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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아버님이 맺어주신 불연
이동배
수천억겁의 헤아릴 수 없는 기나긴 세월 중 일생이라는 찰나적 삶속에 나와 불교의 인연은 어떤 가치적 의미를 내포한 지를 되돌아보고 점검해본다는 것도 유의미한 작업이라 생각된다. 한 개인의 삶의 태도를 함양하는데 있어서 어떤 가치관과 세계관을 지니는 가는 불교적 입장에서 본다면 개인의 업과 개인을 둘러싼 주변 환경과의 상호관계 속의 산물이 아닐까 싶다.
나 역시 현재까지의 삶을 되돌아본다면 나와 똑같은 환경에서 자란 존재가 없는 독특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기에 나의 인생은 그 누구와도 다른 삶의 궤적을 걸어왔다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다른 환경에서도 진리를 추구하는 마음의 업을 지닌 사람들이 진리의 전당에 들어와 함께 공부하는 인연을 맺은 동대 불교학과의 도반들과의 인연은 그 어떤 인연보다도 뜻깊은 일생의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Ⅰ.
누구나 그렇듯 고향은 어떤 한사람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단초가 되기도 한다. 나의 고향은 불교와의 인연을 닿아 말하자면 먼저 장보고를 떠올릴 수 있겠다. 해상왕이라고 불리어지는 그의 삶을 보노라면 깊은 신심을 지녔던 불자라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현재 고향 청해진(완도)에는 그가 창건했다는 법화사지가 그를 증명한다.
지금의 종교적 수세상황과는 달리 어렸을 적 고향의 불교는 가장 많은 신자를 가진 종교이기도 하였지만, 청소년층에서도 특히 불교학생회는 학업면이나 생활면에서 모범적인 학생들이 많이 다니는 모임으로 알려져 불교학생회원들은 큰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나의 불교와의 인연은 중학교 1학년 후반기 때 시작되었지만 그전까지는 전형적인 신실한 기독교신자였다. 교회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을 다니기도 하였지만 본격적으로 교회를 다닌 건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지금과는 달리 놀데가 없고 배움의 장소가 학교 말고는 없는 상황에서, 즐거움과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는 곳은 교회 말고는 없었던 것이다. 교회에서 들리는 노랫소리에 빨려 기웃거리던 나에게 따뜻한 손길로 교회 품안에 안기게 해줬던 건 교회 누나선생님이었다.
그곳에서의 배움과 놀이는 어린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고 견문을 넓혀 주는 즐거움의 나날 그대로였다. 더구나 독실한 불자인 아버지도 교회에 나가는 걸 적극 지원해주셨고 헌보돈도 꼭 챙겨주시곤 하셨다. 6학년 땐 회장도 맡아서 했으니 참 은혜로운 생활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Ⅰ.
기독교 신앙세계에 깊이 들어갔다기 보다도 그 당시 나의 삶에 일부가 되어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나의 일과를 충실하게 채워졌던 교회에서의 생활은 중학교 1학년 전반기로 마감이 되고 말았다. 중학교 올라오면서부터 아버지는 나에게 불교에 대해 조금씩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하셨고 완도읍내 산중턱에 있는 ‘불로사’라는 절에도 학생들이 다니는 모임(불교학생회)이 있다고 일러주시곤 하셨다. 하지만 기독교 외의 종교 중 하나인 불교라는 종교에 대해선 아예 관심이 없었던지라 애써 무심하며 유혹을 뿌리치려 애썼던 거 같다. 무엇보다도 교회 학생회장을 지냈던 사람이 기독교가 제일 경계했던 종교로 바꾼다는 건 낯 들고 다니기에도 부끄러운 일로 여겨져 불교에의 입문은 가당치 않은 일로 생각되었다.
이런 나에게 끊임없이 불교학생회에 다녀보길 주문하셨던 아버지가 최후의 방법을 쓰신 건 강압적인 방식이었다. 아마도 그 방법 말고는 나와 불교와의 인연을 맺게 해주긴 어렵다고 판단하셨을까? 아버지가 보시기엔 난 깊이깊이 기독교신앙에 깊이 빠지고 있는 걸로 비쳐지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 생각하면 재밌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한 일이지만 어느 날 아버지께서 어린 나의 손목을 잡고 산중턱에 자리한 절까지 데리고 가시는데 그때 얼마나 신을 찾고 간구했는지 모른다. ‘주님! 저를 이런 어려움에서 구해주소서’라고. 지금 생각해도 그땐 넘 간절했던 것 같다. 이런 나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신은 나를 저버렸는지 나는 낯설고 무서운 금강역사를 지나서 법당 앞에 이르렀는데 생소한 노랫소리도 들리고 나를 본 친한 선배들이 반갑게 맞이해주기까지 않는가.
어릴 적의 종교와의 인연은 이렇게 하찮은 흐름 속에 맺어지기도 하고 끊어지기도 하나보다 생각된다. 물론 교회와의 인연이 간단히 끝난 게 아니라 아버지의 강한 전도의 힘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겠지만, 어린사람들의 종교와의 인연은 자기 선택적인 결과 보다는 주변의 힘에 쉽게 좌우된다는 말이다.
중학교 때 매주 일요일에 열리는 법회에 참석했는데 거긴 독특하게도 고등학교 선배가 법회 후에 꼭 한자공부를 비롯해서 간단히 교습을 실시했다. 그리고 방학 때면 불교학생회 출신 대학생 선배들이 서울이나 광주에서 내려와 절에서 영어 수학 교습을 무료로 해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학생들이 뛰어놀기 좋은 너른 잔디밭이 있었고 탁구대 시설도 있어 학생들이 즐기기엔 마땅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이런 배경에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사랑하고 청소년포교를 중요시 여긴 ‘청파’라는 스님이 계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스님이 계실 적에 완도는 최상의 힘을 지닌 종교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섬 지역은 처음엔 육지 사람을 배타적으로 경계하지만 이제 우리 섬에서 정착할 사람이라고 여겨지면 그 누구보다도 아끼고 따르는 특성이 있다. 청파스님은 입적한 그 날까지 내내 우리 섬사람 곁에 계셔주셨던 스님이셨다. 힘들면 걸망지고 떠나면서 이제 인연이 다했다라고 말하는 그런 스님이 아니었다.
Ⅰ.
중학생인 나는 불로사 불교학생회장을 하며 불교와 보다 가까워져 있었고 새로운 종교인 불교의 분위기에 훈습되고 부처님 가르침에 조금씩 다가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나에게 불교의 세계로 이끌어주신 분은 아버지였는데 아버지는 늘 식사시간에도 불교이야기를 들려주셨고 고향에서 유일한 불교잡지 신문 구독자이셨기에 집안에는 불교신문과 잡지가 널려 있어 자연스럽게 불교와 가까워 질 수 있었다. 그리고 새벽이면 아버지와 함께 뜻 모를 면벽좌선을 해댔는데, 어린 나에겐 참으로 고역스럽고 힘든 일중에 하나였고 불교수행의 어려움을 맛보게 한 추억이 되었다.
그리고 중학교 때 처음 간 백양사 수련회는 정말 불교랑 가깝게 해준 인연이었던 것 같다. 눈 많이 내리는 백양사에서 공양시간에 나온 김치국은 정갈함 그 자체였고, 바로 불교의 순수 담백을 그대로 빼어 닮아 내 머릿속에 아직도 깊이 남아 있다. 종교는 이론과 지식이 아닌 감성적 부분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큰데 수련회나 템플스테이는 불교적 감성을 길러주고 심어주는데 참으로 중요한 기회가 되기에 불교와의 인연을 심어주는데 적극 활용할 방안이라 생각한다.
고등학교 진학은 누구에게나 삶의 방향을 보다 구체화시키는 결정적인 선택이 되곤 한다. 난 당시에 당연히 광주시내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리라 생각했지만, 아버지는 정광고를 사전에 답사하시고 거기에 진학할 것을 강력하게 주문하셨다. 그래서 불교종립학교인 정광고를 다니게 되었는데 당시 정광고는 종비생 혜택이 있어 3년간 장학생으로 다닐 수 있게 되었고, 당시 종비생들은 절 안에 있는 기숙사 생활을 함께 하였는데 미산스님(상도선원장)을 비롯한 현재 불교계 출재가 활동가들과 인연을 깊이 맺을 수 있었다.
지금 고등학교 시절을 되돌아보면 정광고는 종비생 혜택을 주는 등 나름 종립학교의 역할을 한다고 하였지만 넘 아쉬운 점이 많았던 거 같다. 학교에서는 불교에 대해 가르쳐주는 종교시간이 아예 없었고 삼귀의 사홍서원을 음악시간에 배워 의식시간에만 부르고만 수준이었다. 오로지 ‘실력정광’을 외치며 보통 일반계 고등학교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으니 설립이념은 문자 속에만 존재하는 공허한 구호에 불과하였다. 현재 모교에서 교법사로 근무하는 나로서는 참으로 아쉽고 종립학교의 건학목적을 되새기게끔 하는 학창시절이었던 것 같다.
Ⅰ.
고등학교 때도 불교학생회장으로서 신행활동을 하며 불교와의 인연을 쌓았는데 대학진학을 앞둔 상황에서 나는 불교를 본격적으로 공부해보고자 불교학과에 진학을 하게 되었고 그건 아버지에겐 최고의 선물이기도 하였다. 물론 아버지 바람대로 내 뜻을 좇아간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버지가 가장 바라시던 게 아들이 불교학과에 진학하는 거였고, 아들이 출가자의 삶을 걷는 거였기 때문이다.
고향의 청파스님의 주선으로 당시 서울 성북동 전등선원장이셨던 은사 혜산 스님을 뵙고 나의 대학생활은 전등선원에서 시작되었다. 당초엔 절의 일을 조금씩 도와주면서 숙식을 해결할 참이었는데 점차 본의 아니게 행자의 신분 비슷하게 변모하게 되었고 묘하게 나 역시 그게 싫지는 않았었다. 절하고 학교만 왕래하면서 이어지던 대학생활과 절 생활은 미묘한 부조화 속 생활이긴 했지만 절제된 삶 속에서 충만함을 느꼈고 수행자의 가풍을 지닌 해안문중의 품안에 점차 깊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그해 겨울에 은사스님은 나에게 출가의 길을 열어주셨다.
성북동 절에서의 생활이 아닌 도반이 머물고 있던 백상원에 들어가고자 한 염원이 이루어진 건 4학년 때였다. 늦었지만 1년만이라도 도반들과 함께 한 시간은 같은 수행자로서의 고민을 알 수 있고 친해지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대학 4학년 때의 우리나라 정치적 상황은 매우 심각한 위기 속에 있었고 독재정권하에 신음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5.18 민주화운동을 고등학교 때 겪은 나로서는 군부독재의 독재자는 악마 그 이상이었던 것이다. 이럴 때 우리불교는 어떤 역할을 해내고 있는지 유심히 바라보고 관심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의 한국불교는 더 이상 한국사회에 필요치 않는 종교에 불과하였고 내 자신이 그런 종교에 몸담고 있다는 게 너무 괴롭고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대학 4학년 때 민중불교운동연합 조직부장 역할을 맡으며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양심적 행동을 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최소한 역사 속에서 부끄러운 삶을 살았다는 평가를 내 스스로에게 내리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나의 삶속에서 가장 치열하게 고민하고 살았던 시기가 그 때였던 거 같다.
Ⅰ.
그렇게 대학생활을 마칠 즈음 난 군법사 후보생이었기에 졸업 후 1년 동안 여유를 지닐 수 있었다. 민불련 활동하는 스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스님의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할 시간이 얼마 없다고 생각되어 내소사에서 재무 소임을 보는 걸로 결정하고 1년 동안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였다.
당시만 해도 내소사는 참으로 열악한 재정 상황이었기에 살림살이가 여간 힘들지가 않았다. 은사스님 한분과 총무스님 그리고 공양주 보살님 한 분이 계셨다. 그렇게 가난하였지만 수행자로서의 삶을 만족하며 살아가던 중 우연히 들려오는 9.7 해인사 승려대회. 그 사건은 애써 역사의 현장의 아픔을 외면하려는 나에게 반성과 자각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래서 스님께 죄송하다는 편지 한 장 남겨두고 서울로 올라와 명진 스님과 함께 10.27 법난 규탄대회를 준비하여 봉은사에서 실행하였는데 집회 후 수배령이 떨어지고, 나와 명진 스님은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기소유예로 풀려나 내가 향한 곳은 가장 노동환경이 열악하다는 부천이었다. 나중에 동아일보에도 기사화가 된 노동자 포교당 부천 ‘반야포교원’이었다. 손가락이 성한 젊은이가 거의 없어 손가락 한두 개는 기본적으로 잃은 친구들로 가득 찬 포교당의 생활은 젊은 승려에게 새로운 세계에 대한 청년들의 열망을 생생하게 일깨워 주었다. 사람다운 세상을 꿈꾸는 우리들의 새로운 공동체를 열어가는 하루하루의 삶은 진정한 불국토의 세상을 열어가는 발걸음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이런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발걸음을 내딛던 중 우리 사회에서 복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군복무를 법사로서 하게 되었는데 부천에서의 열악한 삶의 환경이 아닌 계급적 사회에 젖어드는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군법사의 생활은 병사들의 힘듦을 위문하며 불교와 인연을 맺기 힘든 그들에게 부처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점에선 중요성이 없지는 않는 긍정적인 면이 없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한반도에서의 평화는 이런 적대적 대치상황이 아니라 자주적 독립국가 건설이 시급하다는 점에서 늘 마음 한 켠에 무거움의 추를 단 채 10년의 삶으로 이어져 버렸다.
Ⅰ.
모교에서의 부름으로 교법사 생활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불교와의 인연을 심어주고 종립학교로서의 위상과 역할에 고민하며 지낸 지 벌써 20년이 가까워지고 있다. 학생들에게 연꽃과 같은 삶을 가르치며 수처작주의 주인공 삶을 살아 이 땅에 보살로서의 삶을 살길 축원하고 있다.
잘 알다시피 기독교는 몸의 선교는 병원을 통해, 정신의 선교는 교육을 통해 전개하고 있다. 특히 교육은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학생들에게 기독교적 가치관을 심어주는데 현재 우리나라 사학의 절대 다수가 기독교 미션스쿨이다. 우리 불교 선각자들이 일제 강점기에 세웠던 많은 불교 종립학교는 매각되고 현재는 불과 20여개 학교가 운영되고 있다.
지금과 같이 종교 활동하기에 어려운 조건(과도한 학업과 진로불안)에 놓인 청소년 포교 상황에서는 군대와 같이 종교와의 인연을 맺는 조건이 아니고서는 불교포교는 난망한 점이 없지 않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설사 불교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종립학교에 재학하는 동안 불교적 환경에서 교육을 받는다면 자연스럽게 부처님 가르침에 가까이할 소연을 심어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나는 학생들에게 불연을 심어줄 수 있는 상황에서 나로 말미암아 부처님과 가까이 하게 될 많은 꿈나무 불자들을 떠올리며 최선을 다하려 한다.
Ⅰ.
나와 불교와의 인연을 직접 맺게 해주시고 늘 나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일깨워주신 아버지는 이생의 인연을 다하시고 지금은 대학병원 해부실에서 의대생들의 실습자료로 기꺼이 몸을 내맡기고 계신다. 몸의 부질없음을 잘 알 수 있도록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는 나에게 큰스님들의 입적 후 일화를 들려주시고는 하셨다. 바다에 자신의 몸을 버리게 하여 물고기에게 보시한 이야기, 산속에 버려 짐승의 밥이 되게 한 이야기 등을 들려주시며 당신도 직접 진정한 보시를 실천하신 아버지는 나에게 불교의 스승으로 여전히 자리하고 있다.
Ⅰ.
불교는 나의 삶에 있어서 절대적 가치가 되어 삶의 저변에 흐르는 강건한 받침돌이 되었다. 진리에 조차 집착을 경계한 절대 진리의 가르침은 고통스런 나의 삶을 자유롭게 하였고 또한 뭇 생명을 자유와 행복으로 이끄는 진실 된 길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러한 자각을 일깨워준 부처님과 모든 선지식들의 은혜에 감사할 따름이다.
이제 나의 원력을 말한다면 불교를 전문화되고 세련된 가르침으로 무장하여 현실의 사람들에게 불교를 풀이하고 설명해내어 함께 이 땅을 불국토로 가꾸는 실천적 삶을 걸어가고자 함이다. 외도의 가르침으로 혼탁한 이 세상에 부처님의 진리를 설파하는 파사현정적 삶으로 정토세계를 향해 늘 부단히 실천 수행하는 불제자가 되리라 발원한다.
이동배 1986년 졸업. 군승법사로서 10년간 군포교에 봉직했다. 이후 부천 반야포교원의 원장 역임하였으며, 현재는 광주 정광고 교법사로서 전국교법사단장의 직책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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