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 무디는 칼뱅주의자들이 배교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전통이 성경을 이겼기 때문”이라고 비판하면서, 빌레몬서를 제외하고 모든 신약성경은 배교의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배교의 가능성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보존된다는 약속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그 약속이 주님을 계속해서 따르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에게 주어졌다는 점을 중시한다.”
그런데 칼뱅주의 관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하면, 신자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 끝까지 노력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사실상 배교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하나님이 신자가 배교하도록 방치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안전한 보장인가. 그래서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입장에 서면, 신자가 스스로 신앙을 지키고 성화를 위해서 노력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는 문제점이 있다.
반대로 아르미니우스의 조건적 은혜도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이 견해는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을 충분하게 담아낼 수 없다. 인간이 선택하는 반응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가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조건적 은혜란 개념에서 보면, 인간의 견인과 배교는 으레 인간의 반응과 결정에 좌우될 수밖에 없기에, 하나님의 주권은 명목상의 주권일 수밖에 없다는 비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에드가 멀린스(E. Y. Mullins)가 아르미니우스의 은혜론은 “이신론”(deism)으로 빠질 위험이 있다고 지적한 것은 정당한 것이었다. 이런 견해는 본질적으로 율법적인 구원관과 무관하지 않다.
[회중주체적 조직신학], 460-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