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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16장 8-15절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승천 이후 제자들은 스승 없이 복음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스승 없이 복음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인성으로는 떠나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승천하시기에 앞서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는 말씀도 하셨는데, 신성과 인성이 나눠지거나 분리되지 않는다고 할 때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것이 그들과 함께 하지는 않겠지만, 전 그리스도는 여전히 그들과 함께함으로 복음 사역을 감당케 하신다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의 내용 속에서는 성부의 영이요, 성자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을 보내어 그들과 함께 복음 사역을 감당하도록 하시겠다는 말씀도 하십니다. 이때 세상은 복음 사역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그들에 앞서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들이 세상에 속하였다면 미워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세상에서 구별된 자로 부르셨기 때문에, 그래서 더 이상 세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이기 때문에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런데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가?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때 실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한다고 할 때 단지 마음으로만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 입장에서는 이단처럼 여기고 죽이기까지 하는 모습까지 있게 될 것인데,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때 실족하여 넘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말씀을 하신다는 겁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 제자들은 예수님이 잡혀가실 때처럼 두려움으로 있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담대함으로 복음을 증거 하게 되는데, 이 모든 것은 성령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셔서 그들을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고 계신 시점에서 보자면 예수님께서 떠나신다고 하시고, 또 박해와 같은 어려운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할 때 제자들의 마음에는 근심함으로 가득하였습니다. 바로 그들에게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더 유익하다고 하시는데, 왜냐하면 그때서야 비로소 성령 하나님께서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난 뒤 성령 하나님이 오신다는 표현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기 이전에는 성령 하나님이 오시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늘 그들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 사역을 완성하시고 난 뒤에 오신다고 해서 그때서야 비로소 오시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약 백성들이 참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있다고 할 때 그들에게도 성령 하나님의 내적 역사가 분명 있었는데, 왜냐하면 성령 하나님의 내적 역사 없이는 참된 믿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지상 사역을 완성하시기 전 공생애 기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이 증거 되고 그 복음에 대하여 믿음의 역사가 있다는 것은 거기에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런 표현을 통해 예수 그리스께서 완성하신 사역을 성령 하나님께서 적용하신다는 것인데, 구약이나 예수님 공생애 기간에는 오실 그리스도, 완성하실 그리스도를 내다보는 방식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취와 성령 하나님의 적용이라고 할 때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취 이전이지만 성령 하나님께서 적용하시되 성취의 확실성에 근거해서, 그 성취를 내다보게 하심으로 역사하셨던 겁니다. 이런 성취의 확실성, 성취를 내다보게 하시는 것이 바로 말씀에 있는 것이고, 그 말씀을 믿음으로 적용하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인 겁니다. 동일한 성령 하나님께서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것을 적용하는 것으로 역사하시는 겁니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오시면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인 성령 하나님이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할 것이지만, 내가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낸다고 할 때 성령 하나님을 보내셔서 특별히 제자들, 복음 사역을 감당해야 할 사도들을 통해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설명하십니다. 8절입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9절 이하 11절을 통해 말씀하시는데, 성령 하나님께서 오순절에 오셔서 하시는 일은 세상을 책망하신다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가 성령 하나님의 사역을 말할 때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것을 성령 하나님께서 적용하시는 이런 부분에서 말하게 됩니다. 성령의 내적 역사라고 해서 택한 백성이 구원과 영생에 이르도록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전에도 말씀드린 바 있지만 구약 사울 왕에게는 내적으로 역사하셨다기보다는 외적 충동으로 예언까지 하게 하신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 하나님의 사역은 반드시 택자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 택자가 아닌 자들에게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히브리서 6장입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히6:4-6)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에 대하여 택자도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까지 참여한 바가 되었지만, 또한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기까지 했지만, 그들이 타락하여 다시금 새롭게 하여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결코 택자가 아닙니다. 택자가 아닌데 어떻게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가 성령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볼 수 있는가? 택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 가운데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열 두 명의 제자 가운데 가룟 유다는 요한복음 13장 이후의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택자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복음을 증거 하는 사도로 부름을 받아 복음을 증거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복음의 사실성을 기적의 역사로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택자가 아닌데도 성령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그런 일을 하시더란 것입니다. 때문에 성령 하나님의 역사는 오직 택자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이 효력 있도록 적용하시는 대상은 오직 택자 뿐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오면, 성령 하나님께서 오셔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오늘 본문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일단 여기서 ‘책망하다’(ἐλέγχω[엘렝코])는 단어는 빛으로 가져오다, 드러내다, 증명하다, 견책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우리말 그대로 책망하다고 번역하게 되면 죄에 대해서는 책망한다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다고 하면 뭔가 어색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분(김성수 교수)은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에서 ‘책망하다’는 단어가 히브리어 ‘יָכַח’[야카흐]를 주로 번역한 것을 언급하면서 이 단어의 뜻이 ‘옳고 그름을 따지며 논의하거나 논쟁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하나 옳고 그름을 따지면서 증명하거나 설득하며 타이르는 것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한다는 것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하나하나 옳고 그름을 따지면서 증명하고 설득하여 타이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누구를 통해 하시는가? 제자들입니다. 사도들입니다. 그들을 통해 복음을 외적으로 전파할 것이고, 그렇게 전파된 복음을 통해 성령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령 하나님은 말씀과 상관없이 역사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번 정리해 두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음성을 통해 일하십니다. 그러나 그 음성이 사람의 지성을 파고 들어 마침내 결실을 맺는 것은, 그래서 돌 같은 마음이 부드러운 살결과 같은 마음이 되는 것은 성령 하나님의 내적 역사로 말미암습니다. 만약 성령 하나님의 내적 역사가 없다면 제자들을 통해 들려지는 음성은 비록 복음이요 진리라 할지라도 공허한 소리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3장 6절에서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칼빈).
세상을 심판하리라, 하나하나 옳고 그름을 따지면서 증명하고 설득하여 타이르겠다고 할 때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시는데, 먼저 9절입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성령 하나님께서 제자들에게 오셔서 그들을 통해 복음을 증거 하게 하실 때 가장 먼저 죄에 대하여 드러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죄를 드러내는 데 있어 잣대가 되는 것은 율법입니다. 율법은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고 다른 하나는 사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불신자의 죄를 드러낼 때 율법의 두 번째 돌판 부분, 즉 사람과 관련해서 죄를 드러내는 것이 좀 더 접근성이 좋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불신자는 하나님을 믿고 섬기지 않는 것 자체를 죄라고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죄인임을 드러내는 것이 불신자들에게는 좀 더 용이합니다. 외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내적인 의미로까지 확대되면 더욱 용이한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성령을 보내어 사도들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게 하실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 자체가 죄라는 것을 드러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오셔서 예수 믿지 않는 죄만을 드러내신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죄에 대하여 드러내시겠지만 특별히 예수 믿지 않는 것이 죄임을 드러내시겠다는 것입니다. 모든 죄의 가장 근본이 되는 죄는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지만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실 모든 사람은 아담 안에서 함께 타락하여 허물과 죄로 죽은 사람으로 있습니다(엡2:1). 죽었다는 것은 감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죄를 설명해도 죄에 대한 감각이 없습니다. 물론 육체적으로 살아 있어서 죄를 의식하기도 합니다. 율법의 두 번째 돌판 부분에 있어 그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의식하는 법은 없습니다. 또한 사람들 사이에서 죄를 의식한다고 해서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 사람에게 있는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적인 타락과 함께 전적인 무능력까지 말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성령 하나님께서 복음 사역자를 통해 무엇을 드러내고자 하시는가? 죄인이라는 사실, 그것도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 자체가 죄라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죄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모든 죄로부터 해방되는가? 궁극적으로는 모든 죄로부터 해방되지만 지상에서는 모든 죄로부터 해방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신자들 안에도 살인이 있고, 간음이 있고, 도둑질 등이 있습니다. 참된 신자라고 할 때 실제적인 살인으로 연결되는 일은 드물지만 여전히 마음으로 짓는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간음과 도둑질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신의 연약함과 악함으로 어떤 경우에는 실제적인 간음과 도둑질이 일어나지만 더욱 많은 부분 나타나는 것은 마음으로 짓는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죄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라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죄는 구원이 없습니다. 영생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난 뒤 우리의 부패성으로부터 나오는 이런 저런 죄들은 구원을, 영생을 취소할 수 없습니다. 왜 죄에 대하여 말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으로 말하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구원도, 영생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10절에서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오셔서 죄만을 드러내시는 것이 아니라 의에 대하여도 드러내시는데, 이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게 되는 의입니다. 그런데 그 의를 설명하면서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간다. 그러니 너희가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후 승천에 대한 내용입니다. 승천 이후 재림하실 때까지는 인성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오시면 의에 대하여 증거 하시겠다고 하시는데, 의를 증거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을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로마서 4장 25절에 보면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의 죽음은 우리의 죄 때문이고, 그의 부활은 우리의 의를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의를 말하고자 한다면 부활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 더 나아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승천을 말씀하시는 것은 지상 사역의 완성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지상에서의 모든 사역을 완성하심으로 하나님께서 그 모든 사역을 받으셨기 때문에 하늘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천상에서의 사역이 시작되는데, 지상에서 이루신 바가 결코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천상에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 분으로 계십니다. 로마서 8장 34절입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죽음과 부활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하나님 우편에 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것을 통해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의에 대하여 말씀하신다고 할 때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 그래서 다시는 보지 못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승천 자체가, 아버지께로 가시는 것 자체가 아버지께서 받으실만한 의를 획득했다는 것입니다. 그 의로 천국 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를 만족했다는 것이고, 성령 하나님은 그런 의를 복음을 통해 주고자 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죄만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도 말씀하시는 겁니다.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난 뒤 심판에 대해서도 말씀하시는데, 11절입니다.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일단 심판을 받았다고 할 때 이것이 최후 심판의 내용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 성령 하나님께서 오셔서 사도들의 복음 사역으로 증거 하시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복음을 증거 함에 있어서 최후 심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복음을 통해 알리시고자 하시는 일차적인 내용은 이 세상 임금이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세상 임금은 누구입니까? 요한복음 12장 31절, 그리고 요한복음 14장 30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을 의미합니다(엡2:2). 요한복음 8장 44절에서 언급한 마귀,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는 악한 영입니다.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다는 것은 창세기 3장 15절의 성취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비록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지만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하실 것이고, 승천하시기까지 할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 말씀처럼 그가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말씀까지 하십니까? 빌립보서 2장 9절과 10절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마태복음 28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28:18)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이전이나 이후나 마귀는 계속해서 활동합니다. 사도 베드로가 증거 하는 것처럼 우리의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습니다(벧전5:8). 이런 점에서 사도 베드로는 이런 권면도 하게 됩니다.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5:9) 그러나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다는 것은 심판 받기 전에도 마찬가지이지만, 심판을 받았다는 분명한 증거가 있는 이상 승리하신 그리스도로부터 그의 백성을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대적 마귀에 대하여 말하면서 너희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대적하라고 하면서도 다음의 말씀을 덧붙입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전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누구 안에서 그렇게 하시는가?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세상 임금인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성령 하나님께서 오심으로 사도들로 하여금 복음을 증거 하게 하실 때 심판에 대하여 증거 하신다는 것은 그가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것이고, 이기셨기 때문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결국 무엇까지 확증하게 만드는가? 최후 심판까지 확증하게 만듭니다. 이것을 요한계시록 20장 10절은 이렇게 증거 합니다.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특히 마귀만이 아니라 마귀에게 속한 거짓 선지자도 영원한 심판 가운데 있다는 것을 밝히는데, 역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귀로부터 승리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 역시 마귀로부터 승리를 얻은 자라는 것입니다. 이 승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방금 언급한 베드로전서 5장의 내용으로 하자면 하나님께서 모든 은혜로 우리를 견인하시는 역사로 말미암습니다. 그가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고, 굳건하게 하시고, 강하게 하시고, 터를 견고하게 하심으로 승리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종합적으로 보면 성령 하나님께서 오셔서 하시는 일은 사도들의 복음 사역을 통하여 죄가 무엇인지를 드러내시고, 의가 무엇인지를 드러내신다는 겁니다. 여러 가지 죄악들이 있지만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이고, 그 죄에서 해방되어 의를 얻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그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모든 지상 사역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그를 받으셨다고 할 때 그가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귀의 모든 권세를 멸하셨다는 것입니다. 본래 타락한 모든 인생은 마귀의 권세 아래 있었지만, 마귀의 모든 권세를 깨뜨리고 이기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를 믿고 그에게 속해야지만 그리스도께서 획득하신 의를 우리에게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복음이 증거 되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가지만 내가 아버지 이름으로 보낼 성령, 그가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로 하여금 유익이 있을 것인데, 그 유익 가운데 하나가 담대함으로 복음을 증거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두려워하고 있지만, 그래서 말로는 주와 함께 하겠다고 하지만 누구도 예외 없이 도망하게 되겠지만, 성령이 오시면 그 양상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때 복음을 전하면 받아들이는 자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자들 가운데서는 지난주 말씀하신 것처럼 박해하고 이단으로 정죄하고 죽이기까지 하는 일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다 할지라도 성령 하나님이 오셔서 너희로 하여금 복음을 증거 하실 때는 결코 두려워 도망하는 자로 있게 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12절에서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공생애 3년 동안 누구보다 많은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 제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다고 말씀합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에는 풍성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에는 깊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듣기에 그들이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비록 3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놀라운 기적들을 보았지만, 심지어 그들 스스로 그 기적을 행사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무지했던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면서도 무지한 상태로 전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연약하기도 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했지만, 그런 고백이 무색할 정도로 연약함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지금 감당하지 못한다고 해서 계속해서 감당하지 못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을 제자로 부르시고 복음 사역을 위한 사도로 부르신 것은 지금은 감당하지 못하지만 앞으로는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서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지만 말씀을 깨닫지도 못하는 저들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결국 말씀하신 일이 일어나게 될 때 실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나아가 성령 하나님께서 오시면 실족이 아니라 담대함으로 복음을 전하도록 하기 위해서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이 모든 말씀이 지금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중을 위한 것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그 나중이 언제냐? 13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지금은 혼란스럽습니다. 6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근심이 앞섭니다. 얼핏 알아들을 것 같으면서도 정확하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어딜 가신다고 하는데, 어디를 가시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가야지만 보혜사인 성령 하나님이 오신다는 말도 생소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지금은 무지하지만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런 무지가 제거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연약하지만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더욱 담대함으로 진리를 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처음부터 누가 진리를 압니까? 진리를 모르다가 진리를 알게 되는데, 진리를 안다고 해서 처음부터 풍성하게 아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진리를 아는 거기에도 자라남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진리의 지식의 풍성함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은 받았지만 구원의 신앙 안에도 이런 저런 불순물이 있습니다. 그런 모든 불순물이 제거되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의 깊이와 풍성함을 깨닫는 일에는 결코 적지 않는 시간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런 시간이라 할지라도 진리의 성령께서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시지 않는다면 여전히 무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여러분이 진리를 깨닫는 모든 일에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의 조명하심이 있는 겁니다. 여러분의 지혜와 지식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뛰어남이 아닙니다. 아무리 뛰어난 지성을 가지고 있다 해도 성령의 조명하심 없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참된 지식의 풍성함을 맛볼 수도 없습니다.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다른 말씀을 말하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자주 확인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아버지의 말씀만을 전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말씀을 아들이 전하는 것이고, 아들의 말씀을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면 제자들의 전해야 하는데, 그때 성령 하나님은 사도들의 입을 통해 오직 들은 것만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도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일치되는 것을 말씀하신다는 것인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지금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을 말하고 있지만 성부 성자 성령은 분리되지 않는 한 하나님으로 일치되는 뜻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기록된 성경, 그것도 더 이상 새로운 계시가 없이 완성된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다고 할 때 이 성경 외에 또 다른 계시를 말하는 것 자체는 결코 성령의 말씀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진리의 성령으로 진리로만 인도할 때 거기에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장래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신다는 것도 새로운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들은 것을 말한다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하여 말씀하신 그 모든 말씀을 사도들의 입을 통해서도 증거 하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들은 그들의 서신과 요한계시록을 통해 장래 일에 대하여 예언한 바 있는데, 이 모든 말씀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부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속해서 말씀해 오신 내용입니다.
지금은 알아듣지 못할지라도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셔서 결국 복음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무지하지만, 지금은 연약하지만,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 진리로 깨닫게 하시고, 진리로 무장하여 담대하게 진리를 증거 하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14절과 15절은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고 말씀합니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아들로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역은 성부와 성자의 영으로 성부와 성자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드러낸다는 것은 내가 아버지의 것으로 그에게 영광을 올려드린 것처럼, 성령 역시 내 것을 가지고 내 영광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질서를 통해 삼위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역하시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아들은 이 땅에 오셨고 이 땅에서 행하시는 모든 것이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하셨던 겁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하셨다고 할 때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을 마치면서 승천하실 것을 말씀하실 때는 자신은 가지만 내가 아버지 이름으로 보낼 성령 하나님을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성부의 영이면서 성자의 영이신데, 그가 오셔서 하는 모든 일이 내 것을 가지고 나의 영광을, 나아가 성부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신다는 겁니다.
그럼 성령은 누구를 통해 일하십니까? 제자들입니다. 사도들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아버지의 영광을, 아들의 영광을, 성령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한다면 성령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라, 그 가르침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에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그 가르침은 성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성부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라 가르쳐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오시면 너희를 진리로 인도하신다는 겁니다. 너희가 무엇으로 복음 사역을 감당해야 하는가? 진리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제자들에게 오신다는 것은 결국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제자들을, 사도들을 그러한 길로 인도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겠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사역은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 증거를 통하여 비록 고난과 박해를 당할 것이지만, 그리고 그런 고난과 박해에 대하여 결국에는 영화롭게 하실 것이지만, 그들의 사역의 목적은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구의 영광인가? 아버지의 영광입니다. 아버지와 분리할 수 없는 성자의 영광이요, 성령의 영광입니다. 그 영광을 위하여 진리로만 가르치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진리는 ‘성령의 가르치심을 따라’인 것이고, 성령 하나님의 가르침은 ‘성자의 가르침과 동일한’ 가르침인 것이고, 성자의 가르침은 ‘성부의 가르침과 동일한’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 동일한 가르침을 성령께서는 사도들을 통해 증거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할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그분의 것으로 그분께 올려드려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습니다. 그분에게서 받은 것으로 우리는 그분께 다시금 올려드려야 합니다. 내 것으로 하나님께 올려드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합당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기에 교만이 있습니다. 동등하신 삼위 안에서도 질서가 있습니다. 성부가 전 신성의 근원이시고, 성부로부터 성자가 나셨고,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신 분이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성자는 늘 성부의 영광을,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영광을 위하십니다. 그러나 자의로 하지 않습니다. 그의 것으로 합니다. 성자는 성부의 것으로, 성령은 성자의 것으로 합니다. 삼위 하나님 안에서조차 이런 방식으로 영광을 올려드린다면 피조물인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다윗 왕은 성전을 위한 모든 것을 준비함에 있어 다음과 같이 고백했던 겁니다.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29:14)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리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본질입니다. 이 예배를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을 통해 드리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주일 예배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께 예배로 드려야 합니다. 다름 아닌 주께로부터 받은 것을 다시금 돌려드리는 것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의 말씀 받아 그 말씀대로 다시금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순종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하라, 하지 말라고 할 때 받은 말씀 그대로 올려드리는 것, 그것이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참된 예배가 있고, 거기에 참된 경배가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합당한 영광의 내용이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