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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유다의 배반과 베드로의 부인>의 줄거리: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버린 것과 수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며 예수님을 향하여 저주까지 퍼 부은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들과 우리들의 차이는 또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하여 이 두 경우의 공통점이면서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실제 충격입니다.
유다의 배반과 베드로의 부인
(마태복음 26:31~35)
31.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32.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33.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5.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유다의 배반과 베드로의 부인>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유다의 배반과 베드로의 부인’
오늘 본문에 나타난 베드로의 태도와 비교되는 것이 14~16절에 나타난 유다의 태도입니다.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의 배반과 베드로의 부인에 어떠한 차이점이 있는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신앙이 어떠한 위치에 있으며 어떠한 깨달음이 간과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눈앞에 다가온 시점에 제자들에게서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다만 이 두 반응은 모두 신앙적이지 못했습니다. 정말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영적 의미를 바로 이해하고 동참하고자 했던 제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베드로식 반응과 유다식 반응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유다를 제외한 다른 모든 제자들이 베드로식 반응에 해당합니다. 유다는 자신으로부터 예수님을 끊어내고자 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끊어내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예수님이 가시는 십자가의 길을 무섭고 두려워하였습니다.
베드로식 반응은 가족적인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족 중에 한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했을 때에, 그 일에 동조하는지는 않으나 가족으로써의 사랑이 사라지지는 않기에 걱정하고 염려합니다. 유다가 예수님 자체를 싫어하게 되었던 것에 비하여 베드로는 여전히 예수님을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시고자 했던 길이 너무도 무섭게 느껴졌고 결국 부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유다는 기적을 나타내시는 예수님의 능력만을 바랐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을 예수님이라면 자신과 관계없다고 여겼습니다. 이 유다의 배반은 우리의 신앙에 생각할 거리를 제시해줍니다. 유다는 예수님이 사용용도가 있다고 여기며 관계하고 있었기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이 확실시되자 더는 사용용도가 없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인생에서 예수님을 폐기처분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서도 이러한 모습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믿기 위해서는 유다의 태도로부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유다만큼도 솔직하지 못합니다. 인생의 목적을 위해서 예수님이 사용용도가 있다고 여기며 관계해왔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의 신앙여정이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그런 잔재가 남아있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간과한 태도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내 삶의 문제와는 무관하십니다.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실 분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믿을 때에 삶은 끝나버릴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이것이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버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진짜 이유였습니다. 예수님이 바라신 것은 삶의 문제를 일시적으로 해결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문제의 근원을 끝내시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유다의 마음으로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가령 돈 문제가 생겼다면 돈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깁니다. 그러나 유다가 예수님을 판 사건이 잘못된 것이라면 이러한 신앙적 태도도 당연히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돈 문제의 일시적 해결이 아니라 돈을 문제시하는 삶 자체가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깨닫지 못할 때에 우리의 신앙생활의 각도는 완전히 빗나가게 됩니다.
말씀드렸듯이 유다는 솔직하게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다만 우리는 마음으로는 유다가 되어서 예수님을 배신했지만 입으로는 충실한 제자 행세를 하고자 합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영적낭만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차라리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앞에서 마음을 돌려버린 유다가 우리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영적낭만주의를 대표하는 말이 있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나는 죄 사함을 받았다.”는 고백일 것입니다. 이 말의 표현자체는 틀리지 않습니다. 다만 이 말이 어떤 마음상태에서 나왔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이 말을 입에 담기에는 우리의 마음상태가 가소롭기 짝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죄는 뿌리 깊게 박혀있으며 치열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른 채로 살아갑니다. 삶의 현장에서 순간순간 죄가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지 볼 수 없다면 이론적으로 아는 예수님의 죄 사함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마음에서는 죄가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는데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나는 죄 사함을 받았다.”고 여기며 감격하고 사는 것은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막연한 낭만주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복음은 현실과 동떨어진 낭만주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막연한 구원에 취한다면 죄에 대해 둔감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유다는 예수님의 죽음을 현실로 느꼈고 예수님을 버리는 선택을 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히 말해 예수님이 유다의 말을 듣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열심당원으로써 인생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력을 통해서라도 민족을 로마의 식민지로부터 독립시키고 다윗 왕국의 번영을 재현시키고자 하는 것이 열심당원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고 예수님의 능력이 열심당원으로써의 꿈을 이루기에 도움이 된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유다 자신은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유다의 마음에서는 예수님을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취직시킨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것을 확정하셨고 유다는 그러한 예수님을 더 이상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유다의 태도로부터 또 한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삶을 살려고 하는 동안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나의 삶에 아무 도움이 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삶은 끝나야만 합니다. 스스로 꿈과 소원을 가지고 삶을 계속하려는 사람에게는 십자가에서 죽으실 예수님은 해고의 대상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팔아버린 가룟 유다의 행동을 마음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생에서 예수님을 해고한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의 사용용도를 폐지시킨 것입니다.
한편 베드로식 반응을 살펴보자면 마음에서 예수님을 고용해본 적이 없는 상태가 문제가 됩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님께 부름을 받았고 예수님을 좋아했고 존경하였으며 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나라의 독립이라는 명확한 의지를 가지고 있던 유다와는 다르게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이 제일 중요한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어부였고 마태는 매국노 취급을 받는 세리였습니다. 나라의 독립이나 민족의 번영 같은 원대한 꿈을 가질 재목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부르셨습니다. 이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 같은 범인들을 제자로 삼으신 예수님은 늘 고마움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다른 랍비들과는 다르게 기적을 베푸시는 능력이 있으셨고, 백성들의 편에 서셨으며 지도자들과 대화를 하실 때에도 오히려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3년 간 이러한 모습을 보며 자랑스럽게 여겼을 것입니다.
이들에게 예수님과의 만남은 마치 로또와도 같은 대박사건이었습니다. 바다 위를 걸으시고, 풍랑을 잠잠케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오병이어 기적을 일으키시고, 각종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을 볼 때에 이들의 마음에서는 비로소 꿈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 예수님과 함께 할 수만 있다면 민족의 독립이라는 원대한 과업이 이루어질 때에 자신들도 그 과업에 참여한 일원이 될 수 있으며, 다윗 왕국을 재현하시며 왕이 되신다면 측근으로써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유다식 반응과 베드로식 반응의 차이는 꿈이 먼저 있었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유다는 자신의 용도를 위해 예수님을 취직시켰습니다. 그러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더는 쓸 용도가 없어졌다고 여겨지자 버리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유다에게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스스로 꿈과 소원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보려고 하는 한 절대로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 26절에서 성만찬의 의미를 밝히며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예수님의 죽으심을 전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이 당신의 죽음입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십시오.”라는 내용이 전도의 내용이 되어야만 합니다. 유다처럼 꿈과 희망과 비전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도 예수님의 죽으심을 전파하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한편 베드로식 반응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어야만 믿음은 온전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을 좋아했고 존경했습니다. 예수님을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말한 베드로의 고백은 거짓말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배반하지 않겠다는 마음은 당시에는 진심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시고자 하신 십자가의 죽음의 길은 이들에게 너무나도 무섭고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를 만나 세 번이나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모습이 요한복음 21장에 나타납니다. 이때에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 비로소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깨달은 베드로는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말에는 십자가 사건에서 주님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나약함에 대한 깊은 후회가 서려있습니다. 본문의 시점에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님을 진심으로 좋아했을지언정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의미까지는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정리해봅니다. 우리는 유다식 반응과 베드로식 반응으로부터 각각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유다식 반응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스스로 인생을 책임지려는 마음을 가진 한 절대로 예수님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고집한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사용용도가 없음을 깨닫게 될 때에 예수님을 팔아버리고 세상으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고용하는 것을 예수님을 믿는다고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는 나의 삶은 중단되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곧 나의 마음에서 세상을 죽이는 일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식 반응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연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마치 음료를 깊게 빨아들이는 빨대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영원 전부터 성령님과 함께 삼위일체를 이루어 기쁨과 평강을 누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이 기쁨에 우리가 참여하시기를 바라십니다. 그 참여의 방법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가지신 모든 속성을 우리가 빨아들이도록 주신 빨대인 것입니다.
성만찬이 의미하는 바도 이와 같습니다.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듯이 우리는 예수님을 먹을 수 있어야만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일이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서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신 것은 성만찬이라는 예식을 제정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이라는 비유였습니다. 우리 또한 포도주를 마시고 떡을 먹듯이 예수님의 죽음을 반드시 우리의 것으로 만들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나의 것으로 삼을 때에 예수님이 가지신 모든 속성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 교훈을 가지고 보자면 이단과 사이비를 믿는 사람들이 참으로 딱하게 여겨집니다. 이단과 사이비의 교주들은 스스로를 재림예수나 선지자로 자처합니다. 스스로를 선지자로 자처하는 것과 참 진리를 위해 살아가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자기가 참 선지자라고 하는 사람은 모두 유다만도 못한 영적인 사기꾼에 불과합니다. 오직 참 진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종으로써 살아가는 사람만이 진짜 선지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윗이나 모세와 같을 수는 없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세상에서 지극히 작은 자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극히 작은 자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빨대로 삼을 수 있다면 예수님의 속성을 빨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기쁨으로 가득 찬 관계에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은혜를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으니 우리는 스스로 선지자를 자처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으면서도 그 평강이 깨어지지 않았던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마음에서는 십자가를 빨대로 삼아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는 성만찬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하여 죽는 순간조차도 평강이 깨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칭찬하실 수 있는 일은 세상에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바로 십자가로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음으로써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이제 더는 유다와 같은 마음으로 이 세상에서 꿈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을 고용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세상에서 무슨 일을 이루느냐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과 연합할 때에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모든 것이 내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만 내 것으로 삼을 수 있으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곧 나의 죽음입니다. 어제 말씀드렸듯이 이 사실을 나의 최우선적인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부모로써의 자아의식보다 배우자로써의 자아의식보다 직장에서 일할 때에 사원으로써의 자아의식보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이 우선되어야만 합니다. 좋은 부모, 좋은 배우자, 좋은 직원이 되고자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모의 자아의식, 배우자의 자아의식, 직원으로써의 자아의식을 끊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의 자아의식을 끊을 수 없다면 유다와 같은 마음상태는 계속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쓸모가 없기에 팔아버리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한 자아의식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내 마음이 떠난 자리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이 활동하시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죽음을 빨아들이는 빨대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빨대삼아 예수님의 모든 속성을 빨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상황을 기대하시고 좋아하시고 칭찬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과 성령님께서 삼위일체로 계시기에 예수님과 연합한 우리는 사위일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마리아를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먹는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라는 것을 사실로 믿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마음에서 아깝고 소중하게 여겨지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이 사실을 적용하며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될 때에 나의 마음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위일체를 이루고, 삶은 하나님의 장갑과 가면으로 쓰임 받는 기적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유다의 배반과 베드로의 부인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연합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이시면서까지 모든 은혜를 허락해 주셨음을 감사드립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머리카락만큼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다 성취될 수 있도록 오늘도 십자가 생활화에 매진할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