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83. 서안의 역사와 불교 ②
宋이후 지방 도시 전락 최근들어 재도약 모색
|
<진시황릉 병마용> |
사진설명: 서안의 대표적 명물인 진시황 무덤의 병마용. 진시황릉은 여산을 배경으로 조성됐다. |
당의 장안이 가장 번성했던 때는 현종(재위 712~756) 치세 전반기였다. 당 태종 이세민 시절(597~649. 재위 626~649)에도 장안은 번영을 누렸지만, 측천무후의 난리를 경험하고 난 뒤인 현종 시절 장안은 명실상부한 국제도시로 이름을 드날렸다. 당나라 장안이 번성할 수 있었던 이면엔 수나라의 대역사(大役事)가 있었다. 이런 점에서 당나라는 사실 행운의 왕조라 할 수 있다. 백성들을 고달프게 했던 ‘대역사(大役事)’나 ‘큰 원정’은 단명했던 전 왕조 수(隋. 581~618)가 대신해 주고 갔던 것이다.
오랫동안 남북으로 분열됐던 중국이 수에 의해 통일되자, 수 양제 양광(楊廣)은 통일을 현실적으로 보장하는 대운하(大運河) 건설을, 무리해가며 완성시켰다. 북경 부근 탁군에서 시작돼 낙양 근처 판저에서 끝나는 영제거(永濟渠), 판저에서 출발해 우치에 도달하는 통제거(通濟渠), 장안에서 동관에 이르는 광통거(廣通渠), 우치-산양-강도의 한구, 경구(건강)-여항의 강남운하(江南運河) 등 대운하들이 수나라 시절 완성됐다. 광통거와 ‘한구’만이 수 문제 양견(楊堅) 시절(581~604) 마무리됐고, 나머지 운하는 전부 수 양제 시절(재위 604~618. 운하 건설시기 605~610) 완공됐다.
|
<시대별로 달라지는 장안성의 규모> |
6년 동안 공사에 동원된 인원만 550만 명, 공사 중 도망치거나 죽은 사람이 20만 명에 달할 정도로 노역은 힘들었다. 이런 희생 위에 북쪽의 탁군, 서쪽의 장안, 남쪽의 여항에 이르는 주요 도시가 수로로 연결된 것. 총길이 1750km 였다. 건설된 운하는 산업용 보다 위락용으로 더 많이 사용돼 원성(怨聲)을 들어야만 했다.
대운하만이 아니다. 당나라 장안성 축성도 수나라가 해놓은 기초 위에다 시작한 것이었다. 전한(前漢)의 수도였던 장안은 앞에서도 살펴보았지만 당의 장안과 동일한 장소가 아니었다. 한의 장안은 당의 장안(현재의 서안시가 그 일부이다)보다 약간 서북쪽인 위수 쪽에 있었다. 북주의 뒤를 이은 수나라는 전 왕조의 도성을 깡그리 없애버렸다.
대흥성 축성은 수 건국 직후인 문제 개황 2년(582)에 시작됐다. 30년 쯤 뒤인 양제 대업 9년에 10만 명의 인부를 동원해 축성 공사를 마무리했다고 역사책엔 기록돼 있다. 상상 이상의 대규모 공사였다. 축성 공사가 마무리 된 5년 뒤 수나라는 멸망되고 만다. 아마도 멸망 당시까지 새 도성은 완공되지 않았을 것이다. 세세한 내부공사는 그 때까지도 진행되고 있었으리라. “나라가 세워지고 망할 때까지 도성 공사만 하다 볼일 다 본 나라가 수나라였다”고 하면 지나친 폄하일까. 어찌됐던 수나라는 공사로 시작해 공사로 망하고 말았다. 완성되지는 못했지만 가장 어려운 단계의 공사는 이미 끝나 있었다. 당나라는 그것을 계승했다. 큰 힘 안들이고, 백성들의 힘을 소진시키지 않은 채, 도성 공사를 끝낼 수 있었다. 이것은 대단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수 대흥성 기초로 당 장안성 완공
|
<양귀비像과 화청지> |
사진설명: 당 현종과 귀비 양옥환이 사랑을 나눴던 화청지. 연못 앞에 양귀비 상이 서 있다. |
주지하다시피 당나라는 개방적이며 스케일이 큰 것이 특징. 때문에 현재의 서안 시에서 당나라 시절 도성의 윤곽을 연상하는 것은 약간 무리다. 현재의 서안은 명대 축조된 성곽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의 중앙에 종루나 고루가 있는데, 이것은 명대의 건축물이다. 명나라 도성은 초기엔 남경이었고, 후기엔 북경이었다. 따라서 서안은 처음부터 지방 도시로 조영된 것이며, 당나라 장안과는 규모에 큰 차이가 있다. 당나라 장안의 가로(街路) 중 남북으로 뻗은 도로는 노폭이 약 150m로 매우 넓었다. 주작문(朱雀門)에서 명덕문(明德門)에 이르는 메인 도로를 비롯해 그렇게 넓은 도로가 11개나 있었다. 동서의 도로는 넓이가 일정치 않지만 좁은 곳이 70m, 넓은 곳 역시 150m 정도였다. 이 큰 도로에 의해 구획된 불럭을 ‘방(坊)’ 혹은 ‘리(里)’라고 했다. 시대에 따라 방의 수에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보통 장안 ‘백십방(百十坊)’이라고 일컬어졌다.
|
사진설명: 서안사변 당시 장개석이 머물렀던 화청지 뒤편의 건물. |
황성은 주작문에서 외성의 명덕문에 이르는 중심가를 경계로 서와 동의 두 부분으로 나눠졌다. 그곳에 각각의 시장이 하나씩 있고, 그곳 이외에는 매매 할 수 없었다. 권세 있는 사람들이 주로 동쪽에 살았기에, 서쪽은 ‘서민의 거리’ 같은 분위기였다. ‘동고서저’였다. 서쪽은 또한 실크로드와 관계가 깊었다. 실크로드를 타고 장안에 들어오는 사람에게 있어 서쪽은 입구였다. 서쪽으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에게 가서(街西)의 3문인 개원문(開遠門), 금광문(金光門), 연평문(延平門)은 잊을 수 없는 출발점이었다. 서쪽 거리엔 자연스레 서역에서 온 사람, 서역과 장사를 하고 있는 사람, 그러한 사람들과 관련을 가진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페르시아인, 인도인, 터키인, 티베트인 등 갖가지 인종이 서쪽 거리에 살았고, 그들이 신앙하는 조로아스터교(배화교) 등의 사원도 그 근처에 건립됐다. 서역색이 농후했고,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나는 거리가 서쪽이었다.
한편, 655년 황후로 책봉돼 704년 쫓겨나 그해 말 죽을 때까지 무측천의 집정은 50년에 달했다. ‘50년간의 전횡’과 뒤 이은 ‘중종 황후의 권세’를 극복하고 현종이 즉위한 것은 712년이었다. 즉위 이후 현종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다시 부강한 당나라를 일궈냈다. 적어도 양귀비(719~756)와 안록산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천보 2년(743) 며느리였던 양옥환을 출가시켰다 귀비로 맞아들이면서 현종은 서서히 환락 속으로 빠져들었다. 당시 여산 온천은 장안 서민들의 휴식처로 유명했다. 그러나 현종이 이곳에 온천궁(일명 화청지)을 세운 후 서민들의 출입이 어려워졌다. 26살의 양옥환이 현종의 후궁으로 간택돼, 현종과 운우지정을 나누던 곳도 화청지였다. 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에 대해 중당기(中唐期)의 대표적 시인 백거이(772~846)는 ‘장한가(長恨歌)’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봄날은 차가운데 / 은총의 목욕 하게 된 / 화청의 못
온천수는 매끄러이 / 고운 살갗 씻도다.
귀비로 발탁된 양옥환는 영화의 층계를 올라갔다. 그러나 대당제국은 그 무렵을 고비로 난숙기에서 몰락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궁정의 실권은 당 고조 이연의 사촌의 증손되는 이임보 수중에 있었다. 양귀비의 3언니도 각각 국부인(國夫人)의 칭호를 하사받아 장안의 궁정에 드나들었다. 양귀비의 사촌 오빠 양국충은 이임보의 권력을 탈환하기 위해 안록산과 손잡았다. 천보 11년(752) 이임보가 병사하자 이번엔 양국충과 안록산이 권력을 놓고 다투웠다. 이 와중에 양국충은 “안록산이 반역을 모의하고 있다”는 거짓 상소를 현종에게 올렸다. 위기에 몰린 안록산은 천보 14년(755) 반란을 일으켰다. ‘안사의 난(755~763)’이 시작된 것이다.
현종과 양귀비 로맨스 전하는 도시
|
사진설명: 당나라시대 복장을 하고 화청지 앞에서 악기를 타고 있는 여인. |
756년 정월 안록산은 스스로 대연(大燕)황제라 칭하고 낙양 장안을 잇따라 함락시켰다. 장안을 탈출한 현종 일행이 마외(馬嵬)에 이르렀을 때, 마침 티베트 사절이 이곳에 도착했다. 양국충이 티베트 사신과 교섭을 시작했다. 그것을 본 병사 한 명이 외쳤다. “국충이 오랑캐와 역모를 꾀하고 있다.” 소리를 들은 병사들이 국충에게 달려들어 살해하고 말았다. 양귀비의 세 언니도 눈 깜짝할 사이에 죽임을 당했다.
병사는 내 친 김에 양귀비를 처단하라고 요구했다. 결국 양귀비는 배나무 가지에 비단 띠를 드리우고 목을 매달았다. 그 때 그녀의 나이 38세. 몇 년 뒤 안사의 난은 평정됐으나 ‘장안’도 ‘당나라’도 예전의 영화를 되찾지 못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서서히 사라져 갔다. 장안은 이후 수도로서 가치마저 떨어지고 말았다. 관중지방이 수도로서 가치가 하락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인구의 조밀화로 인한 토질의 산성화와 사막화 현상’이 첫 번째 원인이었다. 중요한 이유는 아니었다. 위진남북조 시대 이후 강남이 개발되면서 경제의 중심지가 남방으로 이동한 것이 보다 중대한 이유였다. 강남의 경제력을 편리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조운(漕運)이 편리한 화북지방으로 수도가 옮겨가지 않을 수없게 된 것. 개봉, 북경 등이 수도 후보지로 등장했다.
화북 평원 지역으로 수도를 옮긴 후에도 관중이 갖는 지리적 이점은 위정자들에게 미련을 두게 만들었다. 송나라 태조 조광윤이 개봉에 수도를 정하고서도 관중으로 천도를 시도했고, 명나라 태조 주원장도 유혹에 빠져 천도를 계획했다. 근세 일어난 의화단 사건 때 서태후가 서방 제국주의 연합군을 피해 달아난 곳도 관중의 서안이었고, 현대 중국 역사를 바꾼 장개석과 장학량이 주역인 ‘서안사변’(1936년)이 일어난 곳도 서안, 즉 장안이었다. 숱한 역사의 격랑을 겪은 장안은 명나라 이후 ‘서안’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43년 시로 승격된 서안은 오늘날 다시금 비약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목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