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
마리화나 소년
—가족을 떠올릴 때마다 리셋되는 리플리컨트
정우신
총알을 뽑아놓고
떨고 있었지, 사람은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는데 붉고 긴 호스로 빨려 들어갔어 진화를 거듭한 생물들 해안가에 모여 침을 흘리며 나를 기다렸어
벽난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왼발을 저는 고양이를 쫓아가고 있었다
모닥불에 둘러앉아 유서를 쓰고 돌려 읽으며 울었다
서로의 바지에 사슴벌레를 넣어주고
제발 집으로 돌아가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요절한 화가의 산책로에 돌던 바람
주인의 입술을 찾지 못해 더욱 커다란 바람이 되는 동안
소년은 휘파람을 불며 그리움을 달랜다
키우고 싶은 거 있어?
공룡
코끼리
도시에 떠도는 모든 구름에 닿을 만큼
대나무가 무수해졌다
내가 있는 곳으로
금방 건너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목소리를 들어버렸다
다시 시작
여기서 기다려 곧 데리러 올 거야
기억을 찾을 수 있을 거야
간판이 깨진 여인숙과 폐교와 원조 물텀벙 집 앞에서
미아가 되었다
육교를 지나 약초를 파는 상점을 지나
벌레 약이 놓인 리어카 옆에 앉아 생각했다
이 생각들은 나의 것이 아닌 것 같은데
무엇을 버리면 가벼워질까
어디를 절단하면 날아갈 수 있을까
다시 시작
키우고 싶은 거 있어?
공룡
코끼리
진공 포장된 육체들
호이스트로 이동되고 있다
잃어버린 시간을 노래로 바꿔보려다가
파도의 리듬에 방향을 바꾸는
물고기 떼를 지켜보다가
정글짐에 빠져버렸다
일본식 뒷골목에서
우리는 사랑하고
복제 되었네
쉽게 끝나지 않는 목숨처럼
먼 곳보다 더 머나먼 곳이 있지
가령 아이의 눈에 비친 별들
기다란 기찻길을 따라 귀가 먹은 식물들
어둠을 이해하느라 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이름
그리고 중력의 문제들
지난밤 꿈을 흘려보내는 나에게
그러니까 나는 도대체 뭐가 된 걸까 무엇으로 보이는 걸까
아무렇지 않게 잠에서 깨어
머리를 감지만
자꾸 다시 시작되지만
어선 저장고에 불어나는 녹조처럼
녹조를 따라 선원의 생활로 침투하는 비린내처럼
아무도 의심하지 않지
꽃잎과 꽃잎을 겹쳐놓고
심장의 구조를 상상했지 진화까지 남은 길이를 재보기 위해 안개를 끌어 왔지 비둘기를 삶아 왔지 저수지는 말라가고 새소리는 들리지 않는데
다시 시작
평원을 이고 가는
공룡
코끼리
빙하를 깨먹고 있다
나는 어디로 나가면 될까
하얗고 기다란 시소에서 일어나
반대편으로 걸어갈 때
쏟아지는 것들, 뒤집히는 것들, 묽어지는 것들
나의 흔적이 남아있는 내 안의 동식물들
암시장
—만리포 여관에 버려진 리플리컨트
깨진 타일과 모자이크의 세계. 인간은 자주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아침으로 믹스커피에 개보린 두 알을 녹여먹었다. 유난히 더 아픈 날은 향수를 두 번 뿌렸다. 인간의 옷을 입어본다. 우리가 하는 일은 수건을 말리거나 화장실 청소를 하거나, 덫에 걸린 생물을 제거하고 다시 덫을 어디에 설치할지 고민하는 정도다. 벌레는 덫 앞에서 며칠을 고민하다가 가루를 먹는다. 금속 고양이는 빨랫물을 핥으며 세 시간에 한 번씩 운다. 칫솔과 칫솔을 겹쳐놓고 쾌락에 대해 상상한다. 번식에 실패한 인간은 땅을 파고 들어가 뿌리가 돋아나기를 기다렸다. 오늘은 석양의 자리에 토성이 떠 있다. 허벅지로 흘러내리는 정육들. 나는 붉은 헬리콥터를 타고 왔던가. 빈 창틀을 열었다 닫으며 재활한다. 백반이 오는 동안 바닥에 물 뿌리고 신발정리하고 화장을 고친다. 나를 지켜보던 금속 고양이 빙빙 돌며 정보를 보낸다. 안구 갈아 끼우고 일과를 종료한다. 손님이 없는 밤은 석유 냄새가 진하게 난다.
근작시
생물계
—리플리컨트의 멜랑콜리
물속에서 나는 졸다가 깨다가 졸다가 깨다가……
나는 있었나?
고개가 360도 돌아간다 허리를 구부렸다 펴면 멀리까지 와 있다
엉덩이가 얇아진다
발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부피가 늘어난다
먹구름 하나가 만들어지는 시간
파리가 죽은 쥐의 살갗에 들러붙는 동안
그림자가 옅어진다
시멘트에 눌어붙어 비린내를 풍긴다
비린내는 파리의 것? 쥐의 것?
바닥의 것? 나의 것?
비는 누구의 것?
피?
피와 비의 감정을 구별하다가
계절 밖으로 또 튀어나와 버렸다
나는 겹눈으로 주변을 둘러본다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그래서 좋다
미시적인 생활이 좋다
음식물 쓰레기통의 개수를 세며
산책을 하는 새벽
이 동네에는 유난히 호박꽃이 잘 자라고
아이들보다 노인이 많고
그건 가려움이 많다는 이야기
작은 두꺼비가 살기 좋다는 이야기
교회로 향하는 사람보다
문을 두드리는 이가 더 자주 보이고
물 좀 얻어먹읍시다
달마도를 현관에 걸어놓으세요
휴일의 주차장처럼 사람들은
언제나 화가 나있고
여기에서 저기로 저기에서 여기로
끝없이 움직인다
무릎이 닳을 때까지 짐을 가만두지 못한다
돈을 가만두지 못한다
뭘 하는 걸까
고목처럼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바람에 살짝 흔들렸을 뿐인데
방향을 틀었을 뿐인데
거미줄 틈에서
거미줄이 되기 위해
그건 초록이 진하게 익어가는 소리
바다색이 치밀하게 바뀌는 소리
골목은 바닥을 보여주지 않고
전염시킨다
바닥의 원리가 나에게 작동된다
구더기 구더기 구더기 구더기
여름의 뚜껑을 닫는다
우리는 서로를 갉아먹으며
지구의 회전을 유지하지
수박껍질을 버려줘
동료를 늘리게
패턴을 바꿔
생물을 속이게
작고 작아져
시원해지게
뒤를 봐 뒤를
골치 아파요
미래처럼 앞에
있는 척
뭔가 더 할 일이
남아 있는 척
구더기에게 잡아먹혀
어느 날 나는
나도 모르게
팽창!
이건 슬픔이 더 이상 슬픔이 아니라는 것
이쯤에서 삶을 끝내도 아쉬울 것이 없다는 것
나는 보여?
누군가 먹다 남긴 육개장 속에
증기선이 지나간 뒤의 파도거품에
푸줏간을 지키다가 별의 흐름을 읽고
도망간 라마의 눈동자에
코코넛을 따다가 떨어진 원숭이의 두개골에
그리고 해파리
해파리 좋다
즐거워 즐거워 인생은 즐거워
좋은 것들은 나를 물 밖으로 끌어당긴다
……졸다가 깨다가 졸다가 깨다가 흐물흐물해진 살점들
더 먹을래
다 먹고 더 먹힐래
오후 일곱 시
바람 무거워지고
비 오다 말다
오다 말다
이제 인간의 계절은 누가 바꾸나
정우신 2016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비금속 소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