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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호국의달설교}싸우시는 하나님/여호수아 23:8-11,
6월은 호국의 달입니다.현충일과 한국전쟁 기념일도 있는 달입니다.
근대사에서 우리나라는 민족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강대국의 싸움터가 되었습니다.
해방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남북 분단의 아픔을 겪게 되었습니다.
6.25 전쟁이 일어난지 벌써 51년이 되었지만 전쟁의 상처는 남아있고, 천만의 이산가족이 있으며, 7천만 겨레의 가슴에 응어리진 한이 있습니다.
우리를 전쟁에서 구해주시고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극복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민들레는 질긴 풀입니다. 귀하지 않은 풀입니다.
잘 죽지 않는 풀입니다. 밟아도 죽지 않습니다. 뽑아도 조그만 뿌리만 있어도 또 자랍니다.
그런데 보세요. 그 씨가 얼마나 멀리 날아가는지요. 자신의 모습을 온 땅에 퍼칩니다.
이게 우리 민족의 모습입니다. 금방 없어질 듯한 민족이었지만 이제는 전 지구상에 한국인이 없는데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지구상에서 우리 민족이 없어진다고 누구 하나 눈 깜짝 하겠어요?
중국대륙에서 한, 수, 당, 송, 원, 명, 청나라가 설 때마다 우리나라는 지배를 당하고 싸움을 했습니다.
이런 곤욕은 근대까지 이어졌습니다. 한국전쟁 중 중공군의 참전으로 1.4후퇴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일본은 호시탐탐 한반도를 넘봤습니다. 옛날 왜구는 좀도둑이었습니다. 서투른 해적이었습니다.
이 왜구 때문에 많은 괴로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근대에 와서 일본의 대륙 진출의 교두보로 우리나라를 이용한 것입니다.
우리나라를 선점하는 것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렇게 밟히고, 먹히고, 죽임을 당하고, 빼앗겨도 우리는 죽지 않는 질긴 민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없애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이 땅에 보존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보세요.
신명기 4:31에는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라고 하십니다.
신명기 31:6에는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행하실 것임이라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십니다.
여호수아 1:5에는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것 같이 너의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라고 하십니다.
사무엘상서 12:22에는 "여호와께서는 너희로 자기 백성 삼으신 것을 기뻐하신 고로 그 크신 이름을 인하여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라고 합니다.
로마서 11:2에는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라고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을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싸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싸우셔서 이스라엘로 승리하게 하십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싸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지금도 싸우고 승리하게 하십니다.
프랑스의 4대 인물은 루이 14세, 나폴레옹, 잔다르크 그리고 드골이라고 합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싸움을 많이 하였습니다. 사람을 많이 죽였습니다. 독재자입니다. 그리고 국민을 위한 독재자입니다.
우리 하나님도 싸움을 많이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처럼 자기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싸우십니다. 자신을 위하여는 싸우시지 않습니다.
첫째, 우리가 이기는 것은 하나님이 싸우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너희 중 한 사람이 천명을 쫓으리니"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싸우시므로 가능합니다.
이스라엘 전 역사에서 하나님은 싸우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앞에서 왔다갔다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아말렉과 전쟁할 때에 하나님은 싸우시고 백성들은 왔다갔다하기만 했습니다.
여리고성을 함락할 때에 전쟁이 아니라 장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싸우시니 이겼습니다. 하나님이 싸우시게 하면 우리가 승리합니다.
우리가 싸우면 우리가 패배합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어떻게 한 사람이 천명을 당합니까?
하나님이 하시니 당합니다.
이사야 30:17에는 "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다 도망하고"라고 합니다.
이사야 60:22에는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고 합니다.
사울왕과 다윗왕의 다른 점을 아시지요? 사울은 항상 내가 싸운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고 하나님께 물어보지도 않고 혼자 싸웠습니다.
처음에는 잘 싸웠지만 갈수록 패배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사울의 왕위를 빼앗고 그를 죽이십니다.
반면에 다윗은 하나님이 싸우시게 했습니다. 다윗은 불레셋과 싸울 때도 하나님께 일일이 물어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으로 하여금 승리하게 하십니다. 전쟁이 막 끝났을 때 기자들이 맥아더장군에게 물었습니다.
"전쟁에 있어서 문제는 무엇입니까?" 장군은 "전쟁의 문제가 아니라 신학의 문제입니다"라고 하였답니다.
전쟁은 신학의 문제입니다. 전쟁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0:4에는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고 합니다.
아이젠하워 장군이 놀만디 상륙작전을 할 때에 안개가 짙게 끼고 도저히 불가능한 형편이었지만 안개 때문에 독일군이 방심하였습니다.
방심한 틈에 연합군의 작전은 성공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싸우신 것입니다.
한국전쟁 때에 구 소련이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임에 불구하고 유엔이 우리나라에 파병을 하였습니다.
이것을 결정하는 날 이유 없이 소련 대표의 차가 고장이 나서 이사회에 지각을 하였고 지각한 틈에 결정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싸우신 것입니다. 브루스 바튼은 "예수의 인간 경영과 마케팅 전략"이란 책에서 "혼자 성공하려면 실패한다,
삼손은 혼자서 싸울 때는 멋지게 해치웠으나 거대한 조직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던 것이다"고 합니다.
혼자는 절대 이기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함께라면 이깁니다. 하나님이 싸우시기 때문입니다.
기성자는 주나라 선왕을 위하여 싸움닭을 길렀습니다. 닭을 훈련한지 열흘 후에 왕이 물었습니다.
"이제 싸움을 붙일 수 있느냐?" "아닙니다. 실력 없이 허세만 부립니다". 다시 열흘이 지났습니다."지금은 싸울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다른 닭의 소리만 나면 곧 따라 울고 그림자만 보아도 따라 갑니다".
다시 열흘 후에 왕은 묻습니다. "지금쯤은 됐느냐?" "아닙니다. 대적을 보면 질투하고,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는 기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열흘이 지나서 왕이 물었습니다. 그 때 기성자는 "완전치는 못하지만 괜찮습니다.
우는 닭이 있어도 안색이 바뀌지 않고, 마치 나무로 조각한 것 같습니다. 다른 닭들이 보면 응전을 하지 못하고 달아나 버립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안에 계시는 사람은 약해 보이지만 당당합니다.
강합니다. 감히 대들지 못합니다.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싸우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싸우시는 이유는 우리를 위함입니다.
"이는 너희 하나님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고 합니다.
타인을 위해 싸우는 것은 자신을 위해 싸우는 일 보다 가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싸우느냐 하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출애굽기 14:14에는 애굽군대가 뒤따라 올 대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고 합니다.
아모리 족속과 싸울 때에 "너희 앞서 행하시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신 1:30)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일이라면 언제라도 싸우실 준비가 되어 있는 분이십니다.
바울도 하나님이 잘 싸우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8:31에서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싸우시는데 누가 감히 대적하겠습니까?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 어떤 것도 대적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깁니다. 하나님은 결코 패배를 모르는 분이십니다.
나폴레옹은 "내 사전에는 패배는 없다"라고 했지만 하나님은 그런 사전은 만들지도 않습니다.
그런 사전과 말은 패배자가 만드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이기면 우리 모두가 이깁니다. 하나님은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항상 이기시기에 우리가 항상 이깁니다.
우리도 패배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중국과 미국이 미사일 전쟁을 했습니다.
멀리 날아가는 기술도 똑같이 발달했고, 미사일을 막는 기술도 발달했습니다.
그래서 서로를 향해 베이징과 워싱턴에 미사일이 날아갔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중국이 이겼답니다. 왜냐하면 미국의 미사일은 정확하게 날아와서 정확하게 막았지만 중국 미사일은 정확도가 떨어져 어디에 날아올지 몰라 막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승리는 상대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실수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승리는 상대적이 아니라 절대적 승리입니다.
셋째, 우리편의 대가는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라는 말은 위의 결과를 요구합니다.
하나님이 싸우시는데 대한 우리의 대가는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 받으면 힘이 납니다. 사랑 받으면 겁날 것이 없습니다.
사랑 받으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 받는 것 외에 더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마가복음 12:30에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라고 합니다.
사랑하되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야 합니다. 싸울 때 장난으로 합니까? 싸울 때는 목숨을 겁니다. 힘을 다합니다.
마음을 집중합니다. 하나님은 목숨 걸고 우리를 위하여 싸우셨는데 우리는 장난처럼 사랑해서는 안됩니다.
근성으로 해서도 안됩니다. 겉으로 해서도 안됩니다. 6.25 동란 때 목숨 걸지 않고 전쟁한 군인이 누가 있겠습니까?
목숨 걸어야 전쟁이 됩니다. 목숨을 걸고 건진 이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목숨 걸고 나라를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목숨이 필요합니다. 목숨 걸 때 사랑이 됩니다.
한번 해보고 되면 다행이고, 안되면 그만이지 라고 생각하면 사랑이 안됩니다.
지금도 6.25 당시에 부상당한 상이용사들이 있습니다. 월남전에서 부상당한 용사들도 있습니다.
그 후에 간첩과의 전투에서 부상당한 용사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용사들에 대하여 국가가 목숨걸고 보살펴야 할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도 목숨을 걸고 사랑해야 합니다. 목숨을 건 사랑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또 싸워주실 것입니다.
결론
맥스 루카도는 "갈등은 불가피한 것이지만 싸움은 선택적인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과의 싸움은 선택적일지 모르지만 영적인 싸움은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아예 싸움을 걸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오래 전 들은 얘기입니다.
인왕산에 기도원이 많이 있었는제 어떤 분이 기도를 하는데 인왕산의 호랑이가 다가와서 꼬리로 툭 쳐보고
아무 기척이 없고 기도만 하니 슬그머니 사라지더라는 것입니다. 사탄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와서 툭 쳐보고 끄떡도 없으면 슬그머니 사라집니다.
옛날 병가에서는 백전백승이나 연전연승이란 상책이 아니라 하책이라고 합니다.
가장 상책은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도 가장 상책은 아예 싸우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뒤에 숨으세요. 그러면 하나님만 보고 도망 갈 것입니다.
나를 보면 공격하지만 하나님께는 공격하지 못하는 것이 사탄입니다.
시편의 기자는 18:2에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피하고 숨을 바위입니다. 요새입니다. 그에게 숨으면 전쟁은 없습니다.
싸우지 않고 이깁니다. 국가의 전쟁도 하나님이 싸우게 합시다.
우리 교회의 영적 전쟁도 하나님이 하시게 합시다. 싸우시는 그 하나님을 사랑합시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 사랑 때문에 우리를 위해 싸우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