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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이야기 스크랩 도림강당 이야기
아라 추천 0 조회 67 14.09.07 16:2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도림강당(道林講堂)
소 재 지 :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308
건 축 주 :  풍산김씨 문중
건축시기 :  1758년(영조 34), 1805년(순조 5)
이건시기 :  1806년(순조 6)
소 유 자 :  풍산김씨 문중(관리자 : 김원재)
문 화 재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49호, 1982년 2월 24일 지정, 1동

건축 이야기
도림(道林)이라는 말은 추원사와 강당이 보림산(甫林山) 도봉(道峯) 아래에 위치한데서 따온 말이다. 추원사(追遠祠)는 원래 예천 호명에 있던 쌍암사(雙巖祠)가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사당의 이름이 바뀐 것이다.

건축 배경
1758년(영조 34) 추원사(追遠祠)를, 1805년(순조 5)에는 강당(講堂)을 지었다.
추원사는 1806년 절골에서 이건하였고, 고직사는 사찰 암자 건물을 이건하여 그 구재를 활용 건립하였다.

건축 특징
추원사는 강당의 후면 우측에 단을 높이어 조성하였는데,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을 한 일반적인 묘우 건물의 격식을 따르고 있으나 이익공으로 격식을 높혔다. 정면이 동향하고 있으며 낮은 토석담에 둘러 쌓여 있다.
담 밖에 방 1칸, 마루 1칸의 전사청이 있으며, 남쪽에 강당이 배치되어 있고 동쪽의 한단 낮은 곳에 고직사가 놓여 있다. 초익공 5량가이다.
도림강당은 추원사의 남쪽 조금 낮은 곳에 건립되어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가운데 6칸은 마루를 깔고 좌우에는 온돌방을 두었다. 전면 4개의 기둥은 원주이고, 후면은 중앙칸 2본만 원주이다. 전후면은 판벽과 판문으로 되어 있다.
기둥 위에는 주두를 놓고 그 위에서 보와 도리가 결구되어 있는데, 도리의 단면이 팔각형인 것이 특이하다.
이 건물은 지붕 구성이 독특한데 맞배지붕의 양 끝에 다시 맞배지붕이 직교하여 전체적으로 工자형의 용마루를 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工자형의 지붕은 향교의 명륜당이나 서원의 강당에서 간혹 사용되고 있다.
대청 상부는 5량가로 자연스럽게 휜 대량을 놓고, 그 위에 동자루를 세워 종량을 놓았으며 제형 판대공 위에 소로를 곁들여 마루도리를 받고 있다.
강당은 조선 후기 건물로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고 있으며 팔모 도리를 사용하고 있고, 평면에 비하여 지붕 구조가 특이하며 흔히 볼 수 없는 외관을 구성하고 있다.

건축 구성
추원사(追遠祠), 도림강당(道林講堂), 사당(祠堂)

현판
도림강당(道林講堂)
봉황문(鳳凰門)
추원사(追遠祠)
진수재(進修齋)
저존재(著存齋)

 

주향자
- 김대현(金大賢, 1553~1602)
자는 희지(希之)이고, 호는 유연당(悠然堂)이다. 호는 도연명의 시 ‘유연견남산(悠然見南山)’에서 뜻을 따온 것이라 한다.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청백리에 녹선된 증조 공조참판 김양진(金楊震)은 재주와 덕망이 일세의 으뜸이었다.
조부 김의정(金義貞)은 또한 일찍이 글과 행실로 이름이 났고, 세자시강원 사서를 지냈으나 낙향하여 가학의 전통을 수립하였다.

아버지 김농(金農)은 장예원 사의를 지냈다. 김대현은 1582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573년 이미 돌아가신 어머니에 이어 1591년 아버지 사의공이 별세하자 벼슬에 나아갈 뜻을 두지 않고 담박하게 지냈다. 이덕형·김륵 등의 천거로 1595년에 성현도찰방(省峴道察訪)을 제수 받았고, 이어 상의원 직장, 예빈시 주부로 옮겼다가 1601년 산음현감이 되었다. 그가 관직을 역임한 기간은 비록 얼마되지 않지만, 그는 일찍이 작은 벼슬이라도 마음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어떤 벼슬을 하든지 간에 백성의 괴로움과 기아를 해결하는데 진력하였다.

그는 9명의 아들과 딸 셋을 두었다. 일찍 요절한 아들 하나를 제외한 아들 8형제가 모두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 중 다섯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1629년 인조가 팔련오계지미(八蓮五桂之美:과거에서 사마시에 합격하는 것을 연방(蓮榜), 문과에 급제하는 것을 주방(桂榜)이라 하는 데서 나온 말이다.)라 칭찬하고, 마을의 이름을 오미동(五美洞)이라 내렸다.

이어 김대현에게 가선대부 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를 증직하고 부인에게는 정부인을 증직하고 예관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이는 공의 아들 다섯이 문과에 급제한 것을 기린 것이다.

저서로 『유연당집(悠然堂集)』 2권이 있다.
- 김봉조(金奉祖, 1572~1603)
자는 효백(孝伯)이고, 호는 학호(鶴湖)이다.
김대현의 장남이다. 서애 류성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임진왜란 때는 의병장 홍의장군 곽재우 장군과 함께 화왕산성을 지켰다.
1601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613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헌부감찰, 단성현감, 익산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1634년 현재의 병산서원 건에 주역할을 담당하였다.
저서로 『학호집(鶴湖集)』 2권이 있다.
- 김영조(金榮祖, 1577~1648)
자는 효중(孝仲)이고, 호는 망와(忘窩)이다. 김대현의 둘째 아들이다.
어린 시절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망와가 살고 있던 영주에 들렀는데 망와가 학봉에게 사신으로 갔던 일을 물으니, 학봉이 기특하게 여겨 그 기행문인 『해사록(海?錄)』 3권을 모두 내어 주어 읽게 하였다고 한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뒤에 학봉의 사위가 되었다. 1601년 생원이 되고 1612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벼슬은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저서로 『기행록(記行錄)』, 『서정록(西征錄)』, 『남정록(南征錄)』과 『망와집(忘窩集)』 4권이 있다.
- 김창조(金昌祖, 1581~1637)
자는 효언(孝彦)이고, 호는 장암(藏庵)이다. 김대현의 셋째 아들이다. 성품이 강직하고 시문에 능하였다. 1605년 진사가 되었다. 관직은 조봉대부 의금부 도사이다.
저서로 『장암집(藏庵集)』이 있다.
- 김경조(金慶祖, 1583~1645)
자는 효길(孝吉)이고, 호는 심곡(深谷)이다. 김대현의 넷째 아들이다. 1609년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열중하였다. 인조 반정 후 비로소 벼슬길에 나아가 이산현감을 지냈다.
- 김연조(金延祖, 1585~1613)
자는 효석(孝錫)이고, 호는 광록(廣麓)이다. 김대현의 다섯째 아들이다. 1606년 학가산 서미동 중대사에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에게 자치통감강목을 배웠다. 1610년 진사에 합격하고 1612년 대과에 급제하였다. 권지승문원정자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곧 돌아갔다.
저서로 『광록집(廣麓集)』이 있다.
- 김응조(金應祖, 1587~1667)
자는 효정(孝徵)이고, 호는 학사(鶴沙)이다. 김대현의 여섯째 아들이다. 16세 때 서애 류성룡에게 배웠다. 1613년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의 난정에 과거를 포기하고 여헌 장현광의 문하에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1623년 알성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후 여러 벼슬을 거쳤다. 병자호란 때 중형 망와공과 함께 남한산성에 인조을 호종하였다. 1640년 인동도호부사가 되어 스승 장여헌의 사당을 세워 영정을 봉안하였다. 관직은 가선대부 한성부 우윤에 이르렀다.
저서로 『학사집(鶴沙集)』 6권 등이 있다.
- 김념조(金念祖, 1589~1652)
자는 효수(孝修)이고 호는 학음(鶴陰)이다. 김대현의 일곱째 아들이다. 재종숙 김수현의 양자가 되었다. 1636년 생원시를 거쳐 과천현감에 임명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현의 향리들과 함께 관악산 바위굴에서 청군과 대치하고 격문을 내어 의병을 일으켜 근왕하고 과천을 지켰다. 1639년 공조좌랑, 1641년 안산군수를 역임한 후 종친부전첨(宗親府典籤)에 이르렀다. 1636년 근왕원종공훈(勤王原從功勳)으로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겸 경연참찬관에 증직되었다.
- 김숭조(金崇祖, 1598~1632)
자는 효달(孝達)이오, 호는 설송(雪松)이다. 김대현의 아홉째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한 재주가 있어 10여 세에 문예를 이루었으며, 또 효성이 두터웠다. 1624년 진사시에 합격한 후 성균관에 유학하여 대과를 목표로 학문에 정진하던 중 모친상을 당해 과거를 단념하고 고향 오미로 내려왔다. 1629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였다.
사은하던 날 임금이 어전에 불러 가문과 거주를 물은 다음 팔련오계지미(八蓮五桂之美)가 있음을 알게 되어 동리의 이름을 고쳐서 오미동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마을 이름은 원래 오무동(五畝洞)이었다. 이는 증조 잠암공이 1545년 변을 당한 후 자제 화남공에게 과거도 보지 말고, 벼슬도 하지 말고, 농사나 지으라는 뜻으로 이름을 농(農)으로 고쳐 지어주고, 마을 이름도 오릉(五陵)에서 오무로 고친 것이었다. 1632년 승문원주서겸 춘추관기주관이 되어 날마다 경연에 들어가 뛰어난 은총을 받았는데 갑자기 병이 들어 사망하였다.
저서로 『설송집(雪松)』이 있다.

 

안동 > 풍산권 > 오미동
- 풍산김씨의 500년 세거지 마을
오미리는 풍산현에 속하였으나 1895년 안동군 풍북면에 편입되고, 1914년 괴정리의 일부와 예천군 위라리의 일부를 합하여 오미리라 하였다. 1934년 풍산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 안동시 풍산읍에 속하게 되었다.

오미 1리와 2리로 나누어져 있고, 오미 1리는 동촌, 미남, 방계미, 서촌 등 4개 마을, 오미 2리는 개거리, 새날, 수룡골, 산골, 송지 등 5개의 마을이다.

오릉(五陵)·오미(五美)는 오미리의 중심이 되는 마을이다. 오미동은 뒷산은 학가산의 한 갈래인 죽자봉, 동쪽산은 아미산, 서쪽산은 도인산이 감싸 안은 풍산김씨(豊山金氏) 500년 세거지(世居地) 마을이다.

풍산김씨가 처음 정착한 것은 조선 초기 시조 김문적(金文迪)의 8대손 김자순(金子純) 때부터다. 이때 마을 이름은 다섯 개의 산줄기가 뻗어 있다고 해서 오릉동(五陵洞)이라 불렀다. 그 후 김의정(金義貞)이 을사사화 후에 낙향하여 오무동(五畝洞)으로 고쳤는데 능이란 글자가 언덕을 뜻하지만 임금의 무덤을 뜻하기도 해서 무(畝)자로 고쳤다 한다.
그 후 다시 의정의 손자인 유연당(悠然堂) 김대현(金大賢)의 아들 8형제가 모두 진사에 이르렀고, 그 가운데 5형제는 문과에 급제하자 인조가 팔연오계(八蓮五桂)라 하여 오미동이라는 지명을 하사받게 되었다고 한다.

보푸래미[甫林]는 오미리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마을로 아랫보푸래미[下甫林]와 웃보푸래미[上甫林]로 나뉜다. 웃보푸래미에는 풍산김씨의 세덕사(世德祠)가 있다. 또 이곳의 도림추원사(道林追遠祠)와 도양강당(道楊講堂)은 조선시대 중기의 건물이다.

미내미[美南]는 오미리의 동남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방계미는 옛날에는 백양(白楊)으로 불렀다고 하나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방감(方鑑)으로 불리게 되었다. 처음에는 안동권씨(安東權氏)가 살고 있었으나 지금은 각 성(姓)들이 살고 있다. 솔가실[松枝]은 오미골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고령박씨(高靈朴氏)의 집성촌이다.

개거리[開谷]는 용이 올라갔다는 데서 유래하여 용흥(龍興)이라 했다고 한다. 솔가실 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새날[仕羅]·위라마을은 개거리 서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도랑의 중앙을 중심으로 해서 예천군 호명면 본동과 접경이 되며 호명면 구 소재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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