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리넷 연주자의 근황
암 같은 큰 병에 걸려 헤매는 사경(死境)
부처를 본 사람은 머리를 깎고
예수를 본 사람은 신학교로 간다
설마 돈이 보여 장사하겠다고 나선 사람은 없겠지…….
방과 후 청소 마치고 내려가던 고등학교 때 음악실 계단에서 듣던,
창 너머
텅 빈 교정 중앙 화단에 샐비어가 붉디붉은데
고요를 흔들며 퍼져나가던,
그래서 샐비어 꽃술을 간질이던 클라리넷 소리
나의 옛 클라리넷 연주자는
꽃술이 움직이듯 내 마음의 고요를 흔들어놓고
이제는 클라리넷을 놓았다 한다.
사경을 헤매고 그가 본 것은
그의 마음 깊은 저곳이었던가
나의 샐비어만 나와 함께 여름이 길다.
여자 J
가까운 여학교의 학생들 웃음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웃는 소리는 데시벨이 높다
꼭 한번 한 기 밥 차려주고 싶어 불렀다던 정갈한 점심 식탁
카키빛 레인코트가 그리웠을 것이다
비 오는 날 밤 우산 속 담소가 그리웠을 것이다
월계동 언덕바지 작은 방에서 받던 전화가 그리웠을 것이다
조용하게 흐르던 뚝섬유원지 강물이
잔디를 만지고 가던
바람이 그리웠을 것이다
수줍게 숟갈을 드니
어느새 눈치 없는 웃음소리만 찾아와 쳐다보고 있었다.
여수
1
떠나려니 비가 온다
여수에서는
여기 언젠가 와본 듯한
그럴 리 없는 세월 속으로
비가 내린다
2
크고 희고 힘이 셌던 여수서초등학교 아이들
벌교남국민학교 야구부는 상대가 안 됐었다
3
장어탕에 넣는 숙주는
비릿했다
그래서 갯내가 덜 나게 하는지
연안부두 터미널
거문도 배가 육지 바람 머금는다
4
사슴의 눈 같은
여수(麗水).
― 『구름의 이동속도』, 문예중앙,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