 문집에 있습니다.
나라의 길흉의 의식으로 이를 바로 잡는 것은, 당인(黨人)을 물리치는 것인데, 심정(沈貞)과 윤원형(尹元衡)을 따르는 무리들이 어찌 없어지겠습니까?
곧 조선 태조(太祖)가 고려(高麗)의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의 아들이라고 명(明)나라의 《태조실록(太祖實錄)》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잘못 기재되어 있는 것을 선조(宣祖) 때에 와서 완전히 바로잡았는데, 그 공이 더욱 훌륭하다고, 문성공(이율곡)을 자랑한 바, 처음부터 혼자서 한 것이 아니며, 신상촌(申象村) 과 이월사(李月沙) 최간이(崔簡易)와 함께 저술한 것을, 지금 조사해볼 수 있습니다.
손암선생(심의겸)은 할아버지를 계승하여, 이름에 겸손할 겸(謙)자의 훈을 넣고, 스스로 호를 ‘공손한 암자(巽庵)’라는 뜻을 있게 하였습니다. 비록 임금의 내척과 외척으로 살지만, 사류(선비)를 도울 힘이 있어서, 문성공(이율곡)과 많은 사람들이 서로 힘입은 바 있습니다.
雖云領首, 而非本意修隙, 則金世濂一言所追諒也, 外補之時, 文成固是公議, 而文元猶疑於誠心。文網之日, 仁弘豈無題目, 而末流竟歸於誤國。苟欲爲斯人折衷, 當于尤庵 宋文正銘得之矣。松江先生卽河西 金文正及高峰 奇文憲門人也, 牛溪、栗谷諸大賢之益友也。 方其釋褐, 坐兄姊 乙巳之禍而枳廢無極。 逮夫言事, 荷文純諫臣之譽而峭直有忤, 非不恢恢乎古昔淸者之量矣, 金洪詆賢, 立叱之以袞貞。非不勉勉乎文成變和之託矣, 三尹遘讒, 亟脫之於暗昧, 於是乎李潑,金宇顒三竄之徒, 日張月滋。
수운영수, 이비본의수극, 칙김세렴일언소추량야, 외보지시, 문성고시공의, 이문원유의어성심。문망지일, 인홍기무제목, 이말류경귀어오국。구욕위사인절충, 당우우암 송문정명득지의。송강선생즉하서 김문정급고봉 기문헌문인야, 우계、율곡제대현지익우야。 방기석갈, 좌형자 을사지화이지폐무극。 체부언사, 하문순간신지예이초직유오, 비불회회호고석청자지량의, 김홍저현, 입질지이곤정。비불면면호문성변화지탁의, 삼윤구참, 극탈지어암매, 어시호이발,김우옹삼찬지도, 일장월자。
비록 당의 우두머리라고 하지만 본의 아니게 틈이 벌어져, 김세렴(金世濂)의 한 마디 말에 흉을 불렀던바, 지방관에 보임 되었을 때에, 문성(율곡)은 진실로 이를 공적으로 논의하였는데, 문원(김장생)은 오히려 성심(誠心)을 의심하였습니다.
사화(士禍)가 있는 날에, 정인홍은 어찌 글 쓸 안목도 없는데, 말세의 흐름은 마침내 나라를 그르치는 것으로 돌아갔으니, 진실로 이 사람들이 절충(折衷)을 하고자 하면 우암 송문정(송시열)과 합당한 명(銘)을 얻게 됩니다.
송강선생(松江先生)은 곧 하서 문정공 김인후와 고봉 문헌공 기대승의 문인으로 우계, 율곡 등 여러 큰 어진이의 유익한 벗이었습니다. 벼슬길에 오르자, 을사년(1545년) 화에 형과 누나가 연좌되어 벼슬길이 막히고 버려진지 끝이 없다가, 나랏일에 관계되는 상소에 이르러서, 간(諫)하는 신하의 명예로 文純公〔李滉〕을 꾸짖었는데, 성품이 깔깔하고 곧았지만 미움을 받았습니다. 포용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고 옛날에는 청백한 사람의 도량이었는데, 김명윤과 홍언필 같은 어진 사람이 헐뜯고, 남곤(南袞)과 심정(沈貞)을 세워놓고 꾸짖었습니다.
꾸준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문성공(이율곡)은 변하여 화합을 당부하였고, 三尹(윤현, 윤두수, 윤근수)은 참소 하라고 하였는데, 사람됨이 어리석고 못나서 사리(事理)에 어두운 것을 빨리 벗어나고자, 이제는 이발(李潑)과 김우옹(金宇顒)을 삼찬(三竄)〔박근원(朴謹元)·송응개(宋應漑)·허봉(許篈) 〕의 무리라고 하는 것이, 날로 늘고 달마다 불어납니다.
而牛溪、栗谷、黃岡、巽庵、松江之衊, 無復餘地。雖汝立背君師之後, 曁仁弘讐母之際, 而焦原之酷, 幾及泉壤? 向微癸亥之靖社, 沙溪之頌冤, 則不殆殄乎。 一鶚猛虎, 元有聖奬。壹惠華篇, 可見公評, 斯於宋文正與夫金文忠傳信之文, 重可稽者。盤桓先生文成公 李栗谷門人也, 朴思庵、成牛溪、金黃崗、奇高峯、沈巽庵、鄭松江、高霽峯諸賢之所推許也。 當介淸之背思庵則面折僞學, 不免於首禍。値羣壬之陷松江則身罹縲絏, 又困於停擧, 壬辰、丁酉之亂, 旋有大焉, 協守江華, 金文烈資其方略, 從事海徼, 權元帥仗其召募。
이우계、율곡、황강、손암、송강지멸, 무부여지。수여립배군사지후, 기인홍수모지제, 이초원지혹, 기급천양? 향미계해지정사, 사계지송원, 칙불태진호。 일악맹호, 원유성장。일혜화편, 가견공평, 사어송문정여부김문충전신지문, 중가계자。반환선생문성공 이율곡문인야, 박사암、성우계、김황강、기고봉、심손암、정송강、고제봉제현지소추허야。 당개청지배사암칙면절위학, 불면어수화。치군임지함송강칙신리류설, 우곤어정거, 임신、정유지란, 선유대언, 협수강화, 김문열자기방략, 종사해요, 권원수장기소모。
우계 성혼(牛溪 成渾), 율곡 이이(栗谷 李珥), 황강 김계휘(黃江 金繼輝), 손암 심의겸(巽庵 沈義謙), 송강 정철(松江 鄭澈)을 욕되게 하는 것은 다시는 여지를 남기지 않아야 합니다. 비록 정여립이 임금과 스승 이율곡을 배신한 후에 정인홍이 수모론(讐母論)을 주장한 때에 초원(焦原)의 잔혹함에 사람이 몇 명이나 황천으로 갔습니까.
지난번 계해(1623년)반정에서 사계 김장생이 원통(寃痛)함을 하소연하니, 위태로움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나운 호랑이처럼 한번 바른 말 하는 사람에게는 임금의 칭찬이 있어 으뜸이 되었습니다. 한 가지 뛰어난 선행(善行)의 꽃다운 시문은, 공평하여 볼만한데, 이것은 송문정(송시열)과 더불어 김문충이 신의를 전하는 글로, 거듭 상고할 만합니다. 반환선생(홍천경)은 문성공 이율곡의 문인으로 사암 박순과 우계 성혼, 황강 김계휘, 고봉 기대승, 손암 심의겸, 송강 정철, 제봉 고경명 등 여러 현인들에게 추대 된 것입니다. 당시 정개청은 사암을 배반하고 거짓 학문을 대면하여 화를 가장 먼저 당하는 것을 면하기 어려웠습니다. 여러 간신들의 모함을 당한 송강 정철의 몸은 마치 포승에 묶여 있으며 또한 과거를 볼 수 없는 정거의 벌로 괴로웠고, 임진, 정유의 난에 곧 바로 크게, 강화도를 협력하여 지키니, 문열공 김천일의 방책을 도와, 해변에서 방책의 일에 매달렸으며, 권율 원수에 의지하여 의병을 불러 모았습니다.
發弘老之誣賢, 而伸卞牛溪, 値昏朝出入, 於爾瞻 仁洪之毒手, 而危言凜凜苦心炳炳。 向使靖社日遲, 則幾不免白馬淸流之慘矣。 俊氣直思呑海渴, 壯心終擬柱天傾, 三黜病翁猶守介。 五窮才子敢言, 酸李東岳、趙玄谷之詩評。噫! 四賢之於思庵, 名位聲跡, 實無所等差可論者。 而未始不一而二二而一, 而參差之序, 瀾漫之歸, 信乎迭經迭緯。 緫之猶五星在天, 有大小進退疾遲伏見之分, 而其芒寒而色正則均耳。良亦盛矣 , 目以同德, 誰或不可, 是則前之特享後之追享, 亦天時人事早晩疎密之別爾。
발홍로지무현, 이신변우계, 치혼조출입, 어이첨 인홍지독수, 이위언늠늠고심병병。 향사정사일지, 칙기불면백마청류지참의。 준기직사탄해갈, 장심종의주천경, 삼출병옹유수개。 오궁재자감언, 산이동악 、조현곡지시평。희! 사현지어사암, 명위성적, 실무소등차가론자。 이미시불일이이이이일, 이삼차지서, 란만지귀, 신호질경질위。 총지유오성재천, 유대소진퇴질지복견지분, 이기망한이색정칙균이。량역성의 , 목이동덕, 수혹불가, 시칙전지특향후지추향, 역천시인사조만소밀지별이。
박홍로(朴弘老)가 어진이의 무고를 일으키자, 우계 성혼이 신변(伸辨)하였는데, 어지러운 조정(광해군 시대)을 만나 출입하면서, 이이첨, 정인홍이 악독한 수단에도 기품이 높은 말로 씩씩하게 마음과 힘을 다하였음이 밝고 빛났습니다.
지난번 사직(社稷)을 평정시키는 날이 지체되어, 백마청류(白馬淸流)의 참화를 면하지 못할 번 하였습니다. 준일한 기상, 곧은 생각에 목말라 바다를 삼킬 만하고, 장한 마음은 마침내 하늘 기둥이 기울어진 듯 의심스러웠으나, 세 번 쫓겨난 병든 늙은이가 오히려 절개를 지킨 것입니다. 오궁(五窮)의 재주 있는 사람이 감히 말하는데, 이동악(李東岳)과 조현곡(趙玄谷)의 시평(詩評)을 케케묵다고 지금 상고할 수 있습니다.
아, 4현으로서 사암은 명성과 지위에 대한 평판의 자취가 실로 차등하다고 논하는 자가 없습니다. 일찍이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가 아닌 것이 없고, 들쭉날쭉한 차례가, 난만하게 돌아가니, 참말로 사건의 전말을 벗어난 것입니다. 오히려 오성(五星)이 하늘에 존재하는 것이 모두이니, 대소 관원의 진퇴가 빠르거나 늦은 것이 있지만 삼가 구분하여 살펴보면, 그것은 차가운 창끝처럼 엄정한 태도가 모두 똑 같습니다. 좋은 것은 크게 성하고 덕을 같이 한 것으로 보니 어떤 사람이 혹 불가하다 해도 이것은 먼저 특별히 제향하고 뒤에 추향하는 것이니 또한, 하늘의 때와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이 조만간에 소밀하게 나누어집니다.
其又何疑之有哉? 士論旣然, 朝議可知。 遂令咫尺神位, 豐約相懸。嗚呼, 惜哉每當春秋丁享, 自院備供牲幣。 一堂芬苾或公或私, 禮甚不安本州亦有可據之例。 景賢書院有奇高峯、金鶴峯追享, 而同致牲幣已例班班, 伏乞閤下一遵, 光州之月峯, 本州之景賢, 已行之例, 月井書院四位, 牲幣一齋封致甚盛甚盛。 玆敢將士論, 千里齎書齊聲仰籲。 自今丁享三位牲幣一如, 思庵先生位俾作永久之規, 士林幸甚斯文幸甚。
기우하의지유재? 사론기연, 조의가지。 수령지척신위, 풍약상현。오호, 석재매당춘추정향, 자원비공생폐。 일당분필혹공혹사, 예심불안본주역유가거지예。 경현서원유기고봉 김학봉추향, 이동치생폐이예반반, 복걸합하일준, 광주지월봉, 본주지경현, 이행지예, 월정서원사위, 생폐일재봉치심성심성。 자감장사론, 천리재서제성앙유。 자금정향삼위생폐일여, 사암선생위비작영구지규, 사림행심사문행심。
또 어찌 의심이 있겠습니까? 선비들의 논란이 이미 그러함을 조정 의론에서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드디어 가까운 거리에 신위를 두었으나 풍부함과 절약함에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아, 애석하게도 매번 봄가을 정일(丁日)에 지내는 제향에서 서원 스스로 산 제물과 폐물을 준비하여 바칩니다. 한 사당에서 제사 모심이 혹은 공적으로 혹은 사적으로 하니 예법이 심히 불안하지만 본주 또한 증거 할 규례가 있습니다.
경현서원에 고봉 기대승과 학봉 김성일을 추향하고 있어, 함께 산 제물과 폐물을 보내는 것이 전례가 뚜렷하여 살펴보건대 합하께서 한결 같이 따르시어 광주의 월봉서원과 본주의 경현서원에 이미 행한 예로 월정서원의 4위에도 산 제물과 폐물 전체를 북돋아 보내주시면 매우 감사하고 감사하겠습니다.
이에 감히 선비들의 여론과 천리 먼 곳에서 가져온 편지를 일제히 소리쳐 우러러 호소합니다. 이제부터는 정일(丁日) 제사에 3위의 산 제물과 폐물을 한 결 같이 하여 사암선생 자리가 영구적 규범으로 만들 수 있다면 유도(儒道)를 닦는 학자들은 매우 다행이며 유학자도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쪽지 글>
※이 글은 문집 상단 여백에 쪽지 글로 첨부된 것이다 <역자 주>
月井院蹟付刊于盤桓集行于世。 按呈禮曹文多疎漏處, 或上下交錯, 印出時必考月井院蹟而刊行爲至當。
월정원적부간우반환집행우세。 안정예조문다소누처, 혹상하교착, 인출시필고월정원적이간행위지당。
월정원적에 붙여서 책을 펴낸 반환집(홍천경 유집)이 세상에 전한다. 살펴보면, 예조에 올리는 글이 소루한 곳이 많으니, 혹 위 아래로 서로 뒤섞여서 얼크러지면 책판을 박아낼 때 반드시 월정원적을 참고하여 간행하는 것이 지당하다.
<泥齋集卷之二<終>
해설
*월정서원은 1664년(현종5년)에 창건되어 박순, 김계휘, 심의겸, 정철의 위패를 모셨고 1669년에 사액서원이 되었으며, 1767년 홍천경이 추배되었다.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없어 졌다가 1960년 복원되었다.
*산 제물과 폐백(幣帛) : 원문 牲幣(생폐)는 희생(犧牲)과 폐백(幣帛), 즉 천지종묘(天地宗廟) 제사 때 제물로 치는 산 짐승과 제물에 올릴 제찬(과일, 술, 기타 제물 등)을 말함
*합하(閤下) : 여기서는 예조판서를 말한다.
*관청의......되었는데 : 원문 積逋(적포)는 積滯된 逋欠인데, 포흠은 관청의 물건을 사사로
이 써 버림이란 뜻이고 欠逋가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이락 연원록(伊洛淵源錄) : 朱喜가 찬한 책. 송나라 학자들의 언행을 수록한 책자임.
*공송(公誦) : 여럿의 의견을 좇아 사람을 천거함, 다른 사람을 두둔하여 말함, 여러 사람이 칭송함.
*永平의 享祀 : 조선왕조실록 현종17권 1669년 10월24일 조에 보면, 永平儒生李遇輝等疏請文忠公朴淳書院額號/영평 유생 이우휘 등이 상소하여 문충공 박순의 서원에 액호를 청하자, 上下該曹施行。/임금이 해조에 내려 시행하게 하였다. 위와 같은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글을 음미해 보면 영평에 서원을 세우고 사액 액호를 임금께 청하자 허락하는 내용이니 永平之享은 이것을 의미한 듯하다. 효종조의 일기를 현종조에 완성하니 기록은 현종조에 있는 것이다. 승정원일기 숙종 39년 5월 5일 (신사) 에 보면, 閔鎭遠 등이 입시하여 永平의 儒生 등이 朴淳의 書院 등에 賜額을 청한 문제에 대해 논의한 글이 보인다.<永平儒生疏, 卽故相臣朴淳書院事也。> 영평은 경기도파주 용평에 박순을 모신 서원이 있다
*沈貞(심정) : 생원으로 임술년에 급제하였다. 말과 용모가 교활하고 아첨이 넘치며 자칭 꾀를 잘 내고 임기응변을 잘한다 하니, 사람들이 지혜 주머니로 지목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에 가담,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에 녹훈되고 화천군(花川君)에 책봉되었다. 1519년 심정, 남곤, 홍경주 등과 모의, 왕을 움직여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 등 사류를 일망타진하였다.
*신상촌(申象村) : 상촌 申欽, 1566(명종 21)~1628(인조 6)의 인물로 이정구(李廷龜)·신흠(申欽)·장유(張維)·이식(李植)과 함께 '월상계택'(月象谿澤)이라 통칭되는 조선 중기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의 한 사람이다.
*이월사(李月沙) : 월사 이정구, 1598년(선조 31) 명나라의 정응태 무고사건이 일어났을 때 〈무술변무주 戊戌辨誣奏〉를 지어 명과의 갈등을 해결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여러 차례 대제학에 올라 문사(文詞)에 능한 자들을 발굴했고, 중국을 내왕하면서 100여 장의
〈조천기행록 朝天紀行錄〉을 펴냈다. 그 뒤 병조판서·예조판서·좌의정·우의정을 지냈다.
*최간이(崔簡易) : 崔岦. 1539(중종 34)∼1612(광해군 4). 본관은 통천(通川). 자는 입지(立之), 호는 간이(簡易)·동고(東皐). 진사 자양(自陽)의 아들로 빈한한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타고난 재질을 발휘하여 1555년(명종 10) 17세의 나이로 진사가 되고, 1561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중 명나라와의 관계가 빈번하여지자 문장으로 보국(保國)하였다. 그리고 중국에 갔을 때 중국문단에 군림하고 있던 왕세정(王世貞)을 만나 문장을 논하였고, 그곳 학자들로부터 명문장가라는 격찬을 받았다.
*원문 今可覆也는 今可覆按也의 誤記 같다. 앞뒤 문맥이 물 흐르듯 하야야 하는데, 해석해 놓고 보니 어설픈 면이 보여 필자가 약간 수정하였다.
*김세렴(金世濂) : 1593(선조 26)~1646(인조 24)의 인물로 1616년(광해군 8) 문과에 장원하여 예조좌랑으로 시강원사서를 겸했다. 홍문관에 기용되어 수찬·지제교를 거쳐, 1617년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광해군 때 인목대비를 폐모시키자는 주장을 반대하다가 곽산에 유배되었다. 강릉으로 옮겨졌다가 인조반정 뒤 1623년 다시 수찬으로 기용되어, 헌납·교리·부응교를 지내고 1636년(인조 14) 통신부사로 일본에 다녀왔다. 사간을 거쳐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1638년 동부승지·이조참의·부제학 등을 거쳤다. 1641년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외직(外職)을 청하여 안변부사로 있다가 함경도관찰사에 부임했다. 이때 〈근사록 近思錄〉·〈소학 小學〉·〈성리자의 性理字義〉ㆍ〈독서록 讀書錄〉 등을 간행하여 도민의 교화에 힘썼다. 1644년 이래 평안도관찰사, 대사헌 겸 홍문관제학, 도승지, 호조판서 등을 지냈다.
*정인홍 : 來庵 鄭仁弘(1536년~1623년)先生이 탁행지사(卓行之士)로 출사(出仕)하였다. 1623년 소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 폐모론(廢母論)을 주도하였다는 날조(捏造)된 죄명(罪名)으로 서울로 압송되어 만87세에 세상을 떴다. 門人인 정온(鄭蘊)ㆍ이대기(李大期) 등이 처형에 강력히 반대하고 스승의 원통함을 호소하였다.
*송강선생(松江先生) : 鄭澈을 말함
*이발(李潑) : 1544(중종 39)∼1589(선조22)대의 인물로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경함(景涵), 호는 동암(東巖)·북산(北山). 제학 중호(仲虎)의 아들이다. 김근공(金謹恭)·민순(閔純)의 문인으로 1568년(선조 1)생원이 되고, 1573년 알성문과에 장원,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이조정랑으로 발탁되었다. , 이조전랑으로 있을 때에는 자파의 인물
을 등용함으로써 사람들로부터 원망을 샀으며, 동인의 거두로서 정철(鄭澈)의 처벌문제에 강경파를 영도하여 북인의 수령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이이(李珥)·성혼(成渾) 등과도 교분이 점점 멀어져 서인의 미움을 받았다. 1589년 동인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남을 계기로 서인들이 집권하게 되자, 관직을 사퇴하고 교외에서 대죄(待罪)하던 중 잡혀 두 차례 모진 고문을 받고 장살(杖殺)되었다. 그가 죽은 뒤 82세의 노모와 8세의 아들도 엄형(嚴刑)으로 죽었는데, 그 노모는 형벌이 너무 지나치다고 꾸짖으면서 끝내 역모에 관한 일을 승복하지 않았으며, 문생·노비도 모두 엄형을 가하였으나 승복하는 자가 없었다.
*金宇顒(김우옹) : 1540(중종 35) 경북 성주~1603(선조 36)대의 인물로 1567년 식년문과 병과로 급제하여 1582년 홍문관직제학이 되었고, 대사성·대사간을 거쳐 부제학·전라도관찰사·안동부사 등을 지냈다. 1589년 기축옥사가 일어났을 때, 정여립과 함께 공부했다는 이유로 회령에 유배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사면되어 병조판서를 지냈고, 명(明) 찬획(贊劃) 원황(袁黃)의 접반사가 되었다. 그뒤 명의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을 위한 문위사가 되었으며, 왕의 편지를 명의 장수 이여송에게 전했다. 동지의금부사가 되어 왕을 모시고 서울로 돌아와 한성부좌윤·혜민서제조 등을 지냈다. 1599년 자리에서 물러나 인천에서 지내다 다음해 청주로 옮겨 그곳에서 죽었다.
*삼찬(三竄) : 이이(李珥)를 논박하다가 귀양 간 박근원(朴謹元)·송응개(宋應漑)·허봉(許篈) 등을 말함 *정여립 : 1546년(명종1)∼1589년(선조22)우 인물로 1567년(명종22) 진사가 되었고, 1570년(선조2) 식년문과 을과에 급제한 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각별한 후원과 촉망을 받아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율곡 이이는 그의 기억력이 비상한 것과 총명함을 높이 사서 그를 아꼈다. 1583년 예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수찬에 올랐다. 그는 서인으로서 이이의 후원을 받았으나, 당시 집권세력인 동인으로 전향하고, 이이, 박순, 성혼 등 서인들을 비판하였다. 왕이 이를 불쾌히 여기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후 정여립은 진안 죽도에 서실을 짓고 대동계를 조직하여 매달 사회(射會)를 여는 등 세력을 확장하여 갔다. 1587년(선조20) 왜선이 전라도 손죽도를 침범하였을 때 대동계를 동원하여 왜구를 격퇴하였다. 이후 대동계 조직은 황해도까지 확대되었다. 1589년(선조22) 이들의 움직임이 노출되자 황해도관찰사 한준,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 신천군수 한응인 등이 연명으로, 한강이 얼어붙으면 서울로 쳐들어가 대장 신립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 한 후 궐기하기로 하였다고 고변하였다. 이 일로 관련자들이 체포되고, 정여립은 아들 정옥남과 함께 죽도로 피신했다가 관군의 포위망이 좁혀 들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철이 사건을 조사하여 처리하면서 정언신, 이발 등 동인의 주요 인물이 대거 숙청되는 기축옥사로 이어졌다. 그러나 역사는 정여립의 모반 사건을 조작으로 보는 설도 있다. 1589년 12월14일, 유생 丁巖壽, 朴天挺 등이 상소하여 좌의정 이산해, 익산군수 이영남, 이발, 전현감 나사침, 정인홍, 한효순, 이정립, 정개청, 정언지, 권극례, 권극지, 이일, 홍여순, 유영립 등 동인당 거의 전부를 정여립과 관련자라 처벌을 재차 상소하니, 오히려 선조는 정암수 등이 과인을 서험하려 상소했다 하고 상소한 정암수 등을 문초하기에 이른다. 정여립의 모반 사건을 담당한 정철이 지방 선비들을 동원하여 이러한 상소를 올리게 한 것이 훗날 드러난다. *수모론(讐母論) : 광해군이 의붓 어머니 仁穆大妃(宣祖의 繼妃)를 폐위하는 사건을 말함 *박홍로(朴弘老) : 1552(명종 7)∼1624(인조 2). 본관은 죽산(竹山). 초명은 홍로(弘老), 자는 응소(應邵), 호는 이호(梨湖). 1576년(선조 9)에 진사가 되고 1582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해 이듬해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1590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1593년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1595년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 1597년 첨지중추부사에 이어 대사성·도승지를 거쳐 병조참판이 되었다. 이듬해 평안도관찰사로 다녀와 1599년 다시 병조참판이 되었고, 도승지·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601년에는 대사헌, 이어서 호조참판·동지의금부사를 거쳐 진하부사(進賀副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었다. 이듬해 돌아와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이 되어 ≪황화집류 皇華集類≫를 편찬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삭직당하였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 광해군을 태상왕으로 모시고 인성군(仁城君)을 추대하려 한다는 복위 음모와 관련, 역모죄로 사사(賜死)되었다. 1691년(숙종 17) 신원(伸寃)되었다.
*백마청류(白馬淸流) : 당 애제(唐哀帝) 2년에 주전충(朱全忠)이 조정의 명사(名士) 30여 명을 백마역(白馬驛)에 모아 하루저녁 사이에 모조리 살해하여 황하(黃河)에 던졌다. 이보다 먼저 이진(李振)이 여러 차례 진사시(進士試)에 낙방하고 나서 조사(朝士)들을 깊이 미워하는 터이라 주전충에게 “이들은 항상 청류로 자처해 왔으니, 의당 탁류(濁流)에 던져져야 한다.” 하여 주전충이 그대로 따른 것이다. 《당서(唐書)》 애제기(哀帝紀).
*오궁(五窮) : 지궁(智窮),학궁(學窮), 문궁(文窮), 명궁(命窮), 교궁(交窮)을 말함.
*李東岳(이동악)은 李安訥을 말함. 동악은 호임.
*趙玄谷(조현곡)은 趙緯韓, 명종 13년(1558)에 나서 인조 27년(1649)에 죽었다.
*차가운......태도 : 원문 芒寒而色正은 寒芒正色/차가운 창끝과 같이 엄정한 태도. 중국 포청전 사당에 보면 현판에 色正芒寒이란 글이 있다.
*제사 모심이 : 원문 芬苾(분필)은 직역하면 향기가 높음 의 뜻인데, 의역하면 제사 모심으로 해석, 즉 향촉 향기, 술 향기를 두고 그리 표현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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