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광우 바이오그라피 16)
[에피소드50]
제대 무렵에, 정신전력강화의 일환으로 육군본부가 주체하는 멸공 웅변대회가 각 예하 부대별로 개최되었다. 나는 스피치를 잘한다는 소문이 나서 연대 웅변대회에 나갈 대대 대표로 선발되었다. 그러나 나는 난생 처음 웅변을 하게 되어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나는 웅변 시나리오를 이스라엘과 이집트간의 6일 전쟁에서 발휘된 이스라엘 군의 정신력을 주제로 작성했다. 대대장 앞에서 예행연습을 했는데, 대대장도 웅변에 문외한이라 별 코멘트 없이 통과시켜 주었다. 연대에서 실시한 웅변대회에서 나는 1등을 했다. 따라서 나는 사단 웅변대회에 나갈 장교 대표로 선발되었다.
사단웅변대회 당일 연대 짚을 타고 가는데 웅변대회의 시간이 촉박했다. 앞을 보니 인접 37연대장 차가 좁은 도로에서 우리 앞을 천천히 주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연대장 차라 추월할 수도 없어 시간만 계속 지체되고 있었다. 그런데 언뜻 보니깐 연대장이 탑승하지 않은 것 같아, 선임탑승한 정보주임실의 선임하사가 운전병에게 연대장 차를 추월하도록 명령했다. 추월하고 한참 지나 인접연대 앞을 통과하려는 순간, 연대 정문 초소에서 위병들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었다. 연대장이 무전으로 우리를 잡으라고 위병소에 연락을 했던 것이었다. 군대는 계급사회인데 중위가 대령이 탄 차를 감히 추월했으니 괘씸죄에 해당되었던 것이다. 비록 선임하사가 잘못을 저질렀으나, 장교로서 모든 책임을 내가 지기로 했다. 나는 차에서 내려 화가 난 연대장에게 뛰어가서, 웅변대회에 시간이 촉박한 사정과 연대장이 타지 않은 것 같아 이런 실수를 저질렀다고 정중히 사과를 했다.
군기가 엄격한 전방에서 자칫 잘못했으면 큰 봉변을 당할 번 한 사건이었다. 나중에 그 연대장은 우리 연대장에게 이 얘기를 전달했지만 사정이 감안되어 별 일없이 넘어갔다. 사단에서 열린 웅변대회에서 나는 선전했으나, 웅변에 영어를 사용한 것이 감점요인이 되어 우승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귀중한 대중 스피치 경험을 했다.
[에피소드51]
어느 소대에서 암컷수컷 부부 개를 기르고 있었는데, 다른 소대의 부탁으로 한 마리를 보내기로 했다. 수컷이 떠나고 난 뒤에, 혼자 남은 암컷은 컹컹대면서 울고 식사도 하지 않고 떠난 수컷을 그리워했다. 개는 몇날 며칠을 정을 끊지 못하고 괴로워 하다가 혀를 깨물고 마침내 죽고 말았다. 소대에서는 불쌍하게 생각하여 죽은 개를 정성껏 땅에 묻어주었다. 그런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누군가가 몰래 땅을 파고 죽은 개를 끄집어내어 삶아 먹었다고 하였다. 나는 개보다 못한 사람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당혹스러웠다.
[에피소드52]
군대란 특수한 사회에서 있었던 몇 가지 별난 얘기들을 모아본다.
#천도리 마을에서 가장 큰 XX요정의 주인 마담은 군인들에게 외상술도 잘 팔지만, 술값을 갚지 않으면 절대 가만 두지 않는다. 어느 때는 길 가에서 어떤 대위에게 욕을 하며 하이힐을 벗어 머리를 때리기도 했다. 술값을 갚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마담은 어떤 군인이라도 술값을 갚지 않고 천도리를 떠나는 경우, 대한민국 어디라도 찾아가서 반드시 술값을 받아 낸다는 독종의 여자였다. 그래서 군인들은 그 여자를 독사라고 불렀다. 군인들이 거친 성격의 집단이고 보니, 군인을 상대하며 영업하는 술집 주인들도 상대적으로 거칠어지는 것 같았다.
#술이 고래인 Y라는 연대장은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소변이 마려우면, 맥주병에 소변을 본 후 병을 창밖으로 던지는 유치한 버릇이 있었다. 그러다가 날아오는 술병에 놀란, 지나가는 행인과 다투기도 했다. Y연대장은 또한 어느 날 술자리에서 휘하 대대장이 부연대장과 말다툼을 벌이자 건방지다고 대대장의 얼굴을 때려 이빨을 부러뜨리는 사고를 친 적도 있었다.
#독사라는 별명을 가진 B라는 장군은 군단장이 헬기로 도착할 때 헬기 착륙장에서 영접하기 위하여 서 있었다. 헬기가 도착하면서 프로펠러 바람으로 먼지와 모래가 비 오듯이 얼굴에 쏟아졌다. 그래도 그는 부동자세를 잃지 않고 군단장을 향하여 마치 로봇처럼 경례를 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들에게는 무서운 사단장이었지만, 직속상관에게는 고양이 앞의 쥐같이 행동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휘하의 연대장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휘봉으로 배를 쿡쿡 찌르는 등 거칠게 대하였다.
#포병 관측교육 때 인근 가게에서 동기들과 점심을 먹었다. 나는 혼자서 라면 4개를 삶아 먹었는데, 멀리서 지나가던 나의 동기가 쳐다보니 큰 솥단지 하나가 내 앞에 놓여 있었다고 하였다.
#매년 한번 실시하는 소대장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단 집체교육 때였다. 타 출신 장교 한 명이 나의 학군단 동기생과 시비를 벌이다 그를 구타하여 코피가 터졌다. 이 사건에 대해 인원이 제일 많았지만 개인적인 성향을 가진 학군장교들은 침묵을 지키며 동기생의 불운에 대해 모른척하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본 의리파인 내가 의분을 감추지 못하고 가해자인 모 부대 소대장을 한방 먹였다. 덩치가 큰 그는 대항했지만 나는 그를 태권도로 제압했고 그 후 교실에 동기생이 모인 자리에서 동기생의 어려움을 모른척하지 말자며 의리를 강조하는 일장 훈시를 하였다.
#요즘 사회에서 화제에 오르는 트랜스젠더가 인접 중대에도 있었다. 그 중대장은 트랜스젠더 사병이 엉덩이가 크고 여자처럼 행동하자 눈치를 챘다. 그는 그 사병을 전령으로 삼아 훈련도 시키지 않고, 식사 준비와 그의 잠자리를 보살피게 했다.
#가을에 연대 가상 전투훈련인 RCT를 끝내고 군단장으로부터 최상의 연대전투력 평가를 받은 L연대장은 기분이 너무 좋아 술을 잔뜩 먹었다. 그리고 비틀대며 대대로 귀환하는 병사들을 일일이 포옹하며 격려했다. 군단장은 연대 병사들이 공격을 위한 각개약진 때, 한조가 엄호사격을 해 주고 다른 조가 약진하는 실전적 전개(展開)대형을 보였다고 극찬했다. 후 일 연대장은 장성으로 진급했고 사단장을 역임했다.
#군사령부의 어떤 장성은 자기가 달고 있는 별이 너무나 자랑스러워 항상 차에 붉은 색 바탕의 별판을 달고 다녔다. 하루는 원주 부근 고속도로 상에서 그날도 자랑스럽게 별판을 달고, 최고속력으로 질주하다가 고속버스와 충돌하여 그만 하늘나라로 떠나고 말았다.
#우리 사단지역에 HID(북한 침투 공작부대)의 훈련장이 있었다. 그 인근에 사단 수색대대가 있었는데 어느 날 양측이 충돌하여 사상자가 발생했다. 사건의 발단은 아주 단순했다. HID부대원이 데리고 다니던 군견을 사단 수색대 대원이 건드렸다. 이에 흥분한 침투부대원이 공격을 가함으로써 양측부대원들이 집단적으로 무시무시한 싸움을 벌였던 것이다. 두 부대원들은 평소에도 전투력과 자존심을 놓고 서로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었다.
[에피소드53]
부중대장으로 근무하는 동안, 전방 2 SRP(방책선 소대급 초소)의 이태숙 소대장이 부친상을 당하여 대신 그의 소대 근무를 했다. 마산이 고향인 이소대장은 육사32기로서 조용한 성격이었고, 진실한 인간형이었다. 그는 예비대대에 있을 때부터 어학공부도 같이 하고, 천도리 외출도 같이 하는 등, 나를 개인적으로 따랐다. 그래서 내가 각별히 정을 주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마산고교 재학 때 전교 1위를 한 적도 있다고 했다. 그는 친상(親喪)을 치르고 부대에 복귀했을 때, 나에게 “하루 밤만 자신의 벙커에서 술 한 잔하며 자고 가라”고 간절히 권유하였다. 그의 부친을 잃은 처연(悽然)한 마음과 각별한 나와의 관계를 감안 그의 부탁을 꼭 들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다음 11P 대리 근무가 예정되어 있고 또 며칠 안남은 제대 준비를 해야 했기에 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돌아서야 했다.
그런데 그때 그가 나를 붙잡는 안타깝고 슬픈 표정이 아직도 가끔 떠오른다. 그는 부대로 복귀한 그날 밤 나에게 부친을 잃은 슬픔을 위로 받고 싶었던 것이다. 최근에 그의 소식을 들어보니, 그는 나와 헤어지고 얼마 후 유신 사무관으로 전역했다. 그리고 외무부 공무원으로 오랫동안 근무하다가 불란서 총영사 재직 중 불행히도 신병으로 인해 순직하였다고 한다.
[에피소드54]
제대일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후방근무 하는 동기들의 경우, 부대에서 제대 2개월 전에는 취직준비를 할 수 있도록 휴가를 보내 준다고 했다. 그러나 최전방은 제대 마지막 하루까지 방책 선을 지켜야 했다. 나는 부중대장이라, 주로 대대 소대장들 중 휴가나 기타 사정으로 공백이 있는 소대에 대리 근무를 했다. 나는 대리 근무를 할 때 조금씩, 조금씩 더덕을 캐 모았다. 더덕은 집에 가지고 갈 제대 선물로는 최고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의 했어야 할 점은, 더덕을 캐고 난 뒤에 흙이 묻은 채로 보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분야에 지식이 없었던 나는 흙을 모두 제거하는 바람에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일부가 상해 있었다. 아마 흙이 칼질을 한 부분에 진액이 흘러내리는 것을 막아주고, 부패를 방지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티끌모아 태산이라고 제대 무렵에는 더덕을 한 더블백(60Kg가량)이나 되는 많은 양을 모을 수 있었다. 어떤 소대에서는 선임하사가 보안부대에서 부탁이 왔는데 내가 모은 것 중에 일부를 좀 줄 수 없느냐? 는 요청을 했다. 그러나 나는 다시 더덕을 구할 기회가 없는 관계로 그의 청을 완곡하게 거절하였다. 내가 모은 더덕 중에는 팔뚝만 한 것도 있어 일반사회에서는 구할 수 없는 참으로 귀한 것이었다.
더덕을 집에 가져갔더니 아버지는 이렇게 큰 더덕은 처음 본다고 하면서 “산삼 맛 제비”라고 크게 기뻐하셨다. 태어나서 나는 처음으로 부모에게 효도를 한 것이었다. 더덕은 비무장지대와 인근 산에서 캔 수십 년 된 것이었고, 참모총장도 공식적으로는 구하기가 결코 쉽지 않는 진귀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큰 것은 술(양주, 소주)에 담아 선물도 하고, 이웃에게도 나눠주고, 양념을 하여 구워먹기도 하고, 또 간장에도 절여 1년 이상을 먹었다. 집에는 한동안 더덕향기가 진동했다.
(강광우 자서전 다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