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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금같이 나오리라† 원문보기 글쓴이: 켈로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
오늘 본문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시나요?
너무나 평범하고 당연한 말씀이 아닌가요? 그런데 왜 오늘 말씀을 보면 래디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
그게 그렇게 힘든 것인 듯합니다. 너무나 자명한 사실 앞에서, 그렇게 살기 힘들다는 것 말입니다.
사람이 참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부부특강을 하던 중 강사가 말했습니다.
“부부간의 금실은 남편의 성공과도 연결됩니다. 아내의 키스를 받고 출근하는 남편의 연봉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20% 높다는 결과가 있습니다.”
그러자 한 여자가 손을 들고 질문합니다.
“혹시 연봉이 높기 때문에 키스해 주는 건 아닐까요?”
브레넌 매닝이 쓴 [신뢰]라는 책에 윤리학자 존 커버너프에 대한 일화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에게는 한 가지 고민이 있었고, 그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테레사 수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자 캘커타로 향합니다.
그를 본 테레사 수녀님이 물었습니다.
“내가 무얼 위해서 기도해드릴까요?”
“저는 지금 제 삶에 대해 명확한 답을 찾고 싶습니다.”
그러자 테레사 수녀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확실한 답, 그것은 당신이 붙들어야 할 것이 아니라 놓아야 할 것입니다. 확실한 답은 내게 있어본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위해 기도해드릴 능력이 내게는 없습니다. 하지만 내게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뢰입니다. 신뢰를 위해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아주 급진적인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고 확실해 보이지 않을 때 필요한 것이 ‘신뢰’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을 책임지시리라는 것이죠.
이 신뢰는 계약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 기반을 두는 것입니다.
신뢰가 시작되면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던 ‘합리성’이 자취를 감추고 하나님의 생각이 나를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내 안에서 소원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는 그 일이 나 자신을 위해서 하는 일인지 하나님을 위해 하는 일인지 하나님은 잘 아십니다. 아니, 우리 자신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일이 일치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내 인생을 내가 주도하고 있는지 하나님이 주도하고 계시는지를 정직하고 깊이 있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고든 맥도날드의 책 [영적 성장의 길]에 나오는 글입니다.
영국 명문 대학을 졸업한 청년이 간디가 이끄는 공동체에 와서 살게 되었다.
공동체에서 그에게 맡겨진 일을 화장실 청소였다. 며칠을 못 버티고 청년은 간디에게 항의했다.
“제가 누군지 아십니까? 저는 큰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요.”
간디는 조용히 대답했다.
“당신이 큰일을 할 수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내가 모르는 건 당신이 작은 일도 잘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참 잘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무척 힘이 듭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 참 힘이 듭니다.
나 자신에 대한 급진적 생각, 하나님에 대한 급진적 생각.
우리는 늘 큰일을 하고 싶어 합니다. 아니, 큰일을 해야 하나님을 나를 쓰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작 큰일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놓치는 것은 아닌가요?
어쩌면 큰일은 누구나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소수가 모인 작은 공동체에서 그것도 아무도 봐주지 않는 일을 성실히 섬기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찾으시는 사람, 아니 하나님께 필요한 사람은, 큰일을 하려고 줄 서서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하겠노라고 자신을 드리는 사람이 아닐까요?
아주 래디컬한 생각입니다.
주님께서 정말 궁금하신 것은 우리가 큰일을 얼마나 잘하느냐가 아니라 작은 일에도 끝까지 충성할 수 있느냐가 아닐까요?
좀 더 급진적인 생각을 한다면, 지금까지는 우리가 작은 일을 하며 참을 수 있었던 이유가 큰일을 위해서였다면, 혹 평생 작은 일만 맡기더라도 기꺼이 인생을 걸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것이 아닐까요?
민호기 목사의 [작은 예배자]에 나오는 글을 소개합니다.
우리의 관심은 대부분 큰일, 중요한 일, 멋진 일, 빛나는 일, 명예로운 일에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종이 하는 대부분의 일은 작은 일, 하찮은 일, 허드렛일, 더러운 일, 소소한 일, 초라한 일이다. 종이란 본디 작고 하찮고 초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당시에는 많은 종이 있었다. 종에도 계급이 있어 그에 따라 일이 맡겨지기 마련이다. 집 지키는 종, 집안일 하는 종, 심부름하는 종, 밭일하는 종, 시중드는 종, 그중 가장 하급의 종은 단연 ‘발 씻기는 종’이었다. 잘 알다시피 먼지가 많이 나는 건조한 기후에, 샌들을 신고 다니던 당시 사람들이 외출하고 돌아왔을 때 가장 더러워진 곳은 바로 ‘발이다. 발 씻기는 종에게는 특별한 표식이 있었다. 바로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다니는 것’이다.
요한복음 13:4, 5.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예수께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신 것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닦아주기 위함뿐 아니라, 스스로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라고 선언한 것이다.
주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주님처럼 종이 되는 것이다. 내 생각과 방법, 내 뜻과 목소리, 내 고집과 자존심을 수건에 고이 싸서 허리에 두른 후, 누군가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종이 되어 발을 씻어주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이 앞에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무릎을 꿇는 것은 죽을 만큼 힘든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누군가’의 종이 될 뿐 아니라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바로 주님처럼.
혹시 송구영신 때의 말씀을 기억하시나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유언처럼 제자들에게 하고 싶으셨던 말씀 말입니다. 서로 높아지겠다고 하는 제자들에게 “먼저 섬기는 자가 되어라!” 그리고 주님께서 친히 수건을 들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말씀 말입니다.
지금 메저리그에서 활동하는 일본 선수 이치로 스즈키의 말입니다.
“초심을 잃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초심으로 플레이를 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늘 본질적으로 물어야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의 사역과 삶이 부패하고 있는지 아니면 발효되고 있는지.
우리를 처음 부르셨을 때의 마음이 변하지 않고 있는지 말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에게 좀 더 급진적인 생각이 필요합니다.
빌립보서 2장 3~4절에 사도 바울의 멋진 고백이 있습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소명을 찾기 위한 생각
급진적인 삶,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삶의 모험을 떠나기 위해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소명을 따라 살 수 있느냐는 것이죠.
1. 하나님의 목적에 헌신할 수 있는가?
헌신의 첫 번째 조건은 우리의 인생에서 새롭게 조율된 하나님의 목적에 헌신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방식을 뒤엎는 급진적 생각이 없이 섣부르게 헌신에 뛰어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에 헌신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내 삶의 이슈가 되었던 것을 하나님의 이슈로 바꾸겠다는 결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가 무엇이었나요?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무엇’이 되겠다고 하는 것?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이루어야겠다는 ‘무엇’?
우리의 삶에서 가장 시급했던 ‘우선순위’?
그런데 과연 그것이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이슈에 헌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기에 대하여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9장 23절에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분으로 인정하는 순간 자기 자신에 대하여 죽는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포기 정도가 아니라 죽어야 합니다. 이 순간부터 우리의 삶을 통제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사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큰 문제는 ‘통제’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통제 받기를 늘 마땅치 않게 여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통제는 우리의 욕구를 거스른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욕구의 통제를 받을 때 하나님의 계획에서 벗어나 잘못된 길로 갈 확률이 참 높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제 아래 산다는 것은 철저한 자기 부정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그리스 신화의 ‘오디세우스의 모험’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세요.
트로이 전쟁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이 무척 위험합니다. 사이렌들이 유혹하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이 유혹의 소리가 들리는 해협을 통과할 때 항해사들은 항로를 이탈하여 암초에 부딪혀 목숨을 잃고 맙니다.
전쟁에서 이겼지만, 전쟁이 목적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가족들 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많은 이가 인생에서 치열하게 영적 전쟁을 치르고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지 못한 채 좌초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 사역의 승리를 경험하는 순간 아름다운 사이렌 소리가 유혹하기 시작합니다.
사도 바울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도 자신이 가진 욕망 때문에 사역의 끝에서 하나님께 버림받을까 두려워하지 않았습니까?
오디세우스는 부하들에게 귀를 밀랍으로 봉하라고 명령합니다. 또 자신을 돛대에 묶게 하고, 사이렌 소리가 들리는 곳을 벗어날 때까지 자기가 하는 모든 명령을 무시하라고 합니다. 철저한 준비로 오디세우스는 위협을 통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에 헌신한다는 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길을 가기 위해 기꺼이 우리가 포기해야 할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묶어놓아야 할 우리의 욕망이 되살아나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기를 부인하겠다는 결단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기 위해 최후로 시험하셨던 것은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최종적인 꿈을 이루기 위해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 하나님께서는 아들 이삭을 드리는 아브라함의 헌신의 결단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삭을 취하시지 않고 숫양을 준비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대신하여 숫양을 준비하셨다는 사실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포기할 수 있는 결단을 했다는 것입니다.
결단의 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삭을 취하실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삶을 포기한다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거두어 가실 수도 있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계속해서 사용하실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포기하는 순간 모든 통제권이 하나님께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2. 헌신을 위해 기도하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 살기로 했다면, 이제 그분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6장 13절에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라고 말씀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 못지않게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제하시고 인도하시는 가장 중요한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을 통해 기도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기도를 통해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아버지로서의 영향력과 하늘에 계신 분으로서의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기도를 통해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임을 고백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라는 기도를 통해 우리가 구하는 것은 돈이나 권력, 그리고 성공을 쫓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존재임을 또한 고백합니다.
기도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인정하게 되며, 우리의 존재를 확인하게 됩니다. 헌신은 하나님 앞에서 나를 바로 본 자의 신앙 고백입니다.
3. 작은 일에 순종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급진적인 삶을 살기 원한다면 이제 직접적인 순종의 준비가 되어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어떻게 알고 증명할 수 있나요? 순종하지 않고는 결코 알 수 없죠. 그런데 이 순종이 어떤 커다란 순종이 아니라 아주 일상적인 것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셨나요?
스포츠를 생각해 보세요.
홍명보 감독이 월드컵 대표선수를 뽑으면서 가장 고심하는 것 중의 하나가, ‘현재 경기에 출전하는가?’의 기준이죠. 아무리 실력이 좋다고 해도, 연습하지 않고 현재 쓰임 받을 수 없는 사람을 중용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일을 맡기실 때, 작은 일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 어떻게 맡길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현재는 수없이 많은 과거의 결정에 대한 결과입니다. 우리의 미래 역시 현재의 삶이 만들어가는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더 큰 일을 맡기시기 전에 먼저 작은 일을 어떻게 하는지 보기를 원하시겠죠? 여러분이 돈을 어떻게 사용하고, 여러분의 직장에서, 가정에서, 신앙 공동체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바라보시면서 여러분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가장 기본적인 명령에도 순종하지 않으면서 “자기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소명”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실망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급진적 생각은 기본적인 행동을 낳습니다!
당신의 삶에서 가장 기본적인 순종이 무엇인가요?
예배시간을 지키는 시간의 십일조,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는 수입의 십일조, 공동체에서 누구도 하기를 원치 않는 궂은일에 대한 자원,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삶의 헌신.
4. 끈기 있게 행동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주차된 차는 조종하실 수 없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당장 우리에게 가장 적절한 소명을 찾으려는 것이죠.
오스 기니스는 ‘소명’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의 재능에 맞는 자리를 찾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선택한 자리에 맞게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의 재능을 만드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자리에 도달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 본연의 자아를 발견할 것이다.
참 멋진 말이죠?
우리가 끊임없이 행동하며 나아갈 때, 점점 소명의 자리로 나아가게 됩니다.
끊임없는 질문이 끊임없는 행동을 낳습니다.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일원으로 불림을 받는 순간 참 많은 일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그렇게 많은 일 중의 나에게 주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에게 어떤 일이 맞는 일인지 구분하기 힘들 때도 있습니다. 때로 우리가 하는 일이 혹 실수를 유발할까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책망하시는 것은 일의 크기나 성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행동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책망은 우리가 실수한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임하게 될 것입니다. 누구도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끊임없이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 행동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헌신할 때,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질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움직이기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운전하실 것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께 순종하며 신뢰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 열정의 방향을 바로 잡아 주실 것입니다. 때로 우리가 가려는 방향의 문을 닫으시기도 하실 것이며, 또 다른 문을 여시기도 할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는 끊임없는 열정의 사람 사도 바울이 아시아를 향해 가려고 할 때 성령께서 그 길을 막으셨습니다. 그래서 북쪽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더니 그쪽으로 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사도 바울이 꿈을 꾸었을 때,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이리로 건너오라고 손짓하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문을 닫으시고 또 다른 문을 여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을 때, 문을 닫으시고 다른 문을 여시는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라는 움직이는 차를 하나님께서 운전하셨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어떤 계획과 행함이 없었다면 하나님께서 문을 닫으실 일도 여실 일도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5.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가?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완벽하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나의 계획이 아닌 하나님의 작전에 순종하는 것이죠.
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군사로 모집’되었다는 비유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전쟁에 나가기 전에 훈련을 받습니다. 이왕 군사로 불림을 받았다면 최전방에 나가 용감하게 싸우기를 꿈꿀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그분이 필요하신 때에 나를 투입하실 것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기다릴 수 있느냐는 것이죠.
신뢰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주님을 섬길 기회를 주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리처드 스턴스가 레녹스 회장 자리를 사임하고 월드 비전 회장이 되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마흔일곱이 되어서야 월드비전 대표로 인도를 받았다. 첫해를 보내면서 이 일이 얼마나 만족스럽고 내 은사와 재능에 꼭 맞는지 알았다.
아내에게 왜 진즉 이런 일을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자, 아내가 대답했다.
“당신이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까요. 당신이 월드비전에서 섬기도록 준비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하실 일이 많았거든요.”
아내의 말이 옳았다. 하나님은 인내심을 가지고 나를 시험하고 훈련하고 빚어가고 준비시키셨다. 그분은 그때마다 내 앞에 닥친 일에 충실하라고 요구하셨고, 때가 되자 나를 다른 일로 부르셨다. 나는 그 부르심에 언제든 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나요?
지금 하는 일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확신하는 사람만이 다음 부르심에 순종할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 당신에 일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하십시오!
보잘것없는 인생이란 없습니다!
단지 순종하지 않는 인생이 있을 뿐입니다.
위대한 인생은 없습니다.
단지 위대한 순종이 있을 뿐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순종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말입니다.
혹시 ‘도미노’를 아시나요? 연쇄반응으로 작은 도미노가 더 큰 도미노를 넘어뜨리는 것 말입니다. 실제로 죽 늘어선 도미노의 경우 자기 자신보다 1.5배 정도 큰 도미노를 넘어뜨릴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 한 가지,
그렇게 1cm 길이 도미노로 시작한 연쇄반응이 스물아홉 번째 도미노에 도달하면, 마지막으로 넘어지는 도미노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만 한 높이가 된다는 것.
성경에 등장하는 기생 라합은 참 미약한 사람입니다.
그녀는 창녀였고 단지 자신의 생명과 가족의 생명을 위해 정탐꾼을 살려줍니다. 그렇게 그 가정이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정에서 보아스라는 아들이 태어납니다. 보아스는 모압 땅에서 시어머니 오르바를 따라온 룻과 결혼합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다윗의 아버지 이새의 아버지인 오벳이 태어납니다. 그로부터 천 년 후 라합과 룻과 보아스의 혈통에서 요셉이라는 사람이 태어납니다. 그는 예수님의 아버지가 됩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여인 라합에게서 예수님의 족보가 이어집니다.
성경뿐만 아니라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이런 도미노 현상을 보게 됩니다.
정말 드러나지 않는 목회자로서 살았던 일본의 나가노 목사님은 어느 날 폐병으로 죽어가며 자신을 찾아온 한 청년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보여줬습니다. 그 청년은 일본의 성자라 불리는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님이고, 그는 나가노 목사님에게서 배운 사랑을 가지고 2차 세계대전 말기 중국에서 빈민들을 위해 사역을 하게 됩니다. 그의 사역을 보고 감명을 받았던 장개석 총통의 부인 송미령 여사 때문에 패전한 일본인들은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한 사람의 변화가 수만 명의 생명을 살리게 된 것이죠.
여러분은 아십니까?
1880년대에 단지 학생선교자원운동의 창시자였던 로버트 와일더가 시카고 맥코믹 신학교에서 말씀을 전했는데, 그 자리에서 새뮤얼 모펫이 감동을 받고 2년 후에 한국에 옵니다. 그는 유교적 전통에 환멸을 느꼈던 한 젊은이 길선주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는 모펫이 세운 중앙장로교회의 신실한 신자가 되었고, 평양 장로회 신학교가 배출한 첫 번째 일곱 졸업생 중에 하나가 됩니다.
길선주는 1907년 1월에 시작한 평양 대부흥의 주동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한경직 목사님 역시 사무엘 모펫이 세운 교회에서 성장하고 신앙을 갖게 됩니다. 그는 프린스턴에서 공부하고 한국 교회의 지도자가 됩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종군기자 로버트 피어스는 한경직 목사님의 권면으로 한국 전쟁의 과부들과 고아들을 살리기 위한 자선 단체를 만들게 됩니다. 1950년 9월 밥 피어스는 월드비전이라는 새로운 자선단체를 등록합니다. 현재 월드비전은 100여 개 국가에 4만 5천 명이 넘는 직원이 일을 합니다.
이런 도미도 현상은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단지 시작하는 첫 번째 도미노는 다음에 어떤 도미노가 넘어질지 모를 뿐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겠다는 급진적인 생각은 급진적 행동을 낳습니다.
급진적 행동을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의 기본적 순종에서 시작하는 것이죠.
이렇게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자들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는 것이 우리를 얼마나 모험적인 삶으로 인도하겠습니다. 급진적 생각이 낳는 급진적 행동, 그리고 그 행동이 기대하는 모험적 인생이 도미노처럼 펼쳐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