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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장현종론 제35권
8. 변지품(辯智品)1)①
8.2. 지(智)의 종류와 차별
1) 10지(智)의 전개
①-1 10지 총설
지(智)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으며, 그 상의 차별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지’는 열 가지, 총괄하면 두 가지로
유루와 무루의 차별이 바로 그것인데
유루지는 세속지를 말하고
무루지는 법지와 유지를 말한다.
세속지는 두루 경계로 삼고
법지와 유지는
순서대로 욕계와 상계의
고제 등을 경계로 삼는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지(智)에는 열 가지의 종류가 있어 일체의 ‘지’를 포섭하니,
첫째는 세속지(世俗智)이며,
둘째는 법지(法智)이며,
셋째는 유지(類智)이며,
넷째는 고지(苦智)이며,
다섯째는 집지(集智)이며,
여섯째는 멸지(滅智)이며,
일곱째는 도지(道智)이며,
여덟째는 타심지(他心智)이며,
아홉째는 진지(盡智)이며,
열 번째는 무생지(無生智)이다.
①-2 2지(유루ㆍ무루지)와 3지(世俗ㆍ法ㆍ類智)
이와 같은 10지는 총괄하면 오로지 두 종류일 뿐이니, 유루성과 무루성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 ‘지’의 상(相)은 세 가지로 차별되니,
이를테면 세속지(世俗智)와 법지(法智)와 유지(類智)가 바로 그것이다.
[유루지, 세속지]
앞의 유루지(有漏智)를 총체적으로 세속지라고 이름하는데,
‘항아리’나 ‘옷’ 등의 사물의 본성은 가히 훼손되고 괴멸[毁壞]되는 것이지만 속정(俗情) 즉 세속의 정의(情意, 관념)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세속지’라고 이름하였다.7)
즉 이러한 ‘지’는 대부분 세속의 경계대상을 취하기 때문에, 대부분 세간의 세속적 실재[俗事]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다수에 따라 ‘세속지’라는 명칭으로 설정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승의(勝義)의 경계대상을 취하거나, 승의의 실재[勝義事]에 따라 일어나는 [세속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8)
그렇지만 이는 바로 애(愛)의 경계로서, 내적인 여러 혹(惑)을 종식시키는 뛰어난 공능이 없기 때문에 무루가 아닌 것이다.
혹은 출세간법을 은폐하고 세간법을 이끌어 발동[引發]시키는 것이므로 ‘세속’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으며, 그 자체는 무지(無智)이지만 ‘지’가 그것에 따라 소속[隨屬]되기에 그 같은 ‘[세속]지’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으로, 이는 곧 이러한 [세속지라고 하는] 명칭이 유루지에 근거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어떤 이는 [이같이] 설하였다.
“온갖 취(趣)를 일컬어 ‘세속’이라 하였으니, 이러한 ‘지’는 대개 온갖 취로 나아가게 하는 원인으로, 결과(세속의 온갖 趣)를 명칭으로 삼아 ‘세속지’라고 이름하였다.”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이러한 ‘지’는 무시이래 생사의 소의신 중에 현현하여 전전(展轉)하는 것으로, 이에 따라 ‘세속지’라는 명칭으로 설정하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혹은
“온갖 존재[有] 중에서 끊임없이 따라 유전[隨流]하는 것을 ‘세속지’라고 이름하였으니, 일체의 모든 때에 걸쳐 온갖 존재에 수순하며 상속 유전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혹은 또한
“이러한 ‘지’는 일체의 경계대상을 능히 두루 비추어 일어나는 것[映發]이기에 ‘세속’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으니, 유독 이것만이 능히 일체의 법을 두루 반연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9)
[무루지, 법지ㆍ유지]
그리고 뒤의 유루지와 무루지를 두 종류로 나누었으니,
법지와 유지의 두 명칭은 근거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으로,
이러한 두 가지 명칭의 뜻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논설한 바와 같다.10)
이에 따라
“두 지(유루지와 무루지)의 상(相)은 차별되어 세 가지(世俗智와 法智와 類智)가 된다”고 말한 것으로,
정심(定心)과 상응하여 성(聖, 즉 무루)의 행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유루지와 무루지의 차별]
유루지와 무루지의 두 가지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 것인가?
무루지는 경계대상에 대한 행상이 명리(明利)하며, 유루지는 이와 반대되는 것으로,
마치 걸지라(朅地羅, khadira, 檐木, 아카시아나무의 일종)와 그 밖의 다른 나무의 숯은 태워질 때 세력이나 작용이 동일하지 않을 뿐더러 능히 향내를 풍기는 작용에도 수승하고 저열한 등의 차별이 있는 것처럼,
시뻘건 쇠붙이[炎鐵]와 풀을 태우는 불[草火]에 뜨거운 세력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두 가지 지를 서로 비교해 보면 그 차별도 역시 그러하다.
혹은 세속지는 이후 증상만(增上慢)을 일으키지만, 무루지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양자 사이에는] 차별이 있는 것이다.
또한 세속지와 법ㆍ유지는 경계상에 광협(廣狹)이 있기 때문에 차별이 있다.
이를테면 세속지는 일체의 유위와 무위를 두루 소연의 경계로 삼으니,
계경에서
“세속지로서 능히 고제를 두루 아는 것[遍知]이 있으며,……(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허공과 비택멸을 두루 아는 것이 있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며,
또한 역시 비아(非我)의 행상으로써 일체법을 모두 소연의 경계로 삼기도 하니,
계경에서
“제행은 비상(非常)이며, 일체법은 비아이며, 열반은 적정이다”라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법지는 다만 욕계의 4제(諦)만을 반연하며,
유지는 상(上)2계의 4제를 모두 반연한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세 가지 지(세속지와 법지와 유지)는 경계상에 [광협의] 차별이 있는 것이다.
②) 2지(법ㆍ유지)의 8지로의 전개
이와 같은 세 종류의 지(智) 중에서―.
[이하] 게송으로 말하겠다.
법지와 유지는 경계의 차별에 따라
고지(苦智) 등의 네 가지 명칭으로 설정되며
모두 다 진지와 무생지와 통하는데
최초의 그것은 오로지 고류지와 집류지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이와 같은 세 종류의 지(智) 중에서] 법지와 유지는 경계의 차별에 따라 고ㆍ집ㆍ멸ㆍ도의 네 가지 지로 나누어진다.
세속지도 역시 고제 등을 반연하여 고(苦) 등의 행상을 짓는데,
어떠한 연유에서 고지(苦智) 등으로 나누지 않는 것인가?
그것은 일찍이 ‘고’ 등의 행상을 ‘고’ 등이라고 관찰하고 난 후에 다시 ‘고’ 등의 경계대상을 낙(樂) 등으로 관찰하는 일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와 같은 세속지를 획득하고 난 후에도 [4]제를 반연하여 의심[疑]이 현행하는 일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
이와 같은 여섯 가지 지(법ㆍ유지와 4諦智)로서 만약 무학에 포섭되고 ‘견(見)’의 성질이 아니라면, 이를 일컬어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라고 한다.
이러한 진ㆍ무생의 두 가지 지로서 최초로 생겨나는 것은 오로지 고류지와 집류지이니, 고제와 집제를 반연하는 여섯 종류의 행상으로써 유정지(有頂地)의 온을 경계로 삼아 관찰하기 때문이다.11)
따라서 금강유정(金剛喩定)으로서 만약 고제와 집제를 반연하는 것이라면 이것과 경계가 동일하지만, 멸제와 도제를 반연하는 것이라면 이것과 경계가 다르다.12)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다시 말해 진ㆍ무생지는 최초에 유정지의 고제와 집제를 반연하여 생겨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찌 지교(至敎)와 서로 모순된다고 하지 않겠는가?
예컨대 경에서는
“[번뇌가] 다할 때에 처음으로 [진]지가 생겨나며, 이로부터 무간에 능히 스스로 요달(了達)한다”고 설하였던 것이다.
지교와 서로 모순되는 과실이 없으니, 여기서 ‘다할 때에[於盡]’라고 하는 말은 바로 제7성(第七聲, 所依格 즉 處格을 말함)으로, 경계대상으로서의 제7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어떤 이가 번뇌를 남김없이 다하였기 때문에 처음으로 [진]지가 생겨난 경우,
이러한 ‘지’는 ‘다함’을 소연의 경계로 삼아 생겨난 것이 아닌데, 무슨 어긋남이 있을 것인가?
즉 [계경에서] 그같이 말한 뜻은, 혹(惑)이 존재하는 소의신 중에는 이러한 지(智, 즉 진지)가 생겨나는 일이 없으며, 요컨대 혹이 다하여야 [생겨나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13)
답: 오로지 번뇌가 다한 소의신 중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진지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라고 해야 한다.―[그럴지라도]
번뇌가 다한 소의신 중에서 처음으로 일어난 것과 두루 존재하는 것만을 진지라고 이름하니,
무학의 정견은 모두 두루 존재하는 것일지라도 처음 일어난 것이 아니며,
무생지는 시해탈자에게는 성취되지 않기 때문에 두루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진지 이후에 현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처음으로 일어난 것도 아니다.”(『대비바사론』 제102권, 대정장27,p.528하~529상)
③ 특히 타심지에 대하여
앞에서 설한 아홉 종류의 지(智)14) 중에서―.
[이하] 게송으로 말하겠다.
법지와 유지와 도지와 세속지는
타심지를 성취하는 경우가 있지만
수승한 경지와 근기와 상태와
과거ㆍ미래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법ㆍ유지의 그것은 서로를 알지 못하며
성문과 인각유와 부처님은
순서대로 견도의 두 찰나와 세 찰나와
일체의 찰나를 안다.
논하여 말하겠다.
[앞에서 설한 아홉 종류의 지(智) 중에서] 법지와 유지와 도지와 세속지는 타심지(他心智)를 성취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 밖의 지는 그렇지 않다.
도지는 법지나 유지를 떠나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다시 말해 법지나 유지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다만 세 가지 지(법지와 유지와 세속지)만이 타심지를 성취한다고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치상으로는 실로 그와 같다고 해야 하지만, 타심지는 다만 동류의 경계대상만을 아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이같이 말한 것이다.
즉 이러한 법지와 유지는 다른 이의 무루의 심ㆍ심소법을 아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이는 바로 도지에 포섭되는 것으로, 고ㆍ집지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15)
무루지(無漏智)로는 결정코 능히 다른 이의 유루의 심ㆍ심소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른 소의신의 무루의 심ㆍ심소법은 미세하기 때문에, 수승하기 때문에 자신의 유루의 타심지의 경계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이치상 그럴 수 있지만,
어떠한 연유에서 자신의 무루의 타심지로써 능히 다른 이의 유루의 심ㆍ심소법을 알지 못한다는 것인가?
유루의 경계대상에 대해 무루지가 생겨나는 경우, [그것의] 행상과 소연이 이러한 [무루]지와 다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무루지가 유루를 반연할 때에는 필시 총체적으로 싫어하여 등지려는[厭背] 행상을 반연[總緣]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이의 심ㆍ심소법을 개별적으로 반연[別緣]하여서는 결정코 능히 타심지를 성취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온갖 성지(聖智, 무루지)가 유루를 반연할 때에는 필시 소연에 대해 깊이 싫어하고 등지려는 [마음을] 낳아 그것을 총체적으로 버리는 것[棄捨]을 즐겨할 뿐 개별적으로 관찰하는 것을 즐기지 않지만,
무루를 반연할 때에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마음을] 낳기 때문에 그것을 총체적으로 관찰하고 나서 개별적으로 관찰하는 것도 역시 즐기니,
이는 마치 어떤 이가 좋아하지 않는 것을 보거나 들을 때, [그것을] 총체적으로 반연하여 [싫어하고 등지려는 마음을 낳아] 바로 버리려고 할 뿐 개별적으로 반연하여 [보거나 듣는] 것을 즐기지 않지만,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와 반대로 총체적으로 [반연하여] 보거나 듣고 나서 개별적으로 반연하여 [보거나 듣는] 것도 역시 즐기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성지(聖智)로서 다른 이의 유루심 등에 대해 각기 개별적으로 관찰하거나, 유루심을 반연하여 무루의 타심지를 성취하는 것은 필시 존재하지 않으니, 타심지는 결정코 다른 이의 심ㆍ심소법을 각기 개별적으로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 고(苦)ㆍ집(集)의 인(忍)ㆍ지(智)를 포섭하는 3념주(念住)도 역시 그러한 경우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16)
비록 그러한 경우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다만 일법(一法, 즉 한 사람의 마음)만을 반연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법]체(즉 여러 사람의 마음)를 반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이상 제1구와 제2구 해명)
또한 타심지에는 결정적인 상(相)이 있으니, 이를테면 수승한 마음과 과거ㆍ미래의 2세(世)의 마음을 알지 못하며, 아울러 법지와 유지의 품류(다시 말해 법지에 의한 타심지와 유지에 의한 타심지)는 서로가 서로를 알지 못한다.
[수승한 마음의 세 가지]
‘수승한 마음’에는 다시 세 가지가 있으니,
경지[地]와 근기[根]와 계위[位]가 [수승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경지[가 수승한 이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고 함은,
말하자면 하지의 타심지는 상지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는 뜻으로, [타심지는] 오로지 자지와 하지의 마음만을 알 뿐이다.
‘근기[가 수승한 이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고 함은,
신해(信解)와 시해탈(時解脫) 근기(즉 둔근)의 타심지는 견지(見至)와 불시해탈(不時解脫)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하며,17)
‘계위[가 수승한 이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고 함은,
불환과의 성문과 응과(應果, 아라한과)와 독각(獨覺)과 대각(大覺) 중 앞의 계위의 타심지는 뒤의 수승한 계위에 이른 자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는 뜻으로, 오로지 자신과 동일하거나 아래 근기와 계위의 마음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타심지]
그런데 타심지와 그것에 의해 알려지는 경계대상(즉 다른 이의 마음)에 이미 근기와 경지의 차이가 있다고 하였으니, [그것을] 아는 것에도 역시 차이가 있다.
즉 알려진 유루의 심ㆍ심소법으로서 일찍이 획득된 것과 일찍이 획득되지 않은 것에 각기 열다섯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욕계와 4정려 각각에 하ㆍ중ㆍ상근기의 마음으로 능히 안 것이 바로 그것이다.
다만 욕계의 세 품류를 제외하는 경우에는 일찍이 획득된 것과 일찍이 획득되지 않은 것에 각기 열두 가지가 있다.
그리고 알려진 무루의 심ㆍ심소법과, 그것을 능히 아는 [무루의 마음]에도 다 각기 욕계의 세 품류를 제외한 열두 가지가 있다.
먼저 온갖 유루의 [심ㆍ심소법으로서] 일찍이 획득된 것과 일찍이 획득되지 않은 것에 하근기에 포섭되는 타심지가 생겨나는 경우,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하지의 세 근기의 마음과 자지의 하근기의 마음을 능히 알고,
중품[의 근기에 포섭되는 타심지가 생겨나는] 경우에는 역시 또한 자지의 중품의 근기를 능히 알며,
상품[의 근기에 포섭되는 타심지가 생겨나는] 경우에는 자지와 하지의 세 품류의 [근기를] 모두 안다.
그리고 무루의 마음에 하근기에 [포섭되는] 타심지가 일어나는 경우에는 오로지 자지와 하지의 하근기[의 마음]만을 알고,
중품[의 근기에 포섭되는 타심지가 일어나는] 경우에는 역시 또한 중근기[의 마음]도 알며,
상품[의 근기에 포섭되는 타심지가 일어나는] 경우에는 그것과 함께 상근기[의 마음]을 아는 것이다.
어떠한 연유에서 유루와 무루의 타심지가 생겨날 때, 하지를 아는 마음에 많고 적음의 차이가 있는 것인가?
유루의 세 품류(하ㆍ중ㆍ상근기)는 한 소의신상에 성취될 수 있지만, 무루의 경우는 근기에 따라 성자의 차별을 설정하기 때문으로, 한 소의신상에 두 품류의 근기를 성취하는 일도 없는데, 하물며 세 품류의 근기를 성취하는 일이 있을 것인가?
그래서 [양자 사이에는] 차별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한 보특가라가 9품의 도를 성취하여 9품의 혹을 끊는다고 설할 수 있는 것인가?
이러한 도의 차별은 근기상의 차이에 [따른 것이] 아니다.
원인(즉 惑)이 점차 증장[漸長]함에 따라 그 후 도도 더욱 증장[轉增]하여 순서대로 능히 다수의 품류의 혹을 끊게 된다.
혹은 온갖 종성에는 각기 9품이 있어 한 [종성의] 9품을 성취하면 필시 그 밖의 다른 [종성의 9품을] 성취하지 않기 때문에 앞뒤의 말에 서로 모순되는 과실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상지에 근거하여 하근기의 마음을 일으키거나 상근기의 마음이 하지에 근거하여 일어나는 경우, 경지와 근기가 서로에 대해 수승하면 필시 서로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나아가 경지와 계위, 계위와 근기가 서로 대응하는 관계도 역시 그러하다.
[또한] 이러한 타심지는 과거와 미래[의 마음]도 알지 못하니, 이것은 본래 능히 [다른 이의] 심ㆍ심소법을 반연하여 알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며,18)
법지와 유지의 두 품류도 서로가 서로를 알지 못하니, 이 두 가지는 순서대로 욕계와 상계의 모든 대치를 소연으로 삼기 때문이다.19)(이상 제3구~제5구 해명)
이러한 타심지는 견도위 중에는 존재하지 않으니, [견도위에서는] [4]제 이치를 전체적으로 관찰[總觀]하는 것이 매우 빠르게 일어나기 때문이다.20)
그렇지만 [견도위의 마음은] 모두 다 타심지의 경계대상이 될 수 있다.
3승(乘)의 성자가 이러한 [견도위에 대한] 타심지를 일으킬 때, 중품과 하품의 두 승(즉 성문과 독각)은 반드시 가행이 필요한데,
성문의 가행은 상품 혹은 중품이지만, 인각유(麟角喩)는 다만 하품의 가행만을 필요로 하며, 부처님은 가행 없이 원하는 대로 현전한다.
만약 온갖 유정이 장차 견도에 들고자 한다면 성문과 독각이라도 미리 가행을 닦아야 하는데, 하물며 그러한 견도위의 마음을 알고자 함에 있어서랴.
곧 그러한 온갖 유정이 견도위에 들었을 때,
만약 성문이 법지 부분[法分]의 가행을 원만히 하였다면 그 [유정]의 견도의 처음 두 찰나의 마음(고법지인과 고법지)을 알 수 있지만,
만약 다시 유지 부분[類分]의 마음을 알기 위하여 별도의 가행을 닦아 가행이 원만하게 되었을 때라면 그 유정은 이미 제16찰나의 마음에 이르렀을 것으로, 비록 이러한 마음(제16심)을 알았을지라도 이는 견도의 마음을 안 것이 아니다.21)
그렇기 때문에 [본송에서]
“그는 오로지 두 찰나의 마음만을 안다”고 설한 것이다.
인각유(麟角喩) 독각이 만약 법지 부분의 가행을 원만히 하였다면 그 [유정]의 견도의 처음 두 찰나의 마음을 알며,
만약 다시 유지 부분의 마음을 알기 위하여 별도의 가행을 닦아 가행이 원만하게 되었다면, 그의 제8찰나 집류지의 마음도 안다.22)
[이에 대해] 유여사(有餘師)는
“제15찰나의 마음을 안다”고 말하였다.23)
그러나 어떤 이는
“인각유는 네 찰나의 마음을 아니, 이를테면 앞의 두 찰나의 마음과 제8찰나의 마음과 제14찰나의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말은 이치에 부합한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처음 두 찰나의 마음을 알고 난 이후로부터 오로지 다섯 찰나만 건너뛰면 제8찰나의 마음을 안다고 인정하였으므로, 만약 [이로부터] 다시 법지 부분(멸법지인과 멸법지)의 가행을 닦아 다섯 찰나를 지날 때 가행이 성취된다고 해야 한다. 그러니 어찌 제14찰나의 마음을 안다고 인정하지 않겠는가?
다른 어떤 이도 역시 설하기를,
“네 찰나의 마음을 아니, 이를테면 처음 두 찰나의 마음과 제11찰나와 제12찰나(즉 멸류지인과 멸류지)의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라고 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일체의 수승한 공덕을 원하는 대로 현전시키니, 마음이 자재하기 때문이며,
15찰나의 마음도 능히 차례로 아시니, 불세존께서는 3무수겁(無數劫) 동안 정근하여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자량(資糧)을 수습하였기 때문이다.
즉 생각하기도 어려운 수승하고도 미묘한 지(智)를 획득하여 크나큰 세력과 작용을 갖추었기에 알고자 하는 대로 능히 아시는 것이다.(제6구~제8구 해명)
그리고 비록 이러한 [타심]지가 생겨나면 심소도 역시 알 수 있다 할지라도 가행을 닦은 것은 본질적으로 마음(즉 심왕)을 알기 위해서이니,24) 공무변처(空無邊處) 등과 마찬가지로 [가행에 근거하여] ‘타심지’라고 이름한 것이다.25)
그런데 협존자(脇尊者)는 말하기를,
“이러한 지를 인기하여 낳으면, 요컨대 먼저 [다른 이의] 마음을 알고, 그 후 비로소 [심]소를 아는 것으로, 처음에 [알게 된] 것에 따라 다만 ‘타심지’라는 명칭을 설정하게 되었다”고 하였다.26)
이러한 [타심]지를 인기할 때, 어떠한 가행을 닦아야 하는가?
먼저 소의신의 현(顯)ㆍ형(形)의 색과 즐거워하는 말소리[言音]가 마음의 차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관찰해야 한다.
즉 그 같은 행자가 처음으로 업을 닦을 때, 다른 이의 마음의 차별을 자세하게 알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몸의 현색과 형색, 즐거워하는 말소리가 무엇에 의해 차별이 있게 된 것인지를 자세하게 관찰하여 마침내 현색 등의 차별은 마음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런 다음에 다시 다른 사람의 몸의 현색 등도 역시 마음의 변이로 말미암아 차별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자세하게 관찰하고,
이에 따라 그 후 욕탐을 떠난 소의신[離欲身]의 마음이 고르고 유연[調柔]하며 청정하여 뛰어난 선정을 인기하여 낳으면, 이러한 선정에 근거하여 위덕(威德)이 있는 지(智)를 발생시키게 된다.
이러한 ‘지’는 진실로 다른 이의 마음을 조견(照見)하는 것으로,
마치 투명한 구슬 중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색깔의 실을 관찰하는 것처럼,
마음의 차별상을 명확하게 획득할 수 있으니, 이것을 일러 세속의 타심지의 가행을 닦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만약 무루의 타심지를 닦을 때라면, 비상(非常) 등의 고지(苦智)를 관찰하는 것으로써 가행을 삼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가행의 단계에서는 색(色)ㆍ심(心)을 모두 반연하지만, 그것이 원만하게 성취될 때에 이르면 마음만을 반연할 뿐 색은 반연하지 않는다.
또한 가행의 단계에서는 자신과 다른 이의 마음을 반연하지만, 그것이 원만하게 성취될 때에 이르면 다른 이의 마음만을 반연할 뿐 자신의 마음은 반연하지 않는다.
④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
진지와 무생지의 두 가지 상(相)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4성제에 대한 지(智)로서
‘나는 이미 알았다’는 등으로 아는 것과
‘더 이상 알 것이 없다’는 등으로 아는 것이
차례대로 진지와 무생지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예컨대 본론(本論)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무엇이 진지(盡智)인가?
이를테면 무학위에서
‘나는 이미 고(苦)를 알았다’,
‘나는 이미 집(集)을 끊었다’,
‘나는 이미 멸(滅)을 작증하였다’,
‘나는 이미 도(道)를 닦았다’고 스스로 바로 알며,
이에 따라 소유하게 된 지(智)와 견(見)과 명(明)과 각(覺)과 해(解)와 혜(慧)와 광(光)과 관(觀)을 바로 진지라고 이름하였다.27)
무엇이 무생지(無生智)인가?
이를테면
‘나는 이미 고를 알았으니, 더 이상 알아야 할 것이 없다’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나는 이미 도를 닦았으니, 더 이상 닦아야 할 것이 없다’고 스스로 바로 알며,
이에 따라 소유하게 된……(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것을 바로 무생지라고 이름하였다.”28)
그리고 본래의 의요(意樂)에 의해 두 지(智)가 일어날 때의 힘이 능히 이와 같은 해(解)와 지(智)를 인기하는 것으로, 무루의 두 지가 일어날 때 이와 같은 ‘해’를 조작하는 것이 아니니, [무루의 두 지는] 무분별이기 때문이다.29)
이를테면 두 지에서 출[관]한 후에 획득하는 지[後得智] 중에서 비로소 이와 같은 두 종류의 분별을 조작하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의 분별은 두 지 이후에 생겨나는 것으로, 바로 진지와 무생지의 힘에 의해 인기된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두 가지 세속지는 바로 그것(진과 무생)의 사용과(士用果)이다.
따라서 두 가지의 결과를 언급하여 두 지의 차별을 나타내게 된 것으로, 이치상으로도 필시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하니, [본론에서] ‘이에 따라’라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즉 [본론에서는] 이 같은 뜻을 나타내기 위해 ‘이에 따라’라는 말을 설하였으니, 이는 바로 ‘이것에 의해 소유하게 된 지[此所有智]’라는 뜻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마땅히 ‘이와 같이 소유하게 된 지[如是所有]’라고 말했어야 하는 것이다.
모든 관행자는 본디 수행[을 시작]할 때 결정코 이와 같은 다짐[要期]의 의요(意樂)를 일으키는 것으로, 이를테면
“나는 당래 아라한을 증득할 때, 요컨대 마땅히 이같이 스스로를 자세하게 관찰하는 지[審察智]를 일으키리라”라고 하였다.
그런 까닭에 이제 출관(出觀)하면 이러한 지는 반드시 생겨나게 되는 것으로,30) ‘이것을 생겨나게 한 지’를 [이에 따라] 일어난 지(즉 後得智)와 상응하는 바에 따라 진지와 무생지라는 명칭으로 설정하게 되었으니, 이는 바로 뒤의 지가 생겨나는데 소의지(所依止)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러한 해석은 이치상으로도 필시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2) 10지의 상호 포섭관계
이와 같은 10지의 상호 포섭관계는 [어떠한가]?
이를테면 세속지는 한 가지 지(智)의 전부와 한 가지 지의 일부분을 포섭한다.31)
법지와 유지는 각기 한 가지 지의 전부와 일곱 가지 지의 일부분을 포섭한다.32)
고ㆍ집ㆍ멸지는 각기 한 가지 지의 전부와 네 가지 지의 일부분을 포섭하며,
도지는 한 가지 지의 전부와 다섯 가지 지의 일부분을 포섭한다.33)
타심지는 한 가지 지의 전부와 네 가지 지의 일부분을 포섭한다.34)
진지와 무생지는 각기 한 가지 지의 전부와 여섯 가지 지의 일부분을 포섭한다.35)
3) 일체지(一切智)를 10지로 설정한 이유
어떠한 연유에서 두 가지 지(유루지와 무루지)를 10지로 설정하게 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자성과 대치와
행상과, 행상과 경계와
가행과 이루어짐과 원인의 원만함에 따라
열 가지 지로 건립하게 된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일곱 가지 인연으로 말미암아 두 가지 지를 10지로 설정하게 되었다.
첫째로는 자성(自性)으로 인해 세속지를 설정하였으니, 그것은 세속지를 자성으로 삼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대치(對治)로 인해 법지와 유지를 설정하였으니, 그것은 전부 욕계와 상계의 혹을 능히 대치하기 때문이다.
셋째로는 행상(行相)으로 인해 고지와 집지를 설정하였으니, 이러한 두 가지 지의 경계 자체는 어떠한 차별도 없기 때문이다.36)
넷째로는 행상과 경계로 인해 멸지와 도지를 설정하였으니, 이러한 두 가지 지는 행상과 경계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다섯째로는 가행(加行)으로 인해 타심지를 설정하였다. 즉 이러한 타심지가 다른 이의 심소법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행을 닦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이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였다.
비록 그것이 원만하게 성취되었을 때 [다른 이의] 심소도 역시 알 수 있다고 할지라도 가행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타심지’라는 명칭으로 설정하게 된 것으로, [타심지의] 가행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모두 분별한 바와 같다.37)
여섯째로는 [해야 할] 일이 이루어짐[事辦]으로 인해 진지를 설정하였으니, 그것은 결정코 [해야 할] 일이 이루어진 소의신 중에서 처음으로 생겨나기 때문이다.38)
일곱째로는 원인이 원만하게 됨으로 인해 무생지를 설정하였으니, 일체의 성도를 원인으로 하여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진지의 경우 무생지를 원인으로 삼아 생겨나는 것이 아니지만, 무생지로서 진지를 원인으로 삼지 않고서 일어나는 것은 없다.
4) 법지와 유지의 대치력의 한계
앞에서 이미 말한 것처럼 법지와 유지는 전부 욕계와 상계의 법을 능히 대치하지만,
일부 상계와 욕계의 법을 대치하는 경우도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39)
게송으로 말하겠다.
멸ㆍ도제를 반연하는 법지는
수도의 단계 중에서
아울러 상계의 수소단도 대치하지만
유지에는 욕계를 대치할만한 공능이 없다.
논하여 말하겠다.
수도에 포섭되는 멸법지와 도법지는 [욕계의 수소단과] 아울러 상계의 수소단을 능히 대치한다.
그런데 욕계법의 관점에서 본다면, 4제의 법지는 전부 능히 대치하는 것일 뿐더러 욕계 견소단에 대해서도 법지는 역시 지대치(持對治, 즉 해탈도)가 되기 때문에 능히 대치하는 것이나 대치되는 것에 대해 다 ‘전부’라고 말할 수 있지만,40)
상계법의 관점에서 본다면, 두 가지 모두[俱]에 결여됨이 있기 때문에 [능히 대치하는 것이나 대치되는 것에 대해] 다 같이 ‘일부’라고 말한 것이다.41)
어떠한 연유에서 오로지 멸법지와 도법지만이 [욕계와] 아울러 상계[의 수소단]을 대치하고, 고법지와 집법지는 그렇지 않은 것인가?
[멸지와 도지의] 소연이 되는 적정(寂靜)과 출리(出離)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욕계와 상계의 멸(滅)과 능히 대치하는 도(道)는, 서로를 비교해볼 때 그 상에 차별이 없기 때문으로, 모든 택멸은 다 선이고, 다 영원한 것[常]이며, 일체의 성도는 다 능히 출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지와 집지의] 소연이 되는 고(苦)와 집(集)은 욕계와 상계가 동일하지 않으니, 적고 많음과 미세하고 거침과 상하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고지와 집지는 싫어해야 할 경계대상[所厭境]을 반연하는 것으로, 그것(욕계)을 싫어한다고 해서 여기(색ㆍ무색계)서 이탐(離貪)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이치상으로 이러한 지(地)를 싫어할 때면 이러한 지의 번뇌를 끊는 것으로,
만약 싫어함과 이탐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42) 마땅히 이탐과 해탈의 경우도 다르다고 해야 하며,
만약 색ㆍ무색계를 싫어하지 않았음에도 능히 그러한 세계의 탐을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싫어함을 수습하여야 탐을 떠날 수 있다[習厭離貪]’는 이치도 바로 허물어져야 한다.
그러나 멸ㆍ도의 두 지는 싫어하는 경계대상을 반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지[의 멸ㆍ도]를 반연하는 지(즉 멸법지와 도법지)가 상지를 대치한다고 하더라도 역시 과실이 없는 것이다.
또한 [고ㆍ집지와 멸ㆍ도지의 관계는] 부정관(不淨觀)과 열반에 대해 기뻐하여 희구하는 것[欣涅槃欲][의 관계]와 같다.
즉 부정관은 욕계의 경계를 반연하여 능히 마음으로 하여금 오로지 욕계를 싫어하여 등지게 하지만, 열반에 대해 기뻐하여 희구할 때에는 능히 마음으로 하여금 3계를 두루 싫어하여 등지게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욕계를 반연하여 고지와 집지가 생겨나면 능히 마음으로 하여금 오로지 욕계의 염오를 떠나게 하지만, 욕계의 법을 반연하여 멸지와 도지가 생겨나면 능히 마음으로 하여금 3계의 염오를 두루 떠나게 한다.
그래서 멸법지와 도법지의 품류가 증가하면, 나아가 [마침내] 금강유정을 성취할 수 있다고 인정하게 된 것이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대성(大聖)께서는 참으로 미묘하게 능히 잘 요지(了知)하여 모든 대치의 갈래에 근거하여 법지와 유지를 설정하였던 것으로,
법지의 일부(멸법지와 도법지)에는 상계를 대치하는 공능이 있지만, 유지에는 필시 욕계를 대치할 만한 공능이 없다.
요컨대 [법지의 일부는] 자계에 대해 지어야 할 바를 이미 두루 다 지었을 때 바야흐로 타계에 대해 지어야 할 것도 아울러 지을 수 있지만,
모든 유지는 [해야 할 일을] 이미 다 성취하였을 때라도 다른 [세계의] 성취되지 않은 일(즉 욕계의 斷盡)을 반드시 돕는다는 뜻을 갖지 않는다.43) 그래서 유지는 욕계의 법을 대치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
제16 도류지가 생겨나면, 이에 편승하여 능히 욕계의 혹을 대치한다고 해야 하지 않는가?
장차 욕계의 혹을 끊으려고 할 때에는 유지가 현행하지 않으며, 설혹 현행한다고 인정할지라도 자계의 장애(번뇌)에 의해 구애(拘礙)되기 때문에 필시 타계의 법지가 지어야 할 일을 도와 성취할 만한 세력의 공능이 없다.
이에 따라 유지는 능히 욕계를 대치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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