得原失信(득원실신)
한비자(韓非子)는 순자(荀子)에게서 유가 사상과 학문을 배웠으나
현실정치 참여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
그는 당시 전국시대의 군주들이 추구한 부국강병에 필요한 법술(法術)을 바탕으로 하는
법가사상(法家思想)을 세웠으나 말더듬이인 그는 눌변(訥辯)으로 그 뜻을 펴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책을 본 진(秦)나라의 왕은 그 책의 내용에 크게 감탄하여
그가 설파(說破)한 법가이론을 활용, 권력을 강화하였고 결국 중국대륙을 통일하였다.
한비자는 신하들이 교묘하게 꾸미는 말(辯說文辭/변설문사)로 군주를 속이는 것에
넘어가서는 안되며 실정에 맞지 않는 말을 막고, 한번 세운 원칙과 법도는
반드시 지켜야 영(令)이 서게 된다고 말했다.
득원실신이라는 말은 한비자의 외저설(外儲說) 좌상(左上)편에 나오는 말로
‘원(原)을 얻고 신뢰를 잃다’라는 뜻으로 군주에게 신의(信義)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말이다. 춘추오패 중의 한 사람인 진(晉)나라 문공(文公)은
항상 명분을 중요시하는 군주였다.
문공이 원(原)나라를 공격하게 되었을 때 그는 병사들에게
열흘 분의 식량을 나누어 주고 열흘만에 원을 함락시키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원을 공격한지 열흘이 되어도 원을 함락하지 못하자
문공은 원래 약속대로 군대를 철수시키려 하였다.
그때 원의 성(城)에서 빠져나온 사람이 와서 원은 앞으로 사흘을 견디지 못하고
함락될 것이라 말했고 신하들 역시 며칠 더 기다리자고 말했다.
그러나 문공은 ‘나는 병사들과 원을 열흘 동안에 함락시킨다고 약속했는데 이미 열흘이
되었으니 철수하지 않으면 신의가 없는 사람이 된다. 원을 잃더라도 그럴수는 없다’
고 말하며 결국 군대를 철수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원의 사람들은 ‘저토록 신의를 지키는 군주가 있구나.
그를 따르자’ 라며 문공에게 항복했고 이웃 위나라까지 항복하였다.
공자가 이 사실을 듣고 ‘원을 공격하여 위나라까지 손에 넣게 된 것은
오직 신의에 의한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비자는 기록하고 있다.
이와 달리 송양지인(宋襄之仁)이란 고사가 있다.
송나라 양공이 초나라 군대와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었다.
초나라 군대가 강을 건너오자 양공의 신하들이 지금 그들을 공격하자 하였으나
양공은 강을 건너기 전에 치는 것은 도의에 맞지 않는다고 고집부리다가
결국 송나라 군대는 대패하고 양공도 부상으로 죽고 말았다.
한비자는 송양공을 어리석은 군자라고 비판하였는데
자신의 병사들과의 약속을 지킨 진문공의 득원실신 고사와는 성격이 다르다.
한비자는 작은 신의가 성취되면 큰 신의가 확립되며
현명한 군주는 가급적 신의를 지킨다(明主積於信/명주적어신)라고 말했다.
약속을 지킨 사람의 예가 또 있다.
증자(曾子)의 아내가 어느날 시장에 아이를 데리고 갔는데 하도 울자
집에 가면 돼지를 삶아주겠다며 달랬다.
그런데 아내가 집에 가보니 증자가 돼지를 잡고 있었다. 아내가 놀라서 아이에게
그냥 한 말이라고 말하자 증자는 ‘어린 아이에게 특히 실없는 소리를 해서는 안된다.
어미가 아이를 속이면 자식은 어미를 믿지 않게 되니 어떻게 교육을 시키겠는가?’
라며 돼지를 삶았다.
현대의 국가 지도자도 나라를 이끄는데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신의를 보여야 함을 이 옛 고사는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