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출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출전 『소학』 「외편」 가언
범질(范質)은 뛰어난 학식과 문재(文才)로 오대(五代) 왕조인 후당(後唐)에서부터 후진(後晋)·후한(後漢)·후주(後周)에 걸쳐 벼슬을 한 인물이다. 그는 후주(後周)에서 재상을 지냈는데, 송(宋)나라가 중국을 재통일한 후 다시 송나라에서 재상이 되자 스스로를 일컬어 '나그네의 신하'라고 했다. 송나라에서 노국공(魯國公)으로 봉해져 흔히 노공(魯公)이라고 부른다.
이 글은 범질이 재상의 자리에 있을 때 조카인 고(杲)가 황제에게 자신을 좀 더 높은 관직으로 올려줄 것을 요구하자, 그를 깨우치기 위해 쓴 것이다. 3대 왕조에서 벼슬을 하고, 2대 왕조에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재상의 자리에까지 오른 범질의 처세관(處世觀)과 인생관(人生觀)이 잘 드러나 있다.
여기에서 소개하는 글은, 『소학(小學)』 「외편」 중 '가언(嘉言)'에 실려 있는 것으로서 노국공 범질의 글이다. 가언(嘉言)은 '아름다운 말'이라는 뜻으로, 사람들에게 교훈이 되는 아름다운 말을 이른다. 한(漢)나라 시대부터 전해 오는 훌륭한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기록하고 있다.
▣ 출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첫째, 네가 출세를 하고 싶다면, 먼저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웃어른을 공경할 줄 아는 예의범절을 배워야 한다. 어버이와 웃어른을 공손히 받들어 모실 줄 알아야 하고, 어른에게 불손한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된다. 항상 조심하여 급하고 어려운 때에도 반드시 이것을 지켜야 한다.
둘째, 네가 출세하여 높은 관직을 갖는 것보다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와 타고난 재주를 열심히 닦아야 한다. 다음과 같은 격언이 있다. '배우고도 남는 힘이 있으면 벼슬을 한다.' 남이 나를 인정하든 안하든, 그런 것에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 자신이 최선을 다하지 못해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걱정하고, 스스로 세운 뜻을 이루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셋째, 너는 어떤 일이 부끄럽고 욕된 일인가를 가려서 실천해야 할 것이다. 항상 겸손하고 예의범절을 지키면, 부끄러움과 욕된 일은 내 마음에서 사라지게 되는 법이다. 자신을 낮추어 남을 존경할 줄 알고, 남에게 먼저 양보할 줄 아는 겸양의 덕을 쌓아야 한다.『시경(詩經)』에 나오는 '상서(相鼠)'라는 시와 '모치(茅鴟)'라는 시에서는, 모두 예의범절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간사하고 악독하며 교양 없는 행실을 비난하였다. 항상 이 글을 쓴 사람들의 비난을 잘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넷째, 너는 말과 행실을 조심하여 위아래를 분명히 분별하고 때와 장소를 가려 조심성 있게 행동해야 된다. 말과 몸가짐이 바르지 못한 사람은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없다. 주공과 공자는 높은 가르침을 남겼으나, 제나라와 양나라 때에는 현실적이지 않고 고상한 의논을 하는 사람이 마치 대단한 사람처럼 여겼다. 남조 시대에는 세상의 풍속에 물들지 않는 고결한 의논만을 즐겨온 여덟 선비들이 마음먹은 대로 예의에 벗어나며 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 이들은 결국 역사에 오점을 남겼다.
다섯째, 너는 술을 삼가야 한다. 술은 아름다운 맛을 지니지 않았고 사람을 미치게 하는 약일뿐이다. 사람이 술을 마셔 취하게 되면, 어진 품성을 잃고 자신도 모르게 포악하고 거칠어져 방탕하게 된다. 술 때문에 재산을 탕진하고, 가세는 점차 기울어 끝내는 패가망신을 하게 되는 사람을 예나 지금이나 무수히 보아왔다. 이러한 사실을 마음에 깊이 새겨 두어야 할 것이다.
여섯째, 너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 사람들은 말 많은 것을 싫어한다. 필요 이상의 말을 해서는 안 되며 또 묻지 않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 말은 좀더 깊이 생각하고 매우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 한 마디의 말을 잘못하여 뜻하지 않은 화를 당하는 법이다. 잘못된 한 마디의 말은 큰 화를 부르는 씨앗이 되기도 한다. 남을 칭찬하는 말은 쉽지 않지만, 남을 헐뜯는 말은 쉬운 법이다. 사람들이 서로 헐뜯는 말을 하고 다툰다면, 그 말은 결국 자신에게 재앙을 불러올 뿐이다. 그러므로 말수는 적게 하고, 말은 깊이 생각해서 해야 한다.
자신의 뜻을 이루려면 결코 서둘러서는 안 된다
세상 사람들은 서로 어울려 노는 일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름다운 인연을 가볍고 쉽게 맺으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분노와 원망이 쉽게 생겨 다툼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군자는 마음을 한없이 넓고 깊으며 티 없이 맑은 물과 같게 하는 법이다.
세상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미리 알아차리고 치켜세워 주는 것을 좋아한다. 자신의 비위를 맞추어 주면 자신이 정말로 대단한 줄 알고 뽐내면서 잘난 체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을 받드는 사람들이 속으로는 욕을 하며 겉으로만 받드는 척하는 것을 모르고 있다. 이 때문에 옛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상대할 때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여 대하지 않았고, 자신이 잘난 체하며 거만한 태도로 대하는 사람이나 무조건 상대방에게 굽실거리며 상대방의 뜻에 따르는 사람을 모두 같이 싫어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협객으로 지내는 것을 즐겨 강한 자를 꺾고 약한 자를 돕는 일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이와 같은 사람을 흔히 정의롭고 의리 있는 자라고 불렀다. 이들은 다른 사람이 급하고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그를 도와주다가 가끔 감옥에 갇히는 경우가 있다. 좋은 일을 하려다 오히려 화를 입게 되는 경우를 말한다. 사람은 반드시 앞뒤를 깊이 생각하고 가려서 행동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욕심 없는 깨끗하고 맑은 마음을 가지고 사치하지 않으며 분수에 맞게 생활하는 사람을 업신여기고 낮추어 대하려는 습성이 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몸을 필요 이상으로 가꾸며, 아까운 줄 모르고 분수에 넘치는 생활을 즐긴다.
기름기가 철철 흐르는 살이 찐 말을 타고, 좋은 가죽으로 만든 비싼 고급 옷을 걸쳐 입고 거드름을 피우면서 뽐내며 마을을 드나든다. 이렇게 하면 마을 어린애들로부터 부러움을 살지는 모르지만, 세상을 바로 볼 줄 아는 사람들로부터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천박하다는 말을 듣게 된다.
나는 원래 나그네인 신하로서 요순의 다스림에 참여하여 중책을 맡았다. 그러나 막상 막중한 책임을 맡고 보니 내 자신이 갖추고 있는 학문과 재능의 부족함을 느끼게 되었다. 내 마음에서는 항상 '과연 내가 맡은 책임을 다해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근심이 떠나지 않았다. 마치 깊은 연못 위에 살짝 언 살얼음을 딛고 서 있는 것처럼 언제 폭삭 꺼져버릴 줄 몰라 마음이 몹시 불안하다.
너희들이 이와 같은 나의 마음을 안다면, 마땅히 가엾게 여겨 걱정할 것이다. 그러나 나 때문에 너희들이 죄를 더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앞선다. 출입을 삼가고, 집안에서는 몸가짐을 조심하고, 남과 함부로 어울리지 말고, 명예와 권세에 대한 욕심을 버려야 할 것이다.
권세와 높은 자리는 오래 지키기가 대단히 어려운 법이다. 그러니 내 어찌 후일을 믿을 수 있겠느냐. 모든 사물은 기세가 왕성하면, 또한 반드시 기세가 떨어져 쇠약해진다. 어떤 일이든 흥하면 또한 망하는 법이다. 또 무슨 일이든 급하게 서두르면 실패하는 경우가 있고, 급하게 달리면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사례가 많다.
찬란한 빛과 그윽한 향기를 자랑하는 꽃도 일찍 피면 일찍 시들어 떨어지게 마련이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만물의 법칙이다. 그러나 서서히 푸른 자태를 머금고 자란 소나무는 모진 비바람과 추위를 견디면서도 울창한 숲을 이룬다. 그리고 그 푸른 자태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사람의 운명도 이와 다르지 않다. 높은 벼슬 또한 힘으로 이루기 어려운 것이다. 너희들은 자신의 뜻을 이루려고 하기에 앞서, 먼저 훌륭한 사람이 갖추어야 할 품성을 충분히 갖추어야 한다. 나는 너희들에게 뜻을 이루려고 급하게 서둘러서는 안 된다는 부탁의 말을 남기고자 한다.
『소학(小學)』도 한때는 금서(禁書)였다?
『소학(小學)』이 한때 금서(禁書)였다는 말을 듣고 황당하다는 생각을 한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유학을 잘 모르는 사람도 『천자문』, 『명심보감』과 함께 『소학』 정도는 서당에 다니는 어린 학동(學童)들이 배우는 서책 가운데 하나라는 것쯤은 귀동냥으로 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슨 이념서적도 아니고 어린 학동들까지 서당에서 배우는 『소학』이 금서였다니, 필자 입장에서도 좀 황당하기는 하다. 그러나 분명 『소학(小學)』은 금서였다.
『소학(小學)』은 조선 전기(前期) 재야 유학자들, 즉 사림파(士林派)들이 자신들의 삶을 결정하는 중요한 도덕적 기준으로 삼은 '행동 강령'과도 같은 책이었다. 그런데 사림파는 세 차례의 '사화(士禍)'를 통해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勳舊派)들로부터 무참하게 도륙당하는 참극을 겪게 된다. 1498년 무오사화(김종직 부관참시)로부터 1504년 갑자사화(김굉필 처형) 그리고 1519년 기묘사화 때 조광조를 따르는 선비들이 참혹하게 처형되면서, 사림파들이 행동강령으로 삼은 『소학(小學)』 역시 금서(禁書)의 굴레를 뒤집어쓰게 된다.
그 뒤 50여 년이 지난 1568년(선조 1년), 비록 조광조가 정치적으로 복권되어 『소학(小學)』 역시 금서(禁書)의 굴레를 벗을 수 있었지만,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17세기에 들어와서도 사대부들은 『소학(小學)』을 터부시하는 풍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소학(小學)』의 경우는 소위 '금서(禁書)'라는 것이 정치적 상황과 권력자들의 입맛에 따라 얼마나 멋대로 달라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 하겠다.
『소학』, 동양의 『탈무드』
어쨌든, 『소학(小學)』은 고려 말기 성리학자들에 의해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는데, 새로운 왕조인 조선 개국 초기 재야 학자들이었던 사림(士林)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학문의 뜻을 둔 사람이라면 마땅히 『소학(小學)』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믿음을 공유하고 있었다. 사림들이 정치적·사상적으로 탄압받던 조선 중기를 지나, 그들이 정치권력과 사상계를 완전히 장악한 17세기에 들어와서는 『소학(小學)』은 유학자들의 필독서를 뛰어넘어 학문을 시작하는 어린 학생들의 교과서로까지 대우받게 된다. 서당이 전국적으로 퍼지면서 『천자문(千字文)』 『명심보감(明心寶鑑)』 『격몽요결(擊蒙要訣)』 등과 함께 『소학(小學)』은 초학교재(初學敎材)이자 필독서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소학(小學)』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하는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행동 기준을 밝혀주는 율법과 같은 성격의 책으로 대접받았다. 『소학(小學)』은 굳이 비유하자면, 동양의 『탈무드』였다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