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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87
에베소서 2장 20절 [31장 3-5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31장은 회들과 공의회들에 대한 내용으로, 1항은 교회의 보다 나은 정치와 보다 더 나은 건덕을 위해 일반적으로 [대회, 총회, 세계공의회와 같은] 회들, 혹은 공의회들이라 칭해지는 그런 모임들이 있어야만 한다고 고백합니다. 이러한 모임은 2항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위정자들이 종교문제에 관해 의견을 듣고 조언을 구하기 위해 목사들과 적합한 다른 사람들[즉, 장로들]의 어떤 회를 합법적으로 소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정자들이 교회에게 공공연한 적대행위들을 한다면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즉, 목사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직책의 효력에 의해, 혹은 자신들의 교회들 총대로서 적합한 다른 사람들[즉, 장로들]과 함께 그런 모임들로 함께 모일 수 있습니다.
그럼 더 넓은 회들인 대회, 총회, 공의회의 직무란 무엇인가? 신앙고백서는 세 가지를 말합니다. 그런데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세 가지의 중심에는 하나의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말씀이 말씀답게 드러나고, 그 말씀에 따라 교회가 판단하고 결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교회가 그의 몸이라고 할 때 교회는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뜻만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회로 모이든, 노회로 모이든, 31장에서 말하고 있는 보다 넓은 회로서 대회, 총회, 공의회든 하나님의 말씀만이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임을 전제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3항에서는 대회, 총회, 공의회의 직무란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난 뒤, 4항에서는 그러한 회들의 결정이라 할지라도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까지 말할 수 있는 겁니다.
먼저 3항입니다.
신앙의 논쟁들과 양심의 문제들을 결정하는 것, 공적인 하나님 예배와 하나님의 교회 정치의 보다 나은 질서를 위한 규범들과 지침들을 제정하는 것, 그릇된 행정의 경우들에 대한 고소들을 접수하여 권위 있게 결정하는 것은 회들과 공의회들의 사역에 속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한다면 법령들과 결정사항들은 말씀과 일치하기 때문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명령된 하나님의 규례로서 제정된 바에 의한 권세 때문에도 존중과 순종의 마음으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행15:15,19,24,27-31, 16:4, 마18:17-20).
신앙고백서가 말하고 있는 대회, 총회, 공의회의 직무란 무엇인가? 첫째, 신앙의 논쟁들과 양심의 문제들을 결정하는 것이 회들과 공의회들의 사역에 속한다고 고백합니다. 지난 시간에 사도행전 15장을 살펴봤지만,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문제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나고(1-2), 결국 사도들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대회 혹은 총회라 할 수 있는 회의가 열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교리라고 말하는 어떤 부분에 있어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에 합당한가, 합다앟지 않는가를 결정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사도들과 장로들이 모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여 회를 통해 결정할 때 15절에 의하면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이렇게 확증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면에서 지금 우리가 살피고 있는 신앙고백서의 내용도 그런 논쟁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의해야 할 부분도 있는데, 비록 신앙고백서가 신앙의 논쟁들과 양심의 문제들에 대한 결과물이라 할지라도 모든 내용이 성경에 일치한다고 할 수 없다는 것과, 또한 모든 내용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진리의 가장 부요함을 다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에서부터 고백하는 것처럼 66권으로 된 모든 성경만이 신앙과 삶의 규범(2항), 그것도 유일한 규범이라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고, 다만 교회 역사 속에서 성경의 진리와 그 부요함을 알 수 있도록 결과된 신앙고백서의 내용들을 성경만이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라는 것으로 무시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무시한다는 것은 이미 교회 역사 안에서 결과된 것을 모른 채 다시금 건물을 지어야 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목사, 장로, 집사로서 안수를 받을 때 늘 하게 되는 고백은, 첫째가 신구약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요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한 법칙으로 믿는다는 것이요, 둘째가 장로회 신자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대소요리문답에 대하여 신구약 성경에 교훈한 교리들을 총괄한 것으로 알고 성실한 마음으로 받아 신종할 것을 선서하는 것입니다.
대회, 총회, 공의회의 직무란 무엇인가? 둘째, 공적인 하나님 예배와 하나님의 교회 정치의 보다 나은 질서를 위한 규범들과 지침들을 제정하는 것이 회들과 공의회들의 사역에 속한다고 고백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 6항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 바가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영광 및 인간의 구원과 믿음과 삶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에 관한 하나님의 전체 뜻은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거나, 선하고 필연적인 결과로 성경으로부터 유추될 수 있다. 성경에는 성령의 새로운 계시에 의해서든지 인간의 전통들에 의해서든지 아무 것도 어느 때에 추가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말씀에 계시되어진 것들로부터 구원을 아는 이해를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성령의 내적 조명이 필수적임을 인정한다. 그리고 하나님 예배와 교회 정치에 관해서 인간의 행동들 및 사회들과 공통적인 어떤 상황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것은 항상 준수되어야 할 말씀의 일반 규범들을 따라서 본성(자연)의 빛과 그리스도인의 분별에 의해 규정되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예배와 교회 정치에 있어서도 성경이 규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모든 상황과 절차를 세세하게 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문에 성경의 일반적인 원칙을 따라 교회가 지혜롭게 판단하여 필요한 규범과 질서를 정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신앙고백서가 최종적으로 완성되기 전 1645년에 예배모범과 장로교 정치규범을 작성하고 승인하였습니다. 예배모범은 공적인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규정하였고, 장로교 정치규범은 교회의 직분과 치리회, 그리고 교회의 정치와 질서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규정하였습니다.
이 부분 역시 얼마나 중요한지는 목사와 장로가 안수 받을 때 선서하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첫 번째가 성경에 대한 고백이요, 두 번째가 신앙고백과 관련된 것이라면, 세 번째로 선서하는 것이 이 부분입니다. 즉 본 장로회 정치와 권징조례와 예배모범을 정당한 것으로 알고 받아 순종할 것을 선서한다는 것입니다.
대회, 총회, 공의회의 직무 셋째는 그릇된 행정의 경우들에 대한 고소들을 접수하여 권위 있게 결정하는 것은 회들과 공의회들의 사역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일단 교회 안에서도 고소할 수 있다는 것은 고린도전서 6장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고전6:1) 이때 사도 바울은 굳이 세상 법정에서 고소할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해결할 수 있도록 할 것을 권면합니다. 그런데 교회라고 해서 늘 정당하게만 판단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그릇된 행정의 경우들에 대한 고소를 할 수 있고, 그런 고소에 대하여 판단하도록 하는 것이 회들과 공의회들의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의 논쟁들과 양심의 문제들을 결정하는 것, 공적인 하나님 예배와 하나님의 교회 정치의 보다 나은 질서를 위한 규범들과 지침들을 제정하는 것, 그릇된 행정의 경우들에 대한 고소들을 접수하여 권위 있게 결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한다면 법령들과 결정사항들은 말씀과 일치하기 때문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명령된 하나님의 규례로서 제정된 바에 의한 권세 때문에도 존중과 순종의 마음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게 3항의 고백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씀과 일치하느냐에 있습니다. 말씀에 일치한다면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과 일치하는 한 그러한 회들의 결정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명령된 하나님의 규례로 제정되었다고 여겨야 합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권위에 합당한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일치된다면 존중과 순종의 마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앞서 목사와 장로 등 안수를 받을 때 고백하고 선서하는 바가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지에 대한 고민도 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고백하고 선서하는 데서 그친다는 데 있습니다. 가장 먼저는 가르치는 목사가 부끄러워해야 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장로교 목사로서 고백하고 선언했다면 고백하고 선언한 내용을 알아야 합니다. 알면 존중과 순종의 마음으로 받아들이든가, 아니면 성경을 따라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면 이 문제를 가지고 논의하도록 하든가, 논의의 결과 받아들일 수 없다면 자신의 신앙고백과 맞는 쪽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부분 고백을 하면서도 고백한 내용으로 드러내지 못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고 해서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지만 이미 역사 속에서 진리의 합당한 내용으로 개혁된 부분이 있다면 존중하고 순종하는 마음을 받아들이려고 해야 합니다. 이런 부분에 있어 확인 과정 자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통해 경고한 바를 깊이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6-9) 어쩌면 다른 복음을 따르고 있는 것 자체가 저주의 성격으로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런 저주에서 벗어나 복된 길을 가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신앙의 논쟁들과 양심의 문제들을 결정하는 것이고, 나아가 공적인 하나님 예배와 하나님의 교회 정치의 보다 나은 질서를 위한 규범들과 지침들을 제정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릇된 행정의 경우들에 대한 고소들을 접수하여 권위 있게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교회와 성도는 이러한 말씀에 합당한 결정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4항은 오류가 있을 수 있는 부분에 대하여 고백합니다.
사도 시대 이후로 모든 회들이나 공의회들은 [보다 넓은] 보편성을 띠든 [보다 좁은] 개별성이나 특별성을 띠든 오류가 있을 수 있으며, 많은 오류가 있어 왔습니다. 따라서 회들은 신앙과 실천의 규범으로 삼아져서는 안 되고, 신앙이나 실천의 두 문제에 대한 어떤 도움으로써 이용되어야만 합니다(엡2:20, 행17:11, 고전2:5, 고후1:24).
먼저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오류를 말함에 있어 ‘사도 시대 이후’라고 말하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성경 계시의 완성과 관련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성경 계시가 완성되기 전에는 비상 직분이 있었습니다. 에베소서 4장 11절에 언급한 말씀 사역자와 관련해서 말하자면,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가 비상직분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 모두가 다 성경을 기록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비상직분으로서 성경을 기록하였다면 거기에는 결코 오류가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감동을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에베소서 2장 20절은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만약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었다고 할 때 오류가 있는 사도들, 오류가 있는 선지자들의 터라면 우리의 믿음은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한해 오류가 있을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터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신 터로 있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의 모든 가르침, 다시 말해 기록된 성경의 내용은 그리스도와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에서 이런 말까지 하게 됩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3:10-11) 사도 바울의 고백이지만, 에베소서 2장에서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었다고 할 때 그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즉 그들은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었는데, 그 터가 누구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거기에 오류가 있을 수 있는가? 없습니다. 비록 사도 바울도 사람이고, 사도 베드로도 사람이고, 사도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도 사람이지만, 그들을 통해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하게 하셨다면 거기에는 결코 오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고백서를 통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사도 시대 이후로 모든 회들이나 공의회들은 [보다 넓은] 보편성을 띠든 [보다 좁은] 개별성이나 특별성을 띠든 오류가 있을 수 있으며, 많은 오류가 있어 왔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하는 시대는 끝났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기록하던 시대에도 거짓 선지자들, 거짓 사도들이 있었고, 또 사도 베드로의 경우 자신의 잘못된 행동으로 복음의 교리를 어지럽히기도 했다고 갈라디아서에서 기록하고 있지만(갈2:11-13 참고), 신앙고백서가 ‘사도 시대 이후’ 오류가 있다고 할 때는 사도 시대까지 기록된 성경의 기록은 결코 오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류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경 외에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이해하는 데 있어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되고, 그 일로 회들과 공의회를 가지게 될 때 늘 오류 없는 결정만 하는가? 혹은 성경의 부요함을 다 드러내는 어떤 결정을 하는가? 그리고 그것으로 신앙고백과 같은 내용으로 결과되는가?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오류가 있을 수 있고, 또 실제로 교회 역사를 보면 많은 오류가 있어 왔습니다.
한 예로 지금 우리는 4항에서 사도 시대 이후, 모든 회들이나 공의회들은 보편성을 띠든, 개별성이나 특별성을 띠든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고백하지만, 가톨릭에서는 그럴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저들은 다음의 논리 전개과정을 통하여 무류성을 주장하는데(이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삶을 읽다 참고), 첫째로 이들은 주교들의 첫째 임무가 가르치는 임무로 주님의 명령에 따라 주님께 받은 복음의 진리를 모든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 봉사 직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서 목자들에게 신앙과 도덕에 관한 무류성의 은사를 주셨다고 봅니다. 둘째로 이 은사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행사될 수 있다면서 먼저 교황에서 적용합니다. 교황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최고 목자이며 스승으로서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리를 확정적 행위로 선언할 때에 자기 임무에 따라 무류성을 지닌다고 봅니다. 셋째로 무류성을 주교단과 세계 공의회에도 적용합니다. 교회에 약속된 무류성은 주교단이 베드로의 후계자와 더불어 최상 교도권을 특별히 세계 공의회에서 행사할 때에 주교단 안에도 내재한다고 봅니다. 이러하기에 넷째로 무류한 결정에 순종해야 한다고 결론을 짓습니다. 즉 교황과 주교단이 노회와 공의회를 통해 내린 결정은 하나님의 계시와 같은 권위를 갖는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말씀드리지만, 3항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회들과 공의회를 통한 결정이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한다면 말씀과 일치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미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명령된 하나님의 규례이기 때문에 권위를 가지는 것이고 그런 권위에 따라 우리는 마땅한 존중과 순종을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지도 않는데, 교회 회의를 통해 결정되었다는 것으로 오류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말씀만이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 아니라 또 다른 규범이 생기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부분과 관련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합니다.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마15:6) 그리고 이러한 전통에 대하여 예수님은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15:9)는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성경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의 계명으로 전락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도 오류를 내놓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지만, 그 진리로 거짓을 내놓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고백서는, 따라서 회들은 신앙과 실천의 규범으로 삼아져서는 안 되고, 신앙이나 실천의 두 문제에 대한 어떤 도움으로써 이용되어야만 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인용하고 있는 성경 구절들 중 사도행전 17장 11절만 살펴보면,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여기서 주목할 것은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받고 있느냐도 중요하지만,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는 데 있습니다. 누가 전한 말씀이냐? 사도 바울이 전한 말씀임에도 그렇습니다. 비상직분이 사도의 가르침인데도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한가를 확인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목사의 가르침, 그리고 목사와 장로들의 회들을 통한 어떤 결정이 있다고 할 때 우리는 과연 성경과 일치하는가를 분명히 살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5항입니다.
회들과 공의회들은 교회적인 것 외에 그 무엇도 다루거나 결론짓지 않습니다. 그리고 공익에 관계된 국가적 일들에 간섭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상적인 경우에는 겸손한 청원의 방식으로, 혹은 만일 국가 위정자에 의해 요구된다면 양심의 만족을 위한 조언의 방식으로는 할 수 있습니다(눅12:13,14, 요18:36).
2항에서 누가 회를 소집할 수 있는가 할 때 위정자도 소집할 수 있다고 했지만 전제된 것이 있습니다. ‘종교문제에 관해 의견을 듣고 조언을 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소집할 때 모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교회의 모든 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5항은 회들과 공의회들은 교회적인 것 외에 그 무엇도 다루거나 결론짓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덧붙여, 그리고 공익에 관계된 국가적 일들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이 부분은 특별히 성경의 두 본문을 통해 고백하게 되는데, 첫 번째가 누가복음 12장 13절과 14절의 말씀입니다.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분명 예수님은 죽음과 부활 이후 승천하실 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28:18).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그분의 통치는 특별히 교회를 위한 통치자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미리 드러내신 것이 유산을 나누는 문제에 있어서 나는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워진 자가 아니라는 것을 통해 나타내셨습니다.
두 번째는 요한복음 18장 36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분명한 사실은 승천하시면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으시기 전에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지상 나라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통치와 세속 통치를 분명히 구별하셨다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러한 구절들을 통해 회들과 공의회들은 교회적인 것 외에 그 무엇도 다루거나 결론짓지 않고, 공익에 관계된 국가적 일들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의 경우 예외를 두기도 하는데, 이것입니다. 비상적인 경우에는 겸손한 청원의 방식으로, 혹은 만일 국가 위정자에 의해 요구된다면 양심의 만족을 위한 조언의 방식으로는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오늘날 차별금지법을 통과시키기 위하여 움직인다고 할 때 그런 차별금지법이 교회로 하여금 성경이 말하고 있는 죄에 대하여 말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라면,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침범하고 말씀에 따른 양심의 자유를 제한하도록 한다면 그때는 얼마든지 겸손한 청원의 방식으로 요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공익과 관련된 국가의 일에 간섭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도록 하지 않는 비상적인 일에 대하여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국가 위정자에 의해 요구되는 일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양심의 만족을 위한 조언의 방식으로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는 자들의 가장 중요한 원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4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4:19)고 말했던 것이고, 사도행전 5장에서는 “...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5:29)고 했던 것입니다. 비록 회들과 공의회들을 통하여 결정하는 바가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늘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가를 살피면서 말씀만이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으로 여기며 쫓아가야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