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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회 사무엘 상권 26장-31장
1사무 26,1-25 다윗이 사울을 다시 살려주다
26장은 사울을 살려주는 24장과 같은 틀을 갖춘 이야기를 소개한다. “지프 사람들이 기브아에 있는 사울에게 가서 말하였다. ‘다윗이 여시몬 맞은쪽 하킬라 언덕에 숨어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1). 지프(Ziph)은 헤브론 남동쪽 약 8km, 마온 북쪽 약 10km 지점에 있는 유다의 성읍이다. 기브아는 사울의 고향이자 당시 이스라엘의 정치적 수도이다. 지프 사람들의 첫번째 밀고 때의 장소는 ’광야 남쪽'이었다(23,19). 그러나 여기서 언급된 여시몬 맞은 쪽 즉 ‘광야 앞’은 문자적으로는 `광야의 얼굴'이란 의미로서, `광야의 남쪽'과는 전혀 다른 `광야의 인접 지역'을 가리킨다. 따라서 아비가일과 결혼한 다윗은(25,42) 카르멜을 떠나서 지프 사람들의 첫 번째 밀고 때에 거주했던 곳보다 약간 북쪽으로 올라간 듯하다.
사울은 다윗이 있는 곳을 밀고받고 그를 추격하러 나서고, 사울과 다윗의 상황이 각각 소개된다. 대치된 상황에서 다윗이 사울보다 언제나 우위를 차지한다. 다윗은 사울의 텐트에 몰래 들어가 사울의 창과 물병이라는 객관적인 증거를 확보하고, 둘이 서로 만나 멀리서 대화를 나눈 다음 헤어진다. 24장과 26장은 다윗의 관대함과 충실성이 강조하는 데에서는 공통점을 가진다 하더라도 여러 가지 세부 묘사에서는 서로 다르다. “다윗은 히타이트 사람 아히멜렉과, 요압의 동기며 츠루야의 아들인 아비사이에게, ‘누가 나와 함께 사울의 진영으로 내려가겠느냐?’ 하고 물었다. ‘제가 장군님을 따라 내려가겠습니다.’ 하고 아비사이가 대답하였다”(6) 이 구절에 따르면 둘의 만남은 24,3 -“사울은 온 이스라엘에서 가려 뽑은 삼천 명을 이끌고, 다윗과 그 부하들을 찾아 ‘들염소 바위’ 쪽으로 갔다” -와는 달리 우연한 장소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다윗의 주도로 이루어진다.
히타이트족은 가나안 일곱 부족 중의 하나였다. 이들은 아브라함 시대 때도 이미 필리스티아 땅에 거주했었으며(창세 15,23), 이스라엘의 이집트 탈출 후 이스라엘에 의하여 정복되었다. 바로 이 같은 히타이트 족으로서 다윗을 따랐던 또 다른 유력한 인물이 바쎄바의 남편 우리아였다. 한편 `아히멜렉'은 `왕의 형제'란 의미를 갖는 가나안식의 이름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름을 소유했던 제사장 `아히멜렉'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21,1). 그런데 헷 사람 `아히멜렉'이 다윗의 휘하에 들어오게 된 것은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섞여 살던 `히타이트 부족'에 대하여 사울이 어떤 압박을 가했기 때문일 것이다.
츠루야는 그녀의 어머니가 다윗의 아버지 아사이에게 시집오기 전 `나하스'라는 남자에게서 낳은 딸이다(2사무 17,25). 따라서 다윗의 이부(異父) 누이이다. 한편 ‘아비사이’(Abishai)는 `아버지가 계신다'란 의미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후에 비록 다윗의 용사 중 최상급인 `세 용사' 그룹에는 끼지 못했지만, 그 다음인 `삼십 용사' 그룹의 두령으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2사무 23,18.19;1역대 11,20.21). 요압은 `주님은 아버지이시다'라는 뜻이다. 이 사람은 다윗의 군대 장관이 되어 명실 공히 다윗의 제 1 무사(武士)로서 많은 공을 세웠다(2사무 5,6 이하).
다윗의 일행이 사울의 일행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곳에 있었음을 보여 준다. 즉 그때 사울은 `길 가'(3절)에 있은 반면 다윗은 `산'(1절)에 있었다. 다윗은 아히멜렉과 아비사이에게 누가 자신과 함께 사울의 진영에 가겠냐고 물었다. 아비사이가 함께 가겠다고 말했다. 이것은 `아히멜렉'과 `아비사이' 중 `아비사이'가 더 용기있는 인물이었음을 말해 준다. 아무튼 본서와 사무엘하의 저자는 `아비사이'에 대해서는 다윗을 도왔던 훌륭한 인물로서 계속 말하지만, 6절에서처럼 다윗의 요청에 묵묵부답(黙黙不答)했던 `아히멜렉'에 대해서는 완전히 침묵한다. 바로 이같은 사실은 아히멜렉이 성경의 무대에서 사라진 것이 그의 위와 같은 침묵과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시사해 준다. 여기서 우리는 `아히멜렉'이 `아비새'보다 먼저 먼저 언급되는 등 더 우위에 있었으나, 그 자신의 지나친 소심성 때문에 그 위치를 빼앗겼다는 사실을 주목해야만 할 것이다.
26장은 24장보다 다윗이 사울에게 덜 공손하다. 24,5-8에 다윗의 부하들이 맡은 역할을 26,8-11에서는 아비사이가 맡는다. 저자는 아비사이를 매우 급한 성격을 가진 이로 묘사한다. 사울의 목숨에 손을 대지 않는 장면은 26,12의 묘사가 더욱 극적이다. “다윗은 사울의 머리맡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나왔다. 주님께서 그들 위에 깊은 잠을 쏟으시어 그들이 모두 잠들었기 때문에, 다윗을 본 사람도 알아채거나 잠을 깬 사람도 없었다”(12).
`창'은 사울의 왕권(王權)을 상징한다. 이같이 사울이 자신의 왕권을 상징하는 `창'을 자신의 머리맡에 꽂아 놓은 것은 왕으로서의 자신의 위엄을 높이며, 또한 왕으로서의 자신이 잠자는 위치를 표시하기 위함이었다. 아비사이는 다윗에게 잠자고 있는 사울을 단 한번에 죽일 수 절호의 기회라고 하면서 명령을 기다렸다. “그러나 다윗이 아비사이를 타일렀다. “그분을 해쳐서는 안 된다. 누가 감히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에게 손을 대고도 벌받지 않을 수 있겠느냐?”(9). 여기서 다윗은 “누가 감히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에게 손을 대고도 벌받지 않을 수 있겠느냐?”라고 하면서 사울을 친히 죽여 복수해서는 안될 이유를 제시한다. 그 첫째 이유이다. 즉 주님께서 택하여 기름 부은 자는 여하한 경우일지라도 그 생명은 전적으로 주 하느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사람이 침해하면, 곧 그것은 주님의 주권을 침해하고 모독한 결과가 된다. 따라서 다윗은 이러한 원칙에 철저히 입각하여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인 사울의 생명을 하느님의 뜻에 맡겼던 것이다.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아니한 두 번째 이유가 있다(24,12). 즉 이 두 번째 이유 역시 첫번재 이유와 마찬가지로 기름 부은 자에 대한 하느님의 전적 주권 사상에 입각한 것이다. 곧 사람을 택하여 왕으로 기름부어 세운 분이 하느님이시듯, 또한 왕을 폐하고 죽이는 일 역시 하느님의 주권적인 영역 하에 속한 것이라는 사상이다. 다윗은 시종 일관 이러한 사상에 입각하여 사울을 대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실제로 사울을 전쟁터에서 필리스티아인의 손에 붙이심으로써(31,3.4), 다윗과 사울 간에 당신의 주권적인 심판을 행사하셨다.
“”사울이 다윗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물었다.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다윗은 ‘제 목소리입니다. 저의 주군이신 임금님!’ 하고 대답하였다“(17). 이때는 캄캄한 밤 또는 동트기 전의 새벽녘이었을 것이므로, 사울은 음성을 통해서만 다윗이 자신과 가까운 곳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사울은 다윗에게 “내 아들 다윗아”라는 반응은, 다윗이 자신을 충분히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았던 사실을 인식한 결과였다(24,16). 아마도 이때 변덕스런 사울은 다윗을 아브네르보다 더 나은 호위병으로(16,21) 생각했을 것이다.사울은 엔게디 동굴에서의 사건(24,2-7)으로 다윗과 화해를 했었다(24,16-22). 바로 이같은 이유 때문에 사울이 자신을 또다시 추격하는 것은 다윗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19절에 나오는 경신례에 대한 관심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저의 주군이신 임금님께서는 이제 이 종의 말을 들어 주십시오. 만일 주님께서 임금님을 부추기시어 저를 치시려는 것이라면, 저는 기꺼이 그분께 바치는 예물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만일 사람들이 그렇게 하였다면, 그들은 주님 앞에서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제가 주님의 상속 재산을 더 이상 받아 누리지 못하도록,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라.’ 하면서, 그들이 오늘 저를 쫓아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19).
“이제 이 종의 말을 들어 주십시오”라는 이같은 표현은 주로 악행을 선행으로 전환할 도 한번의 기회를 줄 때 사용되었다(15,1). 즉 사무엘은 하느님의 명령을 이행치 않았던 사울에게 하느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할 기회를 주면서 이와같은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언급된 다윗의 이 말은 최후 통첩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하느님의 종 다윗의 이 최후 통첩을 무시하고 또다시 다윗을 죽이려 했던 사울에게(27,1-4) 하느님께서 결국 엄중한 심판을 내리셨다는 사실이다(10절; 31,4-6).
“만일 주님께서 임금님을 부추기시어 저를 치시려는 것이라면” 여기서 다윗은, 하느님께서는 만유(萬有)의 근원이 되신다는 사상에 근거하여 하느님을 선(善)을 행하시고 우리의 잘못으로 나쁜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가르친다. 따라서 다윗은,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징계하시기 위하여 사울을 격동시킬 수도 있다고 본 것이다.
다윗은 엔게디 동굴 사건(24장) 직후에도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간신(奸臣)들의 중상 모략 때문이라고 말한바 있었다. 물론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가장 큰 동기는 악령의 영향 하에 있는 사울의 증오심과 적개심 때문이지만, 이와 더불어 사울 주변에는 벤야민 사람들와 같은 중상 모리배들이 있어 그러한 사울의 증오심을 더욱 부축긴 것 같다.
“그러자 사울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내가 잘못했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너라. 네가 오늘 내 목숨을 소중하게 보아 주었으니, 내가 다시는 너에게 해를 끼치지 않겠다. 내가 정말 어리석은 짓을 하여 매우 큰 실수를 저질렀구나”(21). 21절에서 사울은 다윗의 호소(18-20절)에 전적 수긍한다. 그리고 자신의 행위를 반성한다. 즉 다윗을 죽이기 위해 추격한 자신의 행위를 `범죄'로 `어리석은 일'로 `대단히 잘못된 일'로 고백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단순히 다윗을 자신보다 의롭다고 여긴 엔게디 동굴에서의 사건 직후 때(24,17) 보다 훨씬 고무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울의 이 같은 태도 역시 진정한 회개라 볼 수 없다. 그 이유는, 사울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다시 다윗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다(27,1). 실로 참된 회개란 단순한 후회 또는 반성의 차원을 넘어 마음 중심으로부터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진실된 죄의 고백과 더불어 더 이상 과거의 범죄나 실수를 범하지 않는, 새로운 삶의 전인격적 변화요 결단인 것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내 아들 다윗아, 복을 받아라. 너는 하고자 하는 일을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다윗은 자기 갈 길을 가고, 사울도 제자리로 돌아갔다”(25). “너는 하고자 하는 일을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사울의 이 말은 구체적으로는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가리킨다. 물론 이것은 다윗이 왕이 된 후에 훌륭한 업적을 남길 것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다윗은...사울은...제자리로 돌아갔다’ 이 표현은 성경에서 이별의 장면을 묘사할 대 사용되는 전형적 방식이다(24,23). 그러나 특별히 여기서의 이 표현은 사울과 다윗이 아직껏 화해하지 못한 사실을 암시해 준다. 즉 사울과 다윗의 마음은 하나되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은 각기 자기 길을 따라 따로 가야만 했다.
1사무 27,1-12 다윗이 다시 필리스티아로 망명하다
“다윗이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내가 이러다가 언젠가는 사울의 손에 망할 것이다. 그러니 필리스티아인들의 땅으로 가 목숨을 건지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 사울은 나를 이스라엘 영토 안에서만 찾다가 마침내 단념하고 말겠지. 그러면 나는 그 손에서 목숨을 건지게 될 것이다.’”(1). 다윗은 계속 사울이 자신과 자신의 식솔들을 죽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사실 사울은 다윗을 해치지 않겠다는 약속을 굳게 맹세하고서도(24,16-22) 그 약속을 스스로 뒤엎는 등, 다윗으로서는 도저히 사울을 믿을 수 없는 짓을 저질렀었다. 따라서 다시는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했던 지프 진(陳) 사건(26,6-12) 직후의 사울의 약속(26,21.25) 또한 다윗으로서는 믿을 수 없었다. 더구나 사울의 주변에는 사울로 하여금 다윗을 죽이도록 부추기는 인물들이 있었으며(24,9; 26,19),
1-4절에는 다윗이 필리스티아 땅으로 망명하게 된 이유와 함께 이동한 무리의 규모가 나온다. 다윗은 사울이 언젠가는 자기를 죽일 것으로 예상했다. 다윗은 사울 임금이 더 이상 자신을 추적할 수 없도록 두 아내(25,42-43)와 600명의 군사와 그 가족들을 데리고 필리스티아 지역 갓 임금 아키스의 군대에 합류했다. 그곳은 사울의 통치권 밖이어서 사울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무엘기 상권 21장 11-16절에서도 다윗은 갓 임금에게 망명하려고 했다가 신변에 위험을 느끼자 당시에는 미친 척했는데, 여기서는 그 사실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이는 다윗이 필리스티아로 탈출한 사실을 덜 심각하게 보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다윗이 아키스에게 청하였다. ‘제가 임금님 눈에 드신다면, 지방 성읍들 가운데 한 곳을 저에게 주시어 거기에서 살게 해 주십시오. 제가 어찌 왕도에서 임금님과 함께 살 수 있겠습니까?” (5). 당시 다윗의 군사가 약 육백 명이었다면(2절). 그의 가족까지의 숫자를 모두 합칠 경우 거의 삼천 명은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많은 숫자는 `왕의 수도' 갓의 시민들과 갈등을 일으킬 소지가 항상 있었다. 바로 이 같은 점을 내세워서 다윗은 왕의 수도 `갓'을 떠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윗이 갓을 떠나려고 했던 표면적 이유에 불과하였다. 즉 다윗이 지방 성읍의 독립된 거주지를 요구한 진정한 이유는 우상 숭배가 성행하던 갓에서 가주할 경우 자신의 백성들이 이교적(異敎的) 혼합주의에 빠져들 우려가 충분히 있었고(5,8,9; 26,19), 다윗이 아키스의 궁전에 자주 출입할 경우 아키스의 신하들에게 시기의 대상이 될 우려가 또한 있었다(21,11; 29,4.5). 그리고 다윗이 가드를 떠날 경우 아키스의 정치적 영향권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이점 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5-7절에서 다윗과 아키스는 항상 최상의 예의와 격식을 갖추어 대화한다. 다윗은 자신과 친위대가 필리스티아 수도에 있음으로써 부담이 되지 않도록 외딴 성읍을 봉토로 요구한다. 이는 필리스타인의 직접적인 감독을 받지 않고 좀 더 자유로이 활동하고자 본부로 삼을 자기 도시가 필요했던 것이다. 아키스는 다윗에게 시메온(여호 19,5)과 유다(여호 15,31)애 할당된 성읍 치클락을 주었다. 아키스는 다윗이 남부 전선에 여러 골치 아픈 민족들을 공격해 주리라 믿었기 때문에 다윗에게 치클락을 준 것이 자신에게도 이득이라고 생각했다.
“아키스는 그날로 치클락을 다윗에게 주었다. 그리하여 치클락이 오늘날까지 유다 임금들의 차지가 된 것이다”(6). 6절에는 왜 치클락이 몇 년 후 유다 임금들의 차지가 되었는지에 대한 원인론적 설명이 덧붙여진다. 유다 임금들이라는 표현은 아마도 왕국이 분열된 후의 상태를 나타낸다고 하겠다. 다윗은 필리스티아 사람들과 1년 4개월간 함께 살았다.
8-12절에서 치클락을 본부로 삼은 다윗은 남쪽에 있는 여러 민족들, 즉 그수르족과 게레즈족과 아말렉족을 주기적으로 습격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오랜 적들이었다. 다윗은 공격당한 지역의 사람들이 아키스에게 밀고할 수 없도록 한 사람도 남겨 두지 않았는데, 그들의 옷이나 가축 등의 전리품은 취하여 다양하게 이용하였다. 다윗은 동족인 유다인들은 공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획득한 전리품을 제공하여 그들의 환심을 사기도 했다(30,26-31). 다윗은 전리품을 아키스에게 가져오기도 했는데, 그가 아키스에게 한 보고는 모호하다. 다윗의 모호한 보고를 받은 아카스는 다윗이 자신의 동족을 침략한다고 생각했다. 미래의 유다와 이스라엘의 임금 다윗은 동족에게는 반역죄를 저지르지 않으면서도 자기 민족의 적 아키스의 환심을 샀다. 아키스는 다윗을 영원한 종 혹은 동맹자로 간주한다. “다윗은 ‘저들이 우리를 두고 ‘다윗이 이러저러한 일을 하였다.’고 말하게 해서는 안 되겠다.‘ 하며, 남자든 여자든 모두 죽이고 아무도 갓으로 데려오지 않았다. 다윗은 필리스티아인들의 지방에 머물러 있는 동안 내내 이렇게 하였다”(11). 다윗은 자신이 어느 곳에 가서 무슨 일을 했는지 드러나지 않도록 생존 포로들을 남겨 두지 않았다. 그래서 아키스는 다윗이 유다를 계속 공격한 줄로 믿었다(12). 그러나 실제로 다윗은 유다인들을 약탈한 유목민들을 공격하였다.
1사무 28,1-25 사울이 점쟁이를 찾아가다
“그 무렵 필리스티아인들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전투에 필요한 부대를 소집하였다. 아키스가 다윗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부하들을 거느리고 나와 함께 출전하게 될 터이니 그리 아시오”(1). 이 대목에서 필리스티아인들이 군대를 소집하여 북쪽에 있는 이즈르엘 평야의 수넴으로 진군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키스의 다윗에게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참여하라고 한다. 다윗이 자신의 동족들을 대항하여 필리스티아인 편에서 싸우라는 명령을 받는 것은 그동안 다윗이 펴 온 전술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사울은 그의 군대를 모아 갈보아 계곡에 진을 쳤다(4). “사울은 필리스티아인들의 진영을 보고 두려워서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다. 그래서 사울은 주님께 여쭈어 보았으나, 주님께서는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예언자를 통해서도 대답해 주시지 않았다”(5-6).
'꿈'은 사람이 자의식과 감정을 가라앉히고 잠을 잘때, 외부의 변화없이 인간 내면(內面)의 사고 작용 및 감각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시는 구약 시대의 계시(啓示) 방편이다(창세 20,6; 민수 12,6). 그런데 여기에 언급된 꿈, 우림, 예언자 등 3가지 계시 방편은 저급한 단계에서 보다 고급한 단계의 순서인 것 같은데, 꿈은 그 전달 방법이 간접적이고 일방적이라는 점에서, 가장 비점진된 최하급의 계시 방편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여기서 사울은 자신이 직접 꿈을 통하여 하느님의 계시를 받으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분명히 자신의 주변 사람에게라도 계시적(啓示的)성격의 현몽(現夢)이 내려지기를 간절히 소원하였을 것이다.
여기의 '우림'은 우림과 툼밈의 약칭이다(탈출 28,30). 그런데 사울이 이 우림과 툼밈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묻지 못한 것은 철저히 사울의 자업 자득(自業自得)이었다. 즉 사울은 우매한 판단으로 놉(Nob)의 사제들을 몰살시킴으로써, 당시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에브야타르'로 하여금 `우림과 툼밈'이 들어있는 '에폿'을 갖고 다윗에게로 피신하도록 한 것이다(22,18-20).
하느님의 대예언자 '사무엘'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3절; 25,1). 또한 그밖의 예언자들도 이미 하느님께서 버린 사울의 왕국을 떠나 망명객 다윗에게로 도망을 쳤다(22,5). 바로 이같은 사실로 인하여 사울은 예언자를 통하여서도 하느님의 뜻을 얻을 수 없었다. 아무튼 꿈과 우림과 예언자는 모든 구약 시대에 있어서 하느님의 뜻을 받는 방편이었다(15,10. 11; 23,9-12). 하지만 사울은 그 어느 것으로도 하느님의 응답을 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그가 이미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께 버림을 받았기 때문이다(15,1-23).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하느님께서 제공하시는 기회가 지나가지 전에 하느님을 찾아야한다는 교훈을 절실히 암시해 준다(이사 55,6).
“그리하여 사울은 신하들에게 명령하였다. ‘혼백을 불러 올리는 여자를 하나 찾아내어라. 내가 가서 그 여자에게 물어봐야겠다.’ 신하들이 사울에게 ‘엔 도르에 혼백을 불러 올리는 여자가 하나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7). '엔 도르'란 '거주의 샘'이란 뜻이다. 그 위치는 다볼산 남쪽 약 6.4km, 소(小) 헬몬 산 북쪽 경사 지대이다. 그리고 '수넴'으로부터는 북동쪽으로 약 6~7km 정도의 지점으로 추정된다. 오늘날에도 소 헬몬산 경사 지대에 '엔 도르'이란 마을이 있는데(여호 17,11), 무당들이 거처하기에 좋은 많은 동굴들이 있다고 한다.
혼백을 불러오는 여인을 찾는 사울의 명령은 하느님께서 금하시고(레위 19,31), 또한 사울 자신이 세워놓은 규범(3절)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아무튼 이것은 하느님께로부터의 계시가 완전히 단절된 상황에서, 비신앙적 인물인 사울이 필연적으로 택할 수 밖에 없는 방법이었다. 한편 여기서 혼백을 불러오는 여인이란 죽은 자의 혼령을 통해 미래의 일을 알아보는 자를 가리킨다.
하느님의 침묵에 황망해진 사울은 엔 도르 근처에 사는 여성을 찾아간다. 사울은 변장하여 여인을 찾아 간다. 옷은 곧 그 사람의 신분을 상징한다는 점(18,4)에서, 사울은 왕의 표시가 되는 일체의 복장과 장식물을 제거하고 완전한 평민의 복장을 취했던 것같다. 즉 아무도 자신을 이스라엘의 왕 사울로 알아보지 못하도록 변장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 사울이 위와 같이 철저히 변장을 한 까닭은 여인이 살던 엔 도르의 지리적 위치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사울은, '엔 도르'이 필리스티아의 진영과 인접한 곳이었으므로, 혹 필리스티아 사람들의 눈에 뜨일까 두려워한 것이다. 즉 만일 변장을 하지 않는다면, 필리스티아 사람들의 눈에 뜨일 경우 그 의복에 의하여 그가 이스라엘 왕 사울임이 밝혀지고, 이에 따라 그들의 맹렬한 공격 목표가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사울은 변장한 것과 동일한 이유 때문에 일부러 밤 시간을 택해 엔 도르의 혼백을 불러 올리는 여인을 찾아갔다. 이렇듯 변장한 채 엔 도르의 여인을 찾아가는 사울의 모습에서 그의 철저한 타락상을 볼 수 있다. 한편 미신적(迷信的)인 발상에서 무당이나 점장이를 찾아가는 것은 하느님께서 언급하신 바 있는 영적으로 하느님을 배신하는 행위이다(레위 19,31; 신명 18,9-14).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들은 급박한 상황이 닥칠 때일수록 더욱 하느님을 굳게 의지하고 주님 말씀에 근거한 기도에 힘쓰는 등 끝까지 신앙적인 자세를 지켜야만 할 것이다.
혼백을 불러오는 여인은 사울이 죽은 사무엘에게 자문을 구할 수 있도록 사무엘의 혼백을 불어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물었다. ‘왜 나를 불러 올려 귀찮게 하느냐?’ 사울이 대답하였다. ‘저에게 매우 어려운 일이 생겼습니다. 필리스티아인들이 저를 치고 있는데, 하느님께서는 저를 떠나셨는지 예언자들을 통해서도, 꿈으로도 저에게 더 이상 대답해 주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 주십사고 어르신을 부른 것입니다”(15).
사무엘은 전쟁의 패배와 사울의 죽음, 그리고 다윗을 등극을 예고한다. “주님께서는 나를 통하여 말씀하신 그대로 너에게 하시어, 이미 이 나라를 네 손에서 빼앗아 네 이웃 다윗에게 주셨다”(17).
1사무 29,1-11 다윗이 필리스티아인들에게 배척당하다
“필리스티아인들은 모든 진영을 아펙에 집결시키고, 이스라엘은 이즈르엘에 있는 샘가에 진을 쳤다. 필리스티아 통치자들은 수백 명씩, 또는 수천 명씩 거느리고 나아갔고, 다윗과 그 부하들은 아키스와 함께 뒤에서 나아갔다”(1-2).
29장에서 다윗은 사울을 상대로 하는 필리스티아인의 전투에 참여하기 직전까지 이르렀으나 필리스티아 지휘관들이 다윗을 믿을 수 없는 인물이라 배척하여 그 싸움에 직접 참여하지 않게 된다. 필리스티아 사람들의 1차 군사 집결지는 '아펙'(Aphek)이었다. 필리스티아인은 특별히 다섯 제후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부족 연합 성격의 정치 체제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5,8), 이처럼 집결지를 정해 그곳으로 각 부족의 군사들이 총집결했던 것이다. 한편 '아펙'은 '요새'란 뜻으로, 이와 동일한 지명이 필리스티아 여러 곳에 있다.
이스라엘은 이즈르엘에 있는 샘가에 진을 쳤다. '이즈르엘'은 '하느님께서 씨를 뿌림'이란 뜻인데, 헬라식 이름으로는 '에스드라엘론'(Esdraelon)이다. 이곳은 길보아 산악 지대의 북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28,4), 키손 강의 영향으로 토지는 비옥하고, 길게 평원 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한편 여기의 '샘'(아인)은 '이즈르엘' 동남쪽 약 2.8km 지점에 있고, 길보아 산지 북쪽에 수원(水源)을 갖고 있는 우물로서, 오늘날의 '아인 잘루드'('골리앗의 샘'이란 뜻)와 동일 지역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런데 이 우물은 화강암 절벽에서 흘러 내려온 물에 의하여 형성된 큰 웅덩이의 모양으로 되어있다고 한다.
다윗을 두둔하는 갓 왕 아키스에 대한 필리스티아 제후들의 반발이 있었다. 즉 필리스티아의 다른 네 제후들은, 아키스가 자신들의 말보다 다윗을 더 신뢰하는 데 대하여 이같이 날카로운 반응을 보인 것이다. 한편 여기의 '제후'란 '군주', '우두머리', '지휘관' 등의 의미로서, 왕보다는 낮은 계급의 소유자를 지칭할 때 사용된다(창세 12,15;탈출 1,11). 아무튼 4절은 필리스티아 제후 회의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당시 필리스티아에는 5인의 제후가 있었으며, 그 제후들 중에서 한 명이 필리스티아 연방 체제(聯邦體制)를 대표하는 왕이 되었다(판관 3,3). 하지만 이 왕은 절대적 왕권을 갖지 못하고 제후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따라야 했으며, 제후들의 제의를 무시하고 자의(自意)로 통치권을 행사하지는 못했다(6,1-16). 여기서 아키스는 가드의 제후면서 위와 같은 제한적 왕권을 지닌 필리스티아의 왕이었다. 따라서 필리스티아 제후들이 다윗의 참전 문제에 거세게 항의하면서 아키스 왕의 뜻을 꺾고 다윗을 되돌려 보내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필리스티아의 독특한 통치 체제에 기인한다.
필리스티아 제후 아키스와 함께 있는 다윗은 다른 제후들에게 의심을 받고 전투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 당했다. “아키스가 다윗에게 대답하였다. ‘내 눈에는 그대가 하느님의 천사처럼 좋은 사람이오. 그 사실을 나는 알고 있소. 그러나 필리스티아 제후들이 ‘그가 우리와 함께 싸우러 나가면 안 되오.’ 하고 말하였소”(9). 다윗이 길보아 전투에 참전할 수 없었던 궁극적인 이유는 그를 인도하시는 하느님의 보호하심의 역사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다윗과 부하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필리스티아인들의 땅으로 돌아가고, 필리스티아인들은 이즈르엘로 올라갔다”(11). 다윗이 이처럼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과 싸우지 않고 치클락으로 되돌아가게 된 것은, 필리스티아 제후들로 하여금 다윗의 참전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케 하신 하느님의 섭리 때문이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역사하심으로써, 다윗이 장차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는 데 있어 장애가 없도록 하셨으며, 또한 때마침 아말렉의 침공에 의하여 납치되었던 자신의 가족등 을 구출하도록 하신 것이다.
다윗은 진퇴 양난의 위기에서 결국 동족 이스라엘에게도 전혀 죄를 짓지 않고, 또한 아키스 왕에게도 전혀 의심받지 않은 상태로 자신의 거처인 치클락으로 떠났다. 한편, 11절은 기원전 1010년에 발발한 길보아 전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이 전투를 계획했던 필리스티아 왕 아키스는 그당시 다윗을 상당히 신임하고 있었던 터라 다윗을 그 전투에 참가시키려 했던 것이다. 따라서 다윗은 어떠한 행동을 취하든 결과는 반역자가 될 수 밖에 없는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비록 당신의 뜻을 저버리고 이방인의 신하가 되어 있던 다윗이었지만, 그를 들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사용하시려는 당신의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표시로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던 다윗에게 그 전투에 참전할 수 없도록 섭리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같은 사실들을 통해 인간의 실수와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당신의 뜻을 성취해 가신다는 것과 당신이 택하신 자를 결코(그가 범죄의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버리지 않으실 뿐 아니라 피할 길을 준비해 주신다는 진리를 배울 수 있다.
1사무 30,1-31 다윗이 아말렉을 치다
30장에는 다윗이 약탈 유목인 아말렉족과 싸운 이야기가 실려 있다. “다윗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사흘 만에 치클락에 이르렀는데, 그때는 아말렉족이 네겝과 치클락을 습격한 뒤였다. 아말렉족은 치클락을 쳐 불을 지르고는, 거기에 있던 여자들을 비롯하여 어린이와 늙은이 할 것 없이 모두 사로잡아, 하나도 죽이지 않고 제 길로 끌고 갔다”(1-2). 다윗과 그의 일행이 필리스티아 제후들의 거부로 인하여(29,3-5) 이스라엘과의 전투에 참여치 않고, 필리스티아 군대를 떠나 다시 자신들의 본거지인 '치클락'에 돌아갔다. 여기서 '사흘 날'이란 다윗 일행이 필리스티아 군대로부터 떠난 3일을 가리킨다. 이 기간 동안 다윗과 그의 군사들은 '아펙'으로부터 '치클락'까지 약75km를 행군 했음이 분명하다.
아펙에서 돌아온 다윗 일행은 아말렉의 침공을 알게 되었다. 아말렉족들의 습격은 이전에 다윗이 자신들에게 행한 침략 행위(27,8.9)에 대한 보복의 성격을 지녔다. 또한 생존을 위한 약탈물 확보 등이 그 목적이었다. 그런데 이렇듯 아말렉족이 치클락을 침범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보다도 그곳을 지키던 다윗이 북쪽 '아펙'으로 이동함으로써, 그곳이 무방비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다윗 일행의 가족들인(27,3) 이들은 여자들인 관계로 다윗과 함께 전투에 참여치 않고 치클락에 계속 남아 있었다. 한편, 3절은 이 여자들 외에도 자녀들까지 아말렉 사람에게 모두 잡혀갔음을 말하고 있다.
아말렉 사람들이 여자나 아이들을 죽이지 않고 사로잡아 간 까닭은 그들이 결코 인정이 많아서가 아니었다(15,2). 다만 무장하지 않은 연약한 자들이었으므로 그들의 공격에 대항치 않았으며 이집트에 노예로 팔 경우(창세 37,25-28)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참혹한 현장을 본 다윗과 600명의 다윗 군사들은 목놓아 울었다. 다윗의 이같은 비탄은 비단 자신의 아내들을 빼앗겼다는 사실 때문만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즉 다윗은 치클락을 무방비 상태로 비워 놓고 경솔히 갓 왕 아키스에게로 나아간 자신의 실책으로 인하여, 자신의 모든 부하들의 아내와 자녀가 포로로 잡혀간 그 엄청난 사실로 인하여 큰 슬픔에 잠긴 것이다. “다윗의 두 아내 이즈르엘 여자 아히노암과, 카르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도 사로잡혀 갔다”(5).
백성들은 다윗에게 원망을 하게 되어 돌을 던져 죽이자고 수근 거렸다. 이처럼 말한 이유는 재난의 책임이 전적으로 다윗에게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다윗이 약탈을 생업으로 삼는 아말렉 사람들의 신경을 건드려 놨으며(27,8.9), 또한 다윗이 필리스티아의 갓 왕 아키스의 말을 좇아 치클락을 비워 둔 채 군사들을 모두 북쪽으로 이동시키는 등, 백성들의 보호자 혹은 지도자로서의 사명을 제대로 수행치 못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주 자기의 하느님 덕분에 용기를 얻게 되었다. 즉 이것은 주님을 의뢰하는 확고한 신념에 근거하여 적극적인 방향으로 마음을 새로이 먹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우리는 난관에 대처하는 다윗의 신앙을 엿볼 수 있다. 즉 이때 다윗은 휘하 군사들을 회유하는 설득이나 구구한 변명 대신 하느님께 그 어려운 문제를 맡기고 그분의 도우심을 전적 바라는 신앙인의 모습을 견지했던 것이다.
“다윗은 아히멜렉의 아들 에브야타르 사제에게, ‘에폿을 나에게 가져오시오.’ 하였다. 에브야타르가 에폿을 다윗에게 가져오자, 다윗이 주님께 여쭈어 보았다. ‘이 강도떼를 쫓아가면 따라잡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셨다. ‘쫓아가거라. 반드시 따라잡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되찾을 수 있다”(7-8).
에브야타르는 자신의 아버지 '아히멜렉'을 포함한 놉(Nob) 제사장들이 사울에 의하여 집단 학살됐을 때(22,18-20), 단신으로 다윗에게 피신해 온 제사장이다. 그런데 그는 당시 다윗에게 도피할 때, 하느님의 뜻을 묻는 계시 수단인 '우림과 툼밈'이 부착되어 있는 에폿을 갖고 갔었다(23,6). 이는 당시 다윗의 신앙적 행동의 출발이 어디서부터인지를 잘 보여 준다. 즉 다윗의 신앙적 행동의 출발점은 하느님과의 대화와 친교에 있었다. 즉 그는 사제의 에폿을 통하여 하느님과 신령한 교신(交信)을 했으며, 결국 이것이 올바른 행동과 승리의 관건이 되었다.
다윗이 하느님께 질문한 것은 구체적으로 포로된 가족들을 구출할 수 있을 것인지의 여부였을 것이다. 우림과 툼밈'(탈출 28,30)은 항상 어떤 질문에 대한 '가부'(可否)의 응답만을 했다. 따라서 '우림과 툼밈'이라는 계시 수단을 통해서 하느님의 음성이 직접 들려지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사제의 입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이 전달될 뿐이었다. 한편 여기서 우리는, 사울에게는 하느님의 모든 계시가 중단되었으나(28,6), 다윗에게는 이처럼 하느님의 뜻이 계속적으로 계시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같은 대조를 통하여 본서 저자는, 이제 사울의 왕권은 완전히 쇠퇴하고 반면 다윗의 왕권은 일취 월장(日就月將) 흥왕하게 될 것임을 강력히 예시하고 있는 것이다.
다윗은 자신을 돌로 치려 하는 큰 소요가 바로 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위기를 일순간에 반전시켜 그들 모두로 하여금 자신을 좇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백성들 모두가 다윗을 좇은 것은 '우림과 툼밈'을 통해 전달된 하느님의 긍정적인 답변(8절)으로 인하여, 아내와 자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윗과 그의 휘하 군사들은 '아펙'으로부터 '치클락'까지 약 삼 일 길을 이미 행군하였기 때문에 매우 피곤한 상태였으며(1절), 거기다가 쉬지도 못한 채로 온 힘을 다하여서 아말렉족을 밤낮 추적한 관계로 몹시 지쳐 있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힘들어하는 200명을 브소르 개울에서 쉬게 하였던 것이다. 물론 추격의 시급성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지친 자들에게 무리한 강행군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이는 신앙에 기초를 둔 다윗의 인도적 조처였다. 더욱이 여기서 다윗은 하느님께서 남은 400명과 함께 하신다면 600명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다윗의 신념은 하느님의 구원이 사람의 숫자에 있지 않음(14,6)을 입증하듯 다윗에게 큰 승리를 안겨다 주었다(16-20절).
다윗 일행은 아말렉족을 좇아 가가다 이집트 사람을 만났다. 이 사람은 아말렉 사람들이 이집트의 어느 변방 지역을 노략하면서 노예로 붙들어 온 자였을 것이다. 그의 도움으로 아멕렉의 거처를 찾게 된다. 이같은 다윗의 요구는 아말렉 족속이 일정한 거처를 갖지 않는 유랑(流浪) 민족이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물론 그들도 목적상 일정기간 동안 잠정적인 거처를 가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도시를 형성하고 살지 않는 유랑 민족으로서, 언제든지 이동할 가능성이 있는 부족이었기 때문에, 어떤 정보 없이 그들의 발자취를 추정하기란 여간 힘들지 않다. 따라서 이집트 소년의 정보는 다윗에게 매우 필요했던 것이다. 한편 하느님의 세심한 섭리가 여기에서도 잘 나타난다. 만일 이 부족이 다른 부족처럼 도시를 형성해 살아갔다면, 다윗은 안내자 없이도 그들을 공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윗이 그에게 ‘네가 나를 강도떼에게 데려다 줄 수 있겠느냐?’ 하고 묻자, 그가 대답하였다. ‘저를 죽이지 않으시고 제 주인의 손에 넘기지도 않으시겠다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저에게 맹세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나리를 그 강도떼에게 모셔다 드리겠습니다”(15).
이집트 소년의 이 말은, 적군의 패잔병을 안내자로 이용한 후 그 효용 가치가 없으면 후환을 없애기 위해 미련없이 죽여버렸던 고대의 전쟁 풍습에 기인한다. 즉 그 이집트 소년은, 다윗도 자신을 안내자로 이용한 후 목적이 달성되면 자신을 죽일 것으로 염려한 것이다.
비록 이집트 소년은 병들어 버림당했지만 삼일 전까지만 해도 아말렉 족속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진행 방향에 대해 알고 있었다. 더욱이 다윗 일행은 맹추격을 한 반면, 아말렉족에게는 여자, 어린이, 가축 등 많은 약탈물이 딸려 있었기 때문에 진행 속도가 느릴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다윗 일행은 이집트 소년의 안내로 쉽사리 아말렉족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한편 이집트 소년의 이같은 인도 장면은, 이스라엘의 미래 왕 다윗에게는 장차 국내외적으로 많은 협력자들이 있게 될 것임을 시사한다.
약탈을 생업으로 삼는 유랑 민족에게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성공적인 약탈 행위 이후 방탕하게 베푸는 주연(酒宴)을 가리킨다. 이때에는 경계심을 푼 상태에서 모두 정신없이 먹고 마시며 취하기 때문에, 기습 공격은 그대로 주효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는 소수의 병력을 지닌 다윗의 공격 작전이 주효할 수 있었던 주요한 요인이었음이 분명하다(판관 8,11). “다윗은 새벽부터 이튿날 저녁까지 그들을 쳐부수었는데, 그들 가운데 낙타를 타고 도망친 젊은이 사백 명을 빼고는 아무도 목숨을 구하지 못하였다”(17).
전리품을 획득해 돌아온 다윗 일행은 너무 지쳐서 자기를 따르지 못했던 브소르 개울에 남아 있던 200명을 다시 만났다. 전투에 갔던 사람들은 서로 수군거리며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전리품을 줄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다윗이 말렸다. “형제들, 주님께서 우리에게 넘겨주신 것을 가지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되오. 그분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고 우리를 치러 온 강도떼를 우리 손에 넘겨주셨는데, 이 일을 두고 누가 그대들의 말을 들을 것 같소? 싸우러 나갔던 사람의 몫이나 뒤에 남아 물건을 지킨 사람의 몫이나 다 똑같아야 하오. 똑같이 나눠 가져야 하오”(23-24).
전리품 분배의 규정은 이미 광야 시절 모세 때로부터 있었다. 즉 당시 모세는 미디안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후, 주님의 명을 좇아 노획한 전리품 중 절반은 싸움에 참전한 '군인들'에게, 그리고 절반은 진(陳)에 머물러 있던 '백성들'에게 분배하도록 하는 규정을 세운 바 있었다(민수 31,27). 그런데 23절에서와 같은 다윗의 규정 제정은 그러한 광야 생활의 규정에 근거하여, 그 규정의 폭을 군인들 중 전투자와 비전투자 사이의 구별을 없애는 등, 확대 제정한 것이다. 한편 이같은 규정 제정은 앞으로도 이같은 경우가 매번 발생할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에, 구속력을 지닌 구체적인 법규의 필요성을 느낀 결과였다.
다윗은 그들을 추격하여 그들이 가진 것 전부를 빼앗아 와서는 남부 여러 고을의 원로들에게 선물한다. 그 고을들은 다윗의 부하들을 맞이하여 먹을 것과 주거지를 제공해 준 곳들이다. 다윗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보여 준 친절에 고마움을 표시함으로써 유다에게 가장 인기 잇는 인물이 되어 가고, 이로써 왕조로 가는 길을 준비한다(참조: 2사무 2,4; 5,3). 특히 다윗의 선물을 받은 성읍들 중 하나인 헤브론은 다윗이 유다의 임금으로 기름부음을 받고(2사무 2,1-4), 전체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는(2사무 5,3)곳이다.
그러는 사이에 필리스티아 군대는 사울의 군대와 전투를 벌인다. 사울은 패전하고 부상을 당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고 그의 세 아들도 전사한다(1사무 31장). 한 사람이 다윗에게 와서 이런 소식을 전하면서(사울의 요청에 따라) 그를 죽였노라고 주장하자 다윗은 격렬한 반응을 보이면서도 분별을 잃지 않고 행동한다(2사무 1,1-16 참조).
1사무 31,1-13 사울의 죽음
사울이 다윗을 배척하기로 한 결정은 그 자신을 패배로 이끈 커다란 실수였다. 다윗을 대적하고 백성들과의 관계마저 소원하게 된 것은 그의 성격상 결함 때문이었다. 사울은 몇 가지 경우에서 빈약한 판단력을 보여 준다. 그는 질투 때문에 정치적 감각을 상실하고 다윗과 가까이 지내 온 사제들을 학살한다(1사무 22,6-23). 그는 자기편인 다윗을 쫓느라고 적인 필리스티아인들과 싸우는 일을 소홀히 한다.
사울은 특별히 사무엘에게 인정받은 진정한 하느님의 사람이 되고자 했으나 그에 못지않게 미신에서 벗어나지 못한 원시적인 믿음을 지닌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입타처럼 무분별하고 경솔한 서약을 하고(판관 11,27-40)는 전쟁에서 패하자 자기 아들 요나탄의 생명을 대가로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그 서약을 맹목적으로 지키기로 작정한다. 그는 전쟁 중이었음에도 자기 부하들이 단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서약을 했던 것이다(1사무 14,24-46 참조).
“필리스티아인들이 이스라엘에 싸움을 걸어왔다. 이스라엘 군사들은 필리스티아인들 앞에서 도망치다가, 길보아 산에서 살해되어 쓰러졌다”(1).
사울의 삶은 길보아 산에서 피할 수 없는 종말을 맞이한다. 사울의 죽음과 매장으로 사무엘기 상권이 끝나는데, 사울의 용맹스러운 죽음과 야베스 길앗 사람들의 충성 등으로 사울의 최후가 영웅적으로 묘사된다.
역대기 상권 10장 13-14절에 나타난 사울에 대한 평가와는 대조적이다. 사무엘기 하권 1장에서 사울의 죽음이 다시 언급되는데, 한 아말렉 사람이 부상당한 사울 임금의 청에 따라 안락사를 시켰다고 한다. 문맥상으로 볼 때, 이 아말렉 사람이 거짓을 말한 것 같다. 필리스티아인의 손에 죽기를 거부한 사울 임금은 아말렉 사람의 손에 죽고 싶지 않았을 것도 거의 확실하다. 이 기사는 권력 상승 전승(1사무 16,14-2사무 5장)의 주제에 따라 사무엘기 상권 31장을 해석한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신명기계 역사가는 사무엘기 상권 31장에는 편집을 가하지 않았다.
1절에서 사울은 군사적 방어망을 잃고, 2절에서 아들들을 잃어 완전히 홀로 남게 된다. 사울의 다른 아들 이스 보셋은 이 전투에서 살아남아 잠시동안 사울의 계승자가 되었다(2사무 2-4장). 3절에서 적의 궁수들에게 큰 부상을 입은 사을에게 마지막 동료는 자신의 무기병이었다. 다윗도 한때는 사울의 무기병이었다(1사무 16,21).
“사울이 자기 무기병에게 명령하였다. ‘칼을 뽑아 나를 찔러라. 그러지 않으면 할례 받지 않은 저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희롱할 것이다.’ 그러나 무기병은 너무 두려워서 찌르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사울은 자기 칼을 세우고 그 위에 엎어졌다”(4). 4절에서 사울 임금은 자신의 절망적 상황을 직시하고 필리스티아인이 자신을 능욕하여 죽임으로써 맛보게 될 승리감을 주고 싶지 않아서 무기병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명령한다. 무기병이 감히 명령을 시행하지 못하자 사울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사울의 자살에 대해서는 어떠한 윤리적 평가도 내려지지 않는다.
5절에서 사울의 무기병은 사울의 행동에 감동을 받았거나 아니면 공포에 질려 사울의 뒤를 따랐다. 사울의 무기병은 나약했지만 마지막까지 충성을 다했다는 점에서 영웅적인 분위기를 드러낸다.
7절에서는 이 전쟁의 결과가 나타난다. 필리스티아인 진영 북쪽의 이즈르엘 계곡 건너편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쳤고, 필리스티아인들이 거기에 와서 살았다.
8-9절에는 이튿날 필리스티아인들이 살해된 이들의 옷을 벗기다 사울과 세 아들들의 시신을 발견하고 사울의 머리를 자른다. 10절에서 사울의 무기들은 필리스티아인의 성소(아스타롯 신전)에 보관되고, 시체는 벳 산 성벽에 매달린다. 이렇게 함으로써 필리스티아인들은 그들의 신들과 함께 사울 통치의 종말을 경축했다.
11-13절에서 사울이 구해 준 바 있는 야베스 길앗 주민들이 사울의 호의를 갚는다. 야베스 길앗 사람들은 필리스티아인들이 자신들의 임금에게 저지른 일을 전해 듣고 그곳 용사들이 모두 나서서 밤새도록 행진하여 사울과 아들들의 주검을 벳 산 성벽에서 내려다가 정중하게 장례를 치러 주었다. 그런데 사울의 시신을 불태웠다는 이야기는 다소 의문시되는 구절이다. 이스라엘에서는 화장이 허용되지 않았고, 화형은 중한 범죄자에게만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시체들이 이미 부패한 상태였기에 태워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13절에서 야베스 사람들은 사울과 그 아들들을 에셀 나무 밑에 묻고 이레동안 단식했다. 단식은 흔히 애도의 기간에 행한다. 다윗도 사울과 요나탄을 위해 단식한다(2사무 1,11-12).
길보아 산에서의 사울은 편집증 환자도 아니었고, 다윗을 잡으러 쫓아다니지도 않았다. 오히려 사울은 임금으로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려고 애쓰던 중에 죽었다. 신명기계 역사가는 끊임없이 다윗의 주장을 지지하고 일관되게 이스라엘의 첫 번째 임금 사울을 불신하지만 사울의 죽음을 고소하게 여기지는 않는다.
사울은 수많은 전쟁에서 커다란 승리를 거두지만 끝내 실패하도록 운명지어진 듯한 비운의 영웅이다. 그는 결함 있는 성격의 희생물임과 동시에 자기 시대의 희생물이다. 당시는 단순한 생존뿐 아니라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존립을 위해서 몸부림치던 시기였다. 사무엘과 같은 몇몇 사람들은 이 오래된 이상이 변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변치 않고 고수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밖의 또 다른 사람들은 사울이 옛 이상과 현실의 변화 사이에 다리를 놓아 조화를 이룬 적절한 모형을 발전시켜 주기를 바랐다. 사울은 어떤 면에서 그러한 노력들을 했지만, 시대는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변혁과 위기의 시대가 필요로 하는 것은 제3의 현실, 그러니까 옛것의 복제물도 아니고 이미 이루어져 있는 새것의 모방도 아니며, 옛것과 새것을 뛰어넘으면서도 여전히 양자와 순수하게 맥이 닿아 있는 제3의 현실을 창조할 탁월한 재능을 지닌 영웅이었다. 사무엘 체제는 시대의 요구를 채워 줄 수가 없었고, 사울에게는 체제를 전환시킬 재능은 있었으나, 그것을 완성할 힘은 없었다. 판관시대 이후 400여년에 걸친 새로운 국가의 형태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여했던 제3의 것, 예상 밖의 놀라운 새 모델은 다윗을 통해 완성된다.
* 창세기부터 사무엘 상권으로 제1기 성경통독 공부를 마치고 2월8일부터 다시 제2기 성경공부 통독 공부를 합니다. 자료가 준비되고 공부가 마치는 주간마다 성경자료 공부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