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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그 에코토피아의 길 스크랩 해상왕 장보고 중국 유적 답사기 (3) - 셋째날
남궁효 추천 0 조회 491 12.08.26 17:23 댓글 5
게시글 본문내용

 

 

 

셋째날( 2012. 8. 3)

 

 

545분에 기상하여 창밖을 보니 비가 내리고 있다. 샤워를 하고 찻물을 끓여 보온병에 넣고 짐을 꾸려 1층 안내대로 내려갔다. 짐을 맡긴 다음 2층 식당으로 올라가 호텔식 아침을 맛있게 먹었다. 화장실에서 이빨을 닦고 서둘러 치박으로 떠나는 버스로 올랐다.

 

치박(緇博)은 산둥성 중부에 위치한 공업도시로서 치산과 박천이 합쳐서 치박이 되었다. 산둥성 최대의 탄전이 있으며, 도자기와 실크, 유리세공으로 유명하다. 시내 동쪽의 임치는 춘추전국시대 제나라의 수도였다. 동주(東周)시대의 유적으로 순마갱과 고차박물관이 있으며, 제나라역사박물관과 강태공 사당 등이 있다.

 

 

 

 

중국고차박물관으로 들어가니 1층은 중국의 여러 가지 마차가 전시되어 있고, 지하에는 동주시대의 것으로 대규모 순장 마차들이 진흙 사이로 삐죽삐죽 나와 있다. 1990년 고속도로공사중에 발견된 2800년전의 유물로 당시 전국 10대 고고학 발견의 하나라고 불렸다고도 한다. 대체로 춘추전국시대까지 중국인들은 네 마리 말이 이끄는 전차를 타고 전쟁을 수행했다. 그래서 이런 마차를 백대 낼 수 있으면 백승국(百乘國), 천대를 만들어낼 수 있으면 천승국(千乘國)으로 불렸다. 전국 말기에 이르러 중국은 유목민들의 영향으로 말을 타는 법을 배웠고, 가장 변방의 연나라, 진나라 등지는 승마기술을 도입하여 전쟁을 유리하게 만들어 갔다.

 

 

 

 

 

 

 

 

 

 

 

 

 

 

 

오전 내내 비가 내려 참 시원하다만, 태산(泰山)에 오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여 좌중은 불안해진다. 여기가지 와서 태산에 오르지 못한다면 그거 참 안타가운 일이다. 고속도로변에는 조림한 포플라, 작은키나무, 화단이 3열로 줄지어 지나간다. 어디를 가나 넓은 땅이라 걱정이 없을듯도 하다만, 산둥성 인구가 9천만이 넘어 1억 가까이 된다하니 한국의 1.5배인 15만 평방킬로에 우리 2배의 인구가 사는 셈이다. 어쨋거나 태산이 있다는 태안까지는 170km 나 멀리 있어서 한 숨 자고 일어나 음악을 들었다. 박완규의 하망연과 김광석의 붙이지않은 편지를 들으면서 에너지를 얻는다.

 

셋째날 점심과 저녁을 먹었던 태산국제반점

 

 

결국 태풍의 영향으로 태산 입산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운영진들은 머리를 맞대어 숙의하다가 대안으로 공자의 고향 곡부 관광을 제시했다. 태산은 1545m로 그리 높지는 않으나 천하의 제왕들이 달려와서 하늘에 제사[봉선(封禪)의식]를 지냈던 곳으로, 역사적으로 동악(東嶽)으로 불리었고 만물소생과 도가의 명산이자 천하제일 명산으로 알려져 있다. 오악(五嶽)은 하늘과 맞닿은 산악신앙으로 하남 숭산을 가운데로, 서악은 섬서성의 화산이며 남악은 호남성의 형산, 북악은 산서성의 항산이 그것이다. 우리나라도 나라의 수호신이 산에 거쳐한다는 성산 숭배사상이 있었다. 신라 때에는 팔공산, 태백산, 지리산, 계룡산, 토함산을 오악으로 모셨다.

 

한 번 오르면 10년은 장수할 수 있다는 태산, 그래서 중국인들이 반드시 가보고 싶어한다는 천하 명산 태산 등정을 포기하고 우리는 남쪽 노나라 수도 곡부로 내려갔다. 버스 안에서 가이드가 곡부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곡부는 공자의 고향이며 공씨는 천하제일성씨로서 존경을 받고 있는데, 공자의 사당인 공묘(孔廟)와 공씨 집안의 생활터전인 공부(孔府), 그리고 공씨 가문 10만기의 무덤이 모여있는 공림(孔林)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뒤이어 양 교수님이 추가적으로 설명을 하였다. 공자는 춘추시대에 현실을 너머서는 이상적인 일을 벌여서 별로 인기가 없었지만, 진나라가 망하고 한나라가 수립되면서 공자의 예치(禮治)와 사() 계급의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 등이 채택되면서 급부상하게 되었다. 특히 사마천은 공자를 제후, 왕의 수준으로 격을 높여서 공자세가를 써서 여타 사상가들이 열전에 들어가 있는 것과 차별대우 하였다. 그래서 공자 사당도 왕의 예우로 5문을 세웠다. 마오쩌둥 시대에 비림비공운동으로 공자가 배척되기도 했으나 최근에는 민족 문제가 주요 사항으로 떠올라 다시 스타로 부상하게 된다.

 

곡부에 도착하니 오후 3. 5시이면 공묘가 닫힌다고 하여 우리는 2시간 반 안에 3곳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야말로 주마간산격으로 한 번 훑어보았다. 먼저 전기차를 타고 공묘 앞으로 이동하였다. 수많은 관광객들과 안내원, 여기저기서 설명을 하고 뭉쳐서 이동하고 우리는 80여명이나 되는데 가이드 한 명이 설명하고 죽죽 앞으로 나아가니 거의 설명도 없이 그저 앞 사람을 따라 사진찍으면서 나아갔다. 대성전은 참으로 넓고 크고 위풍당당하다. 관광객들은 너나 없이 기념촬영하느라 정신이 없다. 나 역시 한 두컷 찍었다. 대학 후배 백유선 선생과도 기념촬영을 했다.

 

 

공묘로 가는 길은 저 건너 보이는 건물을 거쳐서 이곳으로 넘어오게 되어 있다.

곡부 삼공 안내도

2조 대원들과 함께

곡부의 옛 성곽

곡부라는 붉은 글씨가 보인다.

성곽 주변을 흐르는 해자 양측으로 버드나무가 늘어져 있다

 

 

 

공묘로 가는 제1문

지극한 성인의 묘

공묘 제2문

공묘 내부 안내도

 

 

 

제3문 홍도문

 

 

 

 

규문각

 

 

 

 

제7문

 

제7문 대성문

 

 

대성전. 공자의 사당이다

제주에서 오신 고 샘과 함께

 

 

 

 

 

공자상

 

 

다음으로 곡부 성곽길을 이리저리 걷다가 공부로 들어갔다. 공씨 집안에서 대대로 살던 곳 생활 공간이다. 역시 생각할 틈도 없이 셔터를 눌러대다가 나왔다. 바깥에는 공씨 후손들이 운영하는 기념품점이 길 양쪽으로 늘어서 관광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뭘 골라야할지도 모르겠고, 늦었다고 재촉하는 가이드의 요청에 그저 바삐 지나가고 말았다.

 

 

 

 

공부 입구

성스러운 부서라고 적어 놓은 편액

성인지문

 

 

 

 

 

 

 

 

 

 

 

 

공부 내부의 도면 안내판

 

 

 

 

 

바깥으로는 아름다운 정원이다

 

 

공림(孔林 : 공자의 묘가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하여 우리는 다시 전기차에 탔다. 공림 입구에 내려 매우 널찍한 대로를 지나 공림으로 들어갔다. 역시 수많은 인파가 한데 얼려 지나간다. 다들 빠른 걸음들이다. 공자의 무덤은 잡초가 무성했고, 참배객들과 관광객들로 붐빈다. 대충 기념촬영을 하고 걸어나오다가 공자의 손자 자사의 무덤이 보여서 셔터를 눌렀다.

 

 

같은 조원끼리 기념 촬영

304호 4인방

 

공자님 무덤

공자의 손자 자사의 무덤

 

이번 여행에서 우연히 만난 대학 후배 백 선생과 함께

 

다시 입구 광장에 나서니 오른편으로 기념품점이 주욱 줄지어 서있다. 나는 뭔가 기념품을 사야겠기에 이리저리 보다가 공부가주라는 고량주 두 병을 샀다. 버스로 돌아오니 5시 반 가량 되었다. 정말이지 초간단 방식으로 곡부를 순례한 셈이다. 많은 아쉬움이 남지만 이거라도 복이라고 여기면서 태안으로 떠나는 버스에 올랐다.

 

 

태안의 어느 호텔 식당에서 점심과 저녁 두 끼의 식사를 했다. 저녁에는 꼭 테이블에 청도맥주 3병과 콜라 사이다 등이 놓인다. 고점용 선생이 공부가주를 먼저 풀어서 나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맥주와 고량주를 섞어 먹으니 취기가 급하게 오른다. 맛있게 먹고 버스에 올라 다시 치박의 숙소인 만호대주점으로 달렸다.

 

만호대주점은 고급 호텔이었다. 1130분경에 도착했지만, 우리는 또다시 모여서 칭타오 맥주와 공부가주를 들면서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침 인터넷이 연결되기에 가지고 간 넷북을 개통시키고 아내에게 편지와 사진을 보냈다. 언젠가 박원순 시장이 변호사 시절 북유럽 교육탐방을 갔을 때, 버스에 오르면 얻어듣고 보고 느낀 정보와 생각을 바로 바로 노트북에 정리해가고, 귀국해서는 얼마 안 되어 책으로 출판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도 흉내낸다고 작은 넷북을 들고 갔지만 피곤하고 집중이 안 되어 버스에서 사용한 적은 없었다. 공연히 짐만 늘어나 쓰지도 않는 가방을 하나 더 들고 다녀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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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2.08.28 01:11

    첫댓글 중국은 진시황 무덤도 그렇고 공자의 무덤도 그렇군요. 규모는 엄청 크지만 정교함은 우리보다 못하지요?

  • 작성자 12.08.28 09:58

    맞습니다. 제가 조선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조선문명은 정말 아름다운 눈썰미를 가지고 완벽한 자연미를 인공적으로 창출했다는데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작금의 한류는 겨우 시작에 불과합니다. 최종적으로는 이런 조선문명의 미감이 세계에 전파될 것입니다.

  • 작성자 12.08.28 10:02

    중국은 크고, 넓고, 많은 특징을 지니고 있어서 그 자체로 사람을 쩔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모든 땅이 국유화되어서 건물을 지을 때도 건축비만 생각하지 우리처럼 땅값을 걱정할 필요가 없게더라구요. 그래선지 새로운 건물은 빌딩이든 아파트든 가옥이든 넓고, 크고, 높게 짓고 있는 중입니다. 저기에 누가 들어가 살까 (인구가 많긴 하지만) 걱정이 들 정도로 정신없이 아파트를 지어 올리고 있습니다.

  • 작성자 12.08.28 10:06

    그러니 제한된 공간에서 최소한의 변화로 자연과 함께하는 문명을 지닌 우리와는 조건부터 달랐나 봅니다.
    대신에 중국은 소박하고 텁텁한 측면도 많아서 십 수 억 인구가 공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음식이 값싸고 질도 좋은 편입니다. 가난한 이들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 12.08.30 09:38

    중국 공산당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일단 굶주림에 허덕이던 인민들이 먹을거리 문제를 확실하게 해결하는데서부터 출발했다고 하지요. 음식값이 저렴하여 일단은 먹고 사는 문제만은 걱정을 하지 않도록 한 정책, 쌀독에서 인심 나온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그리고 대국기질이 있어서 그들은 뭐든지 크게만 하려는 속성을 갖고 있지요. 환경적으로는 정 반대의 길을 가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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