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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마음속 사람저울이 고장 나면>의 줄거리:
법과 정의의 여신 디케는 천으로 눈을 가리고 한 손에는 칼이나 법전을, 다른 한 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재판에서 요구되는 형평성과 공정함을 상징하는 저울은 여신 디케와 그의 후손인 재판관들만의 몫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관계하는 각 사람의 존재의 무게를 측정하는 사람저울이 있습니다. 이 자체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울이 고장 나서 측정에 오류가 발생하게 되면 문제는 내 삶이 근본부터 고장 난다는 것입니다.
마음속 사람저울이 고장 나면
(시편 82:1~8)
1.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
2.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셀라)
3.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4.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하시는도다
5. 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여 흑암 중에 왕래하니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리도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마음속 사람저울이 고장 나면>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마음속 사람저울이 고장 나면’
우리나라 대법원 앞에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법과 정의의 여신 디케(Dike)의 상이 있습니다. 본래의 모습은 천으로 눈을 가리고 한 손에는 칼이나 법전을 들고 있고 다른 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습니다. 눈을 가린 것은 주관적인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겠다는 의지를 상징한 것입니다. 사람은 눈으로 보는 것들에 의해 마음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손에 든 칼이나 법전은 엄격한 법 집행을 의미하고 저울은 형평성과 공정함을 상징합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디케 상은 한복을 입고 의자에 앉아있는데 눈을 가리고 있지 않았습니다. 여기에는 실체적 진실을 밝은 눈으로 바라보라는 의미를 담았다고 합니다. 둘 다 실체적 진실에 다가서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눈을 가린 것은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않겠다는 것에 강조점이 있고, 눈을 뜬 것은 진실을 보겠다는 것에 강조점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디케의 상이 어떻든 간에 우리가 성경 본문과 연관 지어서 생각해봐야 할 것은 바로 손에 든 저울입니다. 이 저울의 공평함은 재판관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에덴에 세워두신 선악과는 일종의 저울이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 판단을 받아서 살았고,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의 모든 인간은 고장 난 저울로 판단하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재판관들의 잘못된 재판을 경고하고 그에 대한 징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 속에도 사람저울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판단을 하는 사람으로서 재판관을 지적하고 있지만, 판단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차원에서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사람의 존재무게를 측정하는 저울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저울이 고장 났을 때에 우리의 삶이 어떻게 파괴되는지를 경고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은 본래 사회를 구성하여 살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타인을 보고 수용하여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음속의 저울질이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 자체를 잘못이라고는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흔히 사람을 저울질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봅니다. 반대로 이해타산으로만 사람을 사귀는 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사람을 저울질하는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의 특성입니다.
문제는 사람저울이 고장 난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시려고 했던 인생의 계획들이 단 하나도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의 존재무게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을 때에 하나님은 나를 통해서 이 땅에 이루시려고 했던 일들을 막힘없이 이루어 가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통해 이루시려는 모든 일들은 사람관계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음속의 사람저울이 고장 나서 만나는 사람들의 무게를 잘못 측정하고 있다면,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를 통해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명자는 곧 사람저울이 고장 나지 않은 사람입니다. 저울이 고장 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시는 관점과 동일하게 봅니다. 달리 표현하면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에게 부여된 존엄성을 기본적으로 저울에 올려놓고 측정할 수 있는 사람이 온전한 저울의 소유자가 됩니다. 반대로 인간의 존엄성을 제거하거나 망각한 채로 무게를 측정하려는 마음은 잘못된 값을 매기는 망가진 저울입니다. 이러한 오류 값을 매기는 마음은 결코 사명자의 마음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 없고 지혜와 능력과 뜻을 허락하셔서 계획을 이루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잘못 측정하고 있는데 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이 뜻이 나타날 수는 없습니다.
보람도 삶의 의미도 온전하게 나타나기 위해서는 사람저울이 고장 나면 안 됩니다. 이 사람저울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존엄성을 측정하는 저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러한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1절을 보면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서 재판하시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신들’이란 맥락상 재판관을 일컫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신’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엘’이라는 단어입니다. 가브리엘 미가엘 등 흔히 천사를 나타날 때에 많이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표현할 때에도 ‘엘로힘’이라는 엘의 복수형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한편 하나님의 권력을 대행하는 권력자들을 지칭할 때에도 신들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재판관들을 신들이라고 한 이유는 이들이 유일한 참 신이신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서 재판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1절은 재판관들이 사람들을 재판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자리에 오셔서 재판관들을 판단하고 계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께서 재판관들을 판단하실 때에 그들의 저울이 망가져있음을 지적하십니다. 이 말씀을 재판관을 넘어서 우리에게 적용시켜봅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나서 판단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나를 판단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에 있는 사람저울이 망가진 상태입니다.
2절을 보면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악인의 낯을 본다’라는 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판결을 임의로 바꾸려는 자들에게 동조하는 것을 뜻합니다. 뇌물을 받고 실력 행사를 통해서 재판관의 판결을 굽게 하려는 자들을 악인이라고 칭한 것입니다. 정의의 여신 디케가 천으로 눈을 가린 이유도 이러한 악인의 낯을 안 보려고 한 것입니다.
이어서 3~4절을 보면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하시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이 말에 동의할 것입니다. 우리나라 헌법 제10조에서 인간이 타고난 천부적인 인권의 존엄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가난한 자와 고아의 인권이 유복한 자들에 비해서 부족함이 없음을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우리 마음의 체감 상태는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눈앞에서 부자를 대할 때와 가난한 자를 대할 때에 우리 마음의 움직임은 다릅니다. 서울대 학생을 대할 때와 중학교 졸업자를 대할 때에 우리 마음의 움직임이 다릅니다.
새삼 예수님이 대단하게 느껴지는 것은 고관대작들(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대제사장들)은 질타하시고 창기와 세리들을 진심으로 가까이 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3장 11~13절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16절에서는 이 여인을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행동이 이론적으로는 가능한 일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며느리를 얻는다면 재벌 딸이었으면 좋겠습니까? 고시원에서 사는 고아출신의 아르바이트생이었으면 좋겠습니까? 과연 이 둘을 동일한 선상에 놓고 보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일 것입니다. 반대로 사윗감으로 대학 교수와 자장면 배달부 중에 고르라면 선택의 여지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에 타인의 존엄을 배우는 데에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선 우리는 그 존엄의 근거를 알아야만 합니다.
대체 인간이 왜 존엄한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매트릭스”라는 영화를 보면 인공지능이 인간에게 묻습니다. 자신들의 관점에서는 인간이야말로 이 세상의 바이러스라고 합니다. 인간처럼 지구환경을 파괴한 생물이 없으며 인간처럼 전쟁을 좋아하는 생물도 없으며 인간처럼 배신과 모욕을 즐겨하는 생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공지능은 인간을 바이러스로 여겨 존엄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정말로 이러한 상태의 인간은 존엄함이 사라진 고장 난 저울을 지닌 모습입니다. 마음의 사람저울이 고장 나면 사명과 보람 있는 삶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잘못 측정된 인간 값을 가지고 오류 속에서 살아가니 결과로 나타나는 삶 전체도 오류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삶은 불행하므로 감사가 나올 수도 없습니다.
18세기의 계몽 사상가들은 인간 존엄의 증거를 “천부인권”이라는 말로 정의하였습니다. 평등과 자유 등의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음을 주장하였습니다. 칸트는 이성에 근거한 도덕적 능력을 근거로 인간 존엄성의 가치를 두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스스로 정할 수 있기에 인간은 존엄하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내가 상대방을 때리지 않는 이유는 그 사람도 나를 때릴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이성적으로 판단한 결과 남을 때리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생명자체를 존엄의 근거로 꼽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인간은 인공지능이 바이러스로 규정할 정도로 생물의 순리에 역행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존엄한 성경적 이유는 무엇일까요? 창세기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신학자들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에 존엄하다는 말을 합니다. 물론 이 말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보충되어야 될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나 자신이 하나님의 속성의 일부를 독립적으로 가졌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하나님과 살아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임을 뜻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가능성 때문에 인간은 존엄한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 있는 하나님 크기의 공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 존엄의 근거입니다.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 있고 하나님과 관계 맺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품고 있기에 인간은 존엄한 것입니다.
이러한 근거를 전제로 하여 사람을 저울질 해보기로 합니다.
재벌 총수와 노숙자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는 자연히 재벌 회장님을 더 귀하게 여기려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나 스스로 깨우쳐야 합니다. 마음속에 있는 사람저울에 재벌과 노숙자를 올려놓습니다. 이들은 모두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속에 들어오신 하나님은 무게로 치면 지구 전체는 고사하고 무한한 우주보다도 더 무거우신 분이십니다. 노숙자에게도 재벌에게도 이 우주보다 무거우신 하나님께서 들어오실 수 있는데, 거기에 덧붙일 재력이라는 무게는 티끌만큼의 차이도 나지 않습니다. 이것을 스스로 깨우치고 설득시키고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원죄의 체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연히 재벌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5절을 보면 ‘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여 흑암 중에 왕래하니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리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땅의 모든 터’는 곧 이 땅의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인간 세상의 터전은 곧 인간의 존엄성입니다. 반대로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할 때에 삶의 터전도 망가지게 됩니다.
이것은 목사님들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형예배당을 가지고 있고 수많은 교인을 거느린 목사님의 자리는 상석입니다. 그것은 큰 교회 목사님들만의 의식이 아닙니다. 상가에서 작은 목회를 하시는 목사님들이나 시골에서 미자립 교회를 목회하시는 목사님 스스로도 자연스럽게 서열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 있는 마음의 공백을 가졌다는 점에서는 조금의 차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무게에 비하면 몇 천 억짜리 예배당의 무게도 티끌의 티끌에조차 미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올린 저울의 기울기는 결코 기울지 않습니다.
인간사회가 부여하는 것들이 그렇습니다. 지위나 신분이나 소유나 성별과 학식의 유무 같은 것들은 하나님의 무게로 인해 결정된 인권 앞에서 인식이 불가능할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고관대작들을 젖혀두시고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인 세리나 몸을 팔아 먹고사는 창기들과 더불어 식사하시고 친구처럼 지내셨습니다. 당신이 십자가를 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세상에서 어떠한 지독한 죄명을 가진 죄인일지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인정하기만 한다면 우주전체보다 무거운 하나님을 마음에 모셔 들일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더 가까이 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이 십자가를 붙잡을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유력자들을 가까이 하실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은 사회적 신분과 재산으로 말미암아 상대적으로 세리나 창기들보다 스스로를 우월하게 여겼습니다. 그러한 자들은 십자가를 붙잡을 수 없었고 오히려 스스로의 가능성을 뭉개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셔 들일 수 있는 길을 스스로 막았던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죄인임을 인정하고 죽지 않는다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과 연합하여 하나님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을 우월하게 여겼기에 십자가를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며느리를 골라야 할 처지에 있다고 칩시다.
아들이 고아 출신의 아이를 사랑하고 있는데, 서울대 출신의 약사도 중매가 들어왔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가치관으로 보자면 이 둘의 차이는 전혀 없습니다. 두 사람의 마음에는 모두 우주보다 무거우신 하나님의 무게를 담을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이 가진 학력이나 재산의 차이로는 저울을 기울게 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마음의 사람저울을 가질 때에 아들이 사랑하는 고아 출신의 며느리를 조금의 미련도 없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소중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붙잡으면 그 아이 속에 우주보다 무거우신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장갑이 될 수 있는 며느리라면 무엇이 부럽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마음에서 이렇게 올바른 사람저울이 작동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스스로 마음의 공백에 하나님을 모셔 들이려 하지 않고 모셔본 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늘 세상에 대한 가치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지라도 하나님의 이름은 결코 마음 안으로 들어오실 수 없고 겉돌게 됩니다. 하나님을 가져서 하나님의 맛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마음은 이 세상이 부여하는 무게가 전부인줄로만 압니다.
인간 존엄함의 근거가 되시는 하나님을 제외하고 무게를 재면 학력도 재산도 없는 고아 출신의 며느리의 인권은 지켜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VIP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에 VIP자리를 차지한 사람이 있는 한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힘과 능력과 지혜를 받는 사명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자는 제대로 된 사람저울을 가진 자입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모셔 들일 수 있는 하나님 크기의 마음 공백을 가지고 있음을 아는 자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사명자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마음에 하나님을 모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설령 이 지구를 다 가진 사람이 있을지라도 그의 존엄함이 다른 이들보다 조금도 나을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누구나 마음에 우주보다 무거우신 하나님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3절에서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라고 하신 것은 이들을 도우라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가능성을 보라는 것입니다.
어떤 열악한 환경에 있고 어떤 죄악으로 감옥에 갇혔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설령 살인죄 강도죄 강간죄를 지었더라도 여전히 그가 존엄한 이유는 십자가를 붙잡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이러한 죄악을 고백함으로서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한다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모셔 들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 존엄함의 가능성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닮아 인간의 존엄함을 사람저울에 올릴 수 있을 때에 여러분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판단과 능력과 뜻이 통과하는 사명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로 하나님을 모셔 들여 하나님 맛에 빠져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똑같은 가능성을 봄으로써 하나님께서 마음 놓고 나를 통해 이루시려는 모든 계획을 이루시는 사명자들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