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전생은 대나무였다외 2편
이혜숙
내 삶의 바닥은 애초부터 뜨거웠다
생의 끝자락으로 내몰린 광부가
진폐증으로 망가진 막장처럼
휘어진 길마다 빛 한 점의 동냥도 없었다
뻘밭보다 더 찐득거리는 모퉁이에서
외국산 밀가루에 버무려져
기억을 망각하라고 강요당할 때도
세제에 짓이겨지지 않음을 기뻐해야 했다
산발한 눈송이가 하늘을 가릴 때
가난한 연인들의 온기가 되고
늙은 시인의 배고픈 시어가 되어
구린 막장에서 덩어리로 뭉쳐져도
묘비명같은 이름표가 숙명처럼 따라왔다
난 '순대'를 순한 대나무로 풀어서 해석했다
나의 전생은 돼지의 창자가 아니었다
가는 떨림으로도 겨울숲을 휘어잡던
온순하나 휘어지지 않는 푸른 대나무였다
연탄
색의 채도로만 따진다면 연탄보단 낮아도
아버지는 검게 그을려 있었다
하루를 지게에 지고 일구다가 늦은 귀갓길
막걸리 몇 잔에 취해 휘청거렸던
아버지는 얼굴이 새까맣게 타 있었다
뜨거움의 강도로만 셈한다면 연탄보단 못해도
아버지의 몸은 뜨거웠다
아가, 학교 잘 댕겨 왔어, 하며 안아주시던
품은 언제나 햇볕처럼 따스했다
아버지는 그렇게 뜨겁고 까만 분이었다
붕어빵틀 아래 숨어 타는
가난한 삶의 뜰 안에서 구들을 데우고
제 몸 활활 태워 뜨거운 사랑을 주고 있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사랑은 뜨거운 곳에서 찬 곳으로 여울져
언 가슴을 녹여주고 살가움을 만든다
연탄이 타고 있다, 아버지가 타고 있다
단풍나무
소풍길
햇살도 詩를 짓는다
몇잔 낮술에
얼굴 붉어진 노신사
단풍이 곱다
불꽃을 품은 나무
대장간을 가졌는가
날선 칼 꺼내
메모장에 가을을 새긴다
붉은빛의 자음과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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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글 23집 (시) 나의 전생은 대나무였다 외 2편 / 이혜숙
금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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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6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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