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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라사막 이남 아프리카 방문은 처음이다. 아프리카는 우리의 상상력을 맘껏 자극하는 동경의 세계이면서 동정의 대상이다. 멀리는 타잔과 밀림의 동화 속 대륙, 가까이로는 정치적 혼란과 전쟁, 사파리, 굶주림과 에이즈로 시달리는 암흑의 대륙. 이것이 내 머릿속에 각인된 아프리카의 모습이다.
나미비아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나 역시 나미비아가 아프리카에 있다는 건 알았지만, 지난해 11월 중순 열린 제1회 나미브사막 울트라마라톤에 참가하기 전만 해도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나미비아는 남아공화국의 통치를 받다가 독립전쟁을 거쳐 1995년 독립한 신생국가다. 당시 공산권 국가들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은 이 나라는 북한과 관계가 좋은 편이다. 내 눈에 비친 나미비아의 민얼굴은 ‘여기가 아프리카 맞아?’였다. 잘 정비된 도시, 길거리를 가득 메운 깨끗한 자동차, 유럽의 작은 마을과 흡사했다. 절대적으로 물이 부족한 이 나라에서 웬만한 집은 아름다운 정원을 갖고 있고, 작은 게스트하우스도 수영장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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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처음부터 끝까지 나와 함께 걸은 선수들. 왼쪽부터 독일인, 가이아나인, 네덜란드인.
- 대영제국 후예들의 의료팀, 흑인도 정성껏 치료
나미비아는 아프리카 대륙에 있는 유럽이다. 전체 인구의 6%에 불과한 백인들은 대부분 유럽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유럽 수준의 삶을 누리고 있다. 반면 흑인들의 노곤한 삶은 계속되고 있다. 시골에선 양철이나 널빤지로 만든 단칸방에서 살고 있고, 어딜 가나 물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19세기 독일인들이 처음 들어왔을 때 원주민들은 수렵 채집생활을 하고 있었다. 유럽인들이 광물자원으로 찾아 내륙으로 잠식해 들어오면서 삶의 터전인 사냥터를 잃어버리고 삶의 기반은 송두리째 무너졌다. 흑인들은 여전히 어둠으로 존재하고 있고, 백인들은 별처럼 한껏 빛을 발하고 있다. 이것이 나미비아의 현주소이다.
이번 대회는 영국 회사(Beyondtheultimate)가 만든 첫 사막 대회이다. 미국인과 영국인이 주최하는 대회의 분위기는 매우 달랐다. 미국인들은 언제 어디서 만나도 “Good job”, “Are you OK?”가 넘쳐난다. 그러기에 비록 언어장벽이 있어도 별로 위축되지 않았다.
이번 대회는 전혀 달랐다. 누구 하나, 주최자는 말할 것도 없고 선수들마저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전원 유럽에서 온 백인이고, 비유럽인은 나와 미국과 캐나다에 거주하는 가이아나 사람 2명뿐이다. 영국인들은 과묵했다. 말 없는 가운데 자기 일은 철저히 했다. 그들에게 품위가 있었다. 묵은 부자의 무게가 있었다.
한 명의 의사와 여러 명의 간호사로 이루어진 의료봉사팀(Radical Medics)은 남달랐다. 그들은 선수들이 캠프로 들어오면 일일이 발을 보살펴 주고 치료해 줬다. 첫날엔 최고령자인 내게 특별히 관심을 보였다. 체크포인트에 도착하면, 물은 얼마나 마셨느냐? 전해질은 어느 정도 먹었느냐? 심지어는 소변은 몇 번 봤는지도 물었다. 이른 아침에 출발하는 날엔 새벽 5시에 일을 시작했다. 그들이 너무 친절했기에 캠프에 들어오면 특별히 아프지 않아도 의자에 앉아 점검을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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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 의사 및 간호사와 함께. / 모래 바닥에 앉아 선수들의 발을 치료 하고 있는 의료 봉사자들.
- 이들이 누구인가? 한때 세계를 호령한 대영제국의 후예 아닌가? 선수 중에는 영국 식민지 국가에서 온 흑인도 있었다. 모래 바닥에 앉아 의자에 앉아 있는 노예 후손의 발바닥을 정성스럽게 만지는 대영제국의 후예를 바라보면서 묘한 기분을 느낀 건 나뿐이었을까?
동시대 최고의 역사학자 중 하나로 평가받는 영국인 니얼 퍼거슨(Niall Ferguson)은 그의 책 <영국은 어떻게 근대 세계를 만들었는가(원제 : Empire, How Britain Made Modern World)>에서 대영제국이 어떻게 현대 세계를 만들었는지 분석했다. 그는 서문에서 ‘대영제국은 분명히 잘못 됐다(wrong)’고 전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인류 역사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고 주장했다. 자유를 추구한 영국인들의 노예 사용과 노예장사, 100만 명이 아사한 아일랜드 대기근, 인도의 암리짜르 학살(Amritsar Massacre) 사건, 외국인 혐오 등은 잘못 됐다고 했다. 그러나 대영제국이 남긴 유산은 긍정적인 면-자본주의 승리, 북미와 호주 대륙의 영국화(Anglicization), 영어의 세계어화, 신교 확산, 의회제 확산-도 많다고 했다.
영국 사람들의 과묵함, 그 이면에는 이런 자존심이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게 분명하다. 첫날 길을 잃은 두 사람 중 한 명은 다음날 오후가 돼도 찾지 못 했다. 나는 행사 진행을 지원하고 있는 행사 주관자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외부사람들에게 수색을 맡기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찾지 못 하고 있다면 우리가 나서는 것이 어떻겠느냐. 길을 잃어버린 선수는 반경 20km 안에 있을 것이니, 여기 있는 사람들이 나선다면 불과 몇 시간 내에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사람들은 그런 점에서 다 프로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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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캠프장 모습.
- 그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나는 입을 닫았다. 나는 생각해 봤다. 그가 왜 내 제안에 그런 반응을 보였을까? 이들이 누군가? 세계를 상대로 전쟁 한 번 일으키고, 100여 년 대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일본인들의 자긍심도 하늘을 찌르는데, 하물며 영국 사람들이야 어떠하랴. 1815년 나폴레옹이 패배한 후 1세기 동안 상대가 없는 초강국의 지위를 유지했고, 전성기에는 전 세계 인구의 5분의 1, 대륙의 4분의 1을 차지한 대영제국의 후예가 아닌가.
내가 나미비아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 잘 몰랐듯이, 어쩌면 그도 한국이 아시아 어디에 붙어 있는지 정확히 몰랐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아니라면, 88올림픽 이전까지는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들 눈에 비치는 한국인은 우리 눈에 비치는 아프리카, 아니면 동남아 사람 정도일지 모른다. ‘그런 나라에서 온 한 노란 사람이 대영제국 국민에게 훈수를 하다니? 어디 감히’ 이렇게 받아들이지는 않았을까.
포기도 자꾸 하면 습관이 된다
60대 중반에 시작해 매년 한 번씩 사막 울트라 시합에 참가했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그 정도면 됐다. 가족 속 그만 태우고, 손자나 봐라”고 한다. 그러면 나는 “아냐 그렇지 않아, 생각보다 쉬워”라고 응답한다. 겉으론 담담해 보여도 내 마음속엔 항상 우려와 걱정의 목소리가 내 발목을 잡곤 했다. 이집트에서 열리는 사하라사막 울트라 마라톤에 처음으로 참가할 때, 출국 2주 전까지 이런 저런 생각으로 망설이고 있었다. 참가비를 보내고 항공권을 발권한 이후에도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지금도 늦지 않았어, 포기해도 누가 뭐랄 사람 없잖아’라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암벽등반은 젊은 시절 마음의 안식처이자 도피처였다. 대학 3학년 가을 울산암 등반 도중 이런 질문을 내게 던졌다. ‘암벽등반을 하다 죽을 수도 있다. 그래도 좋으냐?’ ‘좋다’. ‘차라리 죽으면 괜찮다. 죽지도 못 하고 평생 남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그래도 좋으냐?’ 내 대답은 ‘좋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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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첫날 캠프장(사막 가운데 있는 바위 봉우리를 배경으로)
- 졸업 후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암벽등반을 향한 열정은 50대 초반 되살아났다. 몸이 만들어지고 등반실력이 점차 회복되면서 내 꿈은 미국 캘리포니아 요세미티국립공원의 잘 생긴 바위로 향하고 있었다. 드디어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대학 산악부 후배들이 요세미티 등반을 계획하고 있었다. 평소 그들과 함께 등반하던 나는 자연스럽게 합류하게 되었다. 그러나 출국 날이 하루하루 다가오면서 예상치 못한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자식뻘 되는 후배들과 함께 등반을 하다 사고라도 나면 어쩌지? 하나같이 집안을 일으킬 기둥인데, 만약에 큰 사고가 생기면?’ 이 의문에 내 걸음은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결국 난 접었다.
한동안 수면 속으로 사라졌던 요세미티로 향한 나의 꿈은 거벽 등반기술을 가르치는 ‘익스트림라이더등산학교’에 들어가면서 다시 살아났다. 수료 후 동문회장을 맡으면서 나의 꿈은 차츰 현실로 다가왔다. 몇 차례 기회가 있었지만, 때로는 회사 일 때문에 때론 다른 이유로 참가를 유보했다. 이러는 나를 보고 후배가 농담 삼아 이렇게 말했다.
“회장님은 떠나야 가는 겁니다.”
이 뼈아픈 한마디 말 덕분에 나는 다섯 번의 망설임 끝에 요세미티 거벽에 올라설 수 있었다. 어쩌면 지금 하지 않으면 영원히 할 수 없다. 후일을 기약할 만큼 젊은 나이가 아니다. 더구나 많은 체력을 요하는 이런 일은 미루면 기회는 다시는 오지 않는다. 포기도 자주 하면 습관이 된다. ‘어쩌면 습관이 된 포기’를 포기하자.
사막 울트라 마라톤에서 나는 무엇을 얻는가? 황량한 사막의 풍광이 주는 적막감, 캄캄한 한밤중에 혼자 걸을 때의 호젓함이 좋았다. 등수나 제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최대한 천천히 가고 때로는 드러누워 낮잠을 청하는 여유를 즐겼다. 이런 적막감, 호젓함, 여유가 나를 계속 고생의 길로 이끈다. 상금이나 상품은 없지만 기록을 재고 등수도 매긴다. 선두권을 제외한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완주를 목표로 한다. ‘최대한 여유를 즐기는 것’이 내 목표다. 혹독한 환경에 적응해 살아가는 동식물의 경이로운 삶에 감탄하고, 바람과 모래가 만들어 내는 노래를 마음으로 듣는다. 어쩌다 만나는 작은 그늘에 어린애마냥 감사한다. 적어도 이전 대회에서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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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미 선수들(붉은 색 옷을 입은 여성은 하루 10km 정도 걷고 나머지 시간은 자원봉사한 네덜란드인)
- 이번 대회에선 사정이 전혀 달랐다. 여유가 아니라 생존 그 자체였다. 주최 회사가 개최한 첫 번째 대회라 참가가수가 적었고, 첫날 코스는 나무가 앞을 가려서 앞사람을 시야에 잡아두기가 쉽지 않았다. 이날 15km 지점에서 2명이 길을 잘못 들었다. 다행히 한 명은 제 발로 찾아왔으나, 다른 한 명은 헬기를 띄웠으나 찾지 못하고 다음날 구조대가 가서 찾아 왔다. 그는 구조되자마자 병원으로 후송되어 모든 검사를 받은 뒤 이틀 만에 돌아왔다. 이번 대회는 비상시 헬기구조도 가능한 보험을 요구했지만 그런 보험 상품을 찾을 수 없어 나는 여행자보험만 들었다. 구조비용이 만만찮을 것이라는 생각에 예전의 ‘여유’는 잠시 접어둘 수밖에 없었다.
이번엔 코스의 특성상 선수 간 간격이 조금만 벌어져도 앞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앞사람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신경을 바짝 썼다. 그들이 뛰면 나도 뛰고 그들이 걸으면 나도 걸었다. 이렇게 걸어 55km를 11시간에 걸었다. 훈련할 때 휴식시간을 뺀 기록(시속 5km)에 비추어보면 경이로운 기록이다. 양재천의 잘 포장된 평지가 아닌, 때로는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밭과 자갈길에서 쉬는 시간 포함해서 시속 5km의 속도라니 나 스스로도 잘 믿어지지 않는다.
성숙된 모습으로 돌아오기 위해
마지막 날은 100km를 걸어야 했다. 한밤중 결승점을 15km 정도 앞두고 있었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불빛 하나 없는 사막 한가운데를 손전등 하나에 의존해 혼자 걷고 있었다. 사각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던 밤, 나는 잔물결 하나 없는 호수 위 순풍에 돛을 단 배처럼 가볍게 모래 위를 미끄러져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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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독한 모습으로 황무지를 걸어가는 가이아나 출신의 흑인. 진지한 접근이 돋보였다.
- 그때 어느 순간 ‘걷는다는 것과 걷지 않는다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걷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걷기를 멈췄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그 순간, ‘내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고 돈을 들여서 여기까지 왔는데, 기필코 완주해야지’ 하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이다.
유난히 무더운 여름, 12kg의 짐을 지고 훈련했다. 2개월 동안 일주일에 두 차례 하루 30km 이상을 걸었다. 그렇게 고생하며 훈련한 이유가 완주하기 위해서였다. 몇몇 친구들은 무사히 완주하라면서 격려금까지 줬다. 더구나 파키스탄 고아원 증축에 필요한 성금을 모으는 일도 병행하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출국하기 전 경기 결과를 매일 볼 수 있는 사이트 주소를 친구들과 우리 아이들한테까지 알리고 오지 않았던가? 그 순간 이런 일들이 당연히 떠올라야 했고, 심기일전하여 완주했어야 맞다. 그런데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니?
내 말을 들은 불교에 조예가 깊은 친구가 그건 ‘不二’를 깨달은 거라고 했다. 불교에 ‘둘이 다르지 않다’, 즉 ‘不二’라는 개념이 있다. 우리의 ‘식(識)’이 경계를 정하고 분별하기(나와 너로 가르기) 때문에 다르다고 인식하지만, 원래는 하나라는 것이다. ‘걷다’와 ’걷기를 그만두다’가 다른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은 바로 이를 알아차린 것이다. 완주하는 것과 중간에 그만 두는 것이 다르지 않다는 것은 비록 중도에 그만 두더라도 끝까지 간 것과 같은 마음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삶과 죽음도 이러할까? 죽음은 삶의 다른 형태일 뿐 삶과 다른 것이 아니라고.
여행의 맛은 준비하는 과정이나 여행 중에 느끼기도 하지만, 여행이 끝난 뒤 이리 저리 곱씹으면서 반추하는 과정에 느끼는 맛이 더 진하다. 삶은 여행이다. 여행은 마음공부요 수행이다.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진정한 이유는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다. 떠날 때와는 다른 모습으로 돌아온다. 뭔가를 배우고 깨닫고 더 성숙된 모습으로 돌아온다. 뭔가를 느끼고 돌아온 내 일상에 어떤 변화가 있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