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0년 전후부터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개화사상을 배우고 발전시켜 개화사상을 가지게 되었다. 1872년 21세의 나이에 알성문과에 장원급제를 하고, 1874년 홍문관교리로 임명되었다.
양반신분제도의 폐지, 문벌의 폐지,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 인재의 등용, 국가재정의 개혁, 공장제도에 의거한 근대 공업의 건설, 광업의 개발, 선진 과학기술의 도립과 채용, 화폐의 개혁, 농업과 양잠의 발전, 목축의 발전, 임업의 개발, 어업의 개발, 철도의 부설과 기선 해운의 도입, 전신에 의거한 통신의 발전, 인구조사실시 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을 국가 정책으로 실현하고자 했으나 청국의 극심한 방해를 받았다. 청국은 김옥균 등의 자주근대화정책이 그들의 속방화 정책에 저항하는 것이며, 청국으로부터의 조선 독립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보고 김옥균 등의 개화당과 개화정책을 극도로 탄압하였다.
1884년 12월 4일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단행하였으나 3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1894년 3월 27일 상해 동화양행 객실에서 홍종우에게 암살당했다.
묘소는 충남 아산시, 도쿄 진정사 등 세곳에 만들어졌는데 시신은 아무 곳에도 없다.
8. 오도산 격전지 비
구한말 의병장 이규홍(1881-1929)이 왜병과 싸우던 곳인 오도산 격전지임을 알리는 비가 김옥균생가지 표지석과 함께 세워져 있다.
이규홍의 자는 원오, 호는 오하로서, 전북 익산군 두천면 관동(현 익산시 팔봉동)에서 중추원의관 이기영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7년 10월까지 의병 200여명을 모은 뒤 총기 300여 자루와 탄환 등을 준비하여 1907년 11월 257명의 의병을 지휘하여 고산, 진안, 장수, 용담 등지에서 전투를 벌여 1908년 초까지 왜병 128명을 사살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1908년 4월부터 1917년 10월까지 10년동안 이사동에 은신했다.
1917년 10월 일본 경찰의 급습을 받아 충남 대덕군 산내면 오도산 정상에서 일본 경찰과 교전, 어깨에 총상을 입은 후 탈출, 1918년 11월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 임시정부, 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였고, 1920년 6월 독립운동의 자금 조달을 위해 국내에 잠입하여 보부상으로 가장하여 활약하였다.
1924년 2월 8일 서울에서 일본 경찰에 잡혀 4개월 동안 모진 고문을 받아 오른손이 절상되고 사경에 이르자 보석으로 출감하였다. 집을 떠난지 17년만인 44세에 환가하여 1929년 6월 형독으로 향년 49세에 별세하였다. 묘소는 전북 익산시 석암동에 있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9. 송용재가옥 : 현재 솟을대문과 행랑채만 남아 있다
송용재(1864-1935)는 구한말 문신으로 자는 이견, 호는 용암이다.
사우당 송국택의 10세 장손으로 규장각 직각 벼슬(정3품, 지금의 국립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1935년 2월 송용재의 장례 시 대전 상인들이 철시하고 장례행렬을 관람하였다. 이때의 모습을 사한리 송직각 장례의식-대전양반 상례 역귀몰이 민속놀이로 재현하여 1991년 전남 여수 진남관에서 열린 KBS 제32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품하여 장려상을 수상한 바 있다.
묘소는 금산군 진산면 지량리에 있다.
10. 송창재가옥 : 오하 이규홍 의병장 친우
이규홍 의병장이 1908년부터 1917년까지 10년 동안 숨어 지냈던 송창재가옥은 송용재가옥과 담장(현재는 허물어져 마치 한 집처럼 보임)을 사이에 두고 이웃해 있었다.
송창재(1880-1946)의 자는 문보, 호는 수석당, 내헌이다.
구한말 항일사상가로서 1880년 대전 동구 이사동에서 출생하였다. 난곡 송병화에게서 학문을 닦아 대성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여 울분을 이기지 못하여 날마다 통곡하며 문밖을 나가지 아니하였다.
의병장 이규홍을 10년(1908-1917) 동안 벽장에 숨겨주었다. 평생동안 왜경의 요시찰인물로 갖은 고초를 당했으나 끝내 굽히지 아니하고 항일로 일관하다 1946년 7월 20일 대전 동구 이사동에서 사명하였다. 묘는 대전 중구 구완동에 있다.
덕천 성기운이 묘갈명을 지었다.
11. 52번 버스정류장
52번 버스정류장 옆에 매사냥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매사냥은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 제8호이며, 2010년 11월 16일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수렵술이다.
이사동의 남쪽에 비파산이 있으며, 비파산 정상에 백제시대에 쌓은 비파산성이 있다.
52번 버스정류장 옆에 비파산성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12. 사우당(四友堂)
사우당(四友堂)은 송국택(1597-1659)의 별서로 1642년(인조20)에 지은 학당으로, 매련송국(梅蓮松菊)을 네벗으로 삼는다는 의미이다.
사우당은 최초로 송촌동 대전IC 인근에 있었는데, 문중에서 선조의 산소가 있는 이사동으로 옮겨 1971년 10월에 중건하였다.
송국택의 자는 택지, 호는 사우당이며, 동지중추부사 세훈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장사랑 화수이고, 아버지는 희명이며, 어머니는 민수경의 딸이다.
재당숙(7촌)인 진사 몽인에게 입양되었다.
김장생의 문인으로 9살 연하인 송준길과 깊이 교우하였다. 1919년(광해군 13)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624년(인조2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로 등용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 호소사 김장생의 막료로 있다가 천거로 예문관검열이 되고, 이어 사간원 정언, 함길도도사를 지내고,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함락되자, 원손을 탈출시켜 그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랐고, 그 뒤 병조참지를 거쳐 형조참의, 공조참의, 승지, 예조참의 등을 지냈다. 뒤에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13. 한천(寒泉)
한천은 송성준(1737-1802)이 판 우물이다.
송성준은 송조진의 아들로 사우당 송국택의 5대손이다.
호는 한천, 자는 방숙으로 특천 송명흠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이사동 입향조이다.
충남 대덕 제헌국회의원을 지낸 후손 송진백이 1933년 가을에 한천 현판을 걸었고, 한천이라고 새긴 글씨는 일본식 한자이다.
한천샘은 의병장 이규홍 선생이 왜병에게 발각되었던 장소이기도 하다.
*한천현판에 적힌 시
산하출천/감한이심/표음기락/수월전심
(산 아래 샘이 솟네 검푸르게 차면서도 깊어 표주박으로 떠 마시는 이 즐거움을 물에 비친 달에게로 마음 전하네 : 난곡집 14권 21쪽)
14. 봉강정사(鳳崗精舍)
봉강정사(鳳崗精舍)는 송병화(1852-1915)가 후진들을 양성하기 위해 1896년(고종 33)에 노적봉 봉암 아래 지은 학당으로, 1976년 유림들이 전면 보수하였다.
송병화의 호는 난곡, 약재이며, 자는 회경이다. 송조식의 아들로 사우당 송국택의 9대손이며, 고조는 한천 송성준이다.
난곡 송병화는 율곡과 우암의 학풍을 이어받은 성리학자이다.
간재 전우(1841-1922)와 23회의 학문적 문답 왕복서를 주고받았으며, 난곡집이 전해지고 있다.
봉강정사는 백록당(白鹿堂)의 현판으로서, 일창 유치웅(1901-1998)의 글씨이다.
봉강정사 왼편의 방화실(倣華室) 현판은 “영귀대(詠歸臺)”라 적혀있으며, 이는 논어 선진편에서 따온 것으로 담당 송우용(1863-1941)의 글씨이다.
*논어 선진 : 모춘자 춘복 기성 관자 오륙인 동자 육칠인 욕호기 풍호무우 영이귀
(늦은 봄철에 봄옷이 만들어지거든 어른 대여섯명과 아이들 육칠명과 더불어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에 올라 바람을 쐬고 노래를 부르다 돌아오겠습니다.)
봉강정사 오른편의 앙려재(仰廬齋) 현판은 “의두헌(依斗軒)”이라 적혀있는데, 이는 두보의 추흥 팔수 중 “매의북두망경화(날마다 북두성에 의지하여 서울을 바라보네)”에서 따온 것으로 덕천 성기운(1877-1957)의 글씨이다.
15. 동로사(東魯祠)와 오적당(吾適堂)
동로사는 봉강정사 뒤쪽 담장 안 왼쪽 편에 자리하고 있으며, 공자, 주자, 송자(송시열) 삼현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송병화의 수제자인 극재 송병관(1875-1945)이 1920년 5월 26일에 세웠다.
현판은 조선 철종조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지내고 동학사 삼은각 현판을 쓴 석촌 윤용구(1853-1937)가 68세에 썼다.
오적당은 동로사의 오른쪽 편 한 칸짜리 작은 사당이며, 송병화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극재 송병관이 1933년 6월 15일에 세우고 스승 난곡 송병화의 영정(석강 채용신이 그림)을 모시고 제향하였다.
송병관은 조국이 광복되던 해 2월 광복을 보지 못하고 하세하였다.
현판은 난곡 송병화와 간재 전우에게 배운 후학 김종호(1874-1949)가 61세에 썼다.
16. 소화동천(小華洞天) 암각문
▲소화동천 애각 안내판
광영지 위쪽으로 도보 5분거리에 있다.
수석당 송창재(1880-1946)가 바위에 새긴 글로 소화동천(小華洞天)은 '작고 아름답고 물좋은 곳에 신선이 노닐다'는 의미이다.
송창재 선생은 이규홍 의병장을 숨겨줬다는 이유로 왜병에게 여러차례 끌려가 문책을 받았는데 후손들에게까지 피해가 가지 않도록 이곳에서 용왕제를 지냈다고 한다.
17. 광영지(光影池) 신비(新碑)
광영지는 제9대 외무부장관 최덕신이 농촌 지원을 나왔다가 주민들 민원을 청취하고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 정비해준 못이다.
※광영지(光影池)의 광영(光影)은 주자(주희)의 “天光雲影” 이라는 시구에서 따온 것이다.
광영지신비는 외무부장관 최덕신(1914-1989)이 광영지를 정비하고 1962년 8월 25일 세운 비석이다.
최덕신은 평북 의주에서 태어났으며 부친은 독립운동가 최동오이다.
부친이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과 친구사이였다.
최덕신은 당시 대통령인 박정희와의 불화로 도미하였고, 1986년 9월 아내 유미영과 미국에서 월북하였으며, 1989년 북한에서 사망하여 북한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
이로 인해 광영지 신비에서 이름이 지워지게 되었다.
- 심재 김민섭 강사님의 강의자료 참조하여 허혜경 작성
첫댓글 잘 정리하셨네요. 좋아요
일목요연하게 정리 잘 해주셔서 두고두고 요긴하겠어요~~
두고두고 필요하신분들께 참고자료가 되면 좋겠네요~ 감사합니다 ^^
와우~~ 강의내용을 전부 담아두었네요. 사진과 해설이 정리가 매우 잘되어 좋습니다. 고맙습니다.
심재 선생님, 말씀대로 사진수정하였고, 일부 글도 수정했습니다. 바르게 알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선생님 덕분에 잘 바로잡았습니다. 함께 답사했던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잘못된 정보가 남지 않도록 이렇게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