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기다려라.
내 희망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시편 62:5]
시편 62편은 제2권(42~72)의 핵심진리를 담고 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1,5)"
하나님은 '반석, 구원, 요새, 피난처'로 표현되며,
하나님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행한 대로 갚아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바라는 이들은 세파에 흔들리지만,
그 흔들림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
시인은 그를 해하려는 이들과 겉다르고 속다른 아첨꾼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하지만, 그들을 바라지 않는다.
먼저, '한결같은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본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에 관한 이야기는 앞에서도 나눴다.
진리, 도, 하나님, 절대자...그 무엇으로 불리든 그것이 '진리'이려면 한결같아야 한다.
이 한결같음은 화석화되어 고정된 것이 아니다.
바람이 흐름이 저마다 다르지만, 바람이듯이 진리가 한결같다는 의미도 그와 같다.
'한결같은 사랑'은 히브리어 헤쎄드(chesed)이며, 헬라어로 아가페(agape)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위로부터의 사랑인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없으며, 때로는 일방적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한결같지 않아보이지만,
사랑이라는 큰 흐름에서 보면 '한결같은' 것이다.
10절에는 세속에 물든 이들이 의지하고자하는 것, 한결같지 않은 것들을 제시한다.
억압하는 힘(무력, 폭력), 재물(정당하게 얻는 것이 아니라 빼앗아서 축적한)이 그것이다.
이것을 얻기 위해 거짓말을 일삼고, 미사여구로 저주하는 말을 쏟아낸다(4).
이런 자들의 삶은 기울어가는 담과 같고 무너지는 돌담과도 같다(3).
시인은, '주님께서 각 사람이 행한대로 갚아주실 것(12)'이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이 말씀을 '인과응보, 권선징악'의 하나님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하나님은
죄인들의 허물을 탓하지 않고 안아주시는 분이시며,
더 나아가서는 우리들의 원수들까지도 안아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낱낱이 보시고 기억하시며 갚아주시는 분'이라는 고백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맞다고 본다.
'은밀한 중에 하는 일도 다 아시고, 은밀하게 갚아주시는 주님'이신 것이다.
9절의 '입김'은 '마아트 maat'를 연상시킨다.
아프리카에서는 건물의 중심, 신전의 중심, 우주의 중심을 ‘타조의 깃털’로 표시한다고 한다.
타조가 가장 큰 새라고 해도 깃털은 가볍다.
그런데, 이 깃털만큼의 작은 무게가 저울을 어느 한 쪽으로 기울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타조의 깃털을 마아트(Maat)라고 하는데,
고대이집트어로는 ‘삼라만상이 마땅히 그래야할 원칙’ 즉, ‘만물이 존재하는 방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자신의 신앙을 저울질 하여
타조의 깃털만큼도 기울지 않고 균형을 이루는 일은 어렵다.
말씀과 기도가 균형을 이룰 때,
우리의 신앙은 삶으로 살아질 것이요,
그래야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산 믿음이 될 것이다.
이 믿음을 가지려면, 언제 어느 순간에서나 하나님을 바라는 한결같은 신앙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