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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도론 제48권
19. 사념처품(四念處品)을 풀이함[1]
【경】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의 마하연(摩訶衍)이란 이른바 4념처(念處)이니라.
무엇이 4념처인가?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안의 몸[內身] 가운데에서 몸을 차례로 자세히 관하면서[循身觀] 또한 몸이라는 생각이 없으니,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밖의 몸[外身]에 대해서나 안팎의 몸[內外身]에 대해서 몸을 차례로 자세히 관하면서 또한 몸이라는 생각이 없으니,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이 부지런히 정진하면서 한마음[一心]이 되어 세간의 탐욕과 근심을 없애느니라.
안의 느낌[內受]ㆍ안의 마음[內心]ㆍ안의 법[內法]과,
밖의 느낌[外受]ㆍ밖의 마음[外心]ㆍ밖의 법[外法]과,
안팎의 느낌[內外受]ㆍ안팎의 마음[內外心]ㆍ안팎의 법[內外法]에 대하여 법을 차례로 자세히 관하면서[循法觀] 또한 법이라는 생각이 없으니,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이 부지런히 정진하면서 한마음이 되어 세간의 탐욕과 근심을 없애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어떻게 안의 몸 가운데에서 몸을 차례로 자세히 관하겠느냐?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다닐 때에는 다니는 것을 알고 머무를 때에는 머무르는 것을 알며,
앉을 때에는 앉은 것을 알고 누울 때에는 누운 것을 아나니, 몸이 행하는 그대로 아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안의 몸 가운데에서 몸을 차례로 자세히 관하되, 부지런히 정진하면서 한마음이 되어 세간의 탐욕과 근심을 없애나니,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오고 가고 볼 적에도 한마음이 되며, 굽히고 펴고 굽어보고 쳐다보거나 승가리(僧伽梨)를 입고 옷과 발우를 가지거나 음식을 먹고 눕고 쉬고 앉고 서고 잠자고 깨고 말하고 잠자코 있거나 선(禪)에 들어가고 선에서 나오거나 간에 역시 언제나 한마음이 되느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안의 몸 가운데에서 몸을 차례로 자세히 관찰하니,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안의 몸 가운데에서 몸을 차례로 자세히 관할 때에 한마음이 되어 염(念)하나니,
숨을 들이쉴[入息] 때는 들이쉼을 알고, 숨을 내쉴[出息] 때는 내쉼을 알며,
들이쉬는 숨이 길 때는 들이쉬는 숨의 긴 것을 알고, 내쉬는 숨이 길 때는 내쉬는 숨의 긴 것을 알며,
들이쉬는 숨이 짧을 때는 들이쉬는 숨의 짧은 것을 알고, 내쉬는 숨이 짧을 때는 내쉬는 숨의 짧은 것을 아느니라.
비유컨대 마치 노끈 꼬기를 가르치는 스승이 만약 그의 제자의 노끈이 길면 긴 것을 알고 노끈이 짧으면 짧은 것을 아는 것처럼,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한마음으로 염하되 숨을 들이쉴 때는 들이쉬는 것을 알고 숨을 내쉴 때는 내쉬는 것을 알며,
들이쉬는 숨이 길 때는 들이쉬는 숨의 긴 것을 알고 내쉬는 숨이 길 때는 내쉬는 숨의 긴 것을 알며,
들이쉬는 숨이 짧을 때는 들이쉬는 숨의 짧은 것을 알고 내쉬는 숨이 짧을 때는 내쉬는 숨의 짧은 것을 아느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안의 몸 가운데에서 몸을 차례로 자세히 관하면서 부지런히 정진하며 한마음이 되어 세간의 탐욕과 근심을 없애나니,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몸의 4대(大)를 관하면서 생각하기를,
‘몸 속에는 지대(地大)와 수대(水大)와 화대(火大)와 풍대(風大)가 있다.’고 하느니라.
비유컨대 마치 백정이나 그의 제자가 칼로 소를 죽여서는 네 등분으로 만들며, 네 등분으로 만들고 나서는 서거나 앉거나 간에 이 네 쪽을 자세히 살펴보고 있는 것과 같으니라.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몸의 4대인 지대ㆍ수대ㆍ화대ㆍ풍대를 갖가지로 자세히 관하느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안의 몸 가운데에서 몸을 차례로 자세히 관하나니,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안의 몸은 발에서 정수리까지 얇은 가죽에 둘러싸이고 갖가지의 깨끗하지 못한 것이 그 몸속에 가득 차 있다고 자세히 관하면서,
“이 몸속에는 머리카락ㆍ터럭ㆍ손톱ㆍ발톱ㆍ이빨ㆍ얇은 가죽ㆍ두꺼운 가죽ㆍ힘줄ㆍ살ㆍ골수ㆍ지라ㆍ콩팥ㆍ심장ㆍ간ㆍ허파ㆍ소장ㆍ대장ㆍ위장ㆍ똥ㆍ오줌ㆍ때ㆍ땀ㆍ눈물ㆍ콧물ㆍ침ㆍ고름ㆍ피ㆍ가래ㆍ기름ㆍ뇌 및 막 등이 있다.”라고 생각하느니라.
비유컨대 마치 농부가 창고 속에다 여러 가지 곡식을 걸러 쌓되 벼ㆍ깨ㆍ기장ㆍ조ㆍ콩ㆍ보리 등을 가득히 채워 놓아도 눈 밝은 사람이면 창고 문을 열자마자 곧 알면서,
“이것은 깨요, 이것은 기장이요, 이것은 벼요, 이것은 조요, 이것은 보리요, 이것은 콩이다.”라고 분별하며 모두 아는 것과 같으니라.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이 몸은 발에서 정수리까지 얇은 가죽에 둘러싸이고 몸속에는 머리카락ㆍ터럭ㆍ손톱ㆍ발톱ㆍ치아에서 뇌와 막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깨끗하지 못한 것으로 가득 차 있다.”라고 관하느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안의 몸을 자세히 관하면서 부지런히 정진하며 한마음이 되어 세간의 탐애와 근심을 없애나니,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만일 버려진 죽은 사람의 몸이 하루나 이틀, 닷새가 되어 띵띵 부풀고 푸르뎅뎅하면서 고름이 흘러내린 것을 보며 생각하기를,
“나의 몸도 또한 이러한 모양이 되고, 이러한 법이 있을 터인데 아직 이런 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라고 하느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안의 몸 가운데에서 몸을 차례로 자세히 관하면서 부지런히 정진하며 한 몸이 되어 세간의 탐욕과 근심을 없애나니,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만일 버려진 죽은 사람의 몸이 엿새 혹은 이레가 되어서 올빼미ㆍ보라매ㆍ수리ㆍ승냥이ㆍ이리ㆍ여우ㆍ개 등의 이러한 갖가지 날짐승ㆍ길짐승들이 파먹고 뜯어먹는 것을 보면서 생각하기를,
“나의 몸도 또한 이러한 모양으로 되고, 이러한 법이 있을 터인데 아직 이런 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라고 하느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안의 몸 가운데에서 몸을 차례로 자세히 관하면서 부지런히 정진하며 한마음이 되어 세간의 탐욕과 근심을 없애나니,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만일 버려진 죽은 사람의 몸이 날짐승ㆍ길짐승들이 뜯어먹은 뒤에 깨끗하지 못한 것이 문드러져서 악취가 나는 것을 보게 되면 생각하기를,
‘나의 몸도 또한 이러한 모양으로 되고, 이러한 법이 있을 터인데 아직 이런 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하면서, 세간의 탐욕과 근심까지 없애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만일 버려져 있는 죽은 사람의 몸의 뼈에 피와 살이 엉겨 붙고 힘줄과 뼈가 서로 이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되면 생각하기를,
‘나의 몸도 이러한 모양으로 되고 이러한 법이 있을 터인데 아직 이런 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하면서, 세간의 탐욕과 근심까지 없애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만일 버려져 있는 죽은 사람의 몸의 뼈에 피와 살이 이미 없어졌고 힘줄과 뼈만이 서로 이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되면 생각하기를,
‘나의 몸도 또한 이러한 모양으로 되고 이러한 법이 있을 텐데 아직 이런 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하면서, 세간의 탐욕과 근심까지 없애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만일 버려져 있는 죽은 사람의 몸의 뼈들이 이미 땅에 흩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되면 생각하기를,
‘나의 몸도 또한 이러한 모양으로 되고 이러한 법이 있을 터인데 아직 이런 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하면서, 세간의 탐욕과 근심까지 없애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만일 버려져 있는 죽은 사람의 몸의 뼈들이 땅에 흩어져 있으면서 다리뼈도 다른 곳에 있고 팔뼈ㆍ넓적다리뼈ㆍ허리뼈ㆍ갈빗대ㆍ등골뼈ㆍ손뼈ㆍ목뼈ㆍ해골 등이 저마다 다른 곳에 있는 것을 보며 생각하기를,
‘나의 몸도 또한 이러한 모양으로 되고 이러한 법이 있을 터인데 아직 이런 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하느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안의 몸을 자세히 관하면서 세간의 탐욕과 근심까지 없애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이렇게 버려져 있는 죽은 사람의 뼈들이 오랜 세월 동안 땅에 있으면서 바람에 날리고 햇살에 쬐여서 빛이 조개와 같이 하얗게 바래진 것을 보며 생각하기를,
“나의 몸도 이러한 모양으로 되는 것이 법인데 아직 이 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라고 하느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안의 몸을 자세히 관하면서 세간의 탐욕과 근심까지 없애나니,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니라.
【논】
【문】 4념처(念處) 가운데에는 갖가지 관(觀)이 있거늘 어찌하여 단지 안과 바깥과 안팎의 열두 가지 관만을 말씀하시는가?
또한 무엇이 안이고 무엇이 바깥이며, 안과 바깥을 관하고 나서 무엇 때문에 다시 따로 안팎[內外]을 말씀하시는가?
또한 4념처 중 하나의 염처는 바로 안[內]이어서 안의 법에 포섭되나니, 이른바 마음[心]이다.
두 염처는 바로 바깥이어서 바깥 법에 포섭되나니, 이른바 느낌[受]과 법(法)이다.
그리고 나머지 한 염처는 바로 안팎이어서 안팎의 법에 포섭되나니, 이른바 몸[身]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네 가지 법을 말씀하시면서,
“모두가 이것은 안이고, 모두가 이것은 바깥이며, 모두가 이것은 안팎이다.”라고 하시는가?
또한 어찌하여 “몸을 관한다[觀身]”라고 말씀하지 않고, “몸을 차례로 관한다[循身觀]”라고 말씀하시는가?
또한 몸을 관하면서 어떻게 몸이라는 생각을 내지 않으며, 무엇 때문에 “부지런히 정진하면서 한마음이 된다.”라고 말씀하시는가?
37품(品)을 모두 “한마음이 된다.”라고 말씀하셔야 되거늘, 어찌하여 이 가운데에서만 “한마음이 된다.”라고 말씀하시는가?
이 가운데에서 만일 4념처를 수행하게 되면,
그때에는 온갖 5개(蓋)가 없어져야 되거늘, 어찌하여 유독 “탐욕을 없앤다.”라고만 하며,
세간의 기쁨도 역시 도(道)를 방해하거늘, 어찌하여 “근심을 없앤다.”라고만 말씀하시는가?
몸의 법은 갖가지의 문으로 “무상하고 괴롭고 공이고 무아이다.”라고 관하는 것이거늘, 이제 무엇 때문에 “깨끗하지 않다[不淨]”라고만 말씀하시는가?
만일 깨끗하지 않다고만 관한다면 무엇 때문에 다시 몸의 4위의(威儀) 등을 염(念)하는 것인가?
이런 일들은 알기 쉬우므로 질문을 할 것 조차 없다.
【답】 이 열두 가지의 관을 수행하는 이는 이로부터 선정[定]의 마음을 얻게 된다.
먼저 부터의 세 가지 삿된 행[邪行]은 안과 바깥과 안팎으로 세 가지의 삿된 행을 깨뜨리게 되며, 이 때문에 세 가지의 바른 행[正行]이 있게 된다.
어떤 사람은 안은 집착하는 정(情)이 많고 바깥은 집착하는 정이 적나니, 마치 사람이 몸을 위하여 처자와 친족과 보물을 버리게 되는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은 바깥을 집착하는 정이 많고 안을 집착하는 정이 적나니, 마치 사람이 재물을 탐내어서 몸을 없애고 목숨을 버리는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은 안팎을 집착하는 정이 다 많나니, 이 때문에 세 가지의 바른 행을 설명하게 된다.
또한 자기의 몸을 안의 몸[內身]이라 하고, 다른 이의 몸을 바깥 몸[外身]이라 한다.
아홉 구멍으로 받아들이는[九受入] 것을 안의 몸이라 하고 아홉 구멍으로 받아들이지 않는[九不受入] 것을 바깥 몸이라 하며,
눈[眼] 등의 5정(情)을 안의 몸이라 하고 빛깔[色] 등의 5진(塵)을 바깥 몸이라 하나니,
이와 같은 등으로 안과 바깥을 분별한다.
수행하는 이는 먼저 깨끗하지 못하고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고 나가 없다는 등의 지혜로써 안의 몸을 자세히 관하되 이 몸의 좋은 모양[好相]을 얻지 못하며,
깨끗한[淨] 모양과 항상한[常] 모양과 즐거운[樂] 모양과 나라는 [我] 모양도 진실로 안에서는 이미 얻지 못하므로 다시 바깥 몸을 관하면서 깨끗하고 항상하고 나고 즐거운 것을 구하지만 역시 진실로 얻을 수 없게 된다.
만일 이와 같이 얻지 못하게 되면 의심을 내면서,
“내가 안을 관할 때에는 바깥에서 혹 잘못되기도 하고 바깥을 관할 때에는 안에서 혹 잘못되기도 하리니, 이제는 안팎에서 일시에 다 함께 관하리라.”라고 하지만,
역시 얻을 수 없나니, 이때에 마음에서는 바른 선정[正定]을 얻게 된다.
이 몸은 깨끗하지 못하고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며 나가 없다.
마치 병든 것과 같고, 종기와 같고, 상처와 같아서 아홉 구멍에서는 더러운 것이 흘러내리니 이것은 걸어 다니는 뒷간이며,
오래지 않아 파괴되고 흩어지고 다 없어지면서 주검의 모양이 될 것이며,
항상 배고프고 목마르고 춥고 더우며, 매를 맞고 갇히고 욕을 먹고 비방을 받고 늙고 병드는 등의 모든 고통에 늘 둘러싸여 있으면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안은 공하고 주인이 없고 또한 아는 이[知者]와 보는 이[見者]와 짓는 이[作者]와 받는 이[受者]도 없다.
단지 공하여서 모든 법은 인연이 화합하여 있을 뿐이며 스스로 생겨났다가 스스로 없어지므로 매인 데가 없는 것이 마치 초목(草木)과 같다 함을 알게 된다.
이 때문에 안팎을 모두 함께 관하는 것이다.
그 밖의 안팎에 대한 이치는 18공(空) 가운데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몸을 차례로 자세히 관한다[循身觀]고 함은 찾고 따르면서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다.
곧 그것이 깨끗하지 못하고 쇠하고 늙고 병들고 죽고 문드러지고 악취가 나고 뼈마디가 썩어 없어지면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알게 하고,
우리의 이 몸은 얇은 가죽에 덮이고 싸여서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며 갖은 시름과 두려움이 있다고 알게 하나니,
이 때문에 몸의 모양을 안팎에서 따르면서 근본과 끝을 자세히 살피는 것이다.
또한 마치 부처님께서 몸을 차례로 관하는 법을 말씀하신 것과 같다.
몸이라는 생각을 내지 않는다[不生身覺]고 함은 몸에 대해서 동일하다거나 다르다며 모양을 취하면서 희론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생들은 이 몸에 대하여 갖가지의 생각을 일으키나니,
어떤 이는 깨끗하다는 생각을 내는 이도 있고, 어떤 이는 깨끗하지 않다는 생각을 내는 이도 있으며,
어떤 이는 성을 내면서 다른 이의 허물을 생각하는 이도 있고,
어떤 이는 이 몸을 관하면서,
“몸은 어떠한 법인가? 모든 몸은 동일한 것인가, 다른 것인가?”라고 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갖가지의 생각을 내지 않는다는 것이니,
그것은 왜냐하면, 이익되는 바도 없고 열반의 도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 밖의 범부나 성문의 사람은 몸의 모양을 취하면서 몸을 자세히 관하거니와 보살은 몸의 모양을 취하지 않으면서 몸을 잘 관하다.
부지런히 정진하면서 한마음이 된다[勤精進一心]라고 함은,
그 밖의 세간 일과 교묘한 방편은 끝없는 세계로부터 늘 익히고 늘 만들어져 왔으니,
마치 보통 사람하고는 이별하기 쉬워도 친한 벗하고는 이별하기 어렵고,
친한 벗하고는 이별하기 쉬워도 부자간(父子間)은 이별하기 어려우며,
부자간은 이별하기 쉬워도 자기의 몸을 여의기는 어렵고,
자기의 몸을 여의기는 쉬워도 자기의 마음은 여의기가 어려운 것과 같다.
비유컨대 마치 나무를 송곳으로 뚫으면서 불을 일으키려면 한마음으로 부지런히 비비면서 쉬지도 않고 그치지도 않아야 비로소 불을 얻게 되는 것과 같나니,
이 때문에 “한마음으로 부지런히 정진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세간의 탐욕과 근심을 없앤다[除世間貪憂]라는 것은,
탐욕이 제거되면 5개(蓋)도 남김없이 없어지나니,
마치 대를 쪼갤 적에 처음의 마디가 쪼개지면 그 밖의 마디도 모두 쪼개지는 것과 같다.
또한 수행하는 이는 5욕(欲)을 멀리 여의고 출가하여 도를 닦으므로 이미 세간의 즐거움을 버렸지만 아직 선정의 즐거움을 얻지 못했다면 때로는 마음에 근심을 내기도 하나니,
마치 고기가 물을 좋아하는 것과 같다.
마음의 모양은 이와 같이 항상 즐거운 일을 구하게 되고 도리어 본래의 바라는 바를 생각하게 된다.
수행하는 이도 대개가 이런 두 마음을 내게 되나니, 이 때문에 부처님은,
“탐욕과 근심을 없애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탐욕을 말하면 곧 그것은 세간을 말한 것이니, 그것은 기쁨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처음에 깨끗하지 않음을 관한다 함은,
사람의 몸은 깨끗하지 않지만 얇은 가죽으로 덮여 싸였기 때문에 우선 깨끗한 모양을 내나 뒤에는 다르게 뒤바뀌게 되나니,
이 때문에 처음부터 부정관(不淨觀)을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중생들은 대부분이 탐욕에 집착하면서 청정한 모양을 취하려 하거니와 성냄[瞋恚]과 삿된 견해[邪見]는 그렇지 않나니,
이 때문에 먼저 탐욕을 다스리기 위하여 부정관을 닦게 된다.
몸의 네 가지 위의 등을 염한다[念身四威儀等] 함은, 먼저 몸의 도적을 깨뜨리고자 하여 한마음[一心]을 얻은 사람은 하는 일들이 모두 이룩되나니,
이 때문에 먼저 한 일과 행할 바를 궁구하여 오고 가고 눕고 깨고 좌선(坐禪)하는 데서 몸으로 할 일을 자세히 관하며 항상 한마음이 되어 항상 찬찬하고 자세하면 잘못되지도 않고 산란하지도 않게 된다.
이와 같이 관찰하게 되면 부정삼매(不淨三昧)를 쉽게 얻으며, 몸은 비록 찬찬하고 자상하다 하더라도 안으로는 갖가지 거친 생각[惡覺觀]이 있으면서 그의 마음을 파괴하고 어지럽히나니,
이 때문에 안나반나(安那般那)의 16분(分)을 설명하여 거친 생각과 세밀한 생각을 막게 한다.
안나반나의 이치에 대해서는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
몸이 이미 찬찬하고 자세하면서 마음에 어수선함이 없어진 연후에 부정관(不淨觀)을 행하면 안온하면서 공고하여 진다.
만일 먼저 부정관을 행하면 미친 마음과 착란(錯亂) 때문에 청정하지 않은 것이 도리어 청정한 모양으로 되나니,
부처님 법 가운데에서 이 두 가지 법을 감로의 첫 문[甘露初門]이라 한다.
부정관이란, 이른바 보살마하살이 몸은 마치 풀과 나무와 기왓돌과 같아서 다름이 없다고 관하는 것이다.
이 몸은 바깥 4대(大)가 변하여 음식이 되어서 안의 몸[內身]을 충실하게 해 주되 단단한 것은 땅[地]이요 축축한 것은 물[水]이며 더운 것은 불[火]이요 움직이는 것은 바람[風]이다.
이 네 가지 일이 안으로 들어가면 곧 그것이 몸이다.
이 네 가지 갈래 안에는 저마다 나가 없고 내 것[我所]도 없으며, 자상(自相)을 따르면서 사람의 마음은 따르지 않나니, 괴로움과 공함 따위도 또한 그와 같다.
앉고 선다[若坐若立] 함은,
누우면 게을러져 몸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마음도 움직이지 않으며,
다니면 마음이 산란해져 몸이 고요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도 또한 고요하지 않다.
눈으로써는 일을 보려고 하거늘 하물며 보지 않는 것이겠는가?
그러므로 비유를 들자면,
소는 곧 수행하는 이의 몸이요,
백정은 곧 수행하는 이이며,
칼은 곧 날카로운 지혜요,
소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바로 몸의 한 모양[一相]이라 함을 깨뜨리는 것이며,
나누어진 네 쪽[四分]은 곧 4대(大)이다.
백정이 소의 네 쪽을 자세히 관할 때에, 다시는 그 밖에 따로 소가 없고 또한 그것이 소도 아니니,
수행하는 이가 몸의 4대를 관함도 역시 그와 같다.
이 4대는 몸이라 하지 않나니, 그것은 왜냐하면, 이 네 가지는 몸이 된 하나이기 때문이다.
또한 4대 이것은 전체의 모양[總相]이요 몸 이것은 각각의 모양[別相]이다.
바깥의 4대도 몸이라 하지 않고 몸속으로 들어가야 임시로 몸이라는 이름이 붙여진다.
나[我]는 4대 가운데 있지도 않고 4대도 나 가운데 있지 않으며 나는 4대와 멀어져 가지만 단지 뒤바뀜 때문에 망령되이 헤아리면서 몸을 삼는다.
이 산공(散空)의 지혜로써 4대와 만들어진 물질[造色]을 분별한 연후에야 3염처(念處)에 들어가 도(道)에 들게 된다.
또한 이 몸은 발에서 머리카락까지 머리카락에서 발에 이르기까지 주위를 얇은 가죽으로 덮어 싸고 있는데 되풀이 생각해도 하나도 깨끗한 곳이란 없다.
머리카락 등에서 뇌(惱)와 막(膜)에 이르기까지 간략하게 설명하면 36종이지만 자세히 설명하면 아주 많다.
곡식 넣는 창고는 바로 몸이고 농부는 바로 수행하는 이이며,
밭에 곡식을 심는 이것은 수행하는 이의 몸의 업인연(業因緣)이다.
열매가 맺힌 뒤에 창고에다 넣는 것은 바로 수행하는 이의 인연이 성숙하여 몸을 얻는 것이며,
벼와 깨와 기장과 조 등은 바로 이 몸 속의 갖가지 깨끗하지 않은 것들이다.
농부가 창고를 열어서 곧 깨ㆍ기장ㆍ보리ㆍ콩 등이 갖가지로 다르다 함을 아는 것은,
바로 수행하는 이가 부정관을 닦아 지혜의 눈으로써 이 몸이라는 창고를 열어 보고서,
“이 몸 속에는 깨끗하지 못한 것이 가득 차 있고 장차 반드시 무너지게 될 것이다.
혹은 다른 이가 와서 해치기도 하고, 또한 장차 저절로 줄게 될 것이며,
이 몸속에는 단지 똥오줌 같은 부정한 것과 갖가지 오로(惡露) 등만이 있다.”라고 아는 것이다.
이미 안의 몸의 깨끗하지 못함을 관한 뒤에 이제는 바깥 몸이 부서지고 무너짐을 관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두 가지의 청정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첫째는 이미 파괴된 것이요,
둘째는 아직 파괴되지 않는 것이다.
먼저 자기의 몸이 아직 파괴되기 전에 분별[識]이 있다는 것을 관하나니,
만일 결사(結使)가 얇고 근기가 영리한 사람이면 곧 싫증을 내게 되거니와,
근기가 둔하고 결사가 두꺼운 이면 죽은 사람이 이미 파괴되어 두려워할 만하고 싫어할 만한 것을 관하는 것이다.
만일 죽은 지 하루에서 닷새까지는 마을의 친척들이 아직도 수호하므로 이때에는 날짐승ㆍ길짐승들이 아직 뜯어 먹지 못하지만,
푸르뎅뎅하게 멍이 들고 띵띵 부풀어서 피고름이 흘러나오며 배가 불어서 터지고 5장(藏)이 문드러지며 똥오줌이 질퍽하여 심히 싫어할 만하면,
수행하는 이는 생각하기를,
‘이 사람의 빛깔이 먼저는 좋아서 가고 오고 말하면서 아리따운 자태로 인정(人情)을 미혹되게 했으므로 음심을 품은 이는 애착했었는데, 이제 그를 보니 그 좋은 빛깔은 어디로 갔을까?’라고 한다.
마치 부처님의 말씀과 같아서 진실로 이것은 미혹된 법[幻法]이어서 단지 지혜 없는 이의 눈을 속일 뿐이다. 지금이 실제의 일이 드러난 것이니,
수행하는 이는 곧 생각하기를,
‘나의 몸도 저 이와 똑같이 되면서 다름없으리라.
아직 이 법에서 벗어나지 못했거늘 어떻게 자신에게 집착하고 그들에게 집착하겠는가?
또한 어찌 자신을 중히 여기면서 남을 가벼이 여기겠는가?’라고 한다.
이와 같이 관한 뒤에는 마음을 다스리게 되어 도를 구할 수 있게 되고 세간의 탐욕과 근심을 제거할 수 있게 된다.
또한 다시 생각하기를,
‘이 시체가 처음 죽었을 때에는 날짐승ㆍ길짐승들이 보고서도 죽은 사람이 아니라고 여기어 감히 가까이 오지 않았었다.’고 하며,
그 때문에 말하기를,
“6ㆍ7일이 지난 뒤에 친척들이 다 떠나니 까마귀와 수리와 야간(野干)의 족속들이 다투어 와서 그를 뜯어 먹는다.”라고 한다.
그리하여 가죽과 살이 이미 다하고 날마다 변하면서 달라지자,
이 때문에 말하기를,
“단지 뼈로 된 사람이 있을 뿐이구나.” 하며,
그가 이렇게 된 것을 보면서 다시 싫증을 내며 생각하기를,
‘이 심장과 간과 가죽이며 살에는 실로 나 없고, 단지 이 몸이 합함으로 인하여 죄와 복의 인연을 쌓아서 고통을 받음이 한량없을 뿐이다.’라고 한다.
그리고는 곧 다시 생각하기를,
“나의 몸도 오래지 않아서 반드시 이렇게 될 터인데 아직 이 법을 여의지 못하고 있다.”라고 한다.
간혹 수행하는 이는 뼈만 남은 사람이 땅에 있으면서 빗물에 잠기고 햇볕에 쪼이고 바람에 불리어서 오직 흰뼈만 남아 있는 것을 보기도 하고,
혹은 오래되어서 뼈와 힘줄이 끊어져서 마디마디 다 떨어진 것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그 빛깔이 마치 비둘기와 같은 것을 보기도 하며,
혹은 다 썩고 문드러져서 흙과 똑같은 빛깔로 된 것을 보기도 한다.
처음에 36가지를 자세히 관하고 죽은 시체가 부풀어 하루에서 닷새에 이르기까지는 바로 부정관(不淨觀)이다.
날짐승ㆍ길짐승이 뜯어 먹거나 이에 흙과 빛깔이 같이 되기까지는 바로 이것은 무상관(無常觀)이며,
이 가운데에서 나와 내 것을 구하여도 얻을 수 없는 것은 마치 앞에서의 설명과 같은 데 인연으로 생기는 것이라 자재하지 않기 때문에 바로 이것은 비아관(非我觀)이요,
몸의 모양은 이와 같이 하나도 즐길 만한 것이 없는데도 만일 어떤 이가 집착하여 근심과 고통이 생긴다고 관하는 것은 바로 고관(苦觀)이라고 한다.
이 네 가지 거룩한 행[四聖行]으로써 바깥 몸을 관하고 스스로 자기의 몸도 역시 그와 같은 것인 줄 안 연후에는 안팎[內外]으로 함께 관하는 것이다.
만일 마음이 산란해지면 마땅히 늙고 병들고 죽는 것과 3악도(惡道)의 고통과 신명(身命)의 무상함과 부처님의 법이 멸망하려 한다 함을 생각해야 하나니,
이와 같은 등으로 마음을 채찍질하여 다스리면서 도로 부정관 가운데 매어 둠으로 이것을 부지런히 정진하다고 한다.
한마음이 되어 부지런히 정진하기 때문에 탐욕과 근심을 제거할 수 있나니, 탐욕과 근심이라는 두 도적은 우리 법의 보배를 빼앗아 간다.
수행하는 이는 생각하기를,
‘이 몸은 무상하고 깨끗하지 않아서 싫어해야 함이 이렇거늘 중생들은 무엇 때문에 이 몸을 탐착하면서 갖가지 죄의 인연을 일으키는 것일까?’라고 한다.
이와 같이 생각하고 나면, 이 몸속에는 5정(情)이 있고 바깥에는 5욕(欲)이 있는데 이것이 화합한 까닭에 세간의 뒤바뀐 즐거움이 생기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의 마음은 즐거움을 구하면서 처음부터 머무르는 때가 없기에 관찰하기를,
“이 즐거움이 진실한 것인가, 아니면 거짓인가?
몸의 견고한 것조차도 오히려 흩어지고 없어지거늘 하물며 이런 즐거움이겠는가?
이런 즐거움이란 머무르는 곳이 없나니,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고 과거는 이미 사라졌으며 현재는 머무르지 않아서 찰나마다 모두 소멸한다.
괴로움을 잠시 차단하기 때문에 즐거움이라 하는 것이요 진실한 즐거움은 없다.”라고 해야만 한다.
비유컨대 마치 음식은 배고프고 목마른 괴로움을 없애 주기 때문에 잠시 즐거운 것이라고 여기지만 도(道)에 지나치면 다시 괴로움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마치 먼저 즐거움을 파괴하는 것[破樂] 가운데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그렇다면 세간의 즐거움이란 모두가 괴로움의 인연으로부터 생기고 또한 괴로움의 결과를 내며 사람을 잠시 동안 속이다가 그 뒤에는 고통이 한량없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유컨대 마치 좋은 음식에 독을 섞었을 때, 먹기에는 비록 향기롭고 맛이 있다 하더라도 독이 곧 사람을 해치는 것처럼,
세간의 즐거움도 그와 같아서 음욕과 번뇌 등의 독 때문에 지혜의 목숨을 빼앗기고 마음은 헷갈리게 되며 이익을 버리고 쇠함[衰]을 취하게 된다.
그러니 누가 이런 즐거움을 받겠는가?
오직 심식(心識)이 있을 뿐이다. 이 심식을 자세히 살펴보면 생각생각마다 나고 없어지고 하면서 상속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그 모양을 취할 수 있는 것이니, 마치 물결과 같고 등불의 불꽃과 같다.
괴로움을 느끼는 마음은 즐거운 마음이 아니요, 즐거움을 느끼는 마음은 괴로운 마음이 아니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不苦不樂]을 느끼는 마음은 괴롭거나 즐거운 마음도 아니니, 때에 따라 서로 각각 다르다.
이 때문에 마음은 무상한 것이고,
무상하기 때문에 자재하지 않으며,
자재하지 않기 때문에 나가 없나니,
생각하고 기억하는 것 등도 또한 그와 같다.
그 밖의 세 가지 염처(念處)의 안팎의 모양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이 네 가지의 거룩한 행[聖行]을 하여 네 가지 뒤바뀜[顚倒]을 깨뜨리고,
네 가지 뒤바뀜을 깨뜨리기 때문에 실상의 문[實相門]이 열리며,
실상의 문이 열린 뒤에는 본래 익혔던 바를 부끄럽게 여기게 된다.
마치 사람이 밤에 깨끗하지 못한 것을 먹었다가 뒤에 그것이 잘못인 줄 알게 되면 그 일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과 같다.
이 네 가지 법의 깨끗하지 못함[不淨]과 무상함[無常] 등을 관찰하는 것을 바로 괴로움의 진리[苦諦]라고 한다.
이 괴로움의 원인인 애욕(愛慾) 등의 모든 번뇌를 바로 쌓임의 진리[集諦]라 하고,
욕망 등의 모든 번뇌가 끊어지는 것을 바로 사라짐의 진리[滅諦]라 하며,
욕망 등의 모든 번뇌를 끊는 방편을 바로 도의 진리[道諦]라 한다.
이와 같이 네 가지의 진리를 관찰하여 열반의 도를 믿고 마음이 즐거운 데에 머무르게 되면 마치 무루(無漏)와 같게 되나니, 이것을 난법(煖法)이라 한다.
마치 사람이 불을 피우려 할 때에 따뜻한 기운이 있게 되면 반드시 불을 얻는다는 희망이 있는 것과 같다.
이 법을 믿고 나면 마음으로 부처님과 그 법을 좋아하게 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듯이,
마치 좋은 약을 복용하고 병이 나으면 그 의사가 용하다 하면서 그 약을 먹고 병을 낫게 해 준 이를 인간 안에서는 제일이라고 아는 것과 같나니,
이것이 바로 승가[僧]를 믿는 것이다.
이와 같이 3보(寶)를 믿고 난법이 더욱 나아가서 죄와 복이 그치고 평등해지기 때문에 정법(頂法)이라 하나니, 마치 사람이 산으로 올라가서 꼭대기에 닿으면 양쪽 길의 거리[里數]가 같아지는 것과 같다.
정(頂)으로부터 인(忍)에 이르고, 이어서 아라한에 이르기까지 이것이 한쪽의 길이고,
난(煖)으로부터 정(頂)에 이르기까지의 이것이 한쪽의 길이며,
난(煖)으로부터 정(頂)에 이르기까지의 이것이 한쪽의 길이니,
성문의 법 가운데에서는 4념처를 관하여 얻게 되는 과보가 그와 같다.
보살의 법에서는 이 관(觀) 가운데에서 본래의 서원을 잊지 않고 대비(大悲)를 버리지 않으며 먼저 불가득공(不可得空)으로써 마음자리[心地]를 다스리고 이 자리 안에 머무르면 비록 번뇌가 있더라도 마음은 항상 타락하지 않나니,
마치 사람이 비록 아직 도적을 죽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한 곳에 가두어 둔 것과 같다.
보살의 정법(頂法)은 먼저의 법위(法位) 가운데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