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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역과 귀납, 가지줄기와 뿌리줄기, 리좀과 바이너리
리좀에 관한 설명자료,
노마드-<리좀> 내재성, 혹은 외부의 사유
1. 책에 관하여
리좀이란?
-뿌리줄기 즉, 중심뿌리 없이 줄기와 뿌리가 같이 이어져 나가는 식물류.
-모든 합리주의적 전통을 전복시키는 개념.
(1)책이란 무엇인가
-이 책의 각각의 장은 일종의 고원(정상이 없는, 하지만 평지와는 구별되는 높이와 강밀도를 갖는)이고, 이 책 전체는 그런 고원들이 이리저리 이어지면서 연결되는, 하지만 어떤 하나의 결론으로 모든 논지와 문장을 끌고 가지는 않는 고원들의 ‘모호한 집합’이라 할 수 있다.
-책은 대상도 주체도 갖지 않는다.
ex)푸코의 <감시와 처벌>, 맑스의 <자본> 등
-책은 무엇인가? “책은 하나의 배치다.”, “책은 하나의 다양체”
ex)소쉬르의 <일반 언어학 강의>
(2)책과 외부
-책을 통해 읽게 되는 모든 텍스트는 책이 그 외부와 만나서 만들어지는 주름이다.
-어떤 책도 그 외부의 산물이며, 책의 내부란 그것의 외부와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내부와 외부를 명확하게 가르는 건 불가능하다.
ex)스피노자의 <에티카>, 스미스의 <국부론>, 신채호의 책들 등
-책은 이미 완성된 작품이라 할지라도 어떤 외부와 만나느냐에 따라 다른 내용의 책이 되고 다른 효과를 발휘하며 다른 의미를 갖는다. 즉, 책의 외부성이란 책도 그 외부에 따라 다른 책-기계가 된다는 뜻이다.
(3)책의 유형들
-수목형 혹은 뿌리형 모델: 중간가지나 중간뿌리를 거쳐 하나의 중심, 하나의 일자(一者)로 모든 것을 귀속시키는 모델이다. 결론으로 귀착되면 그것을 통해 하나의 전체성을 획득하는 장(章)들의 유기적 체계로 구성되는 책이다.
-뿌리줄기 혹은 리좀형 모델(곁뿌리 내지 총생뿌리): 어떤 일자적인 중심 없이, 가지 내지 줄기들이 서로 만나고 흩어지는 방식으로 접속되고 분기하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책은 결론은 있지만, 그것은 각각의 장들을 통합하는 중심이 아니라, 각각의 고원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개념들의 집합일 뿐이다.
2. 리좀의 몇 가지 특징들
(1)접속의 원리: 접속은 두 항이 등가적으로 만나서 제3의 것, 새로운 무언가를 생성한다. 줄기들의 모든 점이 열려 있어서 다른 줄기가 접속될 수 있는 것, 하지만 접속한 줄기들이 어느 한 점으로 귀결되지 않으며, 배타적 이항성도 작동시키지 않는 것; “리좀은 어떤 다른 점과도 접속될 수 있고 접속되어야 한다.”
(2)이질성의 원리: 리좀은 이질적은 모든 것에 대해 새로운 접속 가능성을 허용한다. 접속은 어떠한 동질성도 전제하지 않으며, 다양한 종류의 이질성이 결합하여 새로운 것, 새로운 이질성을 창출한다.
(3)다양성의 원리: 리좀적 다양성은 어떤 하나의 척도, 하나의 원리로 환원되지 않는 이질적인 것의 집합이고, 따라서 하나가 추가되는 것이 전체의 의미를 크게 다르게 만드는 그런 다양성이다. 배치라는 개념이 리좀적 다양체를 함축한다.
리좀은 접속하는 선의 수가 늘어나면 그에 따라 차원수가 증가하는 만큼 그 다양성 내지 복잡성이 증가하는 일종의 프랙탈한 다양체다.
(4)비 의미적 단절의 원리: 단절은 어떤 주어진 선과 연을 끊는 것이고, 그 선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그 선 안에서 만들어지는 의미화의 계열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진화론적 도식들은 이질적인 것 안에서 직접적으로 작동하며, 이미 분화된 선에서 다른 선으로 비약하는 리좀적 모델을 따를 것이다.
(5)지도 그리기와 전사術: 현실에 따라 지도를 그리지만, 그려지는 지도에 따라 변형되는 현실
3. 수목적 사유와 리좀적 사유
(1)수목적 체계와 위계적 체계
-가장 중요한 차이는 다양하게 분기하는 선들이 하나의 중심으로 귀착되는가 아닌가 이다. “수목적인 체계는 위계적인 체계로서, 의미화와 주체화의 중심을 포함하며, 조직된 기억과 같은 중심적 자동장치를 갖고 있다.” 이처럼 위계적인 체계에서 하나의 개체는 오직 사위 이웃을 가질 뿐이다.
-독재자의 정리: n명이 발포하게 하는 데 오직 한 명의 장군이 필요한 그런 관계, 그것이 중심화된 수목적 체계의 특징이다.
-n명의 사람들 가운데 독재자를 제거하는 것, 이를 n-1이라고 표시하는데, 이것이 수목적 체계와 대비되는 리좀적 체계를 정의하는 명제이다. 이런 점에서 리좀이란 비-체계가 아니라 비 중심화된 체계라고 할 수 있다.
(2)초월성과 내재성
-“초월성은 유럽에 고유한 질병이다.” 모든 것을 ‘근거’나 ‘원인’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는 사유, 그리하여 그것을 첫 번째 원인이나 원리로 삼아 모든 것을 설명하는 사유가 그것이다. 보편적인 제1원리를 찾아내고, 그것을 통해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이런 식의 사유를 ‘형이상학’이라고 한다.
-반면 연기적인 관계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는 생각이나, 어떤 것이 무엇과 관계하는가에 따라 본질이 달라지고 관계의 질이 달라진다는 생각은, 오직 상호간의 내재적인 관계에 의해 모든 것을 포착한다는 점에서 내재적인 사유라고 할 수 있다.
(3)리좀 속의 수목, 수목 속의 리좀
-“리좀 안에는 수목적인 마디들이 있으며, 뿌리 안에는 리좀적인 압력이 있다.” 즉 리좀 역시 수목적인 가지들이 뻗어나갈 마디들을 갖고 있으며, 그것을 통해 수목적인 체계로 변형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리좀은 출발점이나 끝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중간에 있으며, 사물들 사이에 있는 간 존재요. 간주곡이다.”
-“사물을 위에서 아래로, 혹은 그 반대로, 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혹은 그 반대로 지각하지 않고 그 중간을 통해 지각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그렇게 해 보라, 그러면 당신은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네이버 지식사전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87736
리좀 [ Rhizome ] 프랑스어
'리좀'은 들뢰즈와 가타리(Gilles Deleuze et Felix Guattari)가 그들의 명저 『천의 고원(Mille Plateaux)』(1980)의 입문적 표제어로서 사용하면서 널리 알려지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이 말을 '수목형'(樹木型)과 대비적으로 사용한다.
리좀형과 수목형은 '관계 맺기'의 두 방식을 가리킨다. 더 정확히 말해, 리좀형과 수목형이 따로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리좀형에 좀더 많은 규정들이 들어갈 경우 수목형으로 화하고 반대의 경우(규정성을 줄어들 경우) 리좀형으로 화한다. 즉 리좀형과 수목형은 상관적 정도(correlative degree)를 형성한다.
리좀은 관계를 맺는 방식이 보다 자유로운 쪽으로 갈 때 성립하고, 수목형은 관계 맺는 방식이 이항대립적(binary) 방식으로 화할 때 성립한다(그림 참조).
리좀형은 수목형의 잠재성의 방향이고, 수목형은 리좀형의 현실성의 방향이다. 리좀형의 관계 맺기에서 일정한 규정들이 더해져 감에 따라 수목형으로 화한다. 반대로 수목형의 관계 맺기에서 일정한 규정들이 완화됨에 따라 리좀형으로 화한다. 수목형으로부터 리좀형으로 가는 것은 곧 현실적 이항대립을 극복하고서 잠재적인 보다 자유로운 접속 가능성으로 감을 뜻한다. 역으로 리좀형에서 수목형으로 가는 것은 곧 리좀형에 보다 까다로운 규정(예컨대 “한 항은 다른 세 항과만 접속할 수 있다” 등등)이 가해질 때 성립한다.
리좀형과 수목형을 대립하는 두 형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에 있어서의 역방향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은 대개 수목형의 구조를 하고 있다. 예컨대 대학은 크게 이과 학문과 문과 학문으로 나뉘고, 문과 학문은 인문대학과 사회대학으로 나뉘고, 인문대학은 어문계와 역사철학계로, 역사철학계는 역사학부와 철학부로, 철학부는 서양철학부와 동양철학부로……, 이런 식의 수목형 구조를 하고 있다.
리좀을 사유한다는 것은 이렇게 실선으로 굳어진 수목형으로부터 보다 자유로운(점선으로 그려진) 접속 가능성이 유동하는 잠재성의 차원으로 내려가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다시 현실성으로 올라와 이전과는 다른 형태의 접속들을 실험하는 것이 들뢰즈-가타리가 제안하는 실천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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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사전 식으로, 말그대로 '사전적' 으로만 베끼고 인용하고 복창 하는 앵무새같은 <지식>보다는, 자기 나름대로 소화해서 인식의 지평을 넓혀 보자는 취지로 소개 합니다.
'토론' 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인식체계> 및 <관점> 라고 저는 생각 하거든요
같은 사안이나 사물을 보는데에도 <인식체계> 및 <관점>에 따라서 마치 서로 다른 '차원' 의 얘기를 하는 것처럼 보여질 때가 있습니다.
기실 그것은 어프로치(Approach: 접근법) 가 다른 것임에도, 자칫 '차원'이 다른것으로 오해를 빚어서 서로간에 소통의 '벽'을 형성하게 됩니다.
잘 알다시피, 탐구에는 '연역법' 과 '귀납법' 이 있습니다.
연역법이 고차원이고 귀납법이 저차원이다? = 이런 말 하는 사람들이 주로 '도사' 들이죠.
불가 특히나 선종 에서는 '돈오돈수' '돈오점수', 정혜쌍수' 등의 득도법들이 있는데, 이중에서 '돈오돈수' 가 '연역법' 이다 고로 연역법이 고차원이다 이렇게 단순치환하는 도사(?)들이 있습니다만, 이거 사이비 낭설 입니다.
연역법과 귀납법은 '차원'이 다른 것이 아니라 '어프로치' 가 다른 것이다 저는 이렇게 봅니다.
'어프로치' 의미가 무엇이냐 ? 나무를 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한 그루의 나무도 땅위의 <가지줄기> 부분과 땅밑의 <뿌리줄기> 부분의 전개형태가 다릅니다.
땅위의 '가지'가 전개된 방식이 '연역법' 이고 땅밑의 '뿌리' 가 전개된 방식이 '귀납법' 입니다.
1. 분리되기 전의 큰 가지 하나만 파악하면 거기서 분리된 잔가지는 자동적으로 파악됩니다. 이거 연역법이죠. 디렉토리 구조이기도 합니다. 검색엔진으로 치면 '야후 Yahoo' 검색 방식 입니다. 웹 게시판도 디렉토리 구조 입니다. 문제는 A라는 잔가지에서 B라는 잔가지로 이동하려면 분리되기전의 큰가지 접점을 거쳐야 하는 <계통경로>입니다 - 이것이 '바이너리' 방식이죠.
그에 반해서
2. 땅밑의 뿌리 줄기는? A라는 잔뿌리에서 B라는 잔뿌리로 이동하려면 분리되기전의 큰뿌리 접점을 거치지 않습니다. 그럼 뭐냐? A라는 잔뿌리에서 B라는 잔뿌리로 또 다른 잔뿌리가 생성되서 연결됩니다. 즉 <계통경로>가 아닌 <연동경로> 입니다 - 이것이 '리좀' 방식 입니다. 검색엔진으로 치면 '구글' 입니다. 웹으로치면 '페이스북 (Face Book)' 구조 입니다. 길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개 일 수 있습니다 - 이것이 귀납법 입니다.
상기의 1 과 2 는 다른 전개형태인 것 같지만? 기실은 한 그루의 나무 입니다. 1만 가지고? 또는 2만 가지고? 나무는 형성되지 않습니다. 1 과 2 모두가 있어야 온전한 나무가 됩니다.
그러므로 " 연역법이 더 고차원이다, 큰가지 하나만 알면 그 계통의 잔가지는 저절로 도통한다 " - 이런 말하는 도사들이 왜 사이비인 줄 이제 아셨죠?
현실에서는 오히려 '리좀' 설계자들이 '천재' 입니다. 구글검색 엔진이 가장 속도빠른 엔진인 이유가 A잔뿌리에서 B잔뿌리로 지름길을 찾아서 연동방식으로 직접 건너가기 때문에 빠른 겁니다. 야후가 도저히 구글을 못 이깁니다.
왜 '천재' 일까요? 연동망을 상상해 보십시오 거의 '미로' 같습니다. 그런데 그 '미로' 에서 분명히 '지름길' 이 있다는 것은 더이상 '미로' 가 아닌 어떤 '계통 줄기' 를 추적해 낸다는 얘기 입니다. 그러니 천재 이지요.
인터넷- 이라는 '네트워크 망' ( 미 국방성 알파 프로젝트) 태동 자체가 '리좀' 방식의 구상이었습니다. 얼핏 무작위처럼 보이지만 무작위가 아니지요. 귀신처럼 목적지를 찾아갑니다. 무슨 애기냐? '리좀' 인 것 같지만 '바이너리' 원리가 녹아 있다는 말 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천재' 들이고 도통한(?) 경지 입니다
그러니, 한국의 소위 도통한 도사(?)들이 그 얼마나 한심한 '우물안 개구리' 들이라는 걸 느끼시죠?
내일이 부처님 오신날입니다.
소위 도통한 '도사' 들에게 저는 붓다를 대신해서 다음과 같이 일갈 합니다.
- 연역이 연역만이면 그것은 연역이 아닌 것이고 귀납이 귀납만이면 그것은 귀납이 아닌 것이다 -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면? " 나무를 봐라~!" 이러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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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너리 방식] 과 [리좀 방식] 을 현실에서 대조적으로 비유해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물론 정확히 꼭 들어맞는 '대입' 은 아닙니다만, 대강 얼추 맞아 떨어 집니다.
기타등등 .....
어느방식이 더 우월하다? - 이제 이런 질문하면 바보죠?
둘다 필요하다 입니다. 둘이 기실은 하나 입니다 - 붓다의 설법
덧글>
아프로만 12.05.28.
[체계가 발달하고 더욱 고도화 될 수록,,
소수의 엘리트가 지구촌 수십억의 다중을 장악하는 - 즉. 일명 '매스 커뮤니티' 의 통제력을 장악하기에는 어떤 방식이 더 '가공'할 방식 일까요? '리좀' 입니다]
맞는 이미지 찾아내는 데에는 무브온21 '우리예리'님을 도저히 못 따라갑니다
들뢰즈-가타리가 제안하는 실천철학이 자칫 '천의 고원' 에서 미아(?)가 되버리고 방향을 잃어버리면? --> " MB가 다해 주실거야~! " 성향으로 ' 조 먹사님' 내지는 ' 어버이' 에 매달리는'권위 귀의적' <역현상>을 초래합니다. 탈근대 사조의 부작용성 맹점이지요.
되는것도 없고 그렇다고 안되는 것도 없는 '판례법 체계' 의 미국에서 대중은 더욱 멍청이가 되고 결국 재미보는 것은 오직 변호사 뿐인 것처럼 말이지요. 차라리 성문법체계의 독일사람이 평균적으로 더 똑똑합니다.
리좀, 책, 이문구
― 들뢰즈/가타리의 눈으로 이문구를 읽다
1. 리좀, 리좀-책
새로운 책을 쓴다는 것은 세계를 종과 횡으로 횡단하는 선들, 경도(經度)와 위도(緯度), 그 양태들을 꿰뚫고 나아가며 유동하는 선들을 찾는 일이다. 항상 좌표, 역학, 정향들의 체계들은 창조적인 탈영토화가 아니라 초월의 지리들을 우선적으로 머금고 있다. 사유는 그 의미화의 지층에서 오는 진동과 압력을 받는다. 모든 방향으로 열린 접속을 찾는다면 우리 사유를 ~되기를 향해 열린 절대적 극한으로 몰아가야 한다. 부딪치고 꿈틀거리며 뚫고 흘러가야 한다. 사유가 힘과 의지의 방향성을 갖는 것은 그 다음이다. 사유가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발명하고 발견하지 않는다면 그 사유는 즉각 폐기해야 한다. 왜 ? 그것은 죽은 사유니까. 죽은 사유는 내부에서 작용하는 속도들과 변용태들을 끌어내 새로운 순환의 선으로 나아가는 동력이 되지 못한다.
새로운 순환의 선을 타기 위해서 작동하는 힘들의 순환을 정지시키고 해체해야만 한다. 옛순환이 정지되지 않고서는 새 순환은 작동하지 않는다. 이미 고갈된 힘들의 옛순환에 종속된다는 것은 그 내부의 생성과 다양체를 축소, 환원시키는 반복 운동일 뿐이다. 지각을 폐쇄회로에 가두는 낡은 개념들과 낡은 패러다임의 잔재들을 폭파해야만 배치를 바꿀 수 있다. 배치는 욕망이 생산력과 생산관계에 침투하여 끊임없는 접속을 만들고 그 접속에 따라 다르게-되기를 말한다. 욕망은 기계고, 욕망하는 기계는 흐름들을 절단하고 채취하며 현실을 작동시킨다. 그런 점에서 “욕망은 현실을 생산한다.”(G.Deleuze/F.Guattari, Anti-OEdipe, 1972)고 말할 수 있다. 욕망은 곧 욕망하는 생산이며, 욕망의 배치다. 그것이 생산한 현실이 사회장이며, 사회장은 곧 배치의 장이다. 동일성이 아닌 차이로, 존재가 아닌 생성으로 나아가기. 이것이 ‘있다’에서 ‘되다’에로, 동일성의 정치학에서 차이의 정치학으로, 하나에서 여럿으로, 긴 기억에서 반기억으로, 계보학의 질서에서 반계보학의 혼돈으로, ‘존재의 철학’에서 ‘생성의 철학’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책에서 구할 것은 지식이 아니라 생성을 위한 영감과 힘이다. 저자-텍스트가 아니라 그것의 배아, 그것을 배양하는 젖, 질료들, 즉 사유를 가로지르는 날짜와 속도들, 자연과 무의식, 고원들을 힘껏 빨아 들여라 ! 지식은 기껏해야 지식생산자의 머리를 모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모방은 의미의 축소화이며, 그것에의 종속이다. 그러므로 해석하지 말고, 제발, 제발, 당신의 도주선을 찾으란 말이다. 언제까지 어른이나 흉내내는 덜된 어린애로 남으려고 하는가 ? 언제까지 누군가의 도움과 보살핌이 없다면 생존할 수 없는 응석받이 노릇을 하려는가 ? “그만 둬 ! 너 때문에 피곤해 죽겠다 ! 의미를 내보내거나 해석하지 말고 실험을 해 ! 너의, 너의 영토성, 너의 탈영토화, 너의 체제, 너의 도주선을 찾으란 말이야 ! 이미 만들어지 너의 유년기와 서구의 기호론에서 찾지 말고 너 자신을 기호화하라고 !” 왜 하나의 점, 하나의 질서에 고착해 있으려 하는가 ? 왜 항상 계보학 속에 너의 가능성, 너의 힘, 너의 꿈과 상상력, 너의 잠재적 생성들을 매장시키려고 하는가 ? 그것은 유일한 장군, 하나의 독재자, 여럿처럼 보이지만 하나일 뿐인 히드라며 메두사에 지나지 않는다. 수목적 사유에서 벗어나라. 그래야 하나에서 여럿으로 나아갈 수 있다. 위계적 질서, 중심화된 점에서 탈주하여 반계보, 다양체의 몸으로 나아가라. 진정 다양체를 꿈꾼다면 유일을 빼고서 n-1로 살아라.
들뢰즈/가타리는 탈중심화해서 수목의 위계적 질서를 벗어나라고 말한다. 정주민적 사유가 아니라 유목적 사유를 찾아라. 공(空)과 화엄의 세계,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찾아라. 이제 리좀이다 ! 리좀은 비-체계요, 비중심화한 접속들의 향연이다. 리좀의 세계에서 접속은 어디에서나 일어난다. 리좀은 “계층도 중심도 없고, 초월적인 통일도 또 이항 대립이나 대칭성의 규칙도 없으며, 단지 끝없이 연결되고 도약하여 일탈하는 요소의 연쇄”다. 리좀에는 중심, 서열, 계보가 없다. 그것은 언제나 위계적이며 위상학적인 나무가 아니라 구근이나 덩이줄기다. 그것은 일정한 법칙 아래 뿌리를 뻗어가는 나무와 달리 어떤 지점에서든 다른 지점과 연결접속한다. 리좀은 “아주 상이한 기호 체제들 심지어는 비-기호들의 상태들을 작동시킨다.” 아직도 초월성인가 ? 가로지르고, 넘어서고, 시작도 끝도 없는 운동이다. 초월성이 아니라 내재성이다. 그것은 일인 체계를 무너뜨리고 그 사이에서 자라는 잡초다. 독재자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양쪽의 둑을 무너뜨리며 중간에서 속도를 취하는 시냇물이다. 정주민이 아니라 유목민으로 살아라. 역사를 쓰지 말라. 시작하지 말고 끝내지도 말며 그냥 흘러가라.
리좀은 시작하지도 않고 끝나지도 않는다. 리좀은 언제나 중간에 있으며 사물들 사이에 있고 사이-존재이고 간주곡이다. 나무는 혈통 관계이지만 리좀은 결연 관계이며 오직 결연 관계일 뿐이다. 나무는 “~이다”라는 동사를 부과하지만, 리좀은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라는 접속사를 조직으로 갖는다. 이 접속사 안에는 〈이다〉라는 동사를 뒤흔들고 뿌리뽑기에 충분한 힘이 있다.
2. 책, 그 다양체
책을 읽되 책에 끌려가지 말고 저자-텍스트를 덮쳐라 ! 이것은 종족의 번식을 위한 생식행위가 아니다. 사생아, 즉 당신을 탈영토화하는 변형적 성분을 갖기 위함이다. ~되기를 위한 영감, 생성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당신은 역사의 재귀, 노예의 도덕에 충실한 하수인, 식민지 역할에 그치고 말 것이다. 책은 이미 저자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 저자라는 지층에서 벗어난다. 무슨 힘으로 ? “다른 모든 것들처럼 책에도 분절선, 분할선, 지층, 영토성 등이 있다. 하지만 책에는 도주선, 탈영토화 운동, 지각 변동(〓탈지층화) 운동들도 있다.”(MP : 1980) 책-기계의 기원과 독창성은 한 저자의 전유물일 수가 없다. 한 저자의 이름 뒤에 이미 수많은 가려진 저자들이 숨어 있다. 이름이 지워진 저자들은 기명의 저자를 대신하여 말한다. 따라서 한 권의 책-기계 안에서 수많은 익명의 목소리들이 울려나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 책-기계가 다양체이겠는가 ? “책은 하나의 다양체이다. 그러나, 다양하다는 것이 어떤 것에 귀속되기를 그친다는 것, 즉 독립적인 실사의 지위로 격상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한다.”(MP : 1980) 세계를 다양한 형태로 바꾸려는 숨은 저자들이 없었다면, 그 선행하는 목소리들이 없었다면 책-기계 내부에서 움직이는 질료들, 명제와 척도들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저자란 외부성, 즉 수많은 익명의 저자들의 기표적 기호다. 그러므로 책-기계를 하나의 주체에로 귀속시키는 일은 책-기계의 본질적인 측면인 외부성을 외면하는 일이다. 내부와 외부는 몸을 섞고 서로를 복제하며, 새로운 배치 속으로 들어간다. 배치의 효과는 역사가 아니라 생성, 도약과 증대, 활성화, 그리고 흐름으로서의 통접이다.
책이 얘기하는 바와 책이 만들어지는 방식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하물며 책에는 대상도 없다. 하나의 배치물로서 책은 다른 배치물들과 연결접속되고 다른 기관 없는 몸체들과 관계 맺고 있을 뿐이다. 기의든 기표든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묻지 말아야 하며, 책 속에서 이해해야 할 그 어떤 것도 찾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이런 것들을 물어봐야 한다. 책이 무엇과 더불어 기능하는지, 책이 어떤 다양체들 속에 자신의 다양체를 집어넣어 변형시키는지, 책이 자신의 기관 없는 몸체를 어떤 기관 없는 몸체들에 수렴시키는지. 하나의 책은 바깥을 통해서만, 바깥에서 존재한다. 이처럼 책이 그 자체로 작은 기계라면, 이 문학 기계는 전쟁 기계, 사랑 기계, 혁명 기계 등과, 그리고 이 모든 기계들을 낳는 추상적인 기계와 어떤 측정 가능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 ?
책-기계들은 저마다 세계에 대한 해석을 담고 있다. 해석 본능은 책-기계의 인습에 속하는 영역이다. 그러나 인습이란 평면화에의 운동을 벗어나지 못한다. 해석의 내용, 해석의 방식은 중요하지 않거나 덜 중요한 영역이다. 중요한 것은 책-기계가 내재화하고 있는 그 수많은 외부들과 통하는 것, 그것의 도주선, 탈영토화 운동, 지각 변동들과 교감, 반응을 보이는 것, 그리고 촉발과 생성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의 외부를 바깥으로 끌어내고 다른 배치를 만드는 것, 그것의 질료와 속도를 당신의 탈영토화의 힘으로 바꾸는 것이다. 당신이 먼저 바뀌지 않는다면 세계도 바뀌지 않는다. 그러므로 당신을 바꾸는 피를 수혈하지 못하는 책-기계는 세계도 바꾸지 못한다. 바꾸지 못하는 것은 네거리에서 차량들의 흐름을 조정하고 지휘하는 교통경찰을 흉내내는 정신병자의 헛된 몸짓들, 공을 비켜나간 축구선수의 헛발질이다. 변혁의 힘과 선을 생산하지 못하는 책-기계는 멈춰서 있는 기계다. 죽은 기계다. 어느 시대나 가장 중요한 책-기계들은 세계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예언과 변혁, 도래할 실재들, 아직 오지 않은, 그러나, 오고야 말 현실에 대해 말한다. 좋은 책-기계들은 탈영토화한다. 탈영토화는 새로운 현실의 발명과 창조다. 네 속에 있는 질료적 흐름들을 “행운선, 허리선, 도주선”으로 바꾸어라.
n에서, n - 1에서 써라, 슬로건을 통해 서라, 뿌리 말고 리좀을 만들어라 ! 절대로 심지 말아라 ! 씨 뿌리지 말고, 꺾어 꽂아라 ! 하나도 여럿도 되지 말아라, 다양체가 되어라 ! 선을 만들되, 절대로 점을 만들지 말아라 ! 속도가 점을 선으로 변형시킬 것이다 ! 빨리빨리, 비록 제자리에서라도 ! 행운선, 허리선, 도주선. 당신들 안에 있는 〈장군〉을 깨우지 마라 !
3. 농촌, 혹은 지층화
1960년대의 경제개발계획에서 소외된 농촌은 빠르게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가난과 굶주림에 지친 많은 농촌 사람들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가망이 보이지 않는 농업과 정든 고향을 등지고 도시로 나와 도시빈민 계층에 편입되는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이제 농촌은 공장 폐수와 농약 등의 공해로 오염이 되고, 상업자본과 천박한 소비문화에 물들어 자발적 상호부조의 전통 위에 세워진 농촌공동체는 급격하게 무너져 내린다. 도작농토(稻作農土) 위에 세워진 명실상부한 농촌은 죽어버렸다. 그것은 농경사회적 정서를 내면화하고 있는 많은 농촌출신의 도시인에게 곧 심정적 고향의 상실을 뜻한다. 소설가 이문구(李文求, 1941 ~ 2003)는 『관촌수필』(문학과지성사, 1977), 『우리 동네』(민음사, 1981), 『산너머 남촌』(창작과비평사, 1990) 등으로 이어지는 작품집을 통해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해체의 위기에 빠진 농촌 현실을 자신의 체험을 너절하고 질펀하고 소박하고 호흡이 유장한 요설체의 토속어 문체로 버무려 그려낸다.
이문구는 끈적거리는 토속어 문체로 산업화․도시화․근대화로 인해 와해되는 농촌의 부락공동체,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자기헌신과 상호유대 정신의 멸실, 그 와중에 겪는 농민들의 소박한 희망과 기대의 부서짐을 길어 올린다. 염상섭·채만식․김유정에서 비롯한 “평민문학적 골계미의 전통”을 바탕으로 하는 풍자와 해학의 문체를 이어받은 작가는 농촌소설이 빠져들 수 있는 인물의 소영웅화, 인정삽화, 지방주의 등을 극복하고 1970년대를 대표하는 ‘농촌작가’로 우뚝 선다. 이문구의 대표작으로 꼽는 「관촌수필」 연작은 작가의 과거 유․소년기의 고향 체험에서 길어낸 소설로, 양반토호의 가문과 유림 같은 봉건적 신분질서의 문화적 잔재가 그대로 남아 있고, 부락공동체의 풍습과 인정이 살아 있는 근대문명에 잠식되기 이전의 고향을 복원해낸다. 「관촌수필」에 일관되게 관류하는 정서는 상실감이다. 농촌공동체는 전쟁과 이념의 대립과 충돌로 엄청난 충격과 균열을 겪고, 뒤이은 근대화 과정에서 도시 자본주의 문명에 의해 잠식되며 고향은 다른 사회로 해체, 변모되어간다. 전근대적 농촌사회가 지녔던 공동체적 속성과 농토라는 물적 터전을 근본으로 그 위에 자신의 삶을 세웠던 농민들의 순박함과 인정, 전통적 질서와 윤리는 서서히 멸실되어 가고, 작가는 그 점을 아쉬워하며 애틋한 마음으로 그것을 감싸려고 했던 것이다. 고향은 더는 전통적이고 재래적인 풍습과 인정이 넘치는 그런 곳이 아니다. 「관촌수필」을 두고 현실의식을 결여한 채 농촌을 주자학적(朱子學的) 교양의 바탕 위에서 봉건의 잔영을 그리는데 치우쳤다는 비판과 지적을 할 수도 있다. 그게 부담스러웠던지 작가는 농촌 현장의 구체적 실감을 몸으로 겪은 뒤 농촌에 대해 품었던 낙관론적 기대를 허물고 농촌 문제들을 정치사회적 맥락에서 바라보고 비판적으로 파헤쳐나간다.
대저 농자천하지대본이란 말을 입에 오려 버릇한 지도 벌서 일천팔백 년이 넘었다. 농업이 기간산업의 하나임에도 아직도 변함이 없다. 하지만 천하지대본의 주체는 마땅히 농자에서 농민으로 옮겨져야 한다. 농경사회에서는 농삿일 자체가 중요하였으나 이런 산업사회의 와중에서, 그것도 농사의 기계화가 진행중인 단계에서는 농삿일보다 농사를 담당한 사람의 위치가 중시되어야 옳을 것이다.
「위자료」, 『산너머 남촌』, 창작과비평사, 1990, 45쪽
오늘의 농촌은 “미곡수매와 농약과 농기구, 생활용품 구입에 미치는 행정 편의주의, 통일벼와 노풍을 강권하고 무작정 퇴비증산을 외치는 관청과의 관민 대립문제, 돼지파동, 유흥업의 농촌침투, 영농기계화의 허실, 농지의 자유로운 매매를 제약하는 제반 법률의 문제, 교육문제, TV공해” 등 수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는 사회장이다. 이 농촌이란 사회장은 국가-기계에 의해 포획된 내부적 성분, 혹은 내부성의 환경이다. 당연히 국가-기계에서 발화되는 규칙, 권위, 작용의 범주 아래에 속한다. 이 사회장은 국가-기계의 통치 실행에 의해 끝없이 영토화하며, 동시에 재영토화한다.
이문구는 농업과 사람을 분리해서 문제의 해법에 접근하는 것은 분명 진전된 의식의 산물이다. 이같은 해법의 제시 이전에 아마도 한국 농촌이 ‘분열증적’인 잠재력의 소실에 의해 점점 가망없는 삶의 장, 즉 사회체가 되어가고 있다는 의식이 선행되었을 것이다. 농민들이 농업 자본을 축적하는데 실패하고 농업의 영세성에 포박되어 안에서부터 서서히 무너지는 이 내적 붕괴의 현상은 국가-기계의 포획 속에서 자발성을 반납하고 지층화되는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고속도로를 점거하고 물자의 흐름을 끊거나 봉기나 혁명과 같은 방식으로 흐름 자체를 역류하지 않는다면 지층화는 피할 수 없다. 삶과 사유가 수목형 모델에서 리좀형 모델로 전환이 되지 않는 농촌공동체의 와해는 피할 수 없다. 모든 탈주선은 멈춘다. 불가역적 현상들. 일렁임은 그치고 견고한 지층으로 돌아간다. 유동성은 고갈에 이른 채 자본주의적 공리계의 하부로 지층화한다.
국가-기계란 코기토들의 집합체, 관료주의에 의해 지탱되는 추상적 기계, 몸 없는 텅 빈 기호다. 개인이 노동, 언어, 신체라는 기표적 기호에 의해 발견되며 포획된다면, 국가-기계는 오로지 몸 없는 몸으로만 존재한다. 국가-기계는 인공적인 몸을 갖는데, 국가를 표상하는 각종 앰블럼과 상징들, 주체없는 언표들이 바로 그것이다. 인공적인 몸, 혹은 경찰․군대 조직, 그리고 사법체계. 국가-기계는 그것의 지층에서가 아니라 경계에서 작동한다. 지층들이 아니라 경계들이라고 ? 우리가 국가-기계를 발견할 수 있는 곳은 경계들이다. 지층들은 국가-기계의 잠정적 아이덴티티가 실현되는 장소다. 지층들. “지층들은 층(層)이자 대(帶)이다. 지층의 본질은 질료에 형식을 부여하고, 공명과 잉여의 시스템 속에 강렬함들을 가둬두거나 독자성을 붙들어 매고, 지구라는 몸체 위에서 크고 작은 분자들을 구성하고, 이 분자들을 그램분자적인 집합체 속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지층들은 포획이며, 자신의 영역을 지나가는 모든 것을 부여잡으려고 애쓰는 “검은 구멍(〓 블랙홀) 또는 폐색 작용과도 같다. 지층들은 지구 위에서 코드화와 영토화를 통해 작동한다. 동시에 지층들은 코드와 영토성에 따라 작동한다.” 그 지층들의 끝, 경계들. 경계들에는 이중의 장벽들이 선다.
뉴욕이나 모스크바, 혹은 파리나 런던, 도쿄나 베이징, 인천국제공항들은 어떤가 ? 입국과 출국, 탑승에 따른 복잡한 절차들은 한 사람씩 통과하게 되어 있는 다양한 문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문들이란 사실은 그냥 통과할 수 있는 열려진 문이 아니라 닫혀진 관료적 장벽의 변이체들이다. 실제의 장벽과 관료적 장벽들. 그런 점에서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듯이 “국가의 정치권력은 폴리스, 경찰, 즉 공공도로의 관리”며, “도시의 대문들, 세금 징수와 의무는 대중의 유동성, 이주민 무리(사람들․동물들․물건들)의 침투력에 대한 장벽이고 필터”다. 대표적인 예로 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할 때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까다로운 검색과 입국 절차들이 이를 입증한다. 입국심사대의 관료들은 당신이 내민 여권과 입국서류를 꼼꼼하게 검토하고 입국 사증을 발급한다. 국제공항들은 국가의 내부와 외부의 접점에 있는 입-구멍들이다. 입-구멍들은 일종의 필터, 거름망이다. 그것은 들어와야 할 것과 들어와서는 안될 것들을 선별하고 판정하는 장치다. 선별과 판정은 입국심사대에서 이루어진다. 그 하나의 중심, 일자의 권력이 만들어내는 선별의 기준은 하나의 질서로 자명한 것이지만, 선별당하는 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매우 모호하고 자의적이다. 입국심사대에서 걸러지는 것들은 불순한 것들, 잠재적 범죄자들, 불법체류자, 치명적인 감염군들이다. 신원이 불확실한 외국인, 범법자, 불법입국자, 테러리스트들이 걸러진다. 아마 예언자들도 국가의 입국심사대를 통과하기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항상 국가가 포획할 수 없는 곳, 국가의 외부에 있기 때문이다. 예수, 석가, 노자, 장자, 니체, 카프카, 사드, 심지어 마르크스조차 국가-기계의 내부에서 그것의 외부를 사유한다. 카프카는 “자기 안으로의 이민(移民)”을 통해 국가-기계의 포획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의 한 전범이다. 어느 시대에나 작가의 소설들은 무수한 탈주의 선들을 보여준다. 예언자들이란 곧 탈주의 선을 타고 밖으로 나아가는 자들이다. 그들의 사유가 전복적이기 때문에 불온한 것이 아니라 탈주의 선을 타고 밖으로 나아가는 행위 자체가 국가-기계를 추문화하기 때문에 불온한 것이다. 그 불온성을 통해 끊임없이 포획하고 국가-기계 내부로 통합․귀속하려는 국가-기계에서 탈영토화한다. 국가-기계는 그것에서 탈영토화하려는 일체의 기획과 실천을 불법으로 간주하고 제동을 건다. 국가 권력은 즉각 통제의 힘으로 전환하며 탈영토화하려는 몸들을 포획한다. 포획된 몸들은 국가 권력에 의해 자행되는 감금, 고문, 학살, 의문사가 일어나는 접점이다. 모든 국가-기계들은 거주민들에게 국가-기계의 인정을 획득하려는 나르시시즘 욕망을 주입하는 기관들과 프로그램을 갖는다. 지층화하려는 몸과 의식의 훈육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각종 학교들이다. 학교는 국가-기계의 유력한 포획 장치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은 모든 국가-기계들의 백년지대계다.
4. 세계화의 폭력 속에서
이문구는 1977년에 주거지를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행정리, 흔히는 발안이라고 불리는 지역의 쇠면부락으로 옮기는데, 이 무렵의 생활로 당시 상업주의와 소비문화에 잠식당하는 농촌현실을 생생하게 보고 겪는다. 농경사회는 본질에서 그 뿌리들, 유대들에 고착한다. 유목사회가 내면화하는 반전통적이고 반순응주의와는 반대쪽으로 난 길을 걸어간다. 그리하여 국가-기계와 모든 표준화하는 권력들에 저항없이 투항한다. 농촌에 스며든 미시정치학은 부권주의, 피상성, 소비문화와 결합하며 식민지화를 가속한다. 어쨌든 이문구에게 나고 자란 탯자리는 아니나 발안에 정착해 가축을 기르고 보리바심을 거들기도 하며 농민들과 어울려 산 체험이 농촌의 삶에 대한 실감을 풍부하게 하고 이곳을 내면적 심상공간으로 만들었음은 분명하다. 작가에게 향토의 구체적인 세목들을 되살려 나중에 「우리 동네」 연작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는 보람을 안겨준다. 「우리 동네」 연작은 작가가 경기도 중부의 농촌마을에 거처를 마련하여 살며 농투산이들의 삶을 근접거리에서 관찰하고 그 농촌 실상을 토속적 입말을 풍부하게 살려 그려낸 우리 문학의 중요한 자산이 된 작품이다.
“농사꾼은 호적 파갖구 물 근너온 의붓국민인감. 다른 물건은 죄다 맹그는 늠이 기분대루 값을 매기는디 워째서 농사꾼만 남이 긋어준 금에 밑돌아야 혀 ? 마눌 한 접이 금가면 버리는 푸라스띡 바가지만두 못허니 이래두 갱기찮은 겨 ? 드런 늠덜. 암만 초식 장사 제 손끝에 먹구 산다지만 해도 너무헌다구. 꼭 이래야 발전헌다는 겨 ?”
이문구, 「우리 동네 姜氏」, 『우리 동네』, 민음사, 1981
농촌은 더 이상 서정성이나 토속성 짙은 막연한 그리움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그것은 근대화의 희생양, 도시 자본주의의 수탈대상이다. 농촌은 절대 빈곤에서는 벗어났으되 여전히 잠재적 빈곤의식에 허덕이고, 관청의 부당한 횡포에 속수무책이며, 텔레비전 등 상업주의 매스컴의 영향과 독점자본의 소비문화에 휩쓸려간다. 각박해진 농민들의 심성, 멸실되어 가는 풍속과 유대감, 날로 피폐해지는 농촌 해체의 실상을 작가 특유의 풍자적 문체로 실어 나른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이 타락하고 부정적인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기대와 희망적 가능성으로 농민의 건강한 생명력과 윤리의식을 제시한다.
「우리 동네」 연작은 농촌의 아이들에게까지 번진 망년회, 부녀자들의 무분별한 관광여행과 고고춤, 농협의 변칙 운영, 조미료 중독, 도시인들의 사냥공해로 인해 피해와 공장의 노사문제와 얽힌 농민의 생활, 모내기에 동원된 고등학생들이 새참을 요구하며 데모를 벌이며 주민을 골탕 먹이는 일, 통대선거 사기사건과 수매 비리, 농촌지도소의 영농교육에 대한 반감, 농민의 이익을 외면한 채 중개상으로 전락한 농협에 대한 농민들의 적대감, 농한기의 도박 등 나날이 변해가는 농촌현실의 풍속을 있는 그대로 그려낸다. 이 시대의 변화하는 농촌이란 그것이 경기도이건 충청도이건 간에 생활에 불가결한 생산과 수요가 조화와 균형을 이룬 자족적인 생활체계가 무너지고, 그로 인해 경제적․도덕적 파탄의 위기에 빠진 농촌을 말한다. 농촌 내부는 소비주의의 유혹에 의해 달구어진 욕망들로 들끓는다. TV, 냉장고, 전기밥솥과 같은 가전제품만이 아니라 “이쁜이계”와 같은 성의 쾌락을 드높이기 위한 음부 축소수술에 이르기까지 소비주의가 작동시킨 잉여적 욕망의 분열증적 흐름들은 포화상태에 이르지 않고 끊임없이 반복 순환한다. 사실 욕망에는 만족이 없다. 욕망은 늘 텅 비어 있는 것이어서 욕망은 끊임없이 그르렁거리며 욕망을 욕망하는 상태에 있다. 욕망은 텅빔에서 꽉참으로 나아가는 운동이며, 있음을 구축하는 현상이다. 욕망은 욕망 그 자체가 발화의 원초적 계기이다. 그러므로 욕망이 욕망하는 가운데 그 속에서 삶의 무수한 잠재태가 생성된다. 욕망은 욕망과 합성한다. 욕망의 실재는 주체의 자기형성적 힘에서 섬광처럼 드러난다. 변기는 좌절된 욕망[설사], 이미 다른 것으로 전이된 욕망[소화된 것]을 삼킨다. 욕망의 마지막 출구의 이미지가 변기인 것이다. 변기는 대지 위의 함정, 끝을 알 수 없는 대지의 내장과 연결된 하강으로 나아가는 자리이다. 지하의 미로, 땅속의 관(管)의 입구이다. 그것은 빨아들이고 소멸해버리는 장소이다. 아픈 곳이 자꾸 아픈 생을 가진 자아는 차라리 변기 속으로 도망가고 싶어 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곧 욕망함이다. 죽은 것은 욕망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살아 있다는 것은 욕망함의 현존이다. 사람이나 동물들이 죽는 순간 대장에 남아 있는 내용물이 항문을 통해 저절로 흘러나온다. 분변은 항문의 괄약근이 이것들을 움켜쥐고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이 마지막 분변은 욕망의 마지막 찌꺼기의 배출이다. 욕망을 다 태우지 못할 때 일어나는, 그 불연소의 찌꺼기는 피로라고 불리는 현상이다. “피로는 과다한 외면적인 사회활동과는 상반되는 그러한 수동성이 아니라, 반대로 현재의 사회관계에서 보이는 일반적인 수동성의 강제에 대해 일정한 조건하에서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활동형태이다.” 피로가 근육활동의 과다함의 결과물이 아니라 수동성의 강제에 놓인 조건 속에서 대항의 유일한 활동형태라는 통찰은 놀랍고 참신하다.
농업과 농민들을 덮치는 위기의 본질은 시장 자본주의, 독점 자본주의, 다국적 자본주의에 의해 조장되고 포박된 정신분열증의 위기와 잇대어 있다. 오늘의 자본주의는 “장엄한 정신분열증의 축적”을 생산한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욕망 이론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풍부한 잉여생산 속에서 동시에 결핍과 욕구를 생산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무의식, 신체, 욕망은 영토화하면서 탈영토화의 운동을 한다. 이문구의 소설에서 오늘의 농촌과 거기 사는 사람들이 욕망의 편집증적 충동에 휩쓸려가면서도 그것을 낳는 현실의 지배구조를 전복하거나 해체하지 않고 오히려 전통적인 역할, 개념, 계급 제도를 따르는 것은 그들의 의식이 철저하게 국가의 위계질서적인 제도에 함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때 개별자의 의식들은 집단-주체로 나아가지 못하고 상품교환의 속박, 심리학적인 속박에 머무를 뿐이다. 자본주의의 정신분열증적인 경향은 탈영토화의 전복적인 힘으로 작동할 수도 있는데, 그 질료적 생산과 힘이 국가 장치들의 폐쇄 회로에서만 순환함으로써 차이, 다양성, 생성을 낳는 힘으로 전환하지 못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고착된 국가 장치와 그 속박에서 벗어나는 유목적 사유를 제창하며, 우리에게 “리좀을 형성하라, 탈영토화를 통해 너의 영토를 넓혀라”라고 권유한다.
식물들의 지혜. 식물들은 뿌리를 갖고 있을지라도 언제나 어떤 바깥을 가지며, 거기서 식물들은 항상 다른 어떤 것, 예컨대 바람, 동물, 사람과 더불어 리좀 관계를 이룬다(또 어던 점에서는 동물들 자신도 리좀을 이루고 인간들도 리좀을 이루고........). “식물이 우리 안으로 의기양양 하게 침입할 때의 도취.” 항상 단절을 통해 리좀을 따라가라, 도주선을 늘이고 연장시키고 연계하라, 그것을 변주變奏시켜라, n차원에서 방향이 꺾인, 아마도 가장 추상적이면서 가장 꼬여 있는 선을 생산할 때까지. 탈영토화된 흐름들을 결합시켜라. 식물들을 따라라. 우선 잇단 독자성들 주변에 생기는 수렴원들을 따라 최초의 선의 한계를 정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음으로 최초의 선의 한계 바깥, 다른 방향에 위치한 새로운 점들과 함께 이 선의 내부에서 새로운 수렴원들이 만들어지는지를 보라. 글을 써라, 리좀을 형성하라, 탈영토화를 통해 너의 영토를 넓혀라, 도주선이 하나의 추상적인 기계가 되어 고른판 전체를 덮을 때까지 늘려라. “우선 너의 오랜 친구인 식물에게 가서, 빗물이 파놓은 물길을 주의 깊게 관찰하라. 비가 씨앗들을 멀리까지 운반에 갔음에 틀림없다. 그 물길들을 따라가 보면 너는 흐름이 펼쳐지는 방향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다음에 그 방향을 따라 너의 식물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는 식물을 찾아라. 거기 두 식물 사이에서 자라는 모든 악마의 잡초들이 네 것이다. 나중에 이 마지막 식물들이 자기 씨를 퍼트릴 것이기에 너는 이 식물들 각각에서 시작해서 물길을 따라가며 너의 영토를 넓힐 수 있을 것이다.” 음악은 “변형되는 다양체들”만큼이나 많은 도주선들을 끊임없이 흘려보내왔다. 결국 자신을 구조화하거나 나무 형태로 만드는 음악 고유의 코드들을 뒤엎어버리게 되더라도 말이다. 따라서 음악 형식은 단절되고 증식한다는 점에서도 잡초나 리좀에 비견될 수 있다.
이문구는 「우리 동네」 연작에서 농촌을 외면적 사실과 구체에 충실하게 그려낸다. 농촌은 언제까지나 시대의 변화가 미치지 않는 무풍지대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생산의 잉여들을 떠안는다. 도시살림에서는 일반화된 가전제품과 외래 음식은 말할 것도 없고, 고고춤, 망년회, 관광계, 이쁜이계와 같은 생뚱맞은 소비문화와 외래문화의 풍속 유입과 과포화 상태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현실을 횡단하는 징후들이다. 상징적 강제성의 힘 아래에서 저질러지는 후진성의 맹목들. 혹은 세계화의 폭력들. 세계화는 지역적인 것을 자본으로 묶어놓고 집어삼키는 포식자다. 농촌은 국가-기계의 관료주의적 규제의 조정과 통제를 받으며 병든 신체, 고갈된 신체가 되어가고 있다. 신자유주의 혹은 지구화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자본의 규제없는 흐름과 침투는 더욱 더 농촌을 식민주의적 수탈의 현장으로 고착시킨다. 외부와 접속할 수 있는 탈주선들은 끊어진다. 이문구는 소비문화의 무분별한 확산과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풍속의 범람으로 나날이 비속해지고 남루해지는 농민의 삶을 구체적이고 전면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오늘의 농촌과 농민의 삶에 들어찬 불만과 좌절의 근본 요인에 대한 성찰로 이끈다.
“어제는 농수산부 무엇이라나 하는 것이 피서 허러 지나간다구 새벽버텀 어찌나 볶아대는지, 시 부락 사람들이 죄 분무기를 지구 나와설랑 해전 내 논배미에 들어가 후덩거렸더랴. 공동방제 허는 시늉을 내라니 벨 수 있남. 분무기에 맹물만 한 짐씩 지구 나와설랑 신작로 가생이 냄으 논에 들어가 애매헌 베포기만 짓밟었다는 얘기여. 위서 허라는 것은 세상 읎어두 못 배기니께.”
이문구, 「우리 동네 黃氏」, 『우리 동네』, 민음사, 1981
이를테면 「우리 동네 黃氏」에서 한 작중인물의 입을 빌려 토로하고 있듯 자주적 선택과 의지와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관 주도의 타율적 삶은 농촌의 삶을 비루하게 만드는 크나큰 요인 중의 하나다. 작가는 실익이 없는 행정동원이라든가, 영농법의 강압적 시행에 대해 농민들의 불만과 반발 심리를 놓치지 않는다. 그 불만과 반발은 실효성 없는 정부 시책에 대한 빈정거림이나 관 주도의 영농 교육에 대한 반감과 무관심으로 드러난다. 아울러 공공연하게 “나는 내 양심 내 정신으로, 내 줏대 내 나름을 살자는 사람이다. 지끔까장 이리 가두 흥, 전주 가두 흥, 허메 살어왔지만 두고 봐라, 아무리 농토백이루 살어두 헐말은 허메 살테니.”(「우리 동네 李氏」)라고 주체성과 자주성을 표나게 내세우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것이 관이 되었건 소비문화가 되었건 외래의 침투로 말미암아 농경사회의 공동체적 윤리규범과 인간관계가 무너지는 위기감이 불러일으킨 각성을 보여준다.
「우리 동네」는 1970년대 이후의 노동인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차츰 활기를 잃고 주저앉는 농촌 모습을, 고만고만한 농민을 상징하는 여러 성씨들을 중심인물로 내세워 그려낸 연작소설이다. 행정 관청-농협-농촌지도소들은 농민들 위에 군림하며 수탈의 말단 조직으로 작동한다. 국가-기계들의 권위주의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과 반감, 비아냥거림과 적대감을 드러내는 것은 생존의 최소화에 매달린 농민들이 농업 노동으로부터 자신들을 쓸어내려는 힘에 대항하여 “지악스럽게 버둥거”리는 것이다. 농촌에 넓게 퍼져 있는 환물 심리나 병든 풍속은 다양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의 고갈에 대한 징후들이다. 생래적인 건강성을 잃어버린 농촌-농민은 객체, 타자화한다. 억압의 질서 속에서는 “서루 다다 쇡여 먹잖으면 못 살게 마련된 세상”(「우리 동네 黃氏」)이 된다. “피차 상대방을 물주로 여기고, 서로 꾀를 다하여 등쳐먹으려고만”(「우리 동네 李氏」) 드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 적이며 늑대인 관계로 타락한 세태를 훑어내는 작가의 시선은 어두우면서도 냉철하다. 공산품의 조악성에 대항하여 농촌-농민들은 농약으로 범벅된 농산물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내놓는다. 침투와 파괴는 상호적이다. 죄와 악은 서로에게 삼투한다.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는 이 수성(獸性)의 세계에서 해결의 실마리는 백합, 양배추, 양귀비에 있지 않다. “풀은 유일한 출구이다. (.......) 잡초는 일구지 않아도 황폐한 공간에 있으며 그곳을 채울 뿐이다. 그것은 사이에서, 다른 것들 가운데서 자란다.”(MP : 1980)
「우리 동네」 연작 소설이 오늘의 농촌에 대한 사실적 보고로 끝나지는 않는다. 반근대와 탈현대의 변화라는 소용돌이 속에 놓인 농촌-농민들이 어떻게 세계화라는 폭력의 희생물이 되는지를, 극적인 전환이나 결말이 없이 그 역설과 모순의 생태학을 그려낸다. 이문구의 중문 구조의 문체는 농촌-농민에 대한 외연과 내포를 포착하는데 상당한 효력을 발휘한다. 큰 굴곡없는 삶을 짧은 삽화로 연결시켜 나가는 데도, 이 연작 소설이 돋보이는 것은 풍부한 토속어와 비속어, 판소리체의 입말들, 속담과 격언 등을 적절하게 써서 생생한 민중언어의 활력을 되살려낸 까닭이다. 그 짧은 삽화들은 서로 깊은 연관을 갖고 있지 않고 담담하게 농촌 풍속들을 드러내지만, 그것이 겹쳐지고 그 영역을 넓혀가면서 안으로는 차츰 하나의 구심점을 향해 집중된다. 따라서 독자들은 마치 가만히 앉아 농촌의 구석구석을 엿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뿌리를 찾지 마세요, 수로를 따라가요.......
정말 어렵지만 군데군데 이해가는 부분만 써 보겠습니다- 지금 문서 프로그램이 없어서 여기에 그냥 쓸게요~ -리좀이란 고구마와 같은 덩이줄기이다. 처음과 끝이 없이 언제나 중간부분이고, 무엇으로든 이어질 수 있다. 저자들이 리좀을 들어 비판하고 있는 나무, 뿌리는 위 아래가 있고 시작과 끝이 있다. 수직적 계층구조, 위계질서와 같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리좀은 끝나지 않고 늘 계속되는 중간이라는 뜻에서 n이자 n-1이라고 쓸 수 있다. -또한 리좀은 지도이다. 이는 끊임없이 재생산 가능하다는 뜻인 것 같다. 복사할 수 있고 덧붙일 수 있고, 뒤집을 수 있고... 지도 역시 처음과 끝, 권력의 다소 등을 나타내지 않기 때문에 리좀이 지도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도를 복사할 수 있다는 말에서처럼 지도는 사본과 다르다. 그래서 지도는 추구해야 할 것, 사본은 배격해야 할 것으로 간단히 이해하려 했으나, 저자는 이러한 이분법을 경계하며 두가지 개념이 반드시 대립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지도가 "자신의 고유한 사본들인 잉여현상을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질문 -"서양란은 말벌의 이미지를 만들고 말벌을 본뜨면서 탈영토화되지만, 말벌은 이 이미지 위에서 재영토화된다.(25p)" 처음에 이해하기로는 여기서 탈영토화는 자신의 이미지를 벗어나 다른 이미지를 받아들임으로써 자기자신으로부터 이탈한다는 뜻이고, 재영토화는 자신의 이미지가 타인에게서 재생산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책은 세계의 탈영토화를 확실하게 해주지만 세계는 책을 재영토화하며(27p)"를 보면 그 반대의 의미인 것같다. 또 이러한 비평행적 진화에 관해 "비비는 고양이의 모델이 아니고 고양이는 비비의 복사물이 아니다.(26p)"에 따르면 결국 다른 이미지를 복사하거나 따라하거나 그런척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과연 재영토화와 탈영토화의 의미는?? -<하나>와 <여럿>... 두번째 문장인 "우리들 각자는 여럿이었기 때문에(11p)"에서부터 등장하는데, 하나와 여럿의 의미를 잘 모르겠다. 보충자료 -첫 시간에 채운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자신이 이미 가진 '잘못된' 척도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그렇게 편향되고 딱딱한 시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많이 경험하고 배우라고 한다. 이 점은 <천개의 고원>을 읽을 때에도 기존의 지식에 매달려서 해석하려 할 것이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수행, 수련, 각성, 깨침은 그냥 호기심에 또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다. 아무리 닦아도 깨치지 않으면 소용없다. "깨치고 닦아라." 그런데 그래서 결국 깨침이 뭐란 건지... 어떻게 깨칠 수 있는 건지. 이런 법칙을 발견하려는 것도 깨치지 못한 사람이나 하는 거라는데. -'화두'는 결국 질문을 통해서 공부해나가는 것이다. 그 질문이 어떤 우스꽝스러운 것이더라도.
아프로만 / 2012-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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