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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뫼 성지 - 김대건 신부가 탄생한 한국 천주교 신앙의 요람 |
‘솔뫼’는 소나무 산(松山)이라는 뜻의 토박이 말이다. 이 마을 이름은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지번 주소는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108번지)이며, 도로명 주소는 우강면 솔뫼로(132)이다.
김대건 신부의 가계
김대건 신부의 일족이 이 마을에 거주하게 된 때는 사헌부 감찰을 지냈던 8대조 김수완 때부터라고 한다. 천주교 신앙을 가진 첫 선조로는 3대조인 증조부 운조(運祚, 일명 진후 震厚, 비오)였는데 종현(淙鉉), 택현(澤鉉), 한현(漢鉉), 희현(僖鉉) 4형제를 두었다. 이 형제들 중 둘째 택현(澤鉉)에게서 제봉(濟鳳), 제준(濟俊), 제철(濟哲) 3형제가 태어나는데, 둘째 제준(濟俊) 이냐시오가 김대건 신부의 부친이다. 제준은 지식(芝植)과 난식(蘭植) 두 형제를 두었는데 첫째 지식(芝植)이 바로 김대건 안드레아의 족보상의 이름이고, 둘째 난식 프란치스코는 물론 김대건 신부의 동생이다.
증조부 김진후 비오의 족보상 이름은 운조이며, 그가 신앙을 접하게 된 것은 아들 종현, 택현, 한현, 회현 등이 차례로 입교한 뒤 50세 이후 1788년에 ‘비오’라는 영세명으로 내포의 사도 이존창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는 신해박해 후인 1805년 체포되어 해미로 압송되어 10년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1814년 12월 1일 75세를 일기로 옥중에서 순교하였다
조부 김택현도 이존창으로 인해 입교하여 이존창의 형의 딸인 멜라니아와 혼인하여 제봉, 제준, 제철 3형제를 낳았다. 그러니까 이 멜라니아는 김대건 신부의 조모이다. 김대건 신부는 1921년 아버지 제준과 어머니 고 우술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호적상의 이름은 지식(芝植)이며 재복(再福)이라는 아명으로 솔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김대건 가문은 솔뫼에서 대대로 명망이 높았지만 증조부 김진후가 수차례 체포되기를 반복하고 1805년부터 10년간의 긴 옥중 생활을 한 후 순교하자 가세가 기울어 이곳에서 신앙을 지키고 살기가 어려워졌다.
그리하여 복자 김진후의 둘째 아들 택현은 정미박해가 일어나던 1827년 아들 제준과 손자 대건 등을 데리고 경기도 용인 땅 골배마실이라는 산골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오랫동안 살아왔던 집과 땅이 있는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김씨 일가의 피난길은 그 자체로 설움과 눈물이었지만 신앙을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에서 나온 결단이었다. 이주한지 얼마 되지 않아 택현은 박해 과정에서 타지에 나가 죽었다.
할아버지 택현이 죽은 후 아버지 제준(濟俊) 이냐시오는 1827년 정해박해 때 가족을 데리고 서울 청파동으로 가서 살다가 다시 골배마실로 돌아와 노모를 모시고 부인 울술라와 함께 농사지으며 살던 중, 서양 선교사가 정하상의 집에 묵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상경하여 샤스탕 신부를 만나 ‘이냐시오’라는 영세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세례 후에는 다시 돌아와 인근 마을 은이 공소 회장직을 맡아 교우들을 돌보았다. 그 후 1836년 모방 신부가 남부 지방에 가는 길에 은이 공소를 들르자 15세 된 아들 김대건을 모방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게 하고 신부의 추천을 받아 마카오로 유학을 보내었다. 아들을 사제의 길로 인도한 김제준 이냐시오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그 해 9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마카오로 유학을 갔던 신학생 김대건은 1845년 8월 17일 상해 김가항(金家港) 성당에서 페레올(Ferreol)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고 그 해 10월 귀국하였다. 귀국 후 첫 사목지를 은이 마을로 정한 뒤 공소를 차려 용인 일대의 사목을 시작하였다. 유학 중에 부친의 임종을 지키지도 못하고 모친 역시 귀국 후 잠시 얼굴만 대했을 뿐이었다. 김대건 신부 또한 사제품을 받은 지 불과 1년 만인 1846년 9월 16일 체포되어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장렬한 순교로 일생을 마감하였다. 하지만 1814년 증조부 김진후로부터 시작하여 김대건 신부까지 32년 동안 김씨 일가는 4대가 순교의 월계관을 쓰는 신앙의 명가가 되었다.
김진후의 셋째 아들 종한 안드레아는 부친이 옥중에 있을 때 경상도 안동 땅으로 피난을 갔다가 붙잡혀 .일월산 골짜기 봉화 우련전에 와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영양 머루산과 청송 노래산 교우들과 함께 잡혀 경주부를 거쳐 1816년 대구 감영에서 순교하였다.(대구대교구 관덕정 순교기념관 참고) 1840년에 순교한 성녀 김 데레사는 바로 그의 딸이었다.
김대건 신부의 동생 난식 프란치스코는 형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후 어머니 고 우술라를 모시고 경기도 용인 골배 마실에서 어렵게 살다가 1864년 모친이 돌아가시고 이어 부인 안동김씨 마저 죽은 후,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큰집 형제들이 가서 살고 있는 전라도 정읍 산내면 먹구리에 가서 살다가 1873년 자녀 없이 죽게 된다.
성지 조성 과정
솔뫼 성지의 성역화는 1906년에 당시 합덕 성당 주임 크렘프(Kremff) 신부가 김대건 신부 생가 인근 토지 매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해방 직후 1946년 김대건 신부의 순교 100주년을 앞두고 백문필 필립보 신부는 복자 김대건 신부 100주년 순교 기념비를 세우고 생가 터를 매입하였다. 그 후 대전교구는 1976년부터 성지 개발을 본격화해 이듬해 3m 높이의 김대건 신부 동상과 기념탑을 건립했다. 이어 1983년에 순교자 신앙을 가르치고 전하는 솔뫼 피정의 집을 건립하여 솔뫼 성지를 ‘순교자 신앙의 학교’로 삼았다. (지금은 이 자리에 솔뫼 아레나를 조성하였음)
대전교구는 2004년 9월 22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146호로 지정된 김대건 신부의 생가 터에 지자체의 지원으로 생가 복원을 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이어 2006년 3월 30일에는 성 김대건 신부 기념관과 성당 축복식을 갖고 성인의 성덕과 순교 정신을 기리고 본받기 위한 장을 마련하였다.
2009년 주차장 및 야외 화장실 건립 공사를 시작으로 5년여에 걸쳐 솔뫼 성지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 작업을 시행한 결과 새로 정비된 성지 입구에 들어서면 뫼산(山)자 모양의 정문과 그 옆의 예수성심상이 자애로운 미소로 순례자를 맞이한다. 성 김대건 신부 기념관 정면에 조성된 솔뫼 아레나(야외무대와 광장)와 생가 사이에는 한복을 입고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2m 크기의 솔뫼 성모상이 정겨운 시선으로 순례자를 맞이한다. 성모상을 지나면 소나무 숲속에 건립된 성 김대건 신부 동상과 기념탑, 그리고 유리타일로 제작된 십자가의 길 15처와 청동 조각 작품들로 조성된 십자가의 길 14처가 순례자들의 마음을 이끌고 있다.
이리하여 솔뫼 성지는 한국인 첫 사제인 성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성지의 위상에 걸맞게 집회와 순례, 기념 공간으로 나누어 순례자들이 성지순례의 참 의미를 묵상하도록 조성되었다.
한편 2014년 8월 15일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솔뫼 성지를 방문해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한 청년들과 만남의 시간을 가졌고, 그해 9월 25일 문화재청에 의해 김대건 신부의 생가가 있는 ‘당진 솔뫼마을 김대건 신부 유적’이 국가 지정문화재 사적 제529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2015년 4월 24일에는 교황 방문 후속 사업의 하나로 충남 당진시의 협조로 프란치스코 교황 동상 2점과 교황과 성 김대건 신부가 남녀 어린이와 손을 잡고 웃고 있는 모형이 설치되었다.
2017년 8월 14일에는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 3주년을 기념해 성지 내에 신축한 매듭을 푸시는 성모 마리아 경당 축복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대전교구와 당진시는 2021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탄생 200주년 기념사업으로 솔뫼 성지에,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 아시아 청년들과 만났던 현장에 대성전을 포함한 천주교 복합예술공간인 ‘기억과 희망’(Memoria et Spes)을 조성하였다.
주일 미사 시간에 맞추어 10시 40분경 성당에 도착. 주차장에 내리니 영광스럽게도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께서 어린이의 손을 잡고 나와 맞아주신다. 성지안내도를 보면 생가 영역과 성당 영역으로 나누어지는데 미사에 참여하기 위해 먼저 성당 영역으로 들어갔다.
성당 영역은 대성전, 이춘만 미술관을 포함한 기억과 희망(Memory and Hope)이라는 김대건 신부 복합예술관이 중심이 된다. 그리고 이밖에 성모 칠고 동산, 십자가의 길과 카페, 사무실, 로컬푸드, 성물방, 사제관 등 기타 부속 시설이 있다.
거대한 고인돌과 같은 돌문을 통과하면 여러 부속 시설들이 깔끔하게 좌우로 늘어서 있고 교황님과 어린이 모형상, 그리고 한국적 모습을 한 성모님과 예수님 조각상이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길옆에 예수성탄 마굿간 성체조배실도 예쁘장하게 조성되어 있다.
기억과 희망(Memory and Hope)
2021년 7월 20일에 봉헌한 천주교 복합예술공간 ‘기억과 희망’ 안에는 대성전과 예술 공연장, 전시관, 회랑이 들어 있다. ‘기억과 희망’은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의 사목표어인 ‘피어라 순교자의 꽃들아!’와 문장에 등장하는 들장미를 형상화해 13개의 들장미 꽃잎을 지붕 형태의 덮개로 올리는 방식으로 건축되었고, 대규모 행사를 위해 건물을 개방해 외부 광장까지 객석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장미꽃 건축물을 통해 김대건 신부와 동료순교자들의 뜻을 받들어 이 시대 모든 사람들의 문화, 예술, 순교, 신앙의 꽃들이 피어나기를 바라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가장 앞쪽에 대성전(Memory at Step)이 있다. 대성전 안에 들어가면 또 하나의 투명 유리벽이 있다. 따라서 성전 안이 매우 넓어 보인다. 제대 좌우에는 강론대와 독서대가 있고 제대 뒤 벽면에 있어야할 십자가는 제대 왼쪽에 세워져 있고 대신 벽면에는 중앙에 셋, 그 좌우에 각각 9개의 유리화 기둥이 상하 2단으로 나뉘어 하단에는 인물상이 있다. 채색 유리화는 마치 동굴 속인 양 매우 몽환적인 느낌을 준다.
미사를 마친 후 순례객들을 대상으로 성지 해설 시간을 가지는 것을 보고 밖으로 나와 바로 옆에 있는 이춘만 미술관으로 가니 문이 잠겨있어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성당 둘레에 난 십자가의 길을 걸어 성모칠고 동산에 갔다.
십자가의 길
성모칠고 동산
제1고 예수님 고난을 예고한 시메온의 예언
제2고 이집트로 피신함
제3고 예수님을 성전에서 잃으심
제4고 예수님 십자가를 지심
제5고 예수님 십자가에서 돌아가심
제6고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림
제7고 예수님 무덤에 묻히심
성전 영역을 떠나 다시 성지 입구로 돌아와서 성지 안내게시판에 따라 생가영역인 성모경당, 솔뫼 김대건 신부 기념관, 솔뫼 이레나, 김대건 신부 생가, 술뫼 숲으로 난 십자가의 길을 걸어 김대건 신부 동상에 이르는 코스로 이동했다.
매듭을 푸시는 성모경당
1980년대 초 독일에 유학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우크스부르크 성 베드로 암 페를라흐 성당에서 18세기 초에 그려진 요한 게오르그 슈미트너(1625∼1707)의 매듭을 푸는 마리아 성화를 보고 감동을 하였다. 그리하여 복사본을 고국 아르헨티나로 가져가 직접 기도문을 쓰고 세 차례의 9일 기도, 곧 27일간의 묵주기도를 드리도록 했다. 이 작품에는 개인의 삶의 매듭뿐만 아니라 세상의 평화를 풀기를 전구하는 기도를 바치자는 뜻이 담겨 있다.
이 경당 건물의 전체적인 평면 형태는 나침반의 원형에 성광의 십자가 형상을 더한 모습이다. 이는 김대건 성인이 라파엘호를 타고 귀국할 때 성모마리아에게 의탁하며 나침반을 보고 왔다는 데서 착안됐다. 그리고 외부 지붕은 김대건 성인이 썼던 갓을 표현했다.
제단 가운데는 매듭을 푸시는 성모 환조 입상을 설치했고, 그 왼쪽에는 솔뫼 출신 김대건 일가 4대 성인과 복자를, 오른쪽에는 지상 교회를 형상화한 부조를 설치했다. 그리고 제단의 오른쪽 기둥에 예수성심상이 달려 있다. 원형 천장은 성모님을 상징하는 달의 의미에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우주의 뜻을 더했다.
이 경당은 약 100평의 면적에 신자석은 200석 규모이며 건립비는 신자들의 봉헌금과 당진시가 솔뫼 성지 명소화 사업 지원비로 지었다고 한다.
솔뫼 성 김대건 신부 기념관
2006년에 건립된 김대건 신부 기념성당 및 기념관은 김대건 신부와 밀사들이 조선 입국을 위해 탔던 라파엘 호를 현대적 의미로 재해석해 건축했다. 외관은 붉은 색이 나는 소재를 사용했고, 가운데 큰 길은 김대건 신부의 드넓은 세계를 향한 기개를 표현하였다. 성당은 500명이 미사를 할 수 있도록 지어졌다. 이곳에는 김대건 신부의 생애와 한국교회의 박해 상황들, 신부의 편지와 기해박해 보고서를 전시하고 있다. 그러나 리모델링 관계로 들어가지는 못했다.
솔뫼 아레나 (Arena)
솔뫼 아레나는 1,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야외 공연장이자 문화공간이다. 2011년 5월 14일 노후화된 솔뫼 피정의 집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건립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아레나(Arena)는 로마 시대 검투사들이 처절하게 싸우던 원형경기장인데 여기에서 많은 그리스도 신자가 피의 순교를 한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광장 주위에 12사도 상을 세워 순교 정신을 배우도록 했다.
솔뫼 아레나에서 나와서 바로 가면 김대건 기념관 뒤 솔뫼 숲으로 가는 십자가의 길이 나 있고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김대건 신부 생가 터가 나온다. 일단 먼저 생가 터를 가기로 한다. 도중 길섶에 한복에 쪽머리를 한 성모님께서 아기 예수님을 안고 계시는 성모자상이 있다. 참 평온한 모습이다.
성 김대건 신부 생가터
국가사적지 제529호 솔뫼성지는 1785년 내포의 사도 이존창에 의해 천주교를 받아들였던 김대건 신부 집안의 4대에 걸쳐 신앙을 증거한 곳이다. 또한 이곳은 최초의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1906년 김대건 신부의 탄생 60주년을 맞아 당시 합덕성당의 주임신부였던 크램프 신부는 주변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이곳이 김대건 신부의 생가 터로 고증하였다.
1946년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동상과 순교기념비를 세우면서 소나무 군락지를 중심으로 성지가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1998년 문화재 위원들의 고증으로 2004년 생가 안채가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전통 한옥 구조로 당시 내포지역 사대부가 살던 집의 형태다.생가 터 기념비 옆 안내판에는 이런 내용이 안내되어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안내판은 김대건 신부가 2121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되었다는 내용이다. 유네스코는 2004년부터 유네스코의 이념과 가치에 일치하는 세계적 인물을 선정하였는데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인 2121년을 뜻 깊게 보내기 위하여 한국천주교회의 상징성과 영향을 고려하여 김대건 신부를 기념인물로 신청하였는데 유네스코는 김대건 신부의 서한을 통해 평등사상과 인류애, 선진교육의 필요성, 천연두로부터 죽어가는 어린이를 위한 처방과 의학의 발전의 필요성, 빈곤퇴치에 대한 열망이 유네스코의 이념에 부합된다고 생각하여 기념인물로 선정하였다는 내용이다.
생가 터 기념비에는 김대건 신부의 가족 11명의 명단과 이들을 찬양하는 내용을 시의 형식을 빌어 표현하였으며 뒷면에는 김대건 신부의 가문 김해김씨 안경공파의 66-69대까지의 4대의 순교보를 새겼다.
위의 11인은
이 자리에서 내어나거나 緣하여
푸른 하늘을 보고
드높은 삶을,
너른 들을 바라보고
큰 삶을,
대를 바라보고
굳은 삶을 배웠노라
위의 11인은
솔을 흔들어
물소리를 지어내는 바람을,
낮은 물을 퍼올리는 두레박을,
하늘과 땅을 빚고 돌보는 손을
사방에서 피 흘려 증거하였노라.
생가 청마루에는 김대건 신부의 영정이 걸렸고 댓돌 위에는 김대건 신부님 생가에서 바치는 기도문이 새겨진 오석이 있다. 그리고 그 바로 앞에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의자에 앉으시어 안쪽을 향해 기도를 드리고 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님,
성인께서 태어나신 이 집에서 기도하는 저희를 축복하여주소서
저희로 하여금 가정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시고,
가족 간에 사랑과 기쁨을 함께 나누시며,
서로의 근심 걱정을 덜게 하소서.
성인의 가족들이 신앙과 복음을 충실히 따름으로써
가정을 사랑의 천상 보금자리로 만드셨듯이
저희 가정도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향기를 간직하고 펼치게 하소서. 아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으소서.
부친 성 김제준 이냐시오님, 저희를 위하여 빌으소서.
장고모 성녀 김 데레사님, 저희를 위하여 빌으소서.
순교자 증조부 김진후 비오와 종조부 김종한 안드레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으소서.
십자가의 길
다시 걸어나와 십자가의 길을 통해 솔뫼 숲으로 향했다. 솔뫼 성지 십자가 길은 많은 순례자들이 편안하게 기도할 수 있도록 소나무 숲에 조성되었다. 두 길인데 하나는 예수님의 손을 주제로 모자이크화한 길이고 다른 하나는 청동 조각상의 길이다.
청동상 십자가의 길
모자이크화 십자가의 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동상 및 기념비
십자가의 길의 마지막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동상이다. 김대건 신부님의 동상은 한국 전통 의상인 갓과 도포를 갖추고 영대(靈帶)를 두른 모습으로 바로 뒤에는 마치 불상의 광배처럼 보호자인 성모님를 의미하는 흰 기둥 모양 기념탑을 세웠다.
1977년 12월 23일 세워진 이 동상 받침돌에는 전 대전교구장 고(故) 황민성 주교 글씨로 성 김대건 신부 출생과 순교 사실이 적혀 있다.
그리고 비석 두 기가 서 있다. 하나는 김대건 신부 시성기념비이고 다른 하나는 1946년에 합덕 지방 교우들이 세운 탁덕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 기념비이다. 성 김대건 신부를 공경하는 신심이 솔뫼성지 일대와 한국교회 전체에 뿌리 깊게 면면히 이어져 왔음을 느낄 수 있다.
낮1시가 넘었다. 또 먹어야 할 시간. 다음 행선지 합덕 성당이어서 다시 합덕으로 돌아와 길목이라는 식당에서 꺼먹지 정식으로 잠심을 먹었다. 꺼먹지란 무청 시래기 졸임 같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