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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임어당(林語堂 ; 현지 발음 ‘린위탕’)이라는 이름은 60년대나 70년대를 살았던 한국 사람치고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이름이다. 동양 문화를 서방에 소개한 학자로 또는 《생활의 발견》이라는 책을 쓴 수필가라는 정도는 누구든지 알고 있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리고 임어당은 1968년도 서울에서 열린 제2회 국제 대학 총장 협회에 참가한 적도 있고, 1970년 6월에도 서울에서 열린 제37차 국제 펜클럽 대회에 참석차 내한한 일도 있을 정도로 한국과 친한 사람이었다. 특히 1968년 방한 시에는 어려운 환경에서 살고 있던 한국 청년들을 격려하는 연설을 해서 감명 깊었다는 김형석 교수의 술회가 있을 정도로 한국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긴 인물이다.
임어당은 1895년 10월 10일 푸젠(福建)성 장저우(漳州)시 핑허(平和)현에서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상하이 세인트 존스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 대학과 독일 라이프치히 대학에 유학했다. 라이프치히 대학에서는 언어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국으로 돌아와 베이징 대학, 칭화(淸華) 대학, 베이징 여자사범대학, 상하이 둥우(東吳) 대학 등에서 강의했다. 1927년에는 정치에 입문하여 우한(武漢) 국민정부의 외교부장 천유런(陳友仁)의 비서를 지냈다. 우한 정부 해체 뒤에는 집필에만 몰두하여 명수필가로 이름을 날렸다.
1936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에 살면서 <뉴욕 타임스>의 특별기고가로 활약하는 한편 중국에 관한 많은 영문 평론을 발표했다. 1948년에는 유네스코 예술부장에 선출되었고, 1954년에는 싱가포르 남양(南洋)대학 총장을 역임했다. 1966년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대만에 집을 짓고 살면서 딸이 사는 홍콩에 자주 왕래하다가 1976년 3월 26일 홍콩에서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2. 임어당 고거(林語堂故居)를 돌아보니
가) 임어당 고거의 첫인상
평생 해외로 떠돌아다니던 임어당이 마침내 대만 구석의 조용하고 우아한 장소에 은둔하기로 한 것은 1966년이었다. 임어당은 자기가 직접 설계해서 지은 그 집에서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간 살았다. 그의 명저 《생활의 발견》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만년에 그가 살던 집에서 그의 삶의 철학이 어떤 모습으로 구현되었는지 확인하고 싶은 열망이 생기지 않을까 싶다.
우리 《에세이문학》 대만 문학기행단 일동의 제일 목적지도 바로 임어당 고거였다. 하여 바야흐로 봄이 무르익어 가는 2023년 4월 20일 오후, 타이베이 공항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점심 식사를 마치자마자 즉시 임어당 고거로 향하였다. 현지 여행사에서 마련한 버스가 도심을 벗어나서 북쪽에 있는 양명산(陽明山) 기슭을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온천이 많은 곳이라서 그런지 평일 낮인데도 차량 왕래가 적지 않았다. 중턱쯤 오르니까 길 왼편에 하얀색을 입힌 벽체에 푸른 기와를 이고 있는 멋진 단층집이 나타났다. ‘임어당 고거(林語堂故居)’라는 로고가 대문 옆 벽체에 뚜렷이 새겨 있었지만 ‘고거(故居)’라는 명칭이 주는 고풍스러운 이미지와는 다르게 아주 산뜻하고 세련된 모습이었다.
마당에 들어섰는데도 출입문이 얼른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등을 돌려 앉힌 집인가, 등뼈 같은 모서리가 불쑥 튀어나온 모습이 좀 낯설었다. 접근을 잘 허락하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이 의외의 일격이다. ‘왜, 좀 놀랐나?’ 임어당 선생이 짓궂은 웃음을 띠며 불쑥 나타날 것 같은 기분이다. 이윽고 오른쪽 중간 벽에 있는 출입문을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서니 안내실로 모이란다. 거기 다들 모여 앉아 안내 팸플릿을 받은 다음 영어 자막이 나오는 영상을 시청했다.
나) 집의 구조와 특징
서양식 아치와 복도를 지나자 중정(中庭)이 나왔는데 거기에 스페인식 나선형 기둥이 있었다. 중국 전통 건축 양식 중 하나인 사합원 (四合院;사면에 집이 있고 가운데 안뜰이 있는 건축 양식) 구조에 스페인 건축 양식이 섞여 있으니 동양과 서양의 혼합이요, 현대성과 고전미의 조합이다.
남색 유리기와며 흰 벽, 막새기와, 회랑, 작은 양어장 등을 보면 중국식 정취가 풍기고 아치형 문, 나선형 기둥, 상단의 모퉁이가 둥그스름한 격자창을 보면 서양 건축의 품격이 나타난다. 임어당이 직접 설계했다더니 동서양의 융합이 절묘한 아름다움을 빚어낸 것이다. 임어당 스타일의 요체가 무엇인지 대번에 깨달은 느낌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중정 한쪽 구석에 대나무, 단풍나무, 양치류, 덩굴이 있는 사랑스러운 작은 연못이 보인다. 연못 주변에 독특한 모양의 바위도 있었다. 그는 종종 연못가의 대리석 탁자에 기대어 낚싯대를 손에 들고 물고기를 보는 재미를 즐겼다 한다. 그의 동심 세계를 엿본 듯하여 절로 웃음이 나왔다.
임어당은 집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잔디밭이 아닌 작은 정원을 원한다. 아이들이 집에서 놀고 꽃과 채소를 기르고 닭과 오리 몇 마리 키울 수 있도록…․ 그리고 이른 아침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싶다. 또 집 근처에 키 큰 나무를 좀 갖고 싶다.”
다) 복도 전시 공간
그는 20세기에 중국의 문화와 정신을 서양에 알린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언어학자, 철학자, 작가, 여행자, 발명가인 임어당을 알리는 여러 가지 유품이 복도에 전시되어 있었다.
1923년 29세 때 독일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언어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곧 베이징 대학교 교수로 임명되었다. 손수 공구로 무엇인가 만드는 일을 무척 좋아해서 아내를 위해 편안한 인체 공학적 의자를 만들기도 했고 1947년에 뉴욕에서 중국 고속 타자기를 발명하기도 했다. 1932년에 그는 “유머의 달인”이라는 칭호를 얻으며 유머 문학에 전념하여 격주 잡지인 《논어》라는 이름의 잡지를 창간했고 소품문(小品文)을 유행시키기도 했다.
라) 서재 공간
대학자의 서재는 도대체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지만 특이한 점은 별로 없었다. 양쪽 벽면을 꽉 채운 책장과 응접세트, 그리고 장식품들이 문갑 위에 놓여 있는 모습은 여느 학자의 서재와 별로 다른 점이 없어 보였다.
책에 관해서 임어당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 세상에 누구나 꼭 읽어야 하는 책 따위는 없다. 있다면 오직 누군가가 언제, 어디서, 어떤 사정에서, 생애의 어느 시기에 읽어야만 할 책이 있을 뿐이다.”
이곳의 책상은 임어당이 얼마나 열심히 일했나 하는 것을 증언해 주고 있다. 임어당이 편찬한 현대 용법 중영사전(中英辭典)은 자신이 발명한 즉석 색인(索引) 시스템과 그가 수정한 한자 간체자(簡體字)를 기반으로 하여 완성하는 데 꼬박 5년이 걸렸으며 1972년에 홍콩 중문대학에서 출판되었다.
이 서재 한쪽에는 임어당의 원고, 책들, 문진(文鎭), 영문 타자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임어당이 입에 파이프를 물고 책상에 파묻혀 펜으로 다채로운 세상을 창조했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잠깐, 그가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생활의 발견》에서 그는 <의자에 앉는 즐거움>에 대해 쓴 적이 있다. “나라는 인간은 맥없이 의자에 앉아 있는 것으로 평판이 나 있으므로 의자에 앉는 철학에 대해 써보고 싶다.”고 하면서 친구의 응접실 팔걸이의자에 앉아서 마음껏 자유로운 자세를 취하는 것은 그렇게 하면 할수록 주인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것이라고 했으니 자기 집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짐작이 간다.
마) 침실 공간
임어당은 장자(莊子)와 도연명(陶淵明)과 원중랑(袁中郞)과 소동파(蘇東坡)를 사랑했다. 이들은 모두 평온하고 명성과 부(富)에 무관심하고 행복하고 평온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임어당은 평온과 만족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임어당은 “나는 인생 최대의 즐거움의 하나는 잠자리 속에서 다리를 오므리고 자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대한의 심미적 즐거움을 만끽하고 정신력을 활동시키고 싶다면 팔의 위치도 매우 중요하다. 가장 이상적인 자세는 자리 위에 평평하게 뻗고 자는 것이 아니라 한쪽 팔이나 양팔을 머리 위로 돌리고, 커다란 부드러운 베개에 머리는 30도 각도로 받쳐 두는 자세라고 믿는다. 이 자세라면 시인은 모두 불후의 걸작을 쓰고, 철학자는 인간의 사상을 혁명하며, 과학자는 획기적인 발견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과연 임어당의 침실은 단순하면서도 편안했다. 단출한 침대를 보면서 그가 꼬부리고 누워서 자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임어당은 역시 범상한 사람이 아니었다. 자는 모습이 남다르니 사상과 철학도 남다르지 않을 수 없는가 보다.
바) 거실 겸 식당 공간
거실 겸 식당에는 고풍스러운 티 테이블과 소파 그리고 식탁과 식탁 의자가 놓여있다. 그것들이 많이 사용된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우리는 임어당 부부가 친구나 친척들에게 후대를 많이 베풀고 그들에게 깊은 사랑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임어당은 친구와 이야기하는 즐거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흉금을 터놓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눌 때처럼 좋을 때가 있을까? 하지만 우리는 자기가 어떻게 느끼는지 서로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을 때만 진정으로 통할 수 있다. 그런 대화를 할 때는 구속 없이 앉거나 누울 수 있어야 한다. 테이블 위에 발을 올려놓을 수도 있고 창턱에 앉거나 바닥에 앉아서 소파의 모든 베개를 덮개로 사용할 수도 있다. 팔과 발이 가장 편안한 위치에 놓일 때 우리의 마음도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내 방에서 웃는 사람은 모두 내 친구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보기만 해도 흐뭇해진다.” 임어당은 이런 말끝에 이렇게 강조했다. “친구와 마음껏 밤을 새워 대화를 나누는 일은 인생 최대의 기쁨이지만 이런 기쁨을 맛볼 기회는 그리 흔치 않다.”
참, 그러고 보니 이 방 벽에는 임어당 자신이 쓴 “유불위재(有不爲斋)”라는 붓글씨 편액이 걸려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이라는 뜻이겠는데 이에 대해 안내인이 미리 나누어 준 영어 팸플릿에 “아무것에도 신경 쓰지 않고 사는 것이 임어당의 삶의 원칙”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참으로 임어당다운 생각이라고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사) 베란다 및 후원 묘소
나무 문을 지나면 임어당 선생이 자주 가던 베란다에 도착한다. 베란다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후원에 있는 그의 묘소가 보인다. 그러니까 대문 쪽에서 보면 단층집이지만 후원에서 보면 2층 건물이 되는 것이다.
그는 해 질 무렵 일을 끝내고 저녁을 먹으며 베란다에 앉아 바람을 쐬곤 했다고 한다. 입에 파이프를 물고 있으면서 담배를 피우기도 하고 안 피우기도 했다.
베란다에 앉으면 저 멀리 관음산이 보인다. 밤이 되면 점차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하늘에 별이 반짝거리고 산들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할 수도 있고 아무 생각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도 있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낼 수 있는 것은 얼마나 멋진 즐거움이냐!
나무 테이블과 등나무 의자가 있는 이 작은 공간은 전망이 아주 좋다. 낮에는 구름을 볼 수 있고, 밤에는 달과 반짝이는 불빛으로 가득한 야경을 볼 수 있겠다. 해 질 무렵에는 난간에 기대어 관음산 뒤로 해가 지는 풍경을 감상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베란다 바로 아래 후원에 임어당 선생의 묘소를 쓴 것은 아주 탁월한 선택인 것 같다. 선생은 지금도 누워서 해 지는 광경을 감상하며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물고 있을 것이다.
3. 임어당의 생활 철학
임어당은 한번 주어진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값진 삶이 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 깊이 천착(穿鑿)한 뒤 마침내 한적(閑寂)한 생활이 최선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우리가 그럭저럭 이 일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생활에 한가(閑暇)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교양이란 자체가 원래 한가의 산물이고 최고의 현인은 가장 우아한 우유(優遊) 생활을 즐기는 사람을 말한다는 것이다.
“지극히 삶을 사랑하는 자는 한가의 절묘한 한때를 누군가에게 빼앗기지나 않을까 하여 언제나 질투심을 불태우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유인으로서 언제나 특유한 품위와 긍지를 지녀야 한다. 낚시질하는 잠시 동안이나, 업무에 종사하는 몇 시간이나 똑같이 신성한 것이어야만 한다. 마치 영국인이 스포츠를 할 때 그와 같은 경지에 들어가듯 일종의 종교가 되어야만 한다.”
그는 또 인간의 행복은 모두가 생물학적인 행복이라고 말했다. 정신적 쾌락은 육체를 통해 감득(感得)될 때만 참된 것이요, 정신적 유쾌와 육체적 유쾌가 합쳐졌을 때 우리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인생의 적극적인 기쁨을 받아들일 힘이 없어지는 것은 주로 관능적인 감수성이 줄었기 때문이며 또는 만족스럽게 쓰지 않기 때문이라고도 말했다. 인생을 산다는 것은 즐거움을 찾는 것이라고 갈파한 임어당은 인생을 즐긴 인물로 장자(莊子), 노자(老子), 맹자(孟子), 자사자(子思子), 도연명(陶淵明) 등을 들었다.
4. 그의 저작 활동
영문으로는 모국(母國)인 중국 문화를 옹호하고, 중국어로는 모국의 속물성을 풍자한 글을 쓴 임어당은 소설, 전기를 포함하여 중국어와 영어로 많은 에세이를 발표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그의 작품인 《생활의 발견(The Importance of Living)》은 일본어, 한국어, 독일어 등 12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중국과 중국인의 성격, 생활, 문화 예술 등을 종합적으로 해설한 《내 나라 내 국민》도 영문으로 집필하여 미국에서 출판해서 호평을 받았다.
소설 《붉은 대문》은 《경화연운》 《폭풍 속의 나뭇잎》과 더불어 임어당의 삼부작으로 불린다. 그중 《경화연운(京華煙雲)》은 중국 현대사를 잘 압축해 보여주는 소설로 1974년에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된 작품이다. 1988년에 대만에서, 2005년에는 중국에서 TV 드라마로 제작되어 방영되기도 했다.
수많은 저작 가운데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으로는 에세이집 《생활의 발견》, 《임어당의 웃음》 등과 장편소설 《북경호일》, 《붉은 대문》 등이 있고 《소동파 평전》 등의 저서도 번역 소개가 된 바 있다.
5. 나가며
임어당은 동양과 서양을 모두 잘 아는 20세기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동서양 문화의 교류와 융합에 힘썼다. 하지만 그는 관념론적이고 합리적인 서구 문명을 비판적으로 보았다. 그러한 틀에 박힌 사고나 생활방식보다 늠름한 인생의 즐거움을 존중하는 동양적인 사고와 생활방식이 더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기에 한적한 생활을 즐기라고 했고, 인생을 산다는 것은 즐거움을 찾는 것이라고 했다. 임어당의 인생관과 철학은 어찌 생각하면 평이하고 상식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도 한 줄기 시원한 바람처럼 신선하게 다가오는 것은 웬일일까? 임어당이 살던 시대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각박한 세상에 사는 지금이야말로 아무리 바빠도 한가(閑暇)를 즐기라는 임어당의 충고를 귀담아들어야 할 때가 된 것이 아닐까.
임어당 고거에서는 가만히 걷기만 해도 선생이 삶의 철학을 은근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런 고급스러운 인문학적 향기에 마냥 취해 있는데 갈 시간이 됐다고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쉬운 마음에 몇 번이나 뒤돌아보며 고거를 떠났다.
내 생각에 임어당 선생은 철인(哲人)이라고 하기보다 현인(賢人)이라고 부르는 것이 낫지 싶다. 현인 임어당을 만난 이번 대만 문학기행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첫댓글 아주 맘에 드는 글입니다. 임어당의 삶을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