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만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흥미로운 특징 중 하나는,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소재의 작품 속에서도 선(禪)의 향기가 물씬 풍겨난다는 점입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드래곤볼이나 원피스와 같은 대중적인 작품들 또한 다분히 선적이라고 할 수 있죠. 고요함을 유지하는 가운데 분노의 힘으로 오직 자신을 초극해내는 손오공의 모습이라든가, 자신은 해적왕이 될 것이지만 지배따위는 하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외치는 루피의 모습 등에서, 우리는 대단히 자유로운 선의 감각을 읽어내게 됩니다.
달마 조사를 통해 중국에 유입된 후 6조 혜능에 이르러 아름답게 꽃피어난 선의 계보가, 일본으로 건너가 깊게 뿌리내림으로써 일본문화의 주요한 정신적 기틀을 형성한 것은 분명 사실입니다. 무사도 또한 선과 만남으로써 더욱 풍요로운 기반을 형성할 수 있었죠.
그러한 종교사적 배경 때문인지, 일본의 많은 문화적 생산물들 속에 선의 목소리는 일정 부분 이미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는 느낌입니다.
이 <한마 바키>라는 작품 또한 그러합니다.
바키라는 이름의 소년격투가를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키며 현재 4부까지 진행되어 온 이 작품은, 3부 이후부터는 보다 짙어진 선의 색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특히 3부에서 묘사되는 애리조나 형무소에서의 에피소드는, 선에서 의미하는 자유라는 것이 대체 어떠한 것인가를 대단히 잘 표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용한 장면은 형무소 내의 강자로 대접받는 미스터 세컨드라는 인물이, 그에게 시비를 건 상대와 대결을 펼치는 모습입니다. 물론 대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일방적인 결말로 끝나긴 하지만요.
미스터 세컨드는 상대의 자유를 박탈하겠다고 말하며 그에게 장전된 총을 건넵니다. 이른바, 상대에게 자신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권능을 제공한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는 분명하게 존재하는 그 권능을 사용하지도 못한 채, 미스터 세컨드 앞에 패배하고 맙니다.
실은 여기에서 미스터 세컨드는 대단히 중요한 진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곧, 강함이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총이라는 권능을 갖게 된 자에게는 오직 두 가지 선택밖에는 남지 않게 됩니다. 총을 쏘느냐, 쏘지 않느냐. 바로 그렇게 총이라는 권능에 집착함으로써 그는 제한된 삶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반면, 총이라는 권능을 갖지 않은 자는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총이라는 권능을 갖지 않음으로써, 역설적으로 총으로부터 자유로운 자에게 선택지는 무한대입니다.
그리고 이 무한대의 선택지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강함입니다. 즉,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가 바로 강함입니다.
능력과는 아무 관계없이, 어디에도 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자가, 무언가에 매인 자유롭지 못한 자보다 늘 강하다는 사실을, 이 미스터 세컨드의 에피소드에서는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유사하게, 주인공인 바키 또한 그가 대결하고자 하는 미스터 언체인이라는 인물과 문답을 주고 받습니다.
미스터 언체인은 형무소에서 누구도 꿈꾸지 못할 호화판의 생활을 누리고 있는 자입니다. 음지의 대통령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그의 장악력은 막강하죠. 그의 신체적 강함은 전세계에서도 손꼽을만큼 탁월해서, 어떤 것도 그를 구속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의미 그대로 미스터 언체인(unchain)인 것입니다.
당연히 그가 형무소에서 거주하는 이유도 형벌에 의해 구속받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무 제약없이 형무소를 자기 마음대로 들락날락할 수 있을 만큼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 미스터 언체인은 형무소의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렇게 보자면, 미스터 언체인은 강함과 자유의 관계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자유로운 자가 곧 강한 자라는 사실을 직접적인 그 자신의 삶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인물이 곧 미스터 언체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하나의 함정이 있습니다. 주인공인 바키는 미스터 언체인이 빠져있는 그 함정을 정확하게 지적해내죠.
그건 바로 미스터 언체인이 누리는 자유 또한 이미 조건화된 자유라는 것입니다.
미스터 언체인은 형무소를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을 정도의 자유로운 자가 되어야만, 비로소 스스로가 자유롭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즉, 그러한 위대한 과업을 성취하지 않는 한, 그는 자유를 좀처럼 느끼기 힘든 자라는 의미입니다.
누군가는 자신을 구속하는 수갑이 풀린 것만으로도 가장 거대한 자유로움을 느끼는데, 누군가는 형무소를 자기 뜻대로 장악해야만 비로소 자유의 최소조건을 달성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둘 중 누군가가 진정 자유에 가깝게 있는 자일까요?
"세계 최고의 자유가 아니면 자유를 느낄 수 없다니, 이 얼마나 부자유스러운 사나이인가?"
바키의 이 말은 미스터 언체인의 자기모순을 정확하게 파고 들어간 쐐기입니다. 자유를 삶의 핵심으로 추구하는 그가 오히려 자유의 호혜로부터 얼마나 소외되었는가를 드러내는 촌철살인의 표현이죠.
이는 선의 방법론 중의 하나인 화두 참구의 실제이기도 합니다. 바키의 말은 미스터 언체인에게 분명한 화두로 던져졌습니다. 그가 자신의 자기모순을 직면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헤쳐나올 수 없는 물음으로서요.
그래서 미스터 언체인은 경직되게 됩니다. 바키가 다시 한 번 지적하듯이, 그는 자연스럽게 웃을 수 없게 되죠. 웃음이라는 것은 존재의 여유의 아주 직접적인 표현입니다. 따라서 웃을 수 없다는 것은 존재의 여유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즉, 그는 궁지에 몰린 것입니다.
그리고 화두에 의해 궁지에 몰린 이는, 현재 자신의 모습이 붕괴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화두에서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개인이 현재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특정한 정체성을 붕괴시키는 것이 바로 화두의 기능인 까닭입니다.
우리가 특정한 정체성을 자신이라고 간주하며 그 정체성을 통해서만 존재감을 느끼고 있을 때, 화두는 이 구조를 파괴함으로써, 우리가 특정한 정체성에 매이지 않고도 언제나 스스로 드러나는 다양한 모습 속에서 존재감을 확보할 수 있는 현실로 우리를 안내하고자 합니다.
때문에 바키가 제공한 화두에 미스터 언체인이 궁지에 몰린 순간, 그가 붕괴되는 결과는 필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모순 속에서 그 자신조차도 답을 못찾으며 헤매고 있는 그는 기꺼이 붕괴되어야만 합니다.
화두에 의해 누군가가 붕괴된다는 사실은, 화두를 제공한 다른 누군가가 승리한다는 사실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화두는 승패의 논쟁이 결코 아닙니다. 화두가 안내한 결과는 우리 모두의 승리입니다. 서로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우리 모두를 갑갑하게 가두고 있었던 형무소의 벽이 무너져내리고, 이제 그 무엇도 우리를 가로막을 수 없다는 명확한 증거로서의 환한 하늘만이 우리 앞에 펼쳐지게 되니까요.
거듭 강조하듯이, 자유는 무언가에 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유롭기 위한 다양한 조건에 매이든, 혹은 자유라는 이름 자체에 매이든 간에, 그 모든 구속을 만드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특정한 정체성에 절대적으로 매여 있습니다. 그 정체성 안에서 자유를 추구하는 한, 우리는 아무리 위대한 성취를 이룬다 하더라도 정말로 자유롭지는 못하게 됩니다.
우리가 진정 자유를 원한다면, 우리는 벽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자신이라는 이름의 정체성의 벽을요.
선의 방법론은 어찌보면 자기 자신을 막다른 벽으로 모는 것입니다. 그렇게 몰린 자신이 이미 막다른 벽 그 자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타의 유려한 대안적 방법론이나, 자신에게 자유를 줄 수 있을 것만 같은 대상에의 추구로 도망치지 않고, 그 자신이라는 벽을 향해서만 정직하게, 또 끊임없이 붕괴의 의도를 담아 두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벽은 반드시 문이 됩니다. 어떤 벽이든 반드시 어떤 문이 됩니다. 모든 벽은 반드시 모든 문이 됩니다.
그렇게 이 세상에 우리가 갈 수 없는 곳이 없습니다. 우리는 자유롭습니다.
바로 이것이 <한마 바키>라는 이 작품이 우리에게 뜨겁게 전하고자 하는 자유의 목소리입니다. 선의 과정은 분명 격투기만큼이나 이토록 뜨겁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