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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물다, 들다, 품기다
-신윤서 시인의 신작 시들에 부쳐
안서현(문학평론가)
신윤서 시인의 시들에는 공간적 이미지들이 유달리 자주 어른거린다. 이번 신작시들을 읽어보아도 역시 ‘행성’이나 ‘집’이나 ‘서랍’ 등의 시어들이 의미론적 중심에 놓여 있다는 사실에 쉽게 눈에 간다. 그리고 그곳들에 시적 주체나 대상이 ‘머물고’, ‘들고’, ‘품기고’ 있음을 우리는 본다. 처소(處所)의 문제를 다룬 시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 속에 숨겨진 의미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일례로 ‘머물다’라는 말은 ‘잠시 멈추다’라는 뜻으로, ‘살다’보다는 비정주적이고 ‘떠돌다’보다는 정주적인 의미이다. 언제 떠날지 모르지만 일단 여기에 남아 있는 상태, ‘운동성’과 ‘정주성’의 사이, 그것을 우리는 ‘머물다’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다. 또 ‘들다’라는 말은 ‘살다’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역시 ‘비를 피하려 처마에 들었다’와 같은 문장에서처럼 ‘자기 집이 아닌 곳을 얻거나 빌려서 살게 되다’라는 어기가 강하다. 또 ‘품기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포근하게 안기다’라는 뜻이 먼저 떠오르지만, 사실 ‘품다’라는 말에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도록 감추다’ 혹은 ‘버려야 할 것을 차마 버리지 못하다’ 등의 부정적인 뜻도 있어, ‘품기다’ 역시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의 신작시들을 ‘머물다, 들다, 품기다’의 시로 규정한다 해도, 더 풍요로운 해석의 여지들이 남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해볼 수 있다.
이 글은 신윤서 시인의 신작시들 속에 나타난 ‘존재와 공간’ 혹은 ‘존재와 그 처소’의 테마에 주목한다. 이를 통하여 이 시들이 결국 ‘머물다, 들다, 품기다’라는 말들로 표현될 수 있는 다층적이고, 다면적이며, 다중적인 ‘존재의 본성, 삶의 본원, 사랑의 본질’, 다시 말해 ‘사람, 삶, 사랑의 웅숭깊은 비밀’에 관해 해명하고 있음을 살펴보고자 한다.
거소적 존재, 누군가의 곁에 머무르는
「빗방울 행성」은 운동성의 이미지에서 출발한다. 서로 무수히 교차되며 섞이는 ‘비’와 ‘별’의 이미지가 그것이다. 먼저 “빗방울”은,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로 “건너오는 소리”를 내며 떨어져와서는, “빗물”이 되어 다른 존재 속으로 스며들기도 하고, “드센 빗줄기”가 되어 다른 존재의 몸에 “무수히 많은 금을 긋”거나 그 거처의 금 간 벽들을 밤새 내리치기도 하며, “홍수”가 되어 “유리병” 편지나 “전리품 같은 추억”이 그 존재를 향하여 떠내려오게 만들기도 한다. 여기에 ‘별’의 이미지가 섞여온다. 한 별이 다른 별에게 “충돌”해오고, 이 “행성”은 자신의 고유한 움직임의 질서를 벗어나, 스스로 “위성”이 되어 다른 존재 주변을, 즉 “이마 둘레를 떠”돌게 된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하고 그 곁에 머물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이러한 이미지들로 나타냈다고 할 수 있다. 흔히 다른 별에서 왔다고 상상되기도 하는 이 ‘남녀’라는 서로 다른 존재들이 만나서(“내 비밀을 말해줄까 어느 별에서 왔는지”), 자신의 고유한 운동성을 포기하고, 상대에게 “불시착” 혹은 “충돌”해오는 일이 바로 사랑이다. 이러한 혁명과 위험을 감수하도록 하는 것, 때로는 “죽도록 가파른 벼랑을 틀어잡고서”, 혹은 “금이 간 벽 속”에서 “몸을 말고” 버티게 하는 것이 바로 사랑인 것이다.
홍수에 떠내려 온 전리품 같은 추억이
여자의 허리 사이로 모여들면
물풀이 되어 하염없이 흔들리던 사내,
난파된 배처럼 허물어 가는 한때의
기억으로 우우 뱃고동 소리를 내곤 했다. (부분)
마지막 연에서는 다시 다른 이미지, 즉 ‘배’ 계열의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물풀”이나 “난파한 배”의 “뱃고동”과 같은, (제한적)운동성과 정주성을 함께 갖는 이미지들이다. 모든 존재는 자기 자신의 운동성을 거스르거나 일정 부분 포기함으로써만 다른 존재를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후에는 “물풀”과도 같이 그 자리에서만 “하염없이 흔들리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옛 항해의 기억으로 종종 “뱃고동”만 울려보는 “난파된 배”와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결국 사랑이란, 자신의 운동성을 기억 속에만 간직한 채 그대로 거소적(居所-) 존재가 되어 가는 일인 것이다. 관계를 맺음으로써 어디엔가 필연적으로 머무르게 되는 존재의 본질에 관한 시라고 할 수 있다.
귀소적 삶, 광장을 지나 집으로 드는
그런 날이면 세상에는 아직도 마르지 않은
나무벤치의 페인트가 빗물에 굳어가고,
미처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노점상 할머니의
발등에도 하얀 파꽃은 피지.
뿌리로만 버티고 선 한단의 묶인 파는 말하고 싶었을 거야
씨앗이 맺히고, 맨발로도 꽃 필 수 있다는 것을,
빗줄기 때려대는 퇴근 무렵의 유리창 속에서도 파꽃은 피고,
흘러내린 빗물이 땅 속으로 스며들어
잔뿌리 내리면, 산 21번지 재개발
제2지구의 낡은 지붕 위에도
파꽃은 피지. (「파꽃」, 부분)
지나가는 비에도 어딘가에 쉽게 뿌리를 내리지만, 그 뿌리가 가늘고 얕은 “잔뿌리”인 것이 바로 파꽃의 속성이다. 그 모습은 튼튼한 집에 ‘살다’보다는 임시 거처에 ‘들다’라는 말과 더 잘 어울린다. 그래서 어딘가에 ‘드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시적 주체는 “파꽃은 피지”라고 거듭 노래한다. 어딘가에 ‘든다’는 것은 비오는 날 “창가에 서서” “빗소리의 볼륨을 조금 더 크게 올리”는 일처럼 안온한 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처마 밑에 잠시 피해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일처럼 초조한 일이기도 하고, 또 황량한 재개발 지구를 떠나지 못하고 남아 있어야 하는 일처럼 신산한 일이기도 할 터이다. 그러한 위안과 슬픔의 중첩적 감정이 이 노래에는 모두 담겨 있다.
앞서 「빗방울 행성」에서 마침표 없는 문장들이 이어지다가 마지막 행의 끝에 비로소 마침표가 찍힘으로써 이동과 방랑의 본성을 제한적으로만 간직한 채로 여성적 존재로의 귀의와 정착을 꿈꾸는 남성적 존재의 모습을 강조해보였던 것과 같이, 이 시에서는 “파꽃은 피지.”라는 말 뒤에 내내 마침표가 함께 옴으로써 “맨발로도 꽃 필 수 있다는 것”, 즉 얕은 잔뿌리만으로도 버티고 서서 꽃을 피우는 생명력과 삶의 의지를 보다 단호한 어조로 부각시키는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집요한 마침표로 인해 이 시적 진술들이 질서의 관찰이 아니라 신념의 언명과도 같은 느낌을 주게 되는 것이다.
「집으로 가요」 역시 이러한 ‘듦’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헤어질 때 우리는 일상적으로 이런 말들을 주고 받는다. ‘이제 어디로 가요?’ ‘집으로 가요.’ 바로 이 대화에서부터 출발한 시이다. 그렇다면 “집이 없는 사람들은 어디로 가나요?”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집’의 존재인 ‘그녀’와 달리 ‘나’는 ‘광장’의 존재, “집이 없는 것들과 어울려 거리를 배회하”는 존재이다. 이로써 둘의 대비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여기에서 집이 없다는 것은 반드시 실제적 차원에서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눈물의 온도를 측정하며 황망한 심정 몇을 데리고,/광장 속으로 사라질 거예요”라는 구절에서도 드러나듯이, 정서적 차원의 ‘집없음’, 즉 ‘집없음’의 정조를 나타내는 것이다.
집 없는 사람들의 가슴에 구멍이 뻥 뚫려 있는
이유는, 환멸의 총탄이 지나갔기 때문이지.
내게도 캔의 뚜껑처럼 뚫린, 날카로운 구멍이 하나 있다.
당신이 관통해 간 자리, 나도 이제 그만, (부분)
위 구절에 따르면, 이 ‘집없음’이란 곧 환멸에 의한 가슴의 관통상 구멍과도 같은 것이다. 사랑의 상실에서 오는 상처나 생의 허무에서 오는 환멸은 누구나 피할 수 없으므로, 때로는 “집 있는 사람들도 집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리고 누구나 “집이 없는 것들과 어울려 거리를 배회”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본질적으로는 모두가 “떠도는 것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마지막 연에서 ‘나’가 가고 싶어 하는 “한 뼘, 나만의 집” 역시 실제 집이라기보다는 그곳에 깃들어 잠시라도 “상처를 눕힐 수 있는”, 즉 ‘당신’의 상실이라는 치명적 관통상으로부터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 시에서 집으로의 들고 남이란 곧 공간적 상징으로서, 상실과 극복이라는 삶의 필연적인 사건들을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제목의 ‘집으로 가요’는 의문문으로도 읽을 수 있고, 1연에서처럼 단순 진술을 담은 평서문으로도 읽을 수 있지만, 3연에 나오는 “나만의 집으로 가고 싶어요.”는 ‘나’의 상처의 극복과 방황의 종결, 그리고 귀소(歸巢)의 의지를 나타내는 문장이 되는 것이다.
폐소적 사랑, 한 칸 어둠과 함께 품겨 있는
‘품다’라는 말은 곧 사랑의 본능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리고 ‘품기다’라는 말이 떠올리게 하는 장면 역시 사랑에 빠진 이가 연인의 품에 안겨 있는 모습이다. 폐소(廢所)는 본래 불안이라는 병적 증상을 불러오기도 하는 부정적 상태이다. 그런데,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이를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상대방의 품이라는 좁은 공간 안에 갇혀 있고 싶어하며, 심지어는 그러한 상태를 무한한 안식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윤서 시인이 「트렁크 곁에서」에서 사랑의 시공간을 “트렁크”라는 상징을 통해 나타내는 것은 어떠한 의미에서 절묘하다. 사랑이 지속되는 동안 그 상대는 내가 머무를 수 있는 한 협소한 공간, 즉 작은 “트렁크”와도 같다. “트렁크를 열고 닫고 열고 닫고” 하며 “트렁크 속에서 몇 생을 살”다 다른 존재가 되어 나오는 일. 그것은 바로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경험하게 하는 압축적 시간성, 그리고 예의 존재의 혁명성의 일면일 것이다.
그러한 사랑의 본질은 다시 “루트”라는 기호에 비유된다. 어떤 값에 씌워진 “루트”가 그 값을 나타내는 숫자를 ‘품고’ 있는 형상인 동시에 그 값을 제곱근으로 변환시키듯이, 사랑은 존재를 품어주는 한편, 존재의 얼굴을 바꾼다. 그래서 사랑을 하게 되면 자신의 수많은 얼굴들을 만날 수 있다. “분해하고 약분하고 나누고 빼고 더하고 곱”하면서, 즉 사랑의 시간 속에서 갖은 관계의 부침을 겪으면서, ‘나’는 수없는 존재의 변이를 이루게 된다. 그것을 “수천의 얼굴을 가진 내가 많았다”고 표현하였다. 또 그렇게 존재와 관계의 방정식을 계산해나갈 때면 “지끈지끈” “머리를 앓”게 되는 것이다.
지붕 하나 갖지 못한 나의 트렁크 속으로 폭설이 내려 쌓이고,
겨울비가 내리고, 빙판이 된 트렁크의 가슴팍에 기대어 나는
자꾸만 추워하며 쓸쓸해하고,
견디기 힘들면 가버리라고 트렁크는 소리쳤다.
그 해 겨울의 트렁크를 열고 닫는 동안, 나는 풀기 어려운 수학 공식 속의 기호로 나열되어, 사랑하고 배신하고 의심하고 다시 사랑했다. 트렁크 안에서 쌓인 눈이 녹고, 겨울비가 그치고, 언 가슴팍은 녹아 강으로 흐르고, 바다에 가 닿고, 그 많은 기호들은 모두 물고기가 되어 지느러미를 흔들며 트렁크를 떠나갔다. (부분)
그리고 그러한 무수한 존재의 변화로 인해 각자가 급기야는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게 되면, 그때는 그 “트렁크” 혹은 “루트”의 안이 쓸쓸하게 느껴지게 된다. 그렇게 “사랑하고 배신하고 의심하고 다시 사랑”하는 동안 “언 가슴팍”이 “녹아” 다시 흐르기 시작하여 “바다에 가 닿”으면, 그때쯤 ‘나’의 수많은 모습들(“기호들”)도 모두 “물고기가 되어 지느러미를 흔들며” 연인을 떠나간다. 폐소성을 견디는 사랑의 마법은 끝나고, 다시 존재의 운동성이 되돌아오는 것이다.
「트렁크 곁에서」가 인연의 묘에 관해 말하는 시라면, 「스웨터」는 마음의 신비에 관한 시이다. 시인은 마음을 기억이 간직되는 “서랍”이라는 공간의 이미지로 치환한다. 삶의 시간을 “서랍을 열고 닫는 동안”으로, 혹은 그안에 “차곡차곡 팬티들이 쌓”이는 시간으로 시인은 이해한다. 서랍은 속옷 사이에 쑤셔넣어진 지폐와 같은 삶의 수치도, ‘너’에 대한 사랑과 증오 사이의 한 칸의 어둠도, 모두 기억이 되어 품겨 있는 공간이다. 마음은 그렇게 “차곡차곡” 들어찬 “팬티들” 같은 내밀한 기억들이 품기어 가는 공간인 것이다. 또 “서랍”은 “어머니의 자색 스웨터”가 들어 있던 빈 자리처럼 한 생이 지나가고 남는 “전생의 기억”의 봉분”과도 같다. 결국 인생이란 어쩌면 “서랍을 열고 닫는 동안”, 즉서랍을 열고 닫는 일들이 무수히 반복되는 동안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말해봐,
입 속의 밥알들을 꿀꺽, 삼키고서
너는 돌아서서 서랍처럼 웃는다
스르륵 닫히는 마음과 차르륵 열리는 마음은
한 벌의 옷이 되질 못하는데
창 밖 길고양이들의 울음이 되어
새벽을 찢어 발긴다
그러나 그곳에 담기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너’의 마음이다. ‘너’는 너 자신의 ‘서랍’을 가지고 있어서 ‘나’에게 할 말도 그곳으로 삼켜버리기 때문이다. 때로는 “스스륵” 그 마음을 닫아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한 벌의 옷이 되”어 ‘나’의 서랍에 담기지 못하는 ‘너’의 마음은 “창 밖 길고양이들의 울음”과도 같은 이질적인 것이 되어 “새벽을 찢어 발”기고 나오게 하기도 한다. 그러한 너의 타자적 “불안”은 그러한 타자성에 대한 나의 “분노”를 부른다. ‘너’와 ‘나’는 결코 ‘서랍’에 담겨 있는 어둠까지는 공유할 수는 없기 때문에, 모든 관계는 본질적으로 지극히 어려운 혹은 불가능한 것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결국 신윤서 시인이 이 시들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거소적 존재’, ‘귀소적 삶’, ‘폐소적 사랑’이라고 요약할 수 있는 생의 비밀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명제들마저 이 시들에 표현된 것에 비하면 너무나 정태적이다. 시인의 시들에서 드러나는 것은 그 안에 숨겨진 존재의 ‘운동성’과 ‘정주성’이라는 상이한 방향의 에너지들, 삶 속에 공존하는 ‘탈주’와 ‘귀소’의 엇갈리는 본능들, 사랑의 마음에 나타나는 ‘개방성’과 ‘폐쇄성’이라는 이중적 무늬들이다. 이렇게 삶과 사람과 사랑의 모순적 리듬을 풍부한 공간적 이미지들을 통해 포착해내는 것이 신윤서 시의 독특한 미덕이다. 그 시를 앞으로도 기다려 읽기를 약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