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말할 때 그 근본교리로서 주로 삼법인(三法印) 또는 사법인(私法人)을 말합니다. 삼법인이란 일체개고(一切皆苦)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이며, 여기에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더하여 사법인이라고도 하며 또 일체개고(一切皆苦)를 제외하고 대신에 열발적정(涅槃寂靜)을 더하여 삼법인이라고도 합니다. 이 삼법인은 불교교리의 근본적 특징이므로 이것과 합치하지 않으면 불교가 아닙니다.
'모든 것이 괴로움[一切皆苦]'이라 하는 것은 '모든 현상계가 무상[諸行無常]'하다는 것과 같습니다. 무상이 아닐 것 같으면 괴로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무상이란 변(變)한다라는 의미이며, 변한다는 것은 고정성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와같이 모든 것이 변천하는 까닭은 있는 것[有]과 없는 것[無]을 막론하고 모든 존재에 변하지 않는 그 어떤 상주불변(常住不變)하는 성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실체가 없는 것(諸法無我)'입니다. 모든 존재에 실체가 없는 것을 알아서 그로부터 일체의 집착과 번뇌를 여의게 되면 적정한 열반의 넘치는 열반적정(涅槃寂靜)으로 나가게 됩니다.
이와같이 원시불교에서 중요시 되던 삼법인 가운데 무아(無我)라 한 것을 대승불교에서는 공[空: sunya]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무아는 곧 공과 다름이 없습니다. 대승불교나 근본불교의 공통된 주요 사상 가운데 하나가 이 무아사상, 공사상입니다. 대승불교의 중도일승(中道一乘) 이라든가 일승원교(一乘圓敎) 라든가 하는 이론들은 모두 공사상을 밑바탕으로 하지 않고서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전반적인 인도사상계에 있어서도 불교만큼 철두철미하게 공사상을 주장하는 종교나 철학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공이라는 의미에 대해서 흔히 보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단멸공(斷滅空)이지 중도공(中道空)이 아닙니다. 아주 아무 것도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물질인 색(色)이 멸해서 아주 아무 것도 없다는 색멸공(色滅空)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공이란, 근본불교와 대승불교는 물론 심지어 선종에 이르기까지 색의 자성이 공하다는 색성공(索星空)을 말합니다. 색 이대로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색의 자성이 본래 공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색이 본래 공하므로 모든 법은 서로 연기하여 생하는 것입니다. 만약 모든 색의 자성이 공하지 않다면 결코 연기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연기가 성립되는 것은 반드시 자성공(自性空)이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공을 바람과 같다고 비유로써 말씀하셨습니다. 바람은 모양을 볼 수도 없고 붙잡을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공이란 그 모양을 볼 수는 없지만 결코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전 조사스님들은 색성공의 이치를 이렇게 읊었습니다.
비고 비어 고요하고 고요하여 딴 물건이 아니요
나무들은 푸르고 푸르며 철쭉꽃은 붉도다.
空空寂寂非他物이요 樹樹靑靑 (척촉)紅이라
붉고 푸른 것을 여의고 따로 공공적적(空空寂寂)을 찾는다면 이것은 외도(外道)입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색의 자성이 공하기 때문이지 색 자체가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되면 있는 것이 없는 것이며 없는 것이 있는 것[有卽是無 無卽是有]으로 통하게 됩니다. 이것이 중도입니다. 원시경전 가운데는 이와같은 의미의 공에 대하여 설한 경전이 적지 않습니다. 이제 그 일부를 발췌하여 들어봅시다.
여래가 말한 모든 경전은 매우 깊어서 뜻이 깊고 출세간(出世間)의 공상응(空相應: suuyato patisamyutta)의 것이나, 이들을 설할 때에 잘 듣지 아니하여 귀 기울이지 아니하며 요해(了解)의 마음에 머물지 아니하며, 받아 지니고 잘 알아서 이들 법을 사유하려고 하지 아니한다. 그러나 시(時)지어지고 시로써 글귀가 아름다운 외도의 제자가 말한 모든 경전들이 말해질 때에 잘 듣고 귀를 기울이고 요해의 마음에 머물러서, 받아 지니고 잘 알아서 이들의 법을 사유한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다면 여래가 말한 매우 깊어서 뜻이 깊고 출세간의 공상응인 이들 모든 경전은 소멸되어질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이와같이 배워야 할 것이다.
'여래가 말한 경전은 매우 깊어서 뜻이 깊고 출세간의 공상응인 것이어서 이를 널리 말할 때에 우리들이 잘 듣고 귀기울이며 요해의 마음에 머물며, 받아 지니고 잘 알아서 이들 모든 법을 사유해야 하느니라.'
비구들이여, 너희들은 이렇게 배워야 하느니라. [南傳大藏經 13 相應部 2권 p.394-395]
공상응이란 곧 공도리(空道理)입니다
부처님이 설하신 일부의 여러 경전들은 공, 즉 공사상에 근거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공도리를 잘 받아 가지고 잘 알아야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경과 상응하는 한역경전을 고경(鼓經)이라고 하는데, 이 경의 앞부분에 비유설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과거 세상에 다사라가(陀舍羅:Dasarahana)라는 사람에게 아능가(阿能訶: anaka)라고 하는 북이 있었다. 그 북은 좋은 소리, 아름다운 소리, 깊은 소리를 내어서 40리 밖에까지 들렸다. 그러나 그 북은 낡아서 여러 곳이 찢어졌다. 그때에 그 북장이는 소 껍질을 벗기어 북에 두루 감아 얽었지마는 그 북은 다시는 좋은 소리, 아름다운 소리, 깊은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것은 그 뒤에 더욱 낡아서 가죽은 다 떨어지고 다만 북의 나무살만 남았다. 미래의 비구들도 몸을 닦지 않고 계율을 닦지 않고 마음을 닦지 않고 지혜를 닦지 않아서 여래께서 설하신 깊고 깊으며 밝게 비치는 공상(空相)의 요체와 연기법에 수순하는 것이 여기에서 소멸할 것이다. 마치 저 북이 낡아 부서지고 오직 나무통만 남은 것 같을 것이다."
[雜阿含經 ; 大正藏 2권 p.345中]
그만큼 이 공도리(空道理)라는 것이 중요하고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파리어로 씌어진 남전대장경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 북전(北傳) 한역대장경에 없는 것이 있고, 북전 한역대장경에 있는 경전이 파리어 남전대장경에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적지 않은데, 양쪽의 내용이 같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예를 들어 한역의 잡아함경 원본과 이에 해당하는 팔리경인 상응부 원본이 같다는 결론이 나와야 명확하게 입증됩니다.
50∼60년 전에 중국 신강성 고창 우전국에서 범어로 씌어진 불경, 즉 범본(梵本) 잔편으로 잡아함경의 범본이 발굴되었는데, 이것을 검토해 보니 한역대장경과 같은 동시에 파리어 원본고 똑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 범본을 세계적으로 널리 유포시켰습니다. 한역 잡아함에 있는 말씀이나 파리어 상응부 경전에 있는 말씀이나 그 내용에서는 조금도 틀림이 없다는 것이 범본 원전에서 완전히 증명되어 학계에서 공인하게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하에서 인용하는 한역의 대공법경(大空法經)과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은 팔리경전에는 해당하는 것이 없으나, 범문으로는 남아 있어서 위에서 설명한 바에 따라 그다지 문제가 없을 것으로 여깁니다.
무엇을 대공법경이라 하는가
그때에 세존은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마땅히 너희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리라. 처음도 중간도 나중도 좋고, 좋은 뜻과 좋은 맛으로 순일하고 청정하며 범행이 맑고 깨끗하니 이른바 대공법경(大空法經)이라.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라. 마땅히 너희들을 위하여 설명하리라.
무엇을 대공법경이라 하는가. 이른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 말하자면 무명에 연하여 행이 있고 행에 연하여 식이 있으며 내지 순수한 큰 괴로움의 무리가 모이느니라. 이 두 변에 마음이 따르지 아니하며 바르게 중도를 향한다. 현성(賢聖)은 세상에 나와 여실히 전도하지 않고 바르게 본다. 말하자면 생에 연하여 노사가 있다고. 이와같이 생(生) 유(有) 취(取) 애(愛) 수(受) 촉(觸) 육입처(六入處) 명색(名色) 식(識) 행(行)은 무명에 연하므로 행이 있다고. 그 무명이 멸한즉 행이 멸하고 내지 순수한 큰 괴로움이 무리가 멸하느니라. 이것을 대공법경이라 이름하느니라."
爾時世尊 告諸比丘하시대 我當爲汝等說法하리니 初中後善하고 善義善味하여 純一淸淨하여 梵行淸白하니 所謂大空法經이라 諦聽善思하라 當爲如說하리라 云何爲大空法經고
所謂此有故彼有며 此起故彼起하니 謂緣無明行하며 緣行識하며 乃至純大苦聚集하느니라..... 於此二邊에 心所不隨하고 正向中道라 賢聖出世하여 如實不顚倒正見하니 謂緣生老死라 如是生有取愛受觸六入處名色識行은 緣無明故有行이라..... 彼無明滅則行滅하며
乃至純大苦聚滅하느니라 是名大空法經이니라.
[雜阿含卷 第十二 ; 大正藏 二卷 p. 84하-85상]
대공(大空)이란 크게 공한 것, 즉 중도공(中道空)을 말하는 것이지 변공(偏空)이 아닙니다. 일신(一身)의 진실한 생명체를 뜻하는 명(命)과 육신의 관계를 설명하여, 현자와 성인은 명과 몸이 같다거나 다르다고 잘못 보지 않으며, 중도(中道)에 입각하여 바르게 봅니다. 그리고 그 중도는 바로 연기설에서 유래하니, 다시 말하면 십이연기의 순관과 역관에 의하여 비로소 해명되는 바입니다. 이와같이 연기설은 결과적으로 중도를 지향하게 하며, 그것이 또한 대공의 뜻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이라 하는가
그때에 세존은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무엇을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이라 하는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행을 연하여 식이 있으며 널리 설하여 내지 순수 한 큰 괴로움의 무리의 모임이 일어나는 것과 같으니라. 또 다시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하니, 무명이 멸하므로 행이 멸하고 행이 멸하므로 식이 멸하며 이와같이 널리 설하여 내지 순수한 큰 괴로움의 무리가 멸하느니라. 비구여, 이것을 제일의공법경(第一義公法經)이라 이름하느니라."
爾時世尊 告諸此丘..... 云何爲第一義空經고... 此有故彼有며 此起故彼起하니 如無明緣行하며 行緣識하며 廣說乃至純大苦聚集起니라 又復此無故彼無하고 此滅故彼滅하니
無明滅故行滅하고 行滅故識滅하며 如是廣說하여 乃至純大苦聚滅하느니라 此丘여
是名第一義空法經이니라 [雜阿含經 卷十三 ; 大正藏 卷2, p. 92 下]
공을 설할 때도 연기를 설할 때와 마찬가지로 십이연기의 순관설과 역관설 등 연기의 원형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제일의(第一義)의 공의 내용이 12연기설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이것은 공의 내용이 곧 연기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 이외에 다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연기 밖에 따로 공이 없고 공 밖에 따로 연기가 없으며, 공 이외에 따로 중도가 없고 이외에 따로 연기가 없습니다.
비구들이여,색(色)은 무아(無我)이니라
세존은 다섯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색(色)은 무아(無我)이니라, 수(受)는 무아(無我)이니라, 상(想)은 무아(無我)이니라, 행(行)은 무아(無我)이니라, 식(識)은 무아이니라. 비구들이여, 이런 까닭에 소유한 색의 과거 미래 현재 안[內] 밖[外] 거침[?] 미세[細] 열등[劣] 수승[勝] 멈[遠] 가까움[近] 등 이것은 나의 것[我所]이 아니며 나[我]가 아니며 나의 주체[我 體]가 아니라고 이와같이 바른 지혜로써 여실히 보아야 할 것이니라."
[南傳大藏經 제14 相應部經典 3, p.104-106]
색은 무아라고 하는 것은 색은 공(空)이라는 뜻입니다. 인용에서는 줄였지만 이 경문에서는 제법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인 색 수 상 행 식의 오온(五蘊)에 대하여 무아(無我) 무상(無常) 고(苦)의 삼법인을 순서대로 설하고 있습니다. 대승의 반야경(般若經)에서는 오온이 공하다고 설하는데, 여기 원시 경전에서도 그와 유사하게 무아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부처님께서 제일 처음 어디서 공에 대하여 말씀하셨는가를 역사적으로 한번 살펴봅시다.
부처님이 초전법륜에서 '나는 중도를 정등각했다'고 선언하셨는데, 그 중도의 내용이 팔정도(八正道)라고 하시고, 그 다음에 사성제와 십이연기를 설하셨다는 것은 지금까지 설명한대로 입니다. 그 동안에 다섯 비구가 깨쳐서 부처님의 인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섯 비구에게 설한 내용이 공무아(空無我)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초전법륜에서 중도 팔정도 사성제 공을 전부 다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초전법륜에서 부처님이 평생하시고 싶은 말씀을 다하셨다고 평합니다. 동시에 어떤 학자는 부처님이 평생하시고 싶은 말씀을 어떻게 다섯 비구에서 전부 다 하실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면서, 부처님이 나중에 말씀한 것을 후대 사람들이 한데 묶어 놓은 것이지 일시에 말씀하신 것이 아닐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부처님이 깨치신 근본자리를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근본적으로 깨치신 것이 중도이면서 팔정도이고 사성제이며 공(空)이기 때문에 한 시간이내에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이고 한 장으로도 다 설명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불교경전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인정되는 초전법륜에서 이렇게 사성제를 비롯하여 공무아(空無我)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공사상이 근본불교의 사상이 아니라고는 아무도 의심할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_()_
좋은 법문, 가르침에 머물다 갑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