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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멈춤의 시간
우연히 짧은 동영상을 보게 되었다. 기저귀를 했는지 엉덩이가 불룩 한 아이가 유아용 암벽을 타는 모습이 담긴 영상물이었다. 끝까지 오르 든, 그러지 않든 그 모습 그대로 기록으로 남길만하겠다고 생각하며 보 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감동하기엔 충분했다. 어린 암벽등반가께서 벽 중간쯤에서 잠시 멈출 때, 나는 아, 그만하시려나 했 었다. 이미 저 작은 손아귀에 담긴 힘과 집중에 놀라워하던 터라 그만해 도 충분히 감동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쪽저쪽 디딤돌과 오름 돌을 골 라잡으며 결국 암벽을 정복해냈다. 영상물을 보면서 눈에 밟힌 것이 바 로 중간쯤 잠시 멈췄던 장면이었다. 멈췄다 다시 출발한 그의 몸은 매우 가벼워 보였다. 1초나 2초쯤, 저 짧은 멈춤 동안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 지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내가 본 것은 잠시 멈췄다 다시 출발했을 때 힘 이 더 생겨 보였다는 것뿐이다. 잠깐의 멈춤이 힘을 모은 시간이었다고 생각됐다. 호흡을 가다듬고 방향을 재확인하는 시간, 물러남과 나아감 을 결정하는 시간, 새 루트를 개발하는 시간으로써의 멈춤의 시간. 당분 간 멈춤을 지체나 퇴행의 전조가 아니라 무언가를 해 낼 힘을 모으는 시 간이라고 생각해보기로 했다. 문학 역시 멈춤의 발견에 관심이 많다. 일 상의 속도에 금을 긋고 일상의 장면에서 비일상을 발명해낸다. 새로운 일상의 가능성을 상상해내는 문학의 탐험과 도전으로 우리는 꽤 많은 힘을 얻는다. 동시 한 편, 이야기 하나 읽는 일이 힘을 모으는 시간이면 좋겠다.
겨울호 “작가의 서랍”은 김미희 시인과 박혜선 시인이 참여했다. 문단 동료로 설명하기에는 뭔가 부족한데 두 시인이 보여준 우정은 부럽다기 보다는 든든한 쪽이다. 동시를 쓰지만, 동화와 청소년소설, 그림책으로 작품 세계를 확장하고 있는 것에 관한 이야기, 모든 문학은 기획이며 독 자를 즐겁게 해줄 의무가 있다는 말 등 내내 힘이 넘치는 대화가 오갔다. 거침없는 듯하지만 오랜 문단 활동을 통해 새긴 경험과 생각이기에 집중 해 읽어보면 좋겠다.
황수대의 “시선”은 문예지 편집자로서 매우 공감할 수밖에 없는 말이 다. 그는 푸념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가 몇 년 전에도 이런 걱정을 했 다는 것을 기억한다. 문학을 구성하는 중심축인 작가, 출판사, 서점, 독 자들이 공생적인 관계라는 자각을 환기하는 시간이다. 유효기간이 없는 ‘푸념’이다.
“동시”는 13명의 시인이 보내신 멈춤의 사건들이다. 사는 곳, 사유의 길목이 다 다른 곳에서 발견한 목록은 늘 놀랍고 신기하다. 26편의 작 품마다 특별한 만남의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동화”는 신지명, 은경, 조성희 세 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신지명의 「내가 그릴 웹툰」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가족의 이야기다. 죽음의 선택지만 남은 가족의 일은 작품 밖 엄연한 현실이다. 간절하게 하고 싶 은 것이 있고 찾아보면 살아야 할 이유가 보일 텐데 끝내 삶을 포기한 부 모의 선택은 안타깝기만 하다. 가족 동반 자살이라는 무거운 사건이 문 학으로 소환되는 게 안타깝지만 외면할 수도 없다. 아이가 끝까지 삶의 끈을 놓지 않아 마음을 놓는 것도 잠시, 이 아이가 살아갈 시간에 부모 가 없다면 아이의 삶이 얼마나 많이 외롭고 힘들 것인가. 극단적 절망에 놓인 사람을 구하는 일에 마음을 거두지 말아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현실 속 어린이는 어른에게 지는 일이 더 잦다. 그렇기에 있는 힘껏 어른이라는 권위, 부모라는 절대 권력에 맞서고 이기는 문학적 상상이 필 요하다.
은경의 「눈싸움」은 특별할 게 없는 일상에서 발견한 사건이 사랑스럽 고 감사하게 다가오는 이야기다. 아빠와 둘이 사는 주인공의 일상은 어 쩐지 위태로워 보이지만 마지막 남은 고기 팩을 놓고 벌이는 낯선 할머니 와의 쟁탈전은 비로소 이웃이거나 사람의 말을 듣는 것 같고 팽팽해서 생기가 넘친다. 사과인 듯, 화해인 듯 내미는 할머니의 마음, 그 마음을 받음으로 조금 덜 추운 겨울을 보낼 거 같은 두 부자의 겨울이어서 마 음이 행복해지는 이야기다.
조성희의 「투명 인간」은 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 엄마와 딸의 대 결을 다루고 있는데 주인공 아이가 좋아하는 물이 되기 위해 머뭇거림 없이 물의 세계로 떠난다는 설정이 파격적이다. 엄마의 간섭과 통제를 거부하면서도 현실에 머물며 화해와 갈등의 유예로 마무리하는 이야기 가 아니라 아예 엄마의 세계를 떠나 나의 세계로 들어가 버리는 이야기 는 현실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문학적 사건으로서의 상상이다. 욕망을 거세당한 주인공의 마음이 이해되기에 동의할 수 있는 사건이다.
박윤우의 “청소년소설” 「비상구」는 때아니게 벌어진 이상하고 웃기면 서 슬픈 한밤의 추격전이다. 쫓기는 자와 쫓는 자의 가쁜 호흡, 우리 안 의 공포와 타인을 향한 두려움이 빚어낸 해프닝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특집-오늘의 작가”는 2021년의 연장선이다. 작가와 시인이면서 평론 을 쓰는 김민령, 김준현, 임수현과 같은 잡지를 통해 평론을 쓰기 시작한 강수환과 이하나가 참여했다. 그들이 호명한 오늘의 작가 5인은 한국 어 린이·청소년 문학이 보유한 짱짱한 작가와 시인이다.
강수환의 「위조화폐와 가상화폐 사이에서」는 최양선의 청소년소설 을 읽는다. 시인 보들레르의 시에서 가져온 위조화폐 비유를 통해 최양 선 소설의, 가상의 현실을 새로 쓰는 가상화폐와 기존 세계와 질서를 뒤흔드는 ‘사건’으로서의 경험을 선사하는 위조화폐의 궤적을 살핀다. 그 에 따르면 최양선은 정답이 아니라 물질과 영혼처럼 우리의 현실을 구성 하는 요소이면서도 ‘보이지 않는 것’ 비현실적 세계를 위조함으로써 현실 을 더 잘 바라보고 관찰하게 한다. 작가의 창작 행위와 그 결과인 작품 의 자리를 잘 살피는 평론이다.
김민령의 「어린이 여러분, 귀한 손님은 여기 앉으세요」는 김리리 작품 론이다. 평론의 진지함은 잃지 않되 김리리 동화의 목소리에 호응하듯 발랄한 평론의 목소리가 새롭고 반갑다. 그가 김리리의 떡집 시리즈가 시리즈 상업 출판물이 갖는 한계가 없지 않으나 어느새 자생적으로 굴 러가며 세계관을 확장한다고 했을 때, 왜 김리리의 떡집 이야기가 지루 함 없이 재미있는지 알 것 같았다. 자생의 생명력을 가진 시리즈라니. 김 민령이 김리리 동화에서 어린이들이 기본적으로 손님이라고 한 말은 특 히 인상적인데, 작가의 저 마음을 수많은 어린이 독자가 이미 알아본 것 이 아닐까.
김준현의 「단 한 사람의 보폭으로 독자를 내면화하는 힘」은 시인 문 현식과 그의 동시에 관해 이야기한다. 김준현이 본 문현식 동시는 거대 한 걸 꿈꾸거나 품지 않고 비현실적이거나 추상의 것으로 이해되는 것, 즉 멀리 있는 것을 언어에 기대 상상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이미 문현식 동시를 알고 있다면 김준현의 말에 동의할 것이다. 문현식 동시가 독자 와 똑같은 걸음으로 서둘지도 않고 걸으면서 넓고 깊어진다는 것, 지극 히 구체적인 단 한 사람의 보폭으로 걷는다는 것이 문현식 동시와 다른 동시의 변별점이라는 말에도. 문현식의 동시는 큰 변화가 없는 것 같으 면서도 새 동시로 만날 때마다 조금씩 달라진다고 생각하던 사람이다. 문현식의 보폭은 넓고 깊은 것이었다.
지난해 평론으로 창비어린이 신인문학상을 받은 이하나의 평론은 그 때도 지금도 섬세하다. 작품에 대한 이해가 깊은 평론을 읽게 된 것 같 아 기쁘다. 「태어나는 목소리, 그리고 목소리들」은 주미경의 동시와 이야기에 관한 글이다. 동시와 이야기를 같이 쓰는 작가의 창작 행위를 하나 의 글에서 볼 수 있게 돼 기쁘다. 물론 필자는 두 배로 수고로웠음을 안 다. 동시와 동화 쓰기에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주미경은 이하나의 말 대로 확실히 이야기꾼이다. 주미경의 특별함은 특별할 것 없는 것에 귀 기울이게 만드는 것에 있다는 건데 이거야말로 이야기꾼의 재능이 아닌 가. 그런가 하면 주미경의 시와 이야기는 ‘잉어가 솔새와 뱀과 바람을 만 나는 곳’에서 태어나기도 해서 주미경이 또 어떤 동시와 이야기로 독자 를 이끌지 기대가 크다.
임수현의 「친애하는 바틀비 씨께」는 김성민 시인론이다. 서로를 잘 아 는 사람만 할 수 있는 말과 마음을 공유하게 된 것 같아 특별한 글이다. 시인으로만, 출판노동자로만 알고 있었다면 시인과 출판노동자와 함께 인간으로서의 김성민까지 엿볼 수 있다. 가만히 피리를 불며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같지만 무언가를 하는 김성민을 그의 작품으로 읽어내는 속 깊은 시인론이다. 임수현에 의하면 김성민의 시를 읽으려면 한껏 청각의 볼륨을 낮추어야 한다. 큰 소리에 묻힌 작은 소리를 찾아내는 일이 김성 민의 시 쓰기이므로.
“삐뚤빼뚤”은 물체가 곧지 못하거나 글씨가 고르지 못했을 때 쓰는 말인데, 이번 겨울호 역시 “삐뚤빼뚤”은 전혀 삐뚤빼뚤하지 않다. 나름의 번민과 애씀으로 꽉 찬 어린 그들의 일상이 안녕하기를 빈다.
“숲 해설가가 들려주는 어린이와 계절 이야기”는 이제 겨울 숲 이야기 다. 겨울 숲의 정중동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숲은 지혜롭다.
시인 김금산이 아니라 보건교사 김하준이 쓴 “목소리”는 코로나 팬데 믹을 정면으로 맞서온 양호실 이야기다. 양호실이라는 장소의 의미와 가 치가 새삼 크다는 걸 느낀다. 그는 최근 양호실 이야기를 책으로 묶었는데, 글이 되는 삶을 사는 그에게 존경과 감사를 보낸다.
정선희의 기획연재 “식민지시기와 우리 동화”는 우리 아동문학사의 첫머리를 장식한 창작동화집 『창작동화급동화극집(創作童話及童話劇集) 무지개』를 펴낸 고한승에 관한 이야기다. 연구 논문의 딱딱함을 정선희 특유의 이야기성으로 녹여낸다. 이런 기회로 우리 동화의 뿌리, 혹은 근 원을 생각해보면 좋겠다.
“우리들의 단톡방”과 “서평”, “그림책의 그림을 읽다”에 담긴 열정과 관심도 잊지 말아야 한다. “제9회 한낙원과학소설상”이 새 작가를 맞았다.
채은랑의 「사라지지 않아」를 수상작을 선정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수상의 기쁨이 창작의 동기가 되고 그 기운이 오래가기를 바란다. 수고를 아끼지 않은 김경연, 박상준 두 분 심사위원과 한낙원 선생님 유족께 감사드린다. 겨울호(181호)를 끝으로 현 편집부 임기가 끝나고 지면에도 변화가 있 을 예정이다.
겨울호로 연재 마감하는 “숲 해설가가 들려주는 어린이와 계절 이야기”에서 숲의 사계절을 아이들의 생기와 함께 전해 준 박보나, “기획연재-식민지시기 우리 동화”에서 연구와 글쓰기, 학회 활동으로 일 인다역을 맡으면서도 2년 동안 식민지시기 우리 동화의 행보를 한 편의 이야기처럼 들려준 정선희와 현장 비평의 가능성을 기꺼이 탐험해준 “우 리들의 단톡방” 참여자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일상과 일, 창작으로 빠듯 한 시간을 쪼개 잡지 편집에 참여해준 9기 기획위원과 편집위원께 감사 의 마음을 전한다. 10기 편집부가 만들 <어린이와 문학>도 변함없이 응 원해 주시리라 믿는다.
겨울호를 편집하는 동안 또 한 번 일상이 휘청거리고 깊은 상처로 남을 만큼 안타까운 일이 생겼다. 길었던 코로나 팬데믹의 출구가 보인다 고 생각했는데 더 어두운 터널로 이어지는 것 같다. 힘을 모아야 하는 시 간조차 갖질 못할까 봐 걱정스럽다. 다시 치유와 회복, 지지와 믿음, 우정 의 심지를 잘 살펴야 하는 시간이다. — 김재복(본지 편집주간)
첫댓글 저만 이렇게 독특한 책을 받은 걸까요ㅎㅎㅎ
동시가 더욱 궁금해지네요
재밌어서
안 바꿀 거지만,
다른 분들 책은 괜찮으셨길 바라요~^^
죄송합니다! 교환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게 있는 것은 괜찮은데, 아이쿠.
아이디만으로는 연락처를 알 수가 없어서 010-9006-4623으로 전화 주시면 교환해 드리겠습니다.
다시 한번 죄송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김재복 아이쿠~괜찮습니다. 인쇄소의 실수겠지요~:) 기계도 잠시 쉬고 싶었나 봅니다.
잘 간직할게요^-^
@맥그로드간즈 유쾌한 일로 생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든 필요하시면 말씀해 주세요^^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