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8월 27일 연중 제21주일>
‘통찰’, 하느님의 은총
자기를 알아가는 과정은 건전한 성숙의 과정이기도 하고 타인과 건강한 관계를 맺는 기초가 되며 나아가 신앙생활에서 하느님과 관계에도 깊은 영향을 끼치는 본질적 요인이 될 것이다. 심리치료를 하다 보면 어떤 병리적 증상을 가지고 있던 약물치료의 대상이 아닌 심리적 요인의 경우에는 대부분 ‘자기(SELF)’에 대한 무지 또는 왜곡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트라우마 같은 경우도 얼핏 보면 ‘자기’와는 무관한 ‘갑작스럽고 커다란 심리적 충격’이 원인처럼 보이나 실제로 ‘자아를 확립한’ 사람에게 트라우마는 그리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할 것으로 생각한다.
상담에서 성찰 과정은 과거의 반복하고 싶지 않은 곤란한 이야기를 되풀이해야 하고 아픔을 곱씹는 것 같은 고통스러운 여정이다. 그러나 일부러 이런 과정을 반복하는 이유는 ‘그때 그곳’에서의 나의 자아가 ‘충분한’ 상태가 아니었기에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왜곡시켜 경험했던 것들을 ‘다시’ 봄으로서 ‘재경험’을 하기 위함이다. 이런 성찰의 과정을 잘 견디며 충실히 가노라면 어느 지점에서 ‘통찰’이 오는데 참으로 신비스럽다. 물론 상담자는 이 ‘통찰’을 위해 그 여정에 함께 하지만 그 ‘통찰’은 사람마다 다르고 예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때 상담자로서 할 수 있는 말은 “축하합니다. 지금 당신이 새롭게 깨달은 그것은 하느님의 축복으로 보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큰 선물을 주신 것 같습니다.”라는 것이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지혜들, 깨닫게 된 것들, 알게 된 모든 것이 다 하느님에게서 온 것임을 상담 장면에서 반복적으로 깨닫게 된다. 내가 한 것은 ‘두드리고’, ‘찾고’, ‘달라고 떼쓰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했다는 것이다. 상담에서 내담자가 이런 태도로 여정에 참여할 때 놀라운 통찰은 반드시 일어나곤 했다. 이 신비 앞에서 상담자는 매우 초라한 ‘하느님의 도구’에 불과함을 다시금 경험하는데, 그 기분이 매우 신나고 충만하며 행복하다.
오늘 복음(마태 16:13-20)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신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제자들이 사람들의 생각을 전해드리자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신다. 예수님에게는 사람들의 생각보다 제자들의 생각이 중요한 것이다. 이때도 역시 베드로가 나선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의 이 대답은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완벽한 이해다. 이 대답이 진정 베드로가 그렇게 자각하고 통찰한 깨달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하기에 좀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이후 예수님을 잘 이해하지 못한 사람처럼 배반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베드로의 입을 통해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깨달아야 하는지 전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 믿음 위에 비로소 교회가 세워지고 매고 푸는 모든 권한이 주어지는 것임을 ‘계시’해준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 하나는 그런 이해와 깨달음이 우리의 힘으로 이뤄낸 결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럼, 하느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알려주시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감추시는’ 걸까?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마태 11:25, 루카 10:21a)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루카 10:21b)
이제 ‘베드로’는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통찰’에 이르는 사람들을 총칭하는 대명사가 된다. 관계에서 ‘너’를 안다는 것은 곧 ‘나’를 아는 것에서 출발하고 그럴 때 ‘관계’는 만들어지고 유지되며 관리되는 것처럼 신앙도 하느님과의 관계이기에 나를 아는 것은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우리가 ‘자기(SELF) 이해’에 대해 소홀히 하면서 타인과 관계를 맺고 더 나아가 ‘하느님과 관계’를 만들어가게 되면 그 결말이 어찌 될지 불 보듯 훤하다.
상담에서 ‘자기(SELF)’를 찾아 하나씩 깨달아가는 사람들, 그들의 여정에서 하느님의 자취를 느끼는 것은 지나친 상상일까?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씩 통찰을 해나가는 그들에게 ‘하느님께서 큰 선물을 주셨군요!’ 또는 ‘하느님께서 커다란 축복을 주시는 것 같아요!’라고 했던 표현은 그 순간을 체험하는 데서 나온 순수한 표현이었다. 이 경험은 내담자에게도 그렇게 느껴지는지 하느님의 손길이라는 표현에 별다른 이질감 없이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하느님의 선물이든, 축복이든 모든 것이 스스로 노력하는 자의 몫이다. 게으름에, 나태함에 젖어 살아간다면 ‘통찰’의 기회는 저절로 오지 않는다. 불편하고 고통스러울지라도 거쳐야 하는 과정은 거쳐야 한다.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이기에 필요한 과정이라면 거쳐야 한다. ‘눈 가리고 아웅!’ 한다는 말이 있다. 삶은 그렇게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니다. 영원한 생명 또한 그런 식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 앞에 ‘눈 가리고 아웅!’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베드로! 그는 하느님 앞에 선 온 인류를 대표하면서 동시에 나약한 우리 자신을 대변해주는 인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