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도 지명의 유래(2)
● 고양시 덕양구 주교동의 유래
• 홍수에 배로 다리를 만들다
주교舟橋는 배다리라는 뜻으로 이 이름은 1925년 대홍수로 인하여 배가 이곳까지 떠밀려 내려왔을 때, 주민들이 배로 다리를 놓고 건너다니면서 불리게 되었다. 또 마을 지형이 배 모양처럼 생겼기 때문에 배다리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는데 첫 번째 설이 유력해 보인다. 이후 '배 주舟, 자와 다리 교橋' 자를 써서 주교리라고 부른 데서 동 이름이 유래하였다.
• 영글이와 단산 부원군 이무의 묘
고양시청에서 일산으로 가는 도로를 따라 3백여 미터를 가게 되면 원당중학교에 다다르는데, 이곳에서부터 학교 뒤 북쪽으로 연결되는 골짜기 및 전야 지대를 영글01(영문리永文里)라고 부른다.
1987년『고양군지』의 소지명 유래담 난에는 영글이에 대해 이곳은 예전에 글공부하던 글방(서당書堂)이 있었던 골짜기여서 영문리로 명명된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조 세종 때 단산부원군에 봉군된 이무李茂의 묘가 있으며 그에게 사패지賜牌地로 내려진 땅이 산야의 전체에 이르렀다고 한다.)
라고 소개되어 있다.
이 묘는 배配 정경부인貞敬夫人해평海平 윤尹씨와 계배繼配 정경부인 능성綾城구具씨가 합폄되어 있는 사각 묘로 석대石帶가 둘러 있다.
1785년(정조 9)에 건립된 묘갈墓碣은 윤득관尹得觀이 지었고 글씨는 이의현李義玄이 썼다. 묘 앞의 석물로는 상석 외에 석양羊2기, 문관석 2기, 장군석 2기, 장명등 1기, 망주석 2기가 갖추어져 있으며, 1백 미터 전방 입구 쪽에 신도비와 영모비가 세워져 있다. 1986년에는 당시 고양군(현 고양시)에서 향토유적 제9호 지방문화재로 지정하였다.
지금도 영문리의 지형은 산자수명山紫水明하여 봄가을 소풍철이면 학생 들의 소풍처로도 이용되곤 한다. 자고로 명당에는 샘이 같이 있다는 고사故事에 걸맞게 오래된 약수터도 이무의 묘비 아래쪽에 있다.
이무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의 인물로 자는 돈부敦敎, 호는 중정中亭, 본관은 단양丹陽이며 판서 이거경李居敬의 아들이다.
▲ 단산부원군 이무와 정경부인 해평 윤씨, 능성 구씨의 합장
이무는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1390년에 전라도 도절제사로 왜구를 격멸할 때 무려 70여 급이나 참하여 논공행상시 국왕으로부터 의주를 하사받았다. 그 공적을 영구히 기리기 위해 그 주둔지였던 주계溪지방을 그의 이름 '무茂' 자를 따서 개칭하였으니 오늘날 무주군茂朱郡이 바로 그곳이다.
▲이무의 묘비, 경기도 고양시
이무는 조선 태조 때에는 개성윤을 거쳐 중추원사가 되어 서강(예성강) 및 강화도의 병선을 점검하는 등 문관으로서 국방 문제에 주력하였다. 또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귀국하여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였으며, 도체찰사가 되어 5도의 병선을 거느리고 일지도와 대마도의 왜구를 토벌하여 국위를 크게 선양하였다.
2년뒤인 1398년 8월(태조 7) 왕자의난 때 참찬문하부사로 있으면서 정사공신 1등으로 단산부원군에 봉해졌다. 그후 동북면 도순문사로 영흥 부윤을 겸임하고 판삼군부사를 거처 좌명공신 1등으로 우정승에 승진하였다. 영승추부사 우정승 겸 판병조사를 역임하고 조선 개국 초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었다.
• 세계 최초의 세계 지도(혼일강리역대국지도) 편찬
이무는 1402년(태종 2)에는 김사형金士衡 등과 함께 지리에 관계되는 자료를 수집하여 세계 최초의 세계 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를 편찬하여 세계를 향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지리학적인 업적을 남겼다.
오늘날 이 지도는 일본 류코쿠 대학(용곡龍谷대학)에 소장되어 있는데, 아마도 임진왜란 때에 유출된 듯하다. 이 지도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보다 90년 전에 제작되었기 때문에 남북 미주 대륙은 표기되어 있지 않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모사본이 보관되어 있으며, 중고등학생 지리부도에 소개되어 있을 뿐이다.
지도의 아랫부분에는 권근의 발문이 기재되어 있는데, 그 일부를 우리말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천하는 대단히 넓다. 안으로는 중국에서부터 밖으로는
사해四海에 이르기까지 몇 천만 리인지 모른다. 지도는 수척 지폭에 요약하여 그리는 관계로 상세하게 함이 극히 어렵다. ..(중략).. 건문 4년(1402) 좌정승 상락 김사형, 우정승 단양이공 무茂는 나라 다스리는 여가에 이 지도를 참고하고 연구하여 신도新圖를 만들었으나 정연함이 가히 볼만하다. 진실로 문 밖에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지도를 보고 지역의 멀고 가까움을 아는 것은 또한 다스리는데 도움을 주기 위함이다.>
▲ 익원공 김사형 묘비, 경기도 양평군 목왕리
김사형과 이무가 지도에 대하여 마음 깊이 생각함에 있어서 그 규모와 국량局量이 큰 것을 가히 알 수 있다. 이 지도가 일본으로 유출되지 않고 국내에 현존한다면 국보가 되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2002년에는 후손들이 사당을 묘 아래에 재건하여 선생의넋을 더 한층 기리고 있다.
첫댓글 많이 공부하고 갑니다
잘 배우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