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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점이라는 문제는 모든 시스템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이며 그 원인으로서는 계기의 오판, 보이지 않는 위치에 있는 장치, 제어에 대한 둔감한 반응을 들 수 있다. 기계에 관해서 자신이 아는 것은 얼마나 적은 부분인가 하는 자각을 당사자가 갖지 않는다면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게 되며 위기적 상황 속에서 그들은 잘못된 가설을 날조하고 현실적 정황이 눈앞에 드러나도 그 가설에 집착한다. - 제임스 R. 차일스(2008: 115) |
I. 서론
안전한 것이 위험하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적어도 안전에 관한 한 진실이다. 위험을 예방하기 위한 안전관리체계를 구축함으로써 객관적으로 안전성을 확보하는 경우, 더 큰 위험성을 지닌 상황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등산이 더 많은 인명구조 요원과 더 나은 구조 장비에 의해 더 안전해진다면, 등산가가 결정해야 하는 상황은 바뀌게 된다. 그는 안전을 믿고 위험이 더 큰 등산을 할지 말지를 결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전체적으로 위험한 일이 객관적으로는 위험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위험이 더 큰 등산을 한다는 것은 더 위태로운 일이고 덜 안전한 일임에도 말이다. 자동제어 브레이크(ABS)가 장착된 자동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운전자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예들은 최고의 안전 시설을 갖춘 타이타닉호의 침몰에서부터 다중적 안전장치를 갖춘 원자력발전소 원자로의 사고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많이 제시될 수 있다(노진철, 2010: 281-282). 안전에 대한 과도하거나 맹목적인 신뢰는 안전에 대한 최대의 위험인 것이다. 어쩌면 원전 안전에 대한 지나친 믿음과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안전장치와 시스템을 맹신했기에 감히 원전 부품 시험성적서 조작이나 비리가 발생했을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안전에 대한 근거 있는 믿음이나 잘 구축된 안전관리시스템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더 위험할 수 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위기관리시스템이 작동되어야 하고 안전을 확보해야만 하는 중요한 시설이나 대상은 쉽게 접근하기 어렵다. 보안상의 이유나 전문성이 요구된다는 이유로 인해, 위기가 발생하면 큰 피해를 볼 수 있는 이해관계자들이나 일반 국민들은 정작 안전을 감시하고 모니터링하는 역할로부터 배제되거나 소외된다. 실제로 오늘날 작동되고 있는 가장 위험한 기계들은 출입금지 구역에 있든지 외따로 떨어진 지역에 있기 때문에, 그리 간단하게 눈에 띄지 않는다(차일스, 2008: 22-23). 원자력발전소에 접근해서 안전관리시스템을 점검하거나 조사할 수 있는 국민이 몇 명이나 될까 궁금하다. 그런 상황임에도 우리는 원자력발전소의 안전을 신뢰해야 하고, 신뢰하지 않으면 원자력 전문가들의 설명을 통해 신뢰하도록 강요받고 있는 현실에서 살고 있다.
원자력발전소는 지진으로 인해 원자로가 붕괴되고 방사능이 유출되거나, 테러리스트에 의해 원자력발전소가 파괴될 수도 있으며, 정상적인 시험 검사를 거치지 않은 부품의 고장이나 오작동으로 폭발할 가능성(이재은, 2012: 94-95)은 언제라도 있다. 따라서 과학적 안전관리 시스템이 있기 때문에 원자력발전소에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문가의 설명은 강요된 안전일 뿐이다.
이와는 반대로 원자력 발전의 안전에 대한 무조건적인 불신은 국민들 사이에서 불안과 두려움을 양산할 뿐이다. 원자력 발전의 안전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원자력 발전은 유용하지만 위험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안전성 확보가 최우선이다. 원자력 발전은 핵 분열 과정에서 다량의 방사성 물질을 생성해내는 특징이 있으므로, 국민의 건강과 환경 보전을 위해 요구되는 안전성의 확보 여부가 항상 논란이 되고 있다(장순흥, 1995: 141). 따라서 원자력 발전의 경우, 사고나 재난이 발생하지 않도록 사전에 안전성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다른 하나는 원자력 발전은 천재지변이나 적의 공격, 테러리즘 등에 의해 사고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위기관리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원자력발전소의 내부 기계적 장치의 결함으로 인한 폭발, 붕괴 등의 사고가 발생할 수 있고, 또한 외부의 공격이나 테러리즘, 또는 지진 등과 같은 자연재난으로 인한 비상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특히 지진과 같은 자연재난이 발생하는 경우에는 안전상 가장 큰 위험이 원자력발전소에 집중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홍기원, 2011: 101). 따라서 원전사고에 대처할 수 있는 위기관리시스템을 마련함으로써 사후 대응을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하는 것이 요구된다.
또 다른 하나는 원자력발전 사고는 한 국가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의 안전보장의 문제로 확대될 수 있다는 것이다. 2011년 3월 11일에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일본 원자력 발전소의 안전사고에 그치지 않고 전 세계적인 원전의 안전문제, 환경재앙, 더 나아가 국가의 안전보장 문제로 연결되었다. 이로 인해 원전 문제는 국경을 넘는 국제사회의 공동 관심사로 부상(전진호, 2012: 16)했고, 급기야 원자력 발전에 대한 근원적인 회의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이필렬, 2011: 73).
이 연구에서는 원자력발전의 위험에 따른 위기관리의 의의와 필요성을 살펴보고, 국가위기관리시스템의 현황 분석을 통한 개선방안을 제시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먼저 원자력 발전의 안전과 위기관리에 대한 이론적인 고찰과 후쿠시마 원전폭발 사례와 우리나라 사례를 분석한다. 다음으로 우리나라의 원자력발전 위기관리시스템의 개선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II. 원자력발전의 안전과 위기관리
1. 원자력발전의 안전
원자력발전은 핵분열 과정에서 다량의 방사성 물질을 생성해내는 특징으로 인해 국민의 건강과 환경 보전을 위해 안전성의 확보가 항상 중요한 쟁점이 되어 왔다. 특히 1979년에 발생한 미국 쓰리마일 아일랜드(Three Mile Island; TMI) 원전 사고와 1986년 소련 체르노빌(Chernobyl) 원전 사고는 원전의 안전성에 대한 의구심을 크게 확산시켰다(장순흥, 1995: 141). 그리고 체르노빌 원전 사고 이후 침체 상태에 있던 원자력 산업이 최근 몇 년 사이에 ‘원자력 르네상스’라는 표현처럼 부활하다가(김혜정, 2011: 258),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맞게 됨으로써 다시금 원전의 안전성과 위험성에 대한 논란이 시작되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대중들로 하여금 원자력 찬성에서 반대로 인식 전환을 유도하고, 기존의 원전 반대론자들의 반원전 태도를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WIN-Gallup International이 후쿠시마 원전 사고 직후인 2011년 3월 21일부터 4월 10일까지 47개국 36,12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원자력을 전력 생산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동의하는 비율이 사고 전의 50.4%에서 사고 후에는 43.6%로 떨어졌다. Ipsos(2011)가 2011년 6월에 24개국 18,787명에게 설문조사한 결과, 원자력에 반대하는 사람 중에서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원전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되었다는 응답자가 많았으며, 특히 이러한 인식의 전환 비율이 아시아 국가인 한국(66%), 중국(52%), 일본(52%)에서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난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2011년 7월부터 9월까지 영국 BBC News가 23,231명을 대상으로 수행한 국제조사 자료에 따르면 2005년 대비 2011년의 원자력 발전에 대한 지지도가 미국을 제외한 8개 국가, 즉 프랑스, 독일, 인도, 인도네시아, 일본, 멕시코, 러시아, 영국에서 떨어졌다(왕재선·김서용, 2013: 397).
또한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원전의 안전(safety) 문제가 국가의 안전보장(security)에 직결된 문제라는 점을 국제사회에 인식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국가의 안전보장이라는 관점에서도 원전의 안전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으며, ‘핵무기 없는 세상’을 지향하는 핵안보정상회의의 의제설정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는 9.11 테러 이후의 미국과 같이 핵테러의 위협을 직접적으로 느끼는 국가도 있지만, 핵테러에 직접 노출되지 않은 국가 혹은 일반인들은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인해 핵테러에 의한 위협보다 원자력 안전사고에 의한 위협을 더 크게 느끼게 되었다. 더 나아가 원전시설에 대한 의도적 테러뿐만 아니라, 원전의 안전사고 역시 ‘핵안보’라는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다(전진호, 2012: 16).
원자력 안전의 본질은 방사선(radiation)의 존재로부터 찾는다. 화력발전에서는 화학 반응에 의해 에너지를 생산하지만, 원자력발전에서는 핵분열(nuclear fission) 반응에 의해 에너지를 생산하여 전기로 변환시킨다. 우라늄과 같이 무거운 원자핵이 분열할 때는 막대한 에너지와 함께 매우 불안정한 상태의 원자(핵분열 생성물)들이 만들어지는데, 이들은 알파선(α-ray), 베타선(β-ray), 감마선(γ-ray)과 같은 방사선을 방출하면서 안정된 상태로 돌아가려고 하는 방사성물질(radioactive material)이다. 원자력에서의 안전 목표, 안전성 확보 원칙, 안전성 확보를 위한 방안 등을 비롯한 모든 안전 활동은 방사성 또는 이를 방출하는 방사성 물질의 외부 누출을 방지하는데 집중하게 된다. 따라서 원자력 안전은 “발생가능한 방사성 재해로부터 인간과 환경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세 가지 특성을 지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장순흥, 1995: 143-145). 우선, 원자력 안전은 고도의 기술적인 안전성을 필요로 한다. 다음으로 기술적인 안전성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안전성 인식의 확보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원자력 안전은 한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적인 문제라는 점이다. 만일 한 국가에서 중대한 원전 사고가 발생하면 그 영향은 국경을 초월하여 미치기 때문에 원자력의 안전성 향상을 위한 국제 공동 노력과 상호 감시가 필요한 것이다.
2. 원자력발전 위기관리
원자력 재난이나 위기는 내부적인 기술적 위험성이나 결함으로 인해 발생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핵테러 발생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핵테러리즘은 보편타당하게 통용되는 정의는 없으나 테러의 행위로서 고의적으로 인명을 살상 또는 상해를 목적으로 핵무기나 방사능 무기를 불법적으로 사용하거나 위협하며 또는 핵물질이나 방사능 물질을 포함하고 있는 시설을 공격하여 핵무기의 제조에 필요한 핵물질을 탈취하거나, 고의적으로 방사능 누출 사고를 일으키는 행위로 볼 수 있다(박진희, 2012: 167). 따라서 원자력발전소는 파괴나 무장공격에 대해 적절한 방어가 가능하도록 설계되어야 하는 한편, 발전소 직원들에 의한 파업, 파괴 행위, 그리고 적대적인 공격 행위 등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방어기능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장순흥, 1995: 160).
핵테러의 유형 중 하나인 핵시설 파괴는 최근 테러리스트들의 주요 목표가 되고 있다. 알 카에다(Al-Qaeda)의 고위층이 원자력시설 파괴 가능성을 연구한 것이나 체첸 반군과 북 코카서스(Caucasus) 테러 집단들이 핵시설을 공격할 것이라고 위협하는 것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대표적인 핵시설이라고 할 수 있는 원자력발전소는 보안병력, 격납용기, 추가안전시스템으로 보호되어야 하지만, 어떤 원자로는 현장에 무장경비가 없을 정도로 허술한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서양식 격납용기가 없으며 추가안전시스템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예도 있다(박진희, 2012: 169).
원자력 사고나 재난으로 인한 피해의 중대성에 비추어 원전의 객관적 안전성을 확보하는 것뿐만 아니라 인근 주민의 안전성에 대한 신뢰를 확보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영국에서는 원자력시설의 위험은 참을 수 있는 위험이어야 한다고 본다. 그 판단은 전문가의 평가뿐만 아니라 여론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박균성, 2006: 55, 60). 따라서 원자력발전소의 위험은 바로 그것이 근원적으로 안전하지 않고, 위험이 대재앙으로 표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재앙은 지진이나 해일과 같은 자연적 요인이나 인간의 사보타지나 실수 그리고 부품의 결함(이필렬, 2011: 77)에 의해 촉발될 수 있는 동시에 테러나 무장공격에 의해 위기가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 건강을 보호하기 위한 안전 서비스를 제공하는 분야의 경우에는 시방보다는 정부가 제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는 외부효과(externalities), 공공재(public goods)적 성격, 불완전한 정보(imperfect information)의 문제 등으로 인해 시장의 실패(market failure) 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또한 시장에서 자원이 효율적으로 배분되기 위해서는 모든 재화와 서비스에 대해 시장이 존재하고 가격이 형성되어야 하지만 안전 서비스의 경우에는 현실적으로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시장이 존재하지 않거나 가격이 형성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원자력발전과 같이 위험관리의 중요성이 두드러진 분야에서는 시장에 모든 기능을 맡기는 것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원자력발전의 경우에는 시장 경제 체제에 완전히 맡길 수 없고 공익적 관점에서 어느 정도 공공분야의 관리와 감독에 종속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에너지의 생산, 수송, 공급, 상업화 등은 전적으로 공공성을 존중해야 하며 공권력의 감독 하에 두어져야 한다(홍기원, 2011: 102). 특히 원자력 위기관리는 그 실패의 영향이 시장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원전 사고가 발생한 국가와 국민에게 뿐만 아니라 인접 국가는 물론 전 세계의 인류와 후속세대에까지 미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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