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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가 자유케 하리라
본문<요8:31-38>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33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 종은 영원히 집(천국)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너무도 유명한 말씀이고, 또한 많이들 인용하여 쓰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작 이 말씀의 의미를 아는 자가 얼마나 있을까요?
‘알아야 면장을 한다’는 말이 있듯이 이 말을 정작 자주 쓰면서도 진리를 모른다면 자유함도 없을 테지요. 진리가 뭡니까? 알고들 계신가요? 방금 읽은 구절에서 진리가 무엇인지 눈치 빠른 사람을 알아차렸을 수도 있구요...
31절b~ 내 말에 거하면 내 제자가 되고, (영이요 생명이다. 내 말이 다음 구절로 연결됨)
32절~ 진리를 알지니.. 그러니까 31절의 ‘내 말이’ 곧 32절의 ‘진리’라는 말이네요..
36절~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여기서 완전한 답이 나왔지요?
=> 정리해 보면, 예수님 말씀이 진리이고, 아들 예수님 자신이 진리이다(입니다.)
그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가 되시는 아들이 자유케 하면 참으로 자유하게 된다고 합니다(by 아들)
그렇다면 자유란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님이 주시는 자유란 과연 무엇일까요?
예수라는 이름 속에 주님의 사역이 담겨져 있다고 했습니다.
=>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 할 자, 즉 죄에서 해방시키는 자유를 말합니다.
본문에도 정확히 나와 있어요.
주님의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에, 유대인들이 반문하면서 우리는 누구의 종이 된 적이 없는데 새삼스럽게 무슨 자유를 준다는 것이냐(반발). 그러자 주님이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다’(답하심). 그러니까 자유란 죄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말합니다.
여기서부터 아주 중요한 내용이 전개 됩니다. 죄를 가지고 있으면 어떤 일이 생깁니까?
(힌트) 죄의 삯은 사망.. 즉, 모든 사람이 죽는 것은 왜 그래요? 죄가 있기 때문에 죽지요.
즉, 죄를 이기지 못하니 죽음을 맞게 됩니다. 육신의 죽음으로만 끝나면 그나마 다행인데, 문제는 육신의 죽음 이후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습니까? 심판이 기다리고 있지요. 이것을 히9:27에서, 한 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계20장, 백보좌 심판을 거치게 됩니다. 그 결과 영생이냐? 영벌이냐?가 결정됩니다. 천국이냐 지옥이냐...)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항상 안고 살아들 갑니다. 요즘 같이 사건 사고가 많은 사회구조 속에서는 언제 죽을지 더욱 불안합니다. 자동차를 타도 걱정, 비행기를 타도 걱정, 불치병 들까봐 걱정, 지나가다가 갑자기 미친 놈 만나서 봉변당할까 걱정..다 무엇을 염려합니까? 죽을까봐 걱정이지요. 설사 장수를 누린다 해도, 내세에 대한 공포는 어쩌겠습니까? 혹시 지옥은 있을까? 그 지옥가면 어쩌나? 짐승은 영혼이 없기에 내세에 대한 불안이 없지만, 인간은 영혼이 있기에 본능적으로 내세에 대한 염려와 불안을 갖고 사는 것입니다(이게 사람과 짐승의 차이점)
이런 걱정 근심이 어디서부터 온다구요? 죄 때문에..., 죄로부터 오는 죄책감이 몰고 오는 불안, 근심, 걱정, 두려움입니다. 죄책감 없는 사람 있을까요? ‘나는 죄 없다’고 자부하는 사람 있을까요? 그래도 죄를 덜 짓는 사람이 있다면 어디서 찾아 볼 수 있을까요? 성철 스님은 어땠을까요? 18세에 출가해서 80여세에 타계했다고 하는데, 도를 닦는 불자들은 보시를 일상으로 실천하는 자들입니다. 보시란(자기를 희생해서 타를 이롭게 하는 행위를 말함)
그래서 걷다가 개미 한 마리도 안 밟으려고 조심스레 땅을 쳐다보면서 걷고, 여름에 피 빨아먹으려고 날아드는 모기에게 자신을 내 주는 보시를 실천하는 자들이 수도승들입니다. 이정도로 사는 자들이 죄를 지을까요?(천만에). 그랬다가 선행에 대한 마일리지가 부족하면 다음 생애에 못된 짐승으로 태어날 텐데요? 이런 가치관을 갖고 사는 자들이 수도승들인데, 게다가 성철은 얼마나 해탈에 대한 열망이 타오르면 8년 동안인가 앉아서(가부좌 자세) 잠을 잤고, 10여년 동안 묵언수행을 했답니다(말하다 행여나 실수를../ 바리새인보다 더 독한 자들임)
아마도 우리나라 불교계에서 내로라하는 원효대사, 서산대사, 무학대사 보다도 한 수 더 알아주는 인물이 아닐까 여겨지는 수도승이었는데, 그런데 그런 성철스님이 죽기 전에 어느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심경에 대해 외동 딸, 필자에게 고백한 내용이 충격적입니다(출가로 자식과 생이별을 했으니 ..미안한 마음을 평생 가지고 ..그래서 딸아 미안하다고 고백하면서)
- 나는 석가모니에게 속았고, 달마대사에게 속았다(아마도 자신의 롤 모델로 삼아온 듯함)
- (중요) 필자야, 나는 지옥에 간다. 내 죄를 대신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죽기 전에 깨달은 게 뭐다? 죄를 없앨 수 있는 방법이 불교에서는 없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아마도 ㅎ님의 간섭으로 알게 하셨을 거라고 여겨집니다. 구원받았다는 말이 아니라, ㅎ님은 이방인도 ㅎ님의 일하심을 알게 하시기 위해 사용하신다는 말입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도 ㅎ님이 두 번이나 꿈으로 계시해 주셨음을 다니엘서를 보면 잘 나옵니다.
성철 스님이 왜 그렇게 온 평생을 수도 고행을 했겠습니까? 말이 고행이지 자신을 학대한 게 아닙니까? 왜 그리 스스로 고초를 자처하며 쉼이 없이 살았을까요? 결국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해탈, 열반이라는 그들의 언어로 고상한 말을 썼다지만, 궁극적으로는 내세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해결하고자 일평생을 학대하며 헛되이 살아간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죄의 종이라서 그럽니다. 죄의 종이라는 말은 죄가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종은 주인에게 복종하게 되잖아요. 죄는 사단의 속성, 사단의 정신사상을 말합니다. ㅎ님을 떠난 인간은 사단의 영에 종속되어 살아갑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만들어 낸 방식들이 인간의 각종 종교적 행함으로 나타나는 것이지요. 소위 ㅎ님을 믿는다는 유대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쪽으로 힘쓰는 것이고, 불교나 힌두교 같은 이방 종교는 고행이니 수도니 하면서 자신을 경건하게 만들려고 갖은 수단과 방법을 쓰는 것입니다(3보 1배..)
바리새인의 율법신앙과 불교의 열반수도는 신의 이름만 다르지 추구하는 방식은 동일합니다. 모두 인간의 열심과 정성이 뒷받침되는 행위의 의를 가치로 여기는 것이지요. 여기에 속한 이들은 죽을 때까지 안식이 없어요. 날마다 이것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하고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행해야 하는 불안 속에서 살게 됩니다. 자기를 못살게 구는 여기에 무슨 ‘자유’가 있겠습니까? 설사 자유를 준다 해도 부정 탄다고 거절할 겁니다. 자신을 들볶으며 자학해야 성취감과 보람이 생기는데, 내려놓고 쉬라고 한다면 그동안의 공든 탑이 무너질까봐 도망갈 테지요.
이런 현상이 바로 어두움이고 죄의 종된 모습입니다. ㅎ님을 떠난 모든 인생은 자기 운명을 스스로 책임지기 위해서 쉴 새 없이 동분서주하는 군상들이 되었어요. 이런 게 다 사단이 부추기는 선악과의 독극물에 취해서 안식이 없는, 자유를 상실한 가련한 인생들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어떨까요? 이들도 열심과 노력이 유대인들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지요. 교회에서 요구하는 수많은 종교 행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잡다한 것들 생략하고 몇 가지만 말하자면, 매일 새벽예배에 금요 철야예배, 십일조 생활화, 각종 헌금 들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교회 다니려면, 일단은 건강해야 됩니다. 새벽예배..이것, 불교의 고행과 무엇이 다릅니까? 목사들은 새벽예배를 왜 요구하며 신자들은 왜 따르지요? 이렇게 하라고 성경 어디에 있나요? 새벽마다 잠을 설치며 정성을 드려 기도하면 ㅎ님이 응답을 잘 해주시나요?
완전 샤마니즘, 미신입니다(비나이다~ ~, 정한 수 떠놓고, 우리 서방님 과거 급제..우리 며느리 아들 낳게~뭐가 달라?) 이런 목사를 계21장, 두려워하는 자들, 술객들, 살인자, 거짓말쟁이
또한 한국교회에서 교회 다니려면 일단은 돈이 있어야 합니다. 수많은 헌금봉투에다가 십일조를 강조 합니다. 이런 교회 목사들 보면 쌍욕이 나와요. 야~ 이 개XX야, 실제 칼만 안든 강도야 아니, 강도 보다 더 악질 나쁜 놈이고, 사기꾼이고 도적놈이지 뭡니까? 새벽예배 나가고 십일조 내야 구원 받고 복도 받습니까? (아마 지옥가면 목사가 우굴 거릴겁니다...진짜로요)
<미3:1~5, 9~11>
2절~ 선을 미워하고(ㅎ님의 은혜, 긍휼을 전하지 않고), 악을 좋아하며(ㅎ님 말씀을 땅의 복으로 둔갑시켜 전함- 사람의 행함을 부추겨서 복 받는다고 가르침)
3절~이게 결과적으로 백성을 탈취하는 행위, 성경 가지고 강도짓..(돈이 돈을 부른다식, 투자)
5절~헌금 적거나 안내면 견디질 못해..강대상에서 친다. 전쟁을 선포?(팔 비틀어서 빼앗기-안 내면 미워함) ...
9~11절~ㅎ님 이름 팔아서 장사하는 사기꾼들(종교 지도자들)
복음서도 많은 곳에서 경고(마7-거짓 선지자들 조심해라..양의 옷을 입은 이리들, 누가 알랴?)
이런 신앙생활에 무슨 자유가 있나요? 자유는커녕 율법에 종이 되어서 신자들이 거의 쓰러질 지경입니다. 쉬질 못해요. 왜요? ㅎ님 종이 아니라, 교회의 종이 되어서 교회 부흥에 힘써야 하기 때문인데, 이게 ㅎ님을 위한 거라는 목사의 거짓말에 다 놀아나는 형국이 된 겁니다.
-나중에 지옥가면 슬피 울며 이를 간다네요(그 목사에게 속은 게 억울해서 ..)
죄로부터의 자유, 다른 말로 구원 받고 싶어서 교회를 찾았지만, 교회에서 기다리고 있는 자는 ㅎ님의 참 종이 아니라, 양의 옷을 입은 이리들이 득실거리니 이걸 누가 알겠느냐는 것이지요. 세상에서도 물질 사기 당하면 억울해서 가슴이 미어지는데, 신앙사기 당하면 영혼이 멸망하는 일이잖아요? 지옥가야 비로소 알게 되니 어떻게 보상을 받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마23:13절에서~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도다.(폭로)
주님의 이 말씀은 이런 일들이 교계에서 보편적으로 일어난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태생적인 죄인들입니다. 죄를 저질러서 죄인된 게 아니라, 처음부터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사과나무는 저절로 사과만 열매 맺듯이 죄인은 반드시 죄만 만들어 냅니다. 설사 외적으로는 착하고 선한 행위를 한다해도 이면에는 자기만족과 자기 자랑이 숨겨져 있기에 위선일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바리새인의 외적인 행위를 칭찬하기는커녕, 회칠한 무덤이요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시는 것이지요.
인간이 왜 이렇게 포장하며 살까요? 요8:44절에서 주님이 실체를 폭로하시잖아요.
너희 아비는 마귀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요 거짓의 아비이다(아담과 하와를 거짓말로 미혹하여 선악과를 먹게 한 장본인이 마귀, 그 영혼을 죽게 했으니 살인자, 그래서 거짓의 아비)
-그 마귀에게 속하여 그 영을 받아 태어난 모든 인간도 마귀 짓을 하며 사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런 인간에 대해 엡2장에서 죄와 허물로 죽은 자요,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식... 창6장에서는 이를, 어려서부터 그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라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이 팔을 걷어 부치고 ‘내가 ㅎ님 말씀을 잘 지켜서 ㅎ님께 의롭다함을 받을 거야’ 한다면, 이거야 말로 자기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 미친 짓이지요. 그래서 자유를 얻게 되었나요? 구약의 역사가 무엇을 말해 줍니까? 그 많은 ㅎ님의 기적을 맛보며 옆에서 붙잡아주고 함께 해 주었지만, 반복해서 ㅎ님을 거역하고 우상숭배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 여파로 결국에는 북조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망하여 지구에서 사라졌고, 남조 유다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갔지요.
한마디로 너희 인간은 안되는 존재다라는 것을 증명해 준 것입니다. 이게 옛언약의 결과이지요. 옛언약은 ㅎ님과 사람 간에 쌍무계약 형식으로 체결된 것입니다. 인간 너희들이 ㅎ님 율법을 잘 지키면 복을 받되 율법을 어길 시에는 저주를 받아 망하고 포로가 될 것이라는 언약대로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ㅎ님의 구속사가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기에 감사한 것이지요. ㅎ님의 히든카드가 준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게 뭐지요? 네~ 새언약입니다. 옛언약이 ㅎ님과 사람 간의 약속이었다면. 그래서 인간이 연약하여 실패로 끝났다면, 새언약은 ㅎ님과 아들 예수님과의 언약으로 체결된 것입니다.
즉, 너희 인간은 빠져라 ㅎ님과 아들 예수님이 합작하여 너희 구원을 이루어서 거저 선물로 줄께~, 이게 새언약인 것입니다. 이미 구약에서부터 이 새언약은 계시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렘31:31~33>
31절~ 날이 이르리니( 때가 차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것임/인간의 불가능이 증명되면)
32절~ 옛언약은 남편이 되어 옆에서 도와줘도 불가능(죄로 죽었기에, 순종 불가능)
33절~ ㅎ님의 의를 이루신 IX의 성령이 사람 속에 들어감으로 완성되는 방식으로 구원을..
요14:1절,, 내가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 다 되면 데릴러 올께, 아버지 집은 거할 곳이 많다.
-이는 성령으로 오신다는 말이지 물질적 처소가 아님(20절, 그날에 아버지와 아들과 내가..)
-주님의 십자가는 ㅎ님의 지혜요 능력이심(십자가는 죄사함과 성령의 오심을 가능케 하심)
-X의 영 오심, ㅎ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못하리니 ㅎ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ㅎ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게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희락과 평강이니라(지금 누리시나?)
그렇다면 모든 인간은 죄인들인데, 그래서 ㅎ님 말씀대로 살지를 못해서 저주와 심판을 받고 지옥 가야 마땅한데 누가 이런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요?
여기서 아주 중요한 구원의 뿌리(원리)에 대해 근원을 찾아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너희 아비는 마귀야, 다시 말해 너희들은 다 마귀자식들이야. 그래서 다 지옥가야 해..
그런데 한편으로는 ㅎ님은 사랑이시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 이런 역설을 어떻게 설명할 거냐구요. 습3장(ㅎ님이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며, 잠잠히 사랑하시도다,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도다) 이렇게 ㅎ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이 있답니다. 그게 누구지요?
성경 곳곳에서 증거하는 것들이 택함을 받은 자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엡1:3~7절( 창세전에 IX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IX의 피로 구속, 곧 죄사함을 받게 하여 ㅎ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
<롬8장:29~39> 읽으면서 설명...미리 아신 자, 미리 정하신 것(엡1장 창세전 예정과 연계)
33절(택하신 자 송사 불가/대속 받았기에..), ~39절까지
<롬9:11~13> 에서와 야곱(이게 믿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 죄로 죽은 인간의 실상을 알기에)
그렇다면 이런 택한 자들의 죄는 어떻게 하고 사랑하신다는 말인가요?(ㅎ님의 공의가 깨짐?)
그게 바로 새언약의 핵심 내용입니다. 아들 예수가 자기백성의 죄를 다 짊어지고 대속을 하심
<롬8:3> 이게 대속의 원리입니다(육신이 연약해서 율법을 못지키니까 대신 IX로 죄 값을..)
<롬8:1~2> 그래서 결코 정죄당하지 않습니다(할렐루야!) 마귀가 송사할 수 없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율법의 기능)/ 생명의 성령의 법(IX를 믿음으로 얻은 구원, 새언약으로..)
<히2:14~17> 14절~방금 롬8:3절을 설명해주고 있음.
15절~ 오늘 서두에서 언급한 바대로, 모든 인간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삽니다. 그 이유는 죽음이 끝이라고 여기기 때문이고, 또 죽음 이후 내세에 대한 불안 때문이지요.
그런데 주님의 십자가 피 공로로 죄가 다 사함 받고, 아들의 영을 받아 ㅎ님의 아들이 되었느니 구원의 확신에서 오는 기쁨과 행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참 안식과 자유가 누려지는 것입니다. 자유란 다른 말로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넘치는 안도의 기쁨이요 평강입니다. 이런 자유를 지금 누리고 계십니까?
내가 할 일이 전혀 없이 오직 ㅎ님의 택하심의 사랑이 믿어지고 IX의 십자가 은혜가 믿어질 때에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겁니다. 이게 복받은 자입니다.
롬4장에서는 이런 복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구원에 대하 무슨 일을 한 것이 전혀 없는데, 그저 부르심으로 구원을 받은 자의 대표가 아브라함이었지요. 또한 다윗에 대해 말합니다. 지난주에도 살펴보았지만 그는 경건치 않은 자였지요. 경건은 고사하고 ㅎ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유부녀 밧세바를 범하고 남편 우리야를 청부살인한 극악무도한 죄를 범한 악한 자였습니다. 그런데 용서를 받습니다. 롬4장은, 다윗을 빗대서 그런 악행과 죄를 그저 용서받은 자는 행복하다고 적고 있습니다
-(어찌 행복하지 않겠어요? 그게 바로 나인데.., 죄 밖에 안나오는 나를 죄 없다고 하시는데..)
그러니 우리의 그 모든 악한 죄를 담당하신 IX를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ㅎ님은 자기백성에게 인간의 열심과 충성 그 무엇을 기대하거니 바라는 게 없습니다.
다만, 내가 너희를 위해 베풀어 준 그 사랑과 은혜를 알아먹고 감사하는 것, 하나입니다.
그래서 ㅎ님 나라는 은혜를 아는 자만 사는 세계입니다. 거꾸로 은혜를 모르면 들어가지 못하는 곳입니다.
사단의 짓은 바로 이 은혜를 가리고자 합니다. 너희는 할 수 있어! 그러니 너희 열심과 노력으로 구원을 따내라고 종용 합니다. 그런 자들 내놓은 것은 무엇이겠어요? 자기 자랑, 자기 업적이지요. 그래서 마7장 끝에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였나이다(병고치고, 큰 교회 세우고, 전도하고, 구제하고, 업적이 화려함)
그러나 주님은 이들을 향해 ‘이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외면하심)
불법이 뭔가요? 말씀을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닫고 죄사함을 주시는 IX께 나오라고 주신 율법을 자신들이 잘 지켜서 의롭다고 인정받으려고 행함의 의를 추구한 것이 불법이지요(용도변경) (갈5:4절)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그렇지요? 죄를 안고 태어난 인간이 어떻게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쟁취하겠습니까?(ㅎ님은 You can't).. 율법신앙이란(I can)을 외치며 ㅎ님 말씀을 반듯하게 지켜서 인정받으려는 구도를 말합니다. 거기에는 안식이 없습니다. 무엇인가를 항상 해야 하는 끝없는 숙제가 계속 밀려 있는 세계가 율법의 세계이지요. 그래서 주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지요.
쉬게 한다는 말은 잠시 쉬게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쉼을 주시겠다는 말씀이지요. 율법의 의가 아닌 믿음의 의를 통해 주시는 구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 죄를 대신하여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다 해결하였으니, 너희는 믿기만 해라, 그럼 구원이야.. 너무도 쉬운가요? 그래서 인간은 못 믿는 겁니다. 아니 내가 아무 일도 안했는데, 어떻게 의롭다는 거지? 뒤돌아섭니다.
그래서 복음은 아무나 주어진 게 아니라, 죄인들에게 주어집니다. 자신이 죄로 죽었기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자들만이 염치불구하고 십자가 복음을 붙잡는 거지요(구원은 자기 부인이 시발점). 그러나 이것도 내막을 알고보면, 택한 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사 자기의 죄악된 실존에 대해 보게 하시고, 믿음을 주셔서 복음을 믿게 하시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를 벧후1:1절에서 사도 베드로가 말해줍니다.
‘우리와 같이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너희에게 편지를 쓴다’고요(믿음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지 내 열심을 내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믿음의 정의가 크게 왜곡되어 있음, 주의)
그래서 데살로니가후서 3:2절에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증거 합니다(선물임)
따라서 구원은 ㅎ님이 설계하시고, 아들 IX께서 성육신하여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을 거저 선물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총체적으로 아는 것을 또한 진리라고 말하는 것이고, 이 진리를 아는 자는 우리의 구원을 주께서 다 이루셨음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알기에 자유함이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다시 말) 자유란 구원의 확신에서 오는 기쁨이요 안식이요 만족함이요 행복입니다.
(오늘 말씀 마무리)
이 구원의 확신과 자유함은 ㅎ님의 사랑이 만져질 때에 오는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아주 어린 아기가 자기 엄마 아빠를 알아보고 그 품에 안기는 것은, 호적을 확인해 봐서 일까요? 아니면 코도 닮고 눈도 닮아서 엄마 아빠라고 하는가요? 아니지요. 그런 것보다 엄마로부터 뚝뚝 떨어지는 사랑을 받으니까 엄마아빠인 줄 아는 거지요.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ㅎ님의 그 사랑이 심령 깊숙이 느껴지고 만져지니까 ㅎ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겁니다.
(요일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십자가는 ㅎ님이 자기백성을 사랑하신 사랑의 증표) *롬5:8참조
(요일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마치 아기가 부모의 사랑 안에서 두려움은 전혀 없고 오직 만족과 행복을 누리듯이, 성도가 갖는 자유함은 ㅎ님의 사랑이 물밀 듯 느껴질 때 오는 영적 행복감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육신의 현실은 온갖 문제로 산적해 있지만, 거기에 매이질 않고 심령 깊은 곳에서 ㅎ님의 사랑과 은혜가 만져지기에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이고,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구원의 즐거움을 날마다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소원 합니다.
...
*출처: 사랑과 복음교회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