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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네상스 발상지인 피렌체
- 산타 크로체 성당
-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의 촬영지인 두오모 성당
- 시뇨리아 광장
- 단테의 집
- 아르노 강,베키오 다리
피렌체는 로마에서 북서쪽으로 약 230㎞ 떨어져 있는 이 시는 공화국, 토스카나 공작령의 수도, 이탈리아의 수도(1865~71) 등 다양한 지위를 누리며 긴 역사를 이어왔다. BC 1세기경 로마의 군사 식민지에서 비롯된 곳으로 14~16세기에는 예술을 비롯하여 상업·금융·학문 등의 분야에서 높은 위치를 점했다. 이곳을 무대로 활발히 활동했던 천재들을 통해 이 시의 탁월함을 엿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브루넬레스키, 단테, 마키아벨리, 갈릴레오 및 메디치 가문을 들 수 있다.
그중 가장 으뜸은 뛰어난 천재로 알려진 레오나르도 다 빈치이다. 화가이며 조각가, 건축가였던 레오나르도는 1452년 4월 피렌체 근방의 산간 마을에서 태어났다〈최후의 만찬〉〈수태고지〉〈암굴의 성모〉 등 그가 남긴 명작들 가운데 피렌체에서 만든 작품이 바로 그 유명한 〈모나리자〉이다
피렌체가 낳은 두 번째 예술가는 의심의 여지없이 미켈란젤로이다. 레오나르도와 마찬가지로 화가이며 조각가, 건축가, 작가, 학자였던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에서 예술 분야의 르네상스를 주도했으며 바티칸 궁전 안에 있는 시스티나 성당에 천장 벽화로 그린 〈최후의 심판〉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피렌체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외에도 보티첼리, 라파엘로, 단테 등 유명한 예술가들이 많이 탄생했는데, 이것은 당시 피렌체의 세력가였던 메디치 가문이 적극적으로 이들을 후원했기 때문이며 열세 살의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발견하고 조각 공부를 시켰으며, 라파엘로를 후원해서 그의 천재성을 마음껏 발휘하도록 했다. 르네상스를 빛냈던 많은 화가와 건축가 대부분 메디치 가문과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산타 크로체 성당 측면부
산타 크로체 성당(Basilica di Santa Croce)
1295년 아르놀포 디 캄피오가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성당으로 건축한 산타 크로체 성당은 피렌체 고딕 양식의 걸작이며세계에서 제일 큰 프란치스코회 성당이다. ‘산타 크로체’는 ‘성스러운 십자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 성당은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상징인 ‘타우 십자가’의 T자 형태로 건축되었다. 이 성당이 유명한 이유는 바로 성당 내에 있는 유명인들의 무덤 때문이다. 내부에는 미켈란젤로, 갈릴레오, 마키아벨리, 로시니 등의 무덤이 있고 단테의 가묘가 있다. 피렌체에서 유명한 극작가인 단테는 생애 마지막에 추방을 당해서 객사했기 때문에, 시신 없이 가묘만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단테는 베네치아에서 병에 걸려 라벤나에서 숨을 거두었고, 그의 묘는 현재 라벤나에 있다. 피렌체에서는 단테의 시신을 돌려달라고 라벤나에게 계속 요구하고 있지만, 라벤나가 끝까지 거부하고 있어 여전히 라벤나가 묻혀 있다.
단테(Dante)의 동상
단테는 피렌체에서 태어나 활동했지만, 30대 후반에 정치적인 이유로 추방되어 죽을 때 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라벤나에서 1321년 말라리아로 사망했다. 피렌체는 라벤나시에 단테의 시신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줄 것을 줄기차게 요구했지만 라벤나시는 전혀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대신 단테의 석상 하나를 보내왔는데 이 석상을 산타 크로체 교회 정면 왼쪽에 세워놓았다. 1829년 피렌체 시의회는 산타크로체 성당에 그의 무덤을 건설했다. 피렌체 시의회는 2008년 6월 단테에게 내려진 사형선고를 무효화 했다
정면 파사드는 1853년 니콜로 마타스라는 유대인 건축가에 의해 설계되었다. 유대인 마타스는 이 성당 파사드를 설계한 자기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커다란 ‘다윗의 별’을 파사드 위에 장식 해 놓았다. 다윗 별 안에 양각되어 있는 태양 속의 예수 그리스도의 모노그램인 ‘†’와 ‘YHS’ 가 표시되었다. 산타 크로체 성당의 ‘Santa Croce’는 ‘성스러운 십자가’ 라는 뜻으로 ‘†’는 이 성당의 상징이다. 다윗 별 위 파사드 맨 꼭대기에 두 천사가 이 성당의 상징인 ‘†’를 받들고 있다.
이날 찾은 산타 크로체 광장은 몇일전 까지 진행된 행사로 사용되고 난후 철구조물과 무대를 철거하지 않은 상태로 있어 좀 아쉬웠다
피렌체 두오모 성당(Duomo di Napoli / Santa Maria del Fiore)
피렌체를 대표하는 대성당, 두오모는 피렌체에서 가장 높이가 큰 건축물이자, 유럽에서는 네 번째로 큰 성당이다. 특히, 하얀색, 핑크색, 녹색의 대리석이 기하학 무늬를 이루고 있는 아름다운 외관을 가지고 있는데, 원래 이름은 ‘꽃의 성모 마리아’라는 뜻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이다. 성당의 건축은 1296년 시작되어 1371년 본당이 완공되었고, 돔은 브루넬레스키에 의해 1437년 완공된 것이다. 브루넬레스키는 아무런 철근이나 콘크리트의 도움 없이 벽돌만으로 돔을 쌓아 올렸다. 돔의 내부에는 바사리와 그의 제자들이 그린 프레스코화 〈최후의 심판〉이 그려져 있으며, 돔의 꼭대기에는 전망대가 있어 463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멋진 피렌체의 전경을 볼 수 있다.
지오토의 종탑(Campanile di Giotto)
두오모 건설의 총 책임자였던 지오토가 1334년에 설계를 하고 종탑의 기초 부분 공사 후 1337년에 그가 사망하자 그의 제자인 안드레아 피사노와 탈렌티에 의해 1359년에 완성되었다. 안드레아 피사노는 피사의 사탑(1173년)을 만든 보나노 피사노의 후손이다. 종탑에 오르려면 총 414개의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종탑에 올라 테라스로 나가면 웅장한 두오모의 모습과 오렌지빛 피렌체의 모습이 한눈에 펼쳐진다. 내부는 피사의 사탑보다 넓은 편이다.
단테의 집(Casa di Dante)
원래 단테가 살던 집은 없어졌지만, 피렌체 시가 단테가 살았던 위치의 건물을 사들여 단테 기념관으로 지은 곳이다. 단테는 1265년 5월 피렌체에서 태어났으며, 드란데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후에 단테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기념관은 단테 탄생 700주년이었던 1965년 처음 문을 열어 일반인에게 공개되기 시작했는데, 일곱 개의 방에 걸쳐 단테의 침실과 서재, 그리고 그의 행적을 시대별로 정리해 놓은 자료들을 전시해 놓았다. 특히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는 단테의 〈신곡〉 전편을 인쇄한 것을 계단 벽에 걸어 두었고, 한국어를 비롯한 전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된 단테의 〈신곡〉을 볼 수 있다.
보티첼리가 그린 〈신곡〉의 삽화도 이곳에 전시되어 있다. 단테는 35세 때 정치적인 이유로 피렌체에서 추방당해 죽을 때까지 피렌체로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지금은 르네상스 시대의 4대 시인으로 손꼽히며 피렌체에서 인정받는 시인이지만, 예술가의 쓸쓸한 최후는 안타깝다. 이 집 근처에는 단테의 애인인 베이트리체가 살았었다고 하지만, 어디인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단테(Dante)
단테(1265~1391)는 르네상스 시대의 문예 부흥의 선구자로 불릴 뿐만 아니라 현대 이탈리아어의 기초를 세운 사람이다. 또한 그의 명작인〈신곡〉은 후일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신곡에서 묘사한 지옥의 세계를 우리는 시스티나 예배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상당한 귀족 집안 출신으로 베아트리체에 대한 끝없는 사랑의 시를 지었다.
과거 교황파와 황제파가 싸우던 13세기 피렌체의 교황을 지지하는 구엘파(guelfa)당과 황제를 지지하는 기벨리나(ghibellina)당 중에 단테의 집안은 전통적으로 황제를 지지하는 기벨리나당이었다. 여기서 황제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뜻한다. 그는 1296년 6월에 통령까지 지내게 되지만 그가 소속되어 있던 온건파인 백당이 강경파인 흑당에게 밀리자, 결국 1300년 교황파와 정치 싸움에 휘말려 피렌체에서 추방당해 라벤나로 쫓겨난다. 이때 라벤나의 영주였던 폴렌타가 단테에게 거처를 제공한다. 이곳에서 그의 명작〈신곡〉을 남기게 된다. 단테의 아들들은 이후 성직자가 되었고 단테는 1321년에 죽었다.
지금도 라벤나의 단테의 무덤 앞에는 꺼지지 않는 작은 등불이 있다. 그런데 지금도 단테를 추방한 피렌체 시에서 별도로 예산을 내어 라벤나 시에서 감당해야 할 이 기름 값을 피렌체에서 속죄의 의미로 대고 있다.
폰테 베키오(Ponte Vecchio, 베키오 다리)
1345년에 건설된 베키오 다리는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다. 원래 이 자리에는 로마 시대에 지어진 나무 다리가 있었는데, 홍수로 휩쓸려가자 새로 건설한 것이다. 다리의 설계는 지오토의 제자인 타데오 가디가 맡았으며, 아르노 강의 가장 좁은 곳에 세워졌다. 원래 이 다리 위의 상점에는 푸줏간 등이 많아서 늘 냄새가 고약했는데, 가까이 궁전이 있었기 때문에 페르디난도 1세는 궁전 주변에 어울릴만한 보석상들을 이 다리의 상점에 들어서게 하면서 기존에 있던 상점들은 철거했다
아르노 강
피렌체의 아르노강은 베키오다리와 같이 보면 이태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이라 할 수 있다. 강 주변에 위치한 건축물들이 강과 어울러져 멋진 풍경을 만들어 낸다.
토스카나 아펜니노 산맥에 있는 팔테로나 산의 사면에서 발원하여 240㎞를 흘러 리구리아 해로 들어가며, 중간에 시에베·페사·엘사·에라 강 등과 합류한다. 유역면적은 8,247㎢이다. 배가 거의 다니지 않는 이 강은 상류에서 카센티노라고 부르는 옛 호수분지를 거쳐 대체로 남쪽으로 흐르다가 아레초에서 방향을 바꿔 서쪽과 북쪽으로 흐른다.
강은 피렌체를 일자형으로 관통하고, 강 주변에는 베키오다리 건너 국립도서관과 미켈란젤로 광장이 위치하고 있다.
단테의 '신곡' 배경 무대가 된 베키오 다리위에서...
단테의 영원한 여인 베아트리체. 단테는 9살 때 1살 아래인 베아트리체를 베키오 다리에서 만난다. 아름다운 소녀를 본 단테는 이때부터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과 찬미의 마음을 간직한다. 그리고 9년 후 우연하게 산타 크로체 성당 앞에서 만난 그녀와 다시 이야기를 나눈다. 정중한 그녀의 인사에 지극한 행복을 느낀 단테. 18세에 결혼해 1290년 24살의 나이로 요절한 그녀를 단테는 그의 작품 〈신곡〉으로 옮겨 온다. 베아트리체의 집이 단테의 집에서 50여m 떨어진 곳이었다는데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베키오 다리위에서 아르노 강을 배경으로...
벤베누토 첼리니 흉상(베키오 다리위)
16세기 이탈리아에서 눈부신 재능을 자랑하며 교황과 메디치가의 총애를 받은 조각가 겸 금세공사였지만, 그 예술적 명성만큼이나 여성편력과 동성애 성향, 도둑질과 살인으로 악명 높았던 인물이었다. 그는 자서전을 통해 이러한 자신의 행적들을 가감 없이 보여주었으며, 이로써 작품보다 그 기행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아키오 다리위 가면 판매 상점
시뇨리아광장(Paizza della Signoria)
시뇨리아 광장은 중세 이후 지금까지 피렌체의 행정의 중심지다. 지금도 시청사로 사용되고 있는 베키오 궁전과 르네상스 시대 유명 예술인들의 조각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옥외 미술관 로지아 데이 란치를 볼 수 있다. 주변으로는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회화 걸작들을 모아 놓은 우피치 미술관과 아르노 강에 놓인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 폰테 베키오가 있다. 시뇨리아 광장은 메디치 가문이 살고 있던 베키오 궁전과 함께 융성한 곳이다.
베키오 궁전(Palazzo Vecchio)
‘옛날 건물, 혹은 오래된 건물’이라는 뜻이다. 현재도 시청사로 사용되고 있으며 1294년에 지어졌고 나중에 부온탈렌티와 바자리에 의해 확장 건설되었다. 처음 만들 때는 요새로 만들어졌지만 1540년에 메디치 가문이 이 궁전에 들어와 10년 정도 이곳에 머물다가 피티 궁전으로 이사를 갔다. 이때 사람들이 새 건물을 누오보, 옛 건물을 베키오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건물은 정원이 유명하며, 500인의 방(Salone Cinquecento), 2층에 있는 시뇨리아의 방(Cappela della Signoria), 우디엔자의 방(Sala dell’Udienza)에 많은 미술품들이 보관되어 있다.
우피치 미술관(Galleria degli Uffizi)
우피치 박물관은 세계 최고의 르네상스 박물관으로 알려져 있으며 1584년도에 건설되었다. 이 갤러리 안에는 르네상스 시기의 그림과 조각들이 가득하다. 이때부터 메디치 가문에서는 미술품들을 사 모았고 1737년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3층은 회화, 2층은 소묘와 판화, 1층에는 고문서가 있다.
코시모 데 메디치 동상 ( Cosimo de' Medici,1389년 9월 27일–1464년 8월 1일)
이탈리아인 은행가, 정치인 및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에 사실상의 피렌체 통치자로 군림했던 메디치 정치 세력의 창시자이다
베키오궁전(Palazzo Vecchio)
유럽의 중세시대를 끝내고 르네상스시대를 이끈 대표적인 도시인 피렌체의 중심이 되는 아르노강변에 위치한 시뇨리아광장(Paizza della Signoria)을 구성하고 있는 베키오궁전(Pallazzo Vecchio)이다. 현재 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우피치궁전(Pallazzo degli Uffizi)와 함께 피렌체공화국 청사를 구성하는 주요 건축물로 시계탑으로 사용하고 있는 망루는 두오모의 웅장한 돔과 함께 피렌체를 상징하는 이정표가 되고 있다.
현재도 피렌체 시청사로 사용하고 있는 베키오궁전(Palazzo Vecchio)는 르네상스시대에 피렌체와 토스카나 공화국을 통치한 메디치가문에서 공화국 청사로 건설한 건축물이다. 이 건물은 1298년 착공하여 16세기에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웅장한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요새의 기능을 갖춘 르네상스시대 궁전건물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건물이다. 지금은 복제품이 세워져 있지만, 미켈란젤로의 대표작인 다비상이 궁전 출입문에 세워져 있고, 우피치미술관 옆에 있는 유명한 조각상들이 많이 세워져 있는 Loggia de Lanzi와 함께 피렌체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광장의 장면 중 하나이다. 건물내부에는 르네상스시대 피렌체공화국의 통치자였던 메디치가문의 전투장면을 비롯하여 로마시대 영웅를 그린 프레스코화와 미켈란젤로와 함께 이 도시를 대표하는 인물인 마키아벨리의 초상화 등 많은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다.
피렌체공화국의 정치,행정의 중심 영역인 시뇨리아광장에 우피치궁전과 나란히 서 있는 베키오궁전. 이 건축물은 궁전건물이지만 요새의 기능을 겸하고 있는 건물로 망루로 사용했던 종루는 피렌체 두오모대성당의 돔과 함께 피렌체의 중요한 이정표가 된다.
베키오 궁전을 들어서면 사방이 회랑으로 되어 있는 중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정(Courtyard)는 1453년 Michelozzo에 설계되었다고 하며, 폼페이 유적지 귀족들의 저택에서 볼 수 있는 아트이움과 비슷한 형태와 기능을 하고 있다. 중앙에 빗물을 받는 물받이와 장식품이 세워져 있는데 Battista del Tedda의 작품이라고 한다.
로마시대 저택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한 회랑은 화려한 기둥들과 벽화들로 장식되어 있다.
벽면에는 메디치가문의 업적들을 보여주는 전투장면을 비롯한 다양한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는데,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그 내용을 알아보기는 쉽지가 않다. 프로스코화는 주로 Giorgio Vasari가 1565년 에 그린 메디치가의 결혼 축하연과 전투장면 등이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