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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 눅 13:1-5
지금 세계는 자연재해인 천재와 사람의 잘못으로 인한 인재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중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사건사고를 간략하게 말씀드립니다. 연대순으로 보면, 먼저 1970년 4월 8일 서울 마포구에서 발생한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입니다. 1971년 12월 25일 서울 충무로의 대연각 호텔에서 발생한 우리나라 최대 최악의 화재 사고입니다. 1983년 9월 1일에 일어난 대한항공 007편이 사할린 근처의 소련 요격기에게 격추당해 추락한 사건입니다. 1993년 3월 28일에 부산 구포역 근처에서 일어난 열차 전복 사고입니다. 7월 26일, 김포 공항에서 출발해서 목포 공항에 도착할 예정이었던 아시아나 여객기가 한 야산에 추락했습니다. 10월 10일에 ‘서해 페리호 침몰사고’가 일어났습니다. 1994년 10월 21일에 일어난 ‘성수대교 붕괴사고’입니다. 1995년 4월 28일에 대구의 상인네거리 근처에서 일어난 가스 폭발사고입니다. 6월 29일에 서울의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습니다. 1997년 8월 6일에 괌에서 일어난 대한항공기 추락 사고입니다. 1999년 6월 30일에는 경기 화성의 씨랜드라는 청소년 수련원에서 화재가 일어났습니다. 10월 30일 인천 중구 인현동에서 일어난 화재사고입니다. 2003년 2월 18일 대구 지하철 중앙로역에서 발생한 방화사고, 2012년, 구미 산업단지에서 불산 저장탱크가 폭발한 사고입니다. 2014년 2월 17일, 경주의 마우나 리조트의 강당이 폭설로 인해 무너진 사고입니다. 4월 16일 우리나라 현대사를 대표하는 사건인 ‘세월호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성도 여러분, 제가 이렇게 국내의 사건사고들을 소개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시편을 비롯한 구약의 시가서들이 ‘자연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노라’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둥소리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기도 했고, 번개가 번쩍이는 것을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의 흔적으로, 계절의 변화 등을 하나님의 또 다른 메시지로 보았습니다. 신약성경의 로마서 1:20절에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대로 한다면, 사람들이 당하는 재난 속에도 하나님의 음성, 또는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들을 수 있고 알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끊임없이 일어나는 자연재해와 사고와 질병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합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갑작스런 재난을 당하여 세상을 떠나게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삶과 죽음 사이는 그리 멀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았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살아있는 날 동안 단 하루라도 무의미하게 보내서는 안 됩니다. 자기 삶에 후회 없이 살아야 합니다. 주위에 불행당한 사람을 보며 몇 가지 형태의 반응을 보입니다. 첫째, 위로하는 형입니다. 그 당한 일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어떻게든 그 사람을 위로하려고 하고 상대방의 아픔을 나누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둘째, 정죄하는 형입니다. 그 당한 것에 대해 정죄하고 판단하는 사람입니다. “그 일은 분명히 당한 사람에게도 잘못이 있을 것이다. 그 사람 평소에 지은 죄가 많아서 그렇다. 그렇게 말했는데도 기어이 내 말 안 듣더니 결국 그렇게 됐다.” 셋째, 의미를 찾는 형입니다. 그 일을 통해서 의미를 찾고 교훈을 얻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이 일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을 텐데’ 하며 말을 아끼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유형의 사람입니까? 무조건 위로하는 형입니까? 대놓고 정죄하는 형입니까? 의미를 찾게 하는 형입니까? 무조건 위로하면 상처는 주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왜 그런 일을 당했는지에 대해선 의문이 풀리지 않습니다. 대놓고 정죄하면 상처를 줍니다. 상처 위에 또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스스로 의미를 찾도록 돕는 것이 좋습니다. 할 수 있으면 말을 아끼고 가르치려고 하는 자세를 버리고 본인 스스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할 수 있도록 곁에서 돕는 것이 최상책입니다. 여러분은 고난당한 이웃을 향해 지금까지 어떤 형태를 취하여 왔습니까? 여러분이 한 그대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뿌린 말의 씨가 자라 언젠가 열매가 되어 돌아온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될 것입니다. 여러분, 섣부르게 판단하지 마세요. 이웃의 불행에 대해 함부로 입을 열지 마세요. 고통 받는 이웃에게 정죄하는 것을 금하세요. 전도서 5:2절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함부로 입을 열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까?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고 합니다.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합니다. 우리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임을 잊어선 안 됩니다. 하나님이 듣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보다 직접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1-2절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그대로 되돌려 받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주신 말은 능히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능력있는 말을 가지고 남을 비판하는데 사용하고 남을 헤아리는데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언어의 능력을 남을 축복하는 일에 사용하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을 격려하는데 쓰기를 바랍니다. 타인을 세우는데 사용하기 바랍니다. 남을 축복하면서 살아도 짧은 인생입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서 살아도 길지 않은 인생입니다. 타인을 좋게 생각하면서 살아도 금방 지나가는 인생입니다. 우리의 입술만 잘 지키면 죄짓는 것의 절반은 줄일 수 있습니다. 다윗은 복 받기 원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시편 34:12-13 ‘생명을 사모하고 연수를 사랑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거짓말에서 금할지어다.’ 무슨 말입니까? 죽고 사는 것이 혀에 달렸다는 말입니다. 복을 받느냐, 못 받느냐가 입술에 달려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회개하는 입술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어떤 입술이 복된 입술입니까? 타인에 대해서는 축복하는 입술이고 자신에 대해서는 회개하는 입술입니다. 물론 자신을 축복하는 입술이어야 합니다. 1978년 태어나 이화여대 유아교육과를 졸업한 한 자매가 있습니다. 대학 4학년이던 2000년 7월 30일 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치고 오빠와 함께 승용차로 귀가하던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전신 55퍼센트에 3도 화상을 입었습니다. 한 음주 운전자가 낸 6중 추돌사고 때문입니다. 응급실을 향해 달려가는 앰뷸런스 안에서 동생의 곁을 지키던 오빠는 살 가망이 없는 동생에게 이렇게 작별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넌 누구보다 좋은 동생이었어. 평생 잊지 않을 게. 잘 가.” 4-5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중화상 환자로 의사들마저 치료를 포기한 상황입니다. 7개월간의 입원, 11차례의 수술, 너무나 고통스러운 치료였습니다.
지금 더 이상 예전의 곱던 얼굴은 찾아볼 수 없고, 온몸에 화상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지만, 그 누구보다 당당하고 즐거운 인생을 살고 있는 자매가 책을 한 권 냈습니다. 그 자매는 그 책에서 사고로 자신의 인생이 끝난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때부터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며, 앞으로 상담심리학을 공부한 후 마음이 아픈 사람들의 마음 곁에 함께 서고 싶다는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 자매의 이름은 이지선이고 책 이름은 ‘지선아 사랑해 : 희망과 용기의 꽃 이지선 이야기’입니다. 미국 유학 가서 재활상담학을 전공한 후, 사회복지학으로 전공을 바꿔 박사학위를 하고 지금은 한동대 교수로 재직중입니다. 이지선 자매는 오늘도 화상으로 심히 일그러진 얼굴이지만 거울을 향해 손을 흔들며 자신에게 인사한다고 합니다. “지선아, 사랑해” 자신을 축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자신을 사랑할 때만이 자신을 축복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자신을 향해 진정으로 축복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루에 한 번 이상 자신을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한번 연습을 해볼까요? “너는 복의 근원으로 살지어다.” “너는 행복할지어다.” 그런데 자신을 축복하는 입술 이전에 먼저 회개하는 입술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회개함이 없이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회복 없이 축복이 임할 수 없습니다. 회개라는 말을 무겁게만 생각하지 마세요. 회개는 그릇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릇을 깨끗이 씻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회개 없이 축복 없다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복을 사모한다면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 회개를 거부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문제는 회개를 지체하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것을 미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루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인데 회개하는 일을 연기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것입니다. 내일 회개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사람도 없습니다. 중세의 유명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시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회개할 내일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으셨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회개를 내일로 미루지 마세요. 내일은 우리의 날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내일이 온다는 확실한 보장이 없습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1절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예수님이 여느 때처럼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시고 있는데 두어 사람이 예수님께 왔습니다. 무슨 소식을 갖고 왔을까요? 참으로 충격적인 소식입니다.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것입니다. 여러 명의 갈릴리 사람들이 성전에서 빌라도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당하였다는 것입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어떤 유월절 제사 때에는 3천 명의 유대인들이 제단에 바쳐지는 짐승들처럼 학살당했으며, 또 다른 어떤 유월절에는 무려 2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이 처참하게 학살당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총독이 괜히 유대인들을 학살하지는 않았을 거고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독립을 요구하는 열심당원들이 절기를 지키려고 예루살렘 성전에 모인 백성들을 선동하여 난을 일으키자, 로마 군인들이 이를 평정하고자 성전을 짓밟고 절기를 지키려고 성전 안에 있던 죄 없는 사람들까지 학살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건을 보는 유대인들의 시각은 둘로 나뉘었습니다. 하나는 죄 없이 죽은 자들을 애도하는 입장입니다. 로마 군대에 분노하면서 빌라도와 헤롯을 정죄하고 무고하게 죽은 자들을 애도하는 입장입니다. 다른 하나는 성전에서 죽은 사람들을 정죄하는 입장입니다. 다른 곳에서 죽은 것도 아니고 성전에서 죽은 것을 보면 자신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이 어떤 입장을 취했을 것 같습니까? 당연히 정죄하는 입장이었을 겁니다. 그들은 인간의 모든 사고와 불행을 죄의 결과로 여겼습니다. 아마 예수님께 나아와 보고한 사람들도 그와 비슷한 관점을 가졌을 것입니다. 여러분, 바리새인들처럼 생각하는 것이 맞습니까? 틀립니까? 사실 맞다고 말하기도 그렇고, 틀렸다고 말하기도 그렇습니다. 모든 불행의 원인이 죄에 있다는 점에서는 맞는 말이고, 모든 사건 사고를 죄의 결과로 보기는 어렵다는 점에서 틀린 말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아와 말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서 말씀하셨습니다. 2-5절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예수님은 크게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변을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셨지만 누구 죄 때문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죽은 사람들의 죄 때문이라고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빌라도의 죄 때문이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빌라도에 의하여 자행된 성전 양민 학살 사건의 소식을 듣고서 어느 한 편에 서지 않았습니다. 죽은 자들을 애도하지도 않고 빌라도에 대하여 분노하지도 않고, 성전에서 싸움을 벌이다 죽은 자들을 율법을 범한 사람으로 정죄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또 실로암 망대가 무너진 사건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을 취하셨습니다. 거기에 깔려죽은 18명에 대해 슬퍼하시지 않고, 망대를 쌓았던 시공자들에게 화살을 돌리지도 않았습니다. 누구를 지목하여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시 성전에서 행한 학살 사건과 실로암 망대가 무너진 사건은 대단한 이야기 거리였습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애도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정죄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죽은 사람들과 죽인 사람들에게 쏠려 있는 시선을 말씀을 듣고 있는 무리들에게로 돌리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보느라고 자신을 잃어버리지 말 것을 말씀하신 겁니다. 정죄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는 순간 하게 됩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3절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이상합니다. 우리 눈은 자기 자신보다 남을 더 잘 봅니다. 내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깨달은 사람은 쉽게 남을 정죄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남의 허물이 보일 때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교회에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1절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네 자신을 살펴보아” 자신을 살펴보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자신을 살펴보지 않는 사람의 말은 깊이가 없습니다. 감동이 없습니다. 현대는 자기성찰이 부족한 시대입니다. 정말 중요한 거울을 보지 않는 시대입니다. 얼굴을 비춰보는 거울을 물경(物鏡)이라면 마음을 비춰보는 거울은 심경(心鏡)입니다. 우리는 물경 외에 심경을 가져야 합니다. 내 성격을 비춰보고 내 인품을 비춰보고 내 영혼을 비춰보는 마음의 거울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거울을 주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0:11절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거울)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의 거울을 주신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은 일반 거울과 원리에 있어서 같습니다. 거울의 목적은 보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보는 그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자기 모습을 고치기 위해서 봅니다. 우리가 말씀의 거울을 보는 것도 자신의 영혼을 살피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의 신앙생활이 올바른가를 살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살피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시정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고쳐야 할 부분이 있으면 고쳐야 합니다. 거울을 보고 얼굴에 묻은 것을 보고 ‘아, 뭐가 묻어있구나’ 하고 그냥 놔두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말씀의 거울을 보고는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말씀의 거울에 먼지가 많이 끼어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보고도 그냥 지나가는지 모르겠습니다. 말씀의 거울을 보는 또 다른 목적이 있습니다. 미리 경계하는 것입니다. ‘아, 그렇게 하면 안 되겠구나.’ ‘아, 그렇게 살아야 복을 받을 수 있겠구나.’ 오늘 우리가 말씀을 대하는 목적도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대하면서 우리는 미리 경계합니다.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살펴라.’ ‘남의 눈에 티를 지적하기 전에 자기 눈에 들보부터 빼라.’ 우리는 무슨 사건이든지 어떤 일을 만났을 때 그것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겸손히 찾아야지 성급하게 다른 사람을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 고하러 온 사람들의 마음속에 은근히 자신들은 죄인이 아니고 사고를 당한 사람들은 죄인이라고 하는 의식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사실 그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죄는 크지 않고 다른 사람들은 죄는 크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문제가 없고 상대방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이 남을 정죄하게 합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죄의 질과 죄의 행태는 약간 다를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다 죄인입니다. 드러난 죄인과 드러나지 않은 죄인의 차이일 뿐입니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세요. 누가 누구를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죄가 드러나지 않았다고 타인을 정죄해도 되는 겁니까? 아니죠? 하늘에 계신 분이 보고 계십니다. 그 분이 웃으십니다. 창세기 13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그 조카 롯이 헤어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가난할 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재산이 많아짐으로 목자들 간에 다툼이 잦아짐으로 더 이상 한 곳에 거할 수 없게 된 겁니다. 그 때 아브라함이 어떻게 합니까? 삼촌으로서 롯을 나무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롯을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롯을 찾아갔습니다. 찾아가서는 조카인 롯에게 목초지를 먼저 택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습니다. 창세기 13:9절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문제의 원인을 더 이상 상대방에게서 찾지 않고 갈등의 원인을 찾아 해결합니다. 그 상황에서 붙들고 있어본들 계속하여 갈등만 재연될 뿐입니다. 목자들의 다툼은 급기야 자신과 롯과의 다툼으로 발전하게 될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에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누가 봐도 손해 보는 결단입니다. 그러나 그는 정죄보다 손해를 택했습니다. 죄짓는 것보다 물질적인 손해를 택했습니다. 이게 신앙인으로서 바른 자세가 아닙니까?
둘째,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정죄하지 말고 자신을 살필 것을 요구하신 주님은 이제 회개를 강력히 촉구하셨습니다. 3절과 5절의 말씀이 똑같지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이 말씀에서 주님의 심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 그들이 너희 생각대로 죄 때문에 죽었다고 하자. 그럼 너희들은 죄가 없어서 살아 있는 줄 아느냐?” 예수님은 남에게 향해 있는 관심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릴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 전에 자기 자신의 죄를 깨닫기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죄에는 무관심하고 남의 죄에 지나친 관심을 갖고 있으니 예수님이 보시기에 답답하신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도 죄인이다’는 생각이 회개의 첫걸음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의식하는 사람이 회개의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그럼 회개가 무엇입니까? “회개하다”의 원어 ‘메타노에오’는 지난날을 돌아보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잘못된 삶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는 것까지를 포함합니다. 삶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는 것까지가 회개라면 우리는 회개에 미치지 못할 때가 많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기까지는 합니다. 깨닫고 뉘우치기까지는 합니다. 그래서 후회의 눈물도 흘려봅니다. 그러나 며칠 지나면 다시 그 자리입니다. 얼마 지나면 그 자리에 다시 와 있습니다. 은혜 받으면 뭐가 바뀐 것 같습니다. 새로워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식으면 내가 언제 그랬는가 합니다. 그렇게 하기를 수없이 반복해오다 보니 이제 자신에게 별 기대를 갖지 않습니다. ‘해보니까 나는 안 되더라.’ ‘또 그렇게 될 텐데 뭘.’ ‘내가 한두 번 해본 게 아니다.’ 미리 포기해 버립니다. 그러나 그건 포기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넘어질 수 있는 존재임을 아십니다. 단번에 세워지지 못하는 연약성을 지니고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십니다. 잠언 24:16절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 넘어졌으면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세요.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다시 일어나지 않으면 망한다는 말입니다. 계속하여 넘어져 있으면 망한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망하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고 망하기를 바라신 것은 아닙니다. 망할 것을 작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망할 것을 예고하신 겁니다. 예고를 듣고 돌이키면 괜찮습니다. 그러나 예고를 무시하고 계속하여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게 됩니다. 끝까지 예고를 무시하고 회개를 거부하면 망하는 길 외에 없습니다. 성경은 회개 후에 회복이 있음을 말합니다. 역대하 7:14절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죄를 사하시고 땅을 고쳐주시는 조건으로 회개하는 걸 제시하셨습니다. 회개만 하면 모든 것을 회복시켜주시겠다는 약속 아닙니까?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회개가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7:10절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이 시간 우리는 회개하고 구원을 받을 것인가, 회개하지 않고 망할 것인지를 결단해야 합니다. 회개를 미루지 마세요.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삶입니다. 회개를 연기하는 것은 너무나 무모한 모험입니다. 예수님이 회개에 대해 그렇게 강도 높게 말씀하신 것은 절대로 망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릇을 잘 준비하라는 말입니다. 주인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라는 말입니다. 그 그릇에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차고 흘러 넘쳐 여러분 주위에 있는 사람들까지 복을 받게 되기를 바라신 겁니다. 실제로 여러분 주위에 있는 사람들까지 복을 받을 수 있도록 베푸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지구촌 곳곳에서 들려오는 재앙의 소리가 인류가 하나님 앞에 돌아오라는 영적 음성으로 들을 수 있게 하옵소서. 갈릴리에서 일어난 사고를 만나서 죽은 사람들이 “너희들보다 죄가 많은 줄 아느냐? 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망하리라.” 이 말씀이 우리를 향해서 주시는 말씀으로 듣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이 재림하실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제 겸손하게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좀 더 믿음의 삶을 아름답게 이루다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 눅 13:6-9
한때 세계 3대 피자 회사하면 ‘피자헛, 도미노, 리틀 시저스’를 꼽았습니다. 각각 독특한 판매 전략으로 유명해졌습니다. 피자헛은 다양한 메뉴로, 도미노는 남보다 빠른 배달로, 리틀 시저스는 싼 가격을 판매 전략으로 내세워서 유명해 졌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두각을 나타내면서 3대 자리를 꿰찬 회사가 있습니다. ‘파파존스’라는 회사입니다. 피자의 본질로 승부하겠다는 창업정신으로 유명해졌습니다. 피자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두말 할 것 없이 맛입니다. 좋은 재료를 사용해서 최고의 맛을 내겠다는 전략으로 일약 유명 브랜드가 되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본질에 있습니다. 모든 것에는 본질이 있습니다. 그리고 본질이 건강하면 목적이 분명하고, 그 목적에 맺어지는 열매가 많습니다. 음식의 본질은 맛입니다. 맛있는 음식점은 소문이 나고, 많은 손님들이 몰려들게 마련입니다. 음식의 본질은 맛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지 그 본질을 벗어나면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라도 그 본질인 맛이 변하지 않는 음식점이라면 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렇게 중요한 본질의 문제를 생각할 때 우리는 정말 깊이 생각해 봐야할 본질이 있습니다. 바로 신앙의 본질입니다. 과연 신앙의 본질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여러 가지일 것입니다. 예배, 기도, 봉사, 헌금 등. 만약에 이런 본질들이 건강하다면 반드시 그 신앙의 열매 또한 건강하고 알찬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신앙도 본질로 승부를 해야 합니다. 신앙의 본질로 살아남아야 그리스도인이라는 브랜드를 지켜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브랜드의 가치입니다.
오늘 본문은 무화과나무의 본질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본질이 있고, 그 본질에 따르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이 바로 존재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목적이 귀하다면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며 희생도, 수고도 할 만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최종 목적이 선명하지 않은 것을 위해 수고하는 것처럼 어리석고 허무한 짓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무화과나무의 본질과 그에 따르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주인이 왜 무화과나무를 심었겠습니까? 무화과나무는 오직 단 하나의 목적, 곧 열매 맺는 일이 전부입니다. 존재의 본질적인 목적인 열매만 잘 맺으면 되는 나무입니다. 별 쓸모없는 나무 같지만 열매 맺는 단 한가지의 목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존재하는 모든 것에 그 존재목적의 본질이 있듯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의 존재 목적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나이 많도록 세상에 존재한다면 그 만큼, 또는 짧은 세월을 지나고 세상을 떠났다 하더라도 그만큼의 존재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시간이 길든 짧든지 간에 주어진 그 시간에 열매 맺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그 존재목적입니다. 하나하나의 사건, 한사람 한 사람, 그 누구에게든지 하나님이 기다리고 계시는 열매, 곧 목적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이 섭리 앞에 서 있는 인간됨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그 목적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바라는 주인의 모습이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여기에는 무슨 변명도,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열매를 맺으려 하는 데는 많은 요구가 따릅니다. 예배하라, 기도하라, 봉사하라, 전도하라. 이 요구에 대한 우리의 열매는 있습니까? 무엇이며, 얼마나 됩니까? ‘아들러’라는 심리학자는 말하기를 “사람은 외부적인 요구에 대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몇 가지의 보호 장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첫째가 변명입니다. 자기 양심도 분명히 수긍하는 일에도 변명을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또 한 가지는 공격입니다. 누가 자기를 비판하면 즉각적으로 공격합니다. “너도 그랬지” 또는 “너 때문이야.”라고 공격하는 심리가 있답니다. 그런가하면 거리를 두며 자기를 보호하려고 합니다. “좀 더 있다가 하자. 아직은 이르다. 회개를 해도 죽기 바로 직전에 해야지. 예수님 옆에 있던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도 직전에 회개했는데” 하는 마음으로 자꾸 미뤄나가는 마음입니다. 그런가 하면 요구에 대해 아예 배제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아예 문제 삼지를 않습니다. “나만 죄인이냐? 남들도 안하는 예배, 봉사, 기도, 전도 나만 할 필요가 있나 신경 쓰지 말고 아예 생각을 하지말자.” 하고 배제해 버리는 이러한 심리입니다. 본질과 목적 자체를 생각조차 하지 않거나, 이런 저런 이유로 자기를 보호하려는 심리가 있다는 것인데 이것이 심한 사람일수록 열매를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무화과나무는 꽃이 없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꽃이 없는 건 아닙니다. 꽃이 열매 속에 피기 때문에 겉으로 보이지 않을 따름입니다. 대부분의 과일나무들이 화려한 꽃을 피우건만 무화과나무만은 열매로 자신을 드러냅니다. 무화과나무는 관상수가 아닙니다. 우리 교회에도 한 그루 있지만 관상수감이 아닙니다. 또 무화과나무는 목재감도 아닙니다. 제멋대로 생겼지 않습니까? 그런가 하면 땔감용으로도 접합하지 못합니다. 예레미야 24장에 보면 이스라엘을 무화과나무에 비유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무화과나무에 비유하는데 은혜가 있습니다. 관상수도 되고 목재로도 쓸 수 있으며 꽃과 열매까지 있는 나무가 있을 텐데 그런 나무들을 다 제쳐두고 무화과나무 같은 자들을 택하신 겁니다. 잘난 자를 택하지 않으시고 화려하고 세상이 알아주는 자를 택하지 않으시고 별 볼일 없는 자들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게 은혜가 아니고 뭡니까? 바울도 그렇게 언급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26절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오늘날 우리 중에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특별히 잘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특별히 빼어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특별히 걸출한 사람들도 아닙니다. 사실 잘난 사람들은 예수 믿기 힘듭니다. 오라는 곳이 너무 많아서 교회까지 오기는 힘들고,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주의 일까지는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잘나지 못한 것이 불행만은 아닙니다. 잘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다면 그건 행복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못남도 은혜입니다. 한번 따라해 보십시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못남도 은혜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당신의 의지를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고전 1:27-28절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그렇습니다. 평범한 자들을 들어서 비범한 일을 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볼품없는 무화과나무 같은 우리를 통해서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만의 계획이십니다. 우리는 평범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비범한 계획을 갖고 계신 줄 믿습니다. 그 계획은 우리로 하여금 튼실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묘목인 우리를 세상에 옮겨 심으시면서 그 열매를 기대하셨습니다. 잘 자라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기를 바라셨습니다. 6절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열매를 구하신다고 하지 않습니까? 부담스럽지만 이게 사실입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열매를 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열매 있는 무화과나무입니까?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입니까? 있다면 그 열매는 크고 탐스런 열매입니까? 주님이 바라시는 열매입니까? 주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열매입니까? 열매가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무화과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입니까? 열매가 없을 수밖에 없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 이유가 주님이 수긍할 수 있는 이유입니까? 무화과나무가 자신의 존재 목적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관상수로도 목재로도 땔감으로도 사용할 수 없는 무화과나무가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는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무화과나무와 우리는 같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자신을 따라다니게 하시며 그들을 가르치시고 3년 동안 훈련시키신 이유는 열매를 맺게 하는 데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17장을 ‘다락방강화’라고 부릅니다. 마태복음 5-7장에 나오는 ‘산상수훈’과 쌍벽을 이루는 말씀입니다. 다락방강화는 예수님이 십자가로 나아가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 다락방강화의 정 중앙인 15장에 보면 열매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요 15장을 보세요.(계속 펴놓고 계세요.) 1-2절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아버지를 농부로 자신을 포도나무로 제자들을 가지로 비유하셨습니다. 단순히 비유하신 것이 아니라 가지된 자의 책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가지된 자의 책임이 무엇입니까?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는 것이 책임이라고 말씀하신 주님은 열매를 맺지 않는 무책임한 사람들에 대해서 엄히 경고하셨습니다. 2절상과 6절을 보세요. 2절상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6절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포도나무에 대한 말씀을 하시던 주님은 제자들을 둘러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16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이 제자들을 택하신 이유를 분명히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그게 예수님이 제자들을 택하신 이유만 되겠습니까? 우리를 선택하신 목적도 열매를 맺기 위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심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생존하는 가장 큰 이유 역시 열매를 위함인 줄 믿습니다. 그럼 우리가 무슨 열매를 맺어야 할까요? 첫째는 생명의 열매와 재생산의 열매입니다. 4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열매를 스스로 맺는다고 했습니다. 말씀을 잘 보세요. 노력해서 맺는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맺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생명의 열매는 스스로 맺습니다. 구원은 내가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은 예수 안에 있으면 스스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생명의 열매를 위해서는 노력해봤자 헛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주시는 구원의 선물을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명의 열매뿐 아니라 재생산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2절하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한번 열매를 맺은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주인은 열매를 맺었던 가지에게 더 열매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재생산의 열매를 요구하신 겁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구원받은 것이 끝이 아니라 나를 통하여 다른 사람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전도의 열매가 맺혀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네가 구원 받았다면 다른 사람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쳐라.’ ‘네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마귀에게 종노릇하는 자에게 전하라.’ ‘네가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모든 민족을 대상으로 제자를 삼으라.’ 내가 예수를 믿고 보니 이렇게 좋고 생명을 얻고 보니 이렇게 행복한데, 그걸 혼자 간직할 수가 있겠어요?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고 입이 근질거려서 견딜 수가 있겠어요? 제발 전하지 말라고 해도 소문을 낼 수밖에 없을 겁니다. 마태복음 9:30-31절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리니라.’ 그가 특별한 열심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가 아주 별난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나 눈 뜬 감격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도저히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 재생산의 열매가 있습니까? 아니 재생산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부담감만이라도 갖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 신앙 하나도 감당하길 힘든데 무슨 재생산의 열매냐’고 항변하고 싶으십니까? 만약 항변하고 싶으시면 항변하세요. 그러나 여러분이 조금만 생각하신다면 항변이 아니라 회개가 나올 겁니다. 재생산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신의 가슴을 치고 전도의 열매가 없는 자신의 신앙을 탄식하게 될 겁니다. 하나님은 그 영혼들을 여러분에게 맡기셨습니다. 그 영혼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데 여러분이 귀하게 쓰임받기를 바랍니다. 또 우리가 무슨 열매를 맺어야 할까요? 둘째는 인격의 열매입니다. 갈라디아서에 5장에 보면 성령의 열매가 나옵니다. 22-23절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런데 말씀을 잘 보세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열매가 복수가 아니라 단수로 사용되었습니다. 9가지 열매가 나오지만 실제로는 한 열매나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한 열매 속에 있는 9가지의 특성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 한 열매는 한 인격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한 인격 속에 9가지 열매의 특성이 들어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9가지 특성을 가진 한 인격을 가지신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누구시죠? 예수님입니다. 사랑, 기쁨,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춘 인격의 대표적인 모델은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목표를 잃어버릴 때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 신앙 목표를 무엇에 두어야 합니까? 예수님의 인격을 닮는데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삶을 본받는데 신앙의 목표를 두어야 합니다. 그걸 바울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에베소서 4:13절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5절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모든 일에,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란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의 열매를 맺으라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적인 고목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신앙의 연륜만 높아서 될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마 7:20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열매가 없으면 소용없습니다. 주인은 오직 열매로 그 나무를 판단합니다. 마지막 그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단지 열매로 우리를 판단하십니다. 그 때 우리는 주님 앞에 두 가지 열매를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생명과 재생산의 열매와 인격의 열매를 꺼내 보여줄 수 있는 성도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7절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고 했는데 무화과나무가 어떤 땅에 심겨졌습니까? 포도원에 심겨져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지금도 포도 재배를 많이 합니다. 포도원은 그 중에서도 가장 비옥한 땅을 선택하여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무화과나무가 포도원에 심겨졌다는 말은 아주 좋은 땅에 심겨졌다는 말입니다. 좋은 땅에 심겨졌으면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할 것 아닙니까?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좋은 땅에 나쁜 열매를 바라고 나무를 심는 주인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이유 없이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는 제대로 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훗날 주님이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하십니다. 무화과나무가 실제적으로 땅을 버렸습니까? 무화과나무가 의도적으로 땅을 버렸습니까? 아닙니다. 기름진 땅에 심겨졌으되 열매를 맺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그곳에 포도나무를 심었으면 많은 열매를 얻었을 텐데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는 땅을 버린 셈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열매를 맺지 않는 것은 하나님나라의 땅을 버리는 것입니다. 신앙의 연륜만 높아가지 삶 속에 뚜렷한 변화의 열매가 없는 것은 땅만 버리는 것입니다. 열매가 없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서 말썽을 부린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들으세요. 열매를 맺지 않은 나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다른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열매를 맺지 않고 사는 그리스도인을 보고 배운 사람은 그 역시 열매 없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됩니다. ‘그렇게 믿어도 되는가 보다’ 하게 됩니다. 그 때 만약 그가 열매있는 그리스도인이었다면 자기를 지켜보는 사람을 열매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이끌었을 겁니다. 결과적으로 땅만 버린 것입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오늘날에 비해 숫자는 훨씬 적었지만 그 영향력은 더 컸습니다. 그들이 어떤 영향력을 끼쳤는가를 잘 나타내는 단어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24:5절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별명이 무엇이었다구요? ‘전염병(염병)’입니다. 여러분, 전염병 아시죠? 사전에 찾아보면 ‘장티프스균이 장에 침입하여 일어나는 급성 전염병’이라고 나옵니다. 한 사람이 예수 믿으면 그 사람에게서 끝나지 않고 그 사람을 통해서 그 옆의 사람이 예수 믿고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고 변하면 그 주위가 변하는 엄청난 확산력을 보며 ‘전염병’이란 별명을 붙였던 것입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를 믿은 지 수 십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가정전체를 예수로 전염시키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사람들을 우리가 매일 만나는 사람들을 예수로 전염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믿은 예수님과 우리가 믿은 예수님이 동일하고, 그들과 함께 하신 성령님과 우리와 함께하신 성령님이 동일한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 차이는 우리와 그들의 차이입니다. 그들은 열매를 맺었고 우리는 열매를 맺지 못한 차이입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또 하나의 별명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7:6절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그들의 별명이 뭐라고요?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 세상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는 말입니다. 세상을 뒤집어 놓은 사람들은 그들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표현입니다. 오늘날 20% 정도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지만 세상은 꿈쩍도 하지 않는데, 극히 소수에 불과했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뒤집어놓았습니다.
오늘날은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의해 그리스도인 가정이 잠식되어 가고 있습니다. 거대하게 밀려오는 세상의 물결 앞에 교회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명심하세요. 우리가 세상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면 우리가 세상의 영향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여러분은 세상에 영향을 끼칩니까? 세상으로부터 영향력을 받습니까? 불신자들에게 영향을 끼칩니까? 불신자들로부터 영향을 받습니까? 그리스도에게 속해있으면서도 세상에 끌려 다니는 사람,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불신자에게 끌려 다니는 사람을 향해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한 크리스천 사회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날 세계교회에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의 95프로는 벤치 워머에 불과하다.” ‘벤치 워머’란 말의 문자적인 뜻은 의자를 따뜻하게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경기에는 나서지 못하고 벤치만 지키고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런 사람을 다른 말로 ‘후보 선수’라고 합니다. 주전과 후보는 모든 면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전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그토록 피나는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어떻습니까? 자진해서 벤치 워머가 되려고 합니다. 후보를 자원합니다. 그는 교회에 나와서 한 시간 예배드리며 의자를 따뜻하게 하는 것을 교회에 커다란 기여나 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또한 주일성수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엄청난 기여를 한 것으로 여깁니다. 참으로 답답할 노릇입니다. 그런 열매 없는 신앙생활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열매 맺는 신앙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생명의 열매를 맺는 것은 기본이고 재생산의 열매를 맺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잃어버린 영혼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 영혼들을 가슴에 품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 영혼들을 주께로 인도하기 위해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열매 없는 현재의 삶에 만족하며 살면 그날에 예수님께 이런 책망을 듣습니다.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어느 한국 크리스천과 일본 크리스천이 만나서 자가 나라의 신앙심에 대하여 자랑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크리스천이 먼저 이렇게 자랑합니다. “우리는 선교 역사가 120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전 인구의 20%가 크리스천입니다. 당신네는 선교 역사가 5백년이 넘어가는데 어째서 1%를 넘기지 못합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일본 크리스천이 이렇게 반반문합니다. “그러면 한국은 이미 천국이 되었겠군요?” 참으로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 바닷물에 들어 있는 소금은 3.5%밖에 되지 않지만 엄청 짜고 바다의 부패를 방지합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지금 어떤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합당한 열매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우리 교회에 주신 비전의 말씀들이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들입니다. 아직은 3년이 되지 않아 주님께서 참고 계신데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열매들이 보이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다시 생각하실 것입니다. 찍어내어 버리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그만큼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대한 만큼의 결과가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열매를 맺기까지 참고 인내하십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3년을 참았다고 합니다. 아니 하나님은 더 많은 시간을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내가 무한정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주인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맺히기를 몇 년 기다렸습니까? 3년을 기다렸습니다. 이 3년은 공교롭게도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닌 햇수와 같습니다. 아마 눈치 빠른 제자라면 예수님의 말뜻을 이렇게 알아들었을 겁니다. ‘너희들이 나를 3년 따라다녔으면 이제 너희들도 열매를 맺어야 하지 않겠느냐? 3년이면 서당 개도 풍월을 읊는데 너희는 언제까지 열매 없는 삶을 살거니?’ 동시에 오늘 우리 중에서도 말씀에 예민한 사람들은 이렇게 들을 것입니다. ‘신앙생활 3년 정도 했으면 열매를 맺어야 하지 않겠느냐? 뭔가 좀 삶에 변화가 있어야 하지 않겠니?’ 정말 진지하게 3년 정도 신앙생활 했는데 조금도 삶의 변화가 없다면 그 사람 정말 연구대상입니다. 성실하게 3년 정도 교회생활을 했는데 아무 것도 바뀐 게 없다면 그 역시 연구대상입니다. 여러분, 그런 연구대상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 3년은 불신자들에게 향하신 기한이기도 합니다. 불신자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기한이 정해져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기다림에도 한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영원히 참으시는 분은 아닙니다. 시간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 한계의 시간으로 3년이 주어졌습니다. 물론 문자적인 3년을 말하진 않습니다.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3년일 겁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무한정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아무리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무한정으로 기다리시는 것은 아닙니다. 3년이 지나면 무화과나무가 찍혀도 할 말이 없습니다.
8-9절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그런데 여기에 한사람이 나타납니다. 포도원지기가 나타나 호소합니다.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금년 한번만 봐달라는 의미입니다. 딱 한번만 기회를 주란 말입니다. “한번만 기회를 주시면 두루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여기서 “파고”의 원어 ‘스캐토’는 뿌리 주변에 있는 흙을 부드럽게 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무화과나무는 두루 파고 거름을 주지 않아도 열매를 잘 맺는 나무입니다. 그런데 뿌리 주변의 흙을 부드럽게 해주고 거름을 주는 것은 특별한 배려를 해주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어야 하는 기간이 3년이나 지나도록 전혀 과실을 맺지 못하는 나무에게는 사실 특별한 배려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찍어버리는 것이 적합합니다. 그런데 포도원지기는 지금 사서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세상을 향한 우리의 중보자적 모습이어야 합니다. 금년이 중요합니다. 금년이 지나면 부름 받을 영혼이 있습니다. ‘내년에 복음을 전해야지’ 하고 미루다가 끝내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보낼 수 있습니다. 그럼 평생에 한이 됩니다. 우리는 포도원지기의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한은 금년밖에 없습니다. 금년이 마지막입니다. 금년은 여러 해가 될 수도 있지만 단 며칠 밖에 안 될 수도 있습니다. 포도원지기는 주인에게 단지 얼마간 유예기간을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두루 파고 거름을 주는 수고를 아끼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불신자의 구원에 있어서 거기까지가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불신 가족을 위해서 기도는 하되, 두루 파는 수고까지 하고 있습니까? 전도대상자들을 위해서 거름을 주는 수고까지 하고 있느냐 말입니다. 만일 그렇게 했는데도 열매가 없을 땐 어떻게 합니까? 다시 포도원지기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이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열매가 열리면 좋고 그렇지 않아도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주인이 어떻게 하든 일체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자기의 책임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무화과나무입니다. 좋은 열매를 바라시고 이 땅에 심으신 무화과나무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열매와 재생산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는 인격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언제까지 기회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언젠가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 열매를 내놓아야 합니다. 그 때 주께 드릴 열매를 가득 안고 설 수 있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벌써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우리를 위하여 중보의 역할을 감당하신 우리 주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오늘의 우리가 있게 하여 주신 그 거룩한 은총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이 마지막 기회에 분명히 열매를 맺어서, 오랫동안 인내하신 하나님의 뜻이 결실 맺도록, 우리의 기도와 희생을 통하여 우리의 이웃에게 새로운 구원의 역사가, 아름답게 열매 맺는 은혜가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 / 눅 13:10-17
2015년 신문에 실린 이런 기사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경남 거창의 한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모교인 초등학교에 백만 원이 조금 넘는 장학금을 기탁했다고 합니다. 모교에 장학금을 기탁한 사례들이 많이 있고, 또 동창회에서 낸 장학금이 백만 원이라는 것이 별로 많은 액수는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사연이 있었습니다. 이 동창생들은 1942년에 이 초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벌써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73년이란 세월이 흐른 것입니다. 당시 초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모두 31명이었는데, 이제 연세가 들어가면서 한두 사람씩 세상을 떠나기 시작하더니 지금 남아 있는 사람은 불과 세 사람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난 해(2014) 마지막으로 동창회를 열고, 남은 세 사람 모두 고령인데다가 몸이 불편하여 더 이상 모임을 갖기 힘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해 마지막 동창회로 모였을 때, ‘더 이상 모임을 가질 수 없는데 그 동안 쓰고 남은 동창회비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의논하다가 모교에 모두 장학금으로 전달하기로 마음이 모아졌습니다. 현재 3명이 남은 동창회의 회장은 91세로 직접 모교를 찾아갈 수가 없어서 딸을 보내 장학금을 전달하면서 ‘비록 많은 돈은 아니지만 남은 돈을 뜻 있게 사용하자는데 의견을 모아 장학금으로 내놓게 되었다’고 그 의미를 전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동창회장의 이름도 밝히지 말기를 당부했다고 합니다.
정말 오늘 우리 시대에 따뜻한 이야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이처럼 참으로 따뜻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 마음 따뜻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느 사회이고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죄악이 난무한 세상이라 하더라도 그 가운데는 죄악에 물들지 않고 순수함을 간직한 채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런 사람들이 우리의 눈에 잘 띄진 않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우리가 찾아내지 못한 곳에서 묵묵하게 따뜻한 마음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맺은 약속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주일은 하나님이 우리와 선약하신 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데이트하기로 미리 정해진 날입니다. 이 날을 방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리장군에게 대통령이 전화를 했습니다. 장군을 만찬에 초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리장군은 선약이 있어 거절한다고 했습니다. 대통령은 의아한 듯 물었습니다. “아니, 나의 약속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는 말했습니다. “예, 하나님과 한 약속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만나기로 되어 있는 주일을 너무 경시합니다. 주일날 빠지는 것을 예사로 여깁니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결혼식에 참석한다고, 이웃 집 잔치한다고 주일예배를 빠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럼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1순위로 생각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만나기로 선약되어진 주일을 귀하게 여기기를 바랍니다. 주일성수에 최선을 다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이 예배 때마다 여러분을 만나주실 겁니다. 인생에 있어 예수님을 만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부모를 잘 만나는 것도 중요하고, 선생님을 잘 만나는 것도 중요하며, 친구를 잘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만남입니다. 성경은 예수님과 만남으로 새로운 삶으로 변화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베드로를 비롯한 열두 제자들, 바울, 백부장, 회당장 야이로, 세리장 삭개오, 막달라 마리아, 등등 그 외에도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 치유 받고 변화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만났던 한 여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10절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예수님이 여인을 만나신 때와 장소가 나옵니다. 때는 안식일이고 장소는 회당입니다. 안식일은 뒤에 다시 나오니까 회당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회당은 유대인들에게 있어 예배와 교육의 장소였습니다. 그 중심엔 율법(토라) 곧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이었던지라 관습을 따라 안식일에 회당을 찾으셨습니다. 당시 예수님이 꽤 유명인사여서 말씀을 전하실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본문에서도 예수님이 안식일에 한 회당에 들어가셔서 말씀을 가르치신 경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예배드리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찾아가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에 그 회당에 아무도 없었다면 다시 말해 예배드리는 사람이 없었다면 예수님이 그 회당에 들어가실 이유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8:20절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예배를 위한 모임 중에 함께 하시겠다는 말입니다. 물론 우리가 개인적으로는 주님과 교제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면, 그분은 우리 안에 거하시고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예배 중에 하나님의 임재를 더 확실하게 체험할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예배를 한 마디로 정의하면 만남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 아버지와 만나고,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만나고, 보혜사이신 성령님과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일날 예배하러 나오실 때 하나님을 만날 것에 대해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만날 마음의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과의 뜨거운 만남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말씀 그 자체이신 분입니다. 성령님은 주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결단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설교자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 10:33절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백부장 고넬료가 베드로의 설교를 듣기 전에 한 말입니다. 그는 지금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있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주님이 베드로를 통하여 말씀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중요한 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있다고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이 설교자를 통하여 말씀하신다는 것을 믿는 게 중요합니다. 데살로니가교회의 성도들도 설교를 들을 때 같은 태도를 취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3절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보세요. 설교를 들을 때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받아야 그 말씀이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서 역사하기를 원하세요?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받으세요. 오늘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으세요. 그리고 그 말씀에 “아멘”으로 응답하세요. 무엇보다 그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단하세요. 그러면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서 틀림없이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그럼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서 역사하면 끝입니까? 성서는 말씀을 여러분 안에 쌓아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사용해야 합니다. 자신을 위해서도 사용해야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마귀에게 시험받으실 때 무엇을 사용하셨습니까? 말씀을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한 것이 무엇입니까? 말씀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장 많은 시간을 말씀을 가르치시는 일에 할애했습니다. 우리교회에서 직분자가 되기 위해서는 성서를 열심히 읽어야 합니다. 암송도 하고 묵상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전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1절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예수님을 만날 당시의 여인의 상태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열여덟 해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입니다. 너무너무 불쌍한 여인입니다. 그런 여인을 예수님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여인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아니 그런 여인이었기에 더욱 사랑하신 것 같습니다. 남편을 여의고 아이 넷을 데리고 하숙을 치면서 그렇게 어렵게 살아가는 아주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하숙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된 어떤 손님이 아이들을 정성껏 돌보고 위하여 수고하는 것을 보고 그 어머니에게 물었답니다. “네 아이 중 어느 아이를 가장 사랑합니까?” 이 어머니는 말했습니다. “그것은 맏아들, 우리 첫사랑의 열매이기 때문에 제가 제일 사랑합니다. 아, 아니올시다. 제가 둘째를 제일 사랑합니다. 둘째는 우리 집 4남매 중에 하나뿐인 고명딸이거든요. 그 딸이 예뻐서, 재롱을 떨고 그래서 제가 사랑합니다. 아, 아니올시다. 저는 막내를 제일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유복자로서 아버지 얼굴도 못 보았거든요. 그래서 제가 막내를 제일 사랑합니다.”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난 후에 그녀는 눈물을 머금고 말했습니다. “사실은 제가 셋째를 제일 사랑합니다. 셋째는 소아마비에 걸렸거든요.” 부모는 병들고 약한 자식에게 더 마음을 둡니다.
구약성서를 보면 하나님도 그런 분임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사랑하시지만 특히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와 나그네에게 더 관심을 쏟는 분입니다. 더 예뻐서가 아닙니다. 더 좋아서도 아닙니다. 병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약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본성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보다 약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다른 사람들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다른 사람들보다 부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다른 사람들보다 모자라다고 생각하십니까?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들보다 하나님의 관심을 더 많이 받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다른 사람들보다 하나님의 긍휼을 더 많이 받고 있다고 믿으세요. 그러면 한숨이 변하여 노래가 되고 탄식이 변하여 웃음이 되며 불행이 변하여 행복이 될 줄 믿습니다. 그 여인의 질병은 18년 동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어떤 질병이 18년 동안 계속 되었다는 말은 불치병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악화될 수 없을 정도로 최악의 상태를 말합니다. 허리가 구부러져 펼 수 없는 18년의 삶을 생각해 보십시오. 날마다 한숨지을 것입니다. 하루하루 탄식할 것입니다. 매일 죽음을 생각할 것입니다. 어두운 미래를 생각하면 죽고 싶은 마음밖에 없을 것입니다. 절망의 그림자만 짙게 드리워져 아무런 꿈도 희망도 없을 것입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질병의 근원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귀신 들려” 이를 공동번역은 “병마에 사로잡혀” 표준새번역성서에서는 “병마에 시달리고 있는”이라고 번역했고, 영어 NIV성경에서는 “crippled by a spirit”으로 번역했습니다. 정신적인 장애나 영적인 장애로 생긴 질병입니다. 단순한 생물학적 질병이 아니라 영적인 문제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모든 병이 영적인 문제로 오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질병이 정신적인 것과 연결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모든 질병의 70-80% 정도가 정신적인 데서 온다고 하는 것은 의학계에서 이미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합니다. 정신적으로 강하게 무장해야 합니다. 마귀에게 틈을 보이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바르게 자라지 못합니다. 비뚤어지게 자랍니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나중엔 조금도 펴지 못하게 됩니다. 오래될수록 더 고치기 힘들어집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신앙생활은 오래 해왔지만, 우리가 영적으로 바르게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영적인 질병을 앓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격의 문제, 습관의 문제, 언어의 문제 같은 것이 여기에 해당될 것입니다. 성격이나 습관이나 언어는 어느 한 순간에 형성된 것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몸 안에서 점차적으로 형성되어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몸에 배었습니다. 몸의 일부가 되어 있습니다. 크게 불편이 없습니다. 그러나 남은 힘들었습니다. 곁에 있는 사람은 편하지 않았습니다. 본인만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자기 성격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형제가 보입니다. 자기 습관으로 인해 아파하는 자매가 보입니다. 자기 언어생활로 인해 상처를 받는 지체가 보입니다. 그래서 비뚤어진 성격을 고치고 싶습니다. 꼬부라진 습관을 바꾸고 싶습니다. 잘못된 언어생활을 바로 잡고 싶습니다. 그런데 잘 안됩니다. 맘먹은 대로 되지 않습니다.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에 쉽게 고쳐지지 않습니다. 그럼 포기해야 합니까?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어야 합니까? 아닙니다. 절대로 포기해선 안 됩니다. 아니 그럼 포기하지 않아도 될 이유라도 있단 말입니까? 12-13절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예수님이 답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바뀔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인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여인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면 꼬부라진 인생에서 곧은 인생으로, 비뚤어진 인생에서 바른 인생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내 맘대로의 인생에서 하나님 마음을 헤아리는 인생으로, 내 뜻대로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인생으로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인생이 아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인생으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여인이 예배의 자리에 있었지만 예수님께 특별한 도움을 요청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먼저 그 여인을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예배의 자리에 나와 있는 그 여인을 보셨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예배의 자리에 있는 우리를 보고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먼저 발견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우리를 먼저 발견하고 보십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예배하는지, 어떤 생각으로 예배하는지, 어떤 동기로 예배하는지를 자세히 살피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 때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눈길을 늘 의식하시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여인을 부르신 예수님은 예배하는 우리를 향하여 부르십니다. “아무개야,”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그런데 말씀의 순서를 보면 안수보다 말씀이 먼저입니다. “네 병에서 놓였다"라고 선포하신 후에 안수를 하신 것으로 나옵니다. 거의 동시적이지만 굳이 따진다면 미미하지만 시간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그 여인을 치유한 것은 안수의 능력이 아니라 말씀의 능력임을 강조하고자 한 것입니다. 말씀이 능력 그 자체라면 안수는 능력이 임하는 통로입니다. 능력이 임하는 통로도 중요하지만 능력 그 자체만큼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장로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예배 시간에 안수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장로교 예배에서는 치유가 일어날 수 없습니까? 아닙니다. 말씀을 듣는 중에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예배하러 나오실 때 치유가 일어나기를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크고 작은 질병에서 벗어나게 될 것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사탄에서 매인 바 된 것에서 풀리게 될 것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삶의 고통스런 문제에서 해결될 것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14절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회당장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을 보고 격분했습니다. 그는 안식일에 어떠한 일도 해서는 안 된다고 철저히 믿었던 사람입니다. 병 고치는 것이 그에게는 안식일에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는 차마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비난하지는 못하고 우회적으로 무리들에게 외쳤습니다.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러 온 사람들이 남의 처지를 이해하려고 하기는커녕 비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에 말입니다. 15-16절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예수님은 그들이 안식일에도 소나 나귀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외양간에서 풀어내는 것을 예로 드시면서, 짐승보다 더 중요한 사람을 마귀 사탄의 매임에서 풀어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셨습니다. 이건 현격한 시각차입니다. 회당장이 보기에 그 여인은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여자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여인을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보시느냐가 중요합니다. 아무리 자신이 우겨도 소용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하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아닐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3:7-8절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보세요. 그들은 분명히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평가했지만 하나님은 세례 요한을 통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혹평하시지 않습니까?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주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시지 않았습니다. 그의 소유로 평가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가진 건강이나 젊음으로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내면세계를 보셨습니다. 그랬기에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여자를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부르신 겁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보는 눈을 가졌기에 가능했습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하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보면 가치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소중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쓸모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보면 모든 사람이 아브라함의 아들이요 딸로 보입니다. 우리의 꼬부라진 시각을 바로 펴야합니다. 우리가 교회 다닌지 오래되다 보니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닮아갑니다. 그래서 꼬부라진 시각을 갖게 됩니다. 비뚤어진 시선을 갖게 됩니다. 꼬부라진 시각을 가진 사람의 특징은 남의 입장은 무시하고 자신의 입장만 생각합니다. 비뚤어진 시선을 가진 사람의 특징은, 남의 처지에 대해서는 비판적 시각을 갖고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는 관용적 시각을 갖습니다. 가만 보면 우리는 예수님이 대충 넘어가신 것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캐물어야 직성이 풀립니다. 반면에 예수님이 짚고 넘어갔던 문제에 대해서는 그냥 넘기려고 합니다. 은혜로 넘어가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시각이 꼬부라져 있기 때문입니다. 시선이 비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펴야 합니다. 그래서 바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시각으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시선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꼬부라져 있으면 땅만 보게 됩니다. 바로 서 있어야 하늘을 보게 됩니다. 헬라어로 ‘인간’을 ‘안드로포스’라고 합니다. 이 말의 원래적 의미는 ‘위를 바라본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꼬부라진 시각을 버려야 할 까닭은 위를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땅을 내려다보면 열등감이 생기지만, 하늘을 올려다보면 자신감이 생깁니다. 땅을 내려다보면 불안감이 생기지만, 하늘을 올려다보면 평안함이 생깁니다. 땅을 내려다보면 절망감이 생기지만, 하늘을 올려다보면 꿈(소망)이 생깁니다. 젊은 나이에 벌써 성공의 길에 들어선 영국의 한 변호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영국 의사당 앞에서 비중 높은 변호를 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명성을 날릴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그러나 그 일에 대해 많은 긴장과 부담감을 가진 나머지 지나친 스트레스로 인하여 그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 출세 가도를 달리던 그의 인생은 점차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정신착란 증세로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급기야 그는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라고 자학함으로써 자살까지 하려고 했습니다. 다행히 그는 주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복음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존재를 쓸모없다고 여기며, 자살을 하려고 했던 그가 죽음의 쇠사슬로부터 풀려 나오는 데는 10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자신의 죄를 담당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무가치한 자신의 삶이 새로운 삶으로 변했다고 믿었습니다. 이렇게 생각이 바뀌고 보니 보는 시각도 바뀌었습니다.
예전의 꼬부라진 시각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감격적인 시를 한편 썼습니다. 그가 바로 영국 문학사에서 고전 문학가로 손꼽히는 윌리엄 쿠퍼입니다. 그의 시에 Mason이 곡을 붙여 우리 찬송가 258장에 실려 있습니다. 1절 샘물과 같은 보혈은 주님의 피로다. 보혈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2절 저 도적 회개하고서 보혈에 씻었네. 저 도적 같은 이 몸도 죄 씻기 원하네. 3절 죄 속함 받은 백성은 영생을 얻겠네. 샘솟듯 하는 피 권세 한없이 크도다. 4절 날 정케 하신 피 보니 그 사랑 한 없네. 살 동안 받는 사랑을 늘 찬송하겠네. 5절 이 후에 천국 올라가 더 좋은 노래로, 날 구속하신 은혜를 늘 찬송하겠네. 꼬부라진 시각을 버리고 나면 이처럼 세상이 달라 보입니다. 환경이 달라 보이고 현실이 달라 보입니다. 가정이 달라 보이고 집안 식구들이 달라 보입니다. 교회가 달라 보이고 교회 식구들이 달라 보입니다. 문제를 남에게서 찾으려고 했지만 사실 문제는 나에게 있었습니다. 나의 꼬부라진 시각에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정직하게 보시면 자신의 꼬부라진 시각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말씀의 거울에 비춰보면 자신이 얼마나 꼬부라진 시각으로 살아왔으며, 자신의 꼬부라진 시각으로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정죄하며 비판하며 살아왔던가를 알게 될 겁니다. 똑같은 안식일입니다. 그런데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안식일이 달리 해석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새롭게 해석하셨습니다. 색다르게 해석하셨다기 보다는 안식일 본래의 정신을 알게 하신 겁니다. 안식일의 제정 목적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안식일의 제정 목적은 크게 둘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창조의 은총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창세기 2:3절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께 예배하며 송축하는 날이고,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사람에게 복을 주시는 날입니다. 안식일은 내가 하나님을 송축해서 기쁘고, 내가 하나님께 복을 받아서 기쁜 날입니다. 그런데 안식일의 정신은 실종되고 형식만 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보다는 율법으로 지키는 것에 의의를 두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갈수록 기쁨은 없어져갔고 의무감만 늘어갔습니다. 자기들 나름대로 안식일을 지킨다고 했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우습지도 않아 보였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5:6절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라.’
구약에서 안식일은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된 출애굽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 안식일은 사탄의 올무에 매여 있는 사람을 푸는 부활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을 주의 날로 지키던 것이 점차 유대교와 구별하여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어 오늘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20:7절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고린도전서 16:2절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그 주간의 첫날이나 매주일 첫날은 일요일입니다. 17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는 두 종류의 사람만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앞에 두 종류의 사람들이 대조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은 항상 듣는 사람에게 반응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말씀을 받아들일 것이냐, 거부할 것이냐만 있습니다. 부분적으로 받아들이거나 부분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 중간은 없다는 말입니다. 현실에서는 구분되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이나 거부한 사람이나 별반 달라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날에 가면 극명하게 대조될 것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인 자에게는 기쁨이 있을 것이고 말씀을 거부한 자에게는 부끄러움이 있을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과 갖는 만남을 소중히 여기세요. 하나님과 만나기로 선약되어 있는 주일을 귀하게 여기세요. 예배 시간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세요. 말씀 속에서 여러분의 삶에 강력한 역사가 일어나길 기대하세요. 말씀을 들으시며 메인데서 놓임 받고 고통에서 벗어나길 기대하세요. 꼬부라진 시각을 펴고 바로 보세요. 사람을 볼 때 예수님의 시각으로 보세요. 다른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세요. 모든 사람을 아브라함의 아들로 딸로 보세요. 말씀을 받아들인 자가 누리는 기쁨을 영원히 누리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신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그 주님의 눈으로 나와 이웃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주님은 우리의 매임을 풀어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육체적으로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사슬뿐 아니라 영적으로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모든 무거운 짐을 풀어 주옵소서. 그 주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지금 여기서부터 그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생명의 복음을 널리 전하는 복되고 충성스러운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 나라 비유 - 겨자씨와 누룩 / 눅 13:18-21
미국 남부 내륙에 있는 아칸소주에 살던 어느 농부가 멕시코만으로 바다낚시를 갔습니다. 주로 내륙의 호수에서만 낚시를 하다가 바다낚시는 처음으로 간 것입니다. 멕시코 만에 도착한 그는 광활한 바다를 보자마자 입이 떡 벌어졌습니다. 가슴이 탁 틔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낚시는 허탕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수평선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행복했습니다. 그렇게 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을 맞았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태양이 서쪽 바다 수평선 아래로 가라앉는 것을 보았고, 또 아침에 태양이 동쪽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가지고 간 카메라로 일몰과 일출의 장면을 찍었습니다. 그러고는 집으로 돌아와서 필름을 인화했습니다. 그런데 사진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어느 것이 해가 떠오르는 장면이고, 어느 것이 해가 지는 장면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사진만으로는 아침과 저녁을 구분할 수 없었던 것이죠.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네 삶과 똑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삶도 종종 지는 해와 뜨는 해가 구분이 되지 않고, 어제와 오늘이 달라 보이지 않고, 지난해와 올해가 별 차이가 없어 보이기도 하며, 심지어 지난해에 저문 해가 올해 떠오른 해보다 나아보이기까지 하니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해가 떠올라도 별 기대를 하지 않게 됩니다. 영문학자 장영희 교수가 쓴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첫 부분에 ‘다시 시작하기’라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박사 학위 논문을 마무리한 후, 친구 집에서 차를 마시던 중 학위 논문이 든 가방을 도둑맞고 말았습니다. 당시는 타자로 논문을 쓰던 시절이었고, 논문의 초고마저 짐을 정리하면서 다 버린 뒤라 2년 동안 공들여 쓴 논문이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렸습니다. 소아마비 장애로 인하여 목발에 의지한 채 그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고, 또 잠을 설쳐가며 쓴 학위 논문이 사라지자 얼마나 낙심이 되었든지,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워서 꼬박 나흘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다섯째 되는 날, 침대에서 일어나 거울을 들여다보니 자신의 모습이 창백한 유령 같았답니다. 그 순간 신기하게도 자신의 깊은 곳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괜찮아. 다시 시작하면 되잖아. 다시 시작할 수 있어. 기껏해야 논문인데 뭐. 살아 있으면 돼.” 그러고는 1년 동안 다시 논문을 써서 완성한 후 그 첫 페이지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내 논문 원고를 훔쳐 가서 내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 다시 시작하는 법을 가르쳐 준 도둑에게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여러분의 지나 간 삶이 누군가에게 도둑을 맞은 것 같고, 또 지금이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누군가에게 유린당한 것 같은 현실일지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그 어떤 기대조차 하기 어려울지라도 말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속하신 분들입니까? 여러분이 하나님께 속해있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여러분이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증거는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까? 단순히 교회 나와서 예배 참석하는 것 말고 진짜 말씀을 듣습니까?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오늘 내게 주신 말씀으로 귀담아 듣습니까? 삼상 3:10절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는 자세로 말씀을 듣습니까? 이 시간에 설교자를 통하여 주시는 말씀을 경청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은 두개의 비유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공통된 주제를 두 가지 비유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는 겁니다. 둘째, 하나님나라는 누룩과 같다는 겁니다. 먼저 겨자씨와 같은 하나님나라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8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천국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고민하신 듯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 나라와 똑 같은 것으로 생각했고, 그렇기 때문에 정치 군사 경제 등 현실적인 것으로 임한다고 생각했으며, 또 한 번 임하면 그것이 영원히 지속될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나라는 세상 나라와는 다릅니다. 주님의 나라는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눈으로 잘 볼 수 없으며, 그리고 정치나 군사 등 권력이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으로 시작되며, 또 서서히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특성을 가진 하나님의 나라를 잘 설명하시기 위해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이렇게 비유로 풀어 말씀하신 것에 대해 어느 목사님이 다음처럼 설명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천국을 말씀하시는 것은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어서야 알 일들을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들이 궁금한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그 답을 해주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도 많습니다. 그 중에서 "엄마, 나 어떻게 태어났어?" "엄마, 나 어디로 나왔어?" 라는 질문은 부모를 당혹스럽게 합니다.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답을 해줘도 아이들이 이해하기 힘든 문제지요. "엄마 아빠가 사랑해서 배꼽으로 나왔단다." 이렇게 설명하면 쉽게 이해하는 아주 특별한 아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비유를 동원하신 것이죠. 예수님께서 비유로서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설명하신 것은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것을 모아 놓은 것이 마태복음 13장이지요. 거기에는 일곱 가지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 본문에는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두 가지가 나옵니다.
19절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이 말씀은 작은 것의 가치를 말합니다. 겨자씨는 작은 것의 상징입니다. 겨자씨보다 더 작은 것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가장 작은 것을 의미 할 때 일반적으로 겨자씨에 비유했습니다. 예수님이 겨자씨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본문과 누가복음 17:6절입니다. 두 군데서 그 뜻하는 바가 같습니다. 17:6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을 말할 때 가장 작은 믿음을 말합니다. 페르시아의 유명한 장군이던 다리오스 황제가 유럽 침략을 하면서 첫 번째 치렀던 전쟁이 알렉산더 대왕이 거느리는 군대와 전쟁입니다. 그때 다리오스는 알렉산더에게 병사 하나를 시켜서 선물 하나를 보냈습니다. 그 선물은 참깨가 잔뜩 들어 있는 부대였는데 그것으로 선전 포고를 하면서 보낸 것입니다. 한 자루에 깨가 얼마나 많이 들어있습니까? 그것은 “우리 군대는 이렇게 많다. 너희들은 승산이 없다. 손들고 항복하라”는 메시지였습니다. 깨가 가득 들어 있는 부대를 받은 알렉산더는 그 답장으로 작은 봉투에다 씨 하나를 넣어서 다리오스에게 보냈습니다. 그 씨가 바로 겨자씨였습니다. 거기엔 이런 뜻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우리가 작다고 무시하지 마라. 우리는 놀라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너희들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 전쟁에서 누가 이겼을 것 같아요? 물론 알렉산더가 이겼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대개 큰 것을 선호합니다. 큰 것의 가치를 강조합니다. 이왕이면 큰 것을 찾고, 같은 값이면 큰 것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작은 것의 가치를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위대한 일, 엄청난 일에 관심을 갖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작은 일의 가치를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9:17절을 보세요. “잘 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세상은 큰돈에 가치를 둡니다. 큰돈을 가진 자를 대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작은 돈의 가치를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1:2-3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세상은 많은 것을 알아줍니다. 양이 많아야 하고 수가 많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어린아이의 도시락인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명이 넘는 수많은 무리의 배고픔을 해결하셨습니다. 세상은 가문을 중시합니다. 어느 지역 출신인가를 따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적한 시골 촌 동네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미가 5:2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였지만 그를 맨 처음 반긴 사람들은 당시 가장 하층민인 목자들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작은 것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작은 일에서 시작하여 큰일을 이루어 가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미약하게 시작하여 창대한 결과를 얻게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적은 것에서 시작하여 많은 것을 있게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을 믿고 기대한다면, 지금 작은 일을 해도 그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습니다. 시작이 미약하다고 해도 힘을 내서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적은 것이라고 해도 정성껏 할 수 있습니다. 영국의 어떤 교회에서 5살 된 아이의 이야기입니다. 헌금 시간에 헌금을 하는데 그 아이가 1페니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것으로 꼭 신약성경을 사서 인도에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냥 우습게 지나칠 수 있는 작은 액수의 헌금입니다. 그러나 이 5살 된 아이의 뜻을 소중하게 여겨 그 교회 목사님이 조금 보태어 아주 작은 신약성경 한 권을 사서 소년이 사인을 하여 인도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이 소년도 잊었고 목사님도 잊고 있었습니다. 20년이 지난 후 이 목사님이 인도에 들러 어떤 마을을 방문하게 되었을 때입니다. 그 마을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참 진지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여러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어떻게 이 마을에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습니까?” 그때 뜻밖에도 한 선교사가 이 마을을 찾아와서 작은 신약성경 한 권을 건넨 것이 그 마을의 복음화의 기초가 되었다는 놀라운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성경을 가져왔습니다. 다 낡고 남루한 자그마한 신약성경입니다. 목사님은 그 성경의 마지막 표지에서 20년 전 자기 교회의 5살 된 아이의 사인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보세요. 작은 것을 가지고 크게 쓰시는 하나님을 말입니다. 시시한 것을 가지고 너무나 엄청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말입니다. 저는 이런 하나님이 너무너무 좋습니다. 눈물 나게 좋습니다. 이 사실은 저에게 희망을 줍니다. 여러분에게 희망이 될 겁니다. 또한 우리 교회에도 희망이 됩니다. 이 희망을 떨어뜨리지 말기 바랍니다. 겨자씨는 자랍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자랍니다. 자라서 나무가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채소밭에 겨자씨를 심었다고 합니다. 겨자씨는 심기 전에는 눈에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지만, 일단 심어놓으면 3-4미터 이상 자라게 됩니다. 하루가 다르게 자랍니다. 하나님나라를 자라는 겨자씨에 비유한 것은 하나님 나라의 외적인 성장을 의미합니다. 하나님나라가 눈으로 보이게 성장하고 겉으로 드러나게 성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말구유에서 초라한 아기의 모습으로 태어나셨습니다. 당시 천하를 호령하던 로마 제국과 비교해 볼 때 너무나 보잘 것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생명의 복음이 점점 자라나 마침내 로마를 정복하고 세계로 뻗어나갔습니다. 제자들 역시 그렇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학벌도 문벌도 지위도 변변찮은 어부들입니다. 그렇다고 숫자가 많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소수인 12명을 택하시고 그들에게 말씀의 씨를 심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속에 심겨진 말씀은 점점 자라나 전 세계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가서 셋집에서 1대1 사역을 했습니다. 이건 태평양 한 가운데 돌을 던지는 것처럼 무모하고 무의미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셋집에 뿌린 복음의 씨는 점점 자라나 마침내 A.D. 313년에는 로마 제국을 삼켜 버렸습니다.
겨자씨가 너무나 작다보니 바람에 날려갈 것 같고, 또 작은 충격에도 쉽게 깨질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뿌려지고 심겨진 씨앗은 혹독한 겨울 추위를 이겨내고, 딱딱하게 굳은 땅을 헤치고 새싹으로 돋아납니다. 사람들이 무시해도 될 만큼 작지만, 그 작은 씨가 강철 같은 힘으로 딱딱하게 굳은 땅을 헤치고 나온다는 말이지요. 그러고는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또 그 어떤 것보다도 빨리 자라납니다. 그리하여 그 어떤 잡초나 채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지와 잎이 무성한 나무로 성장합니다. 그야말로 생명의 신비이지요. 정말 작고 볼품이 없는 그 작은 씨앗에 놀랍고 신비한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은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말입니다. 어느 정도입니까?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일” 정도가 됩니다. 하늘 높이, 대자연 위를 마음껏 날아다니는 새도 안식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가려줄 가지와 잎이 없고 독수리 등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수 없는 위험한 나무를 안식처로 삼지는 않습니다. 새들이 아무 나무나 앉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새들이 겨자 나무에는 깃들입니다. 그 작은 씨를 생각하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요. 이렇게 놀라운 겨자씨의 비밀, 이것으로서 예수님은 천국을 설명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점에서 겨자씨의 신비가 하나님의 나라와 같을까요? 당시 유대인들에게 “겨자씨만큼이나 작다”는 속담이 있었고, 그 속담이 딱 어울리는 것이 당시의 ‘예수 운동’입니다. 겨자씨가 나무만큼 자란다는 것은 경험으로 알려진 사실이지만, ‘예수 운동, 천국운동’은 한 번도 경험한 적도 없었으니 당연히 무시할 만 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초라하고 비천하게 말구유의 아기로 오신 예수님, 사회적으로 불학무식하고 가난했던 제자들, 유대교의 위세에 눌려 숨기에 바빴던 초대 교회, 이 모든 것은 정말 겨자씨보다 못해 보이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겨자씨가 자라면 무려 5m나 되는 것들이 있듯이 예수 운동, 우리 주님의 나라 역시 그와 같았습니다. 예수 운동, 천국 운동이 겨자씨보다 더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마구간에서 태어나셨고 자기 백성으로부터 거부당하신 예수님은 그 후 모든 사람 모든 민족 전 세계에서 환영을 받으셨으며, 가장 끔찍하게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마치 땅에 뿌려진 씨앗처럼 부활로 솟아나셨으며, 지금도 살아계신 분으로 찬양을 받고 계십니다. 이렇게 주님의 나라는 세월이 흐를수록 더 넓어지고, 더 강력해지고, 유대교조차 품지 못했던 열방까지 품었습니다. 그 누가 이것을 알고 예견했겠습니까? 사도들마저도 이해하지 못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시작된 복음의 역사와 능력에 대해, 교회 안에 이루어진 복음과 그 능력에 대해, 이 땅에 이미 시작된 복음과 그 능력에 대해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밟아도 뿌리 뻗는 잔디보다, 꺾어도 다시 피는 무궁화보다” 더 끈질기고 강력한 것이 우리 주님의 나라이고, 그 나라의 백성 된 여러분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나라는 외형적으로도 성장해야 합니다. 하나님나라는 겉으로도 확장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나라는 교회를 통해서 성장하고 확장됩니다. 그러니까 교회성장과 하나님나라의 성장은 매우 밀접하고 또한 유사한 개념입니다. 한때 한국교회가 지나치게 외형적인 성장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비판을 많이 받았고 보다 내실을 기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교회의 내실이 기해졌습니까? 교회가 내적인 힘이 길러졌습니까? 외형적인 침체기를 맞게 된 것은 물론이고 내면적으로도 크게 자라나지 못했습니다. 교회는 생명 공동체입니다. 생명은 성장하는 법입니다. 겨자씨가 자라듯이 하나님나라의 모형인 교회는 계속해서 성장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교회에는 취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차마 꺼내놓기가 부끄럽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것의 힘으로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무엇인줄 아시겠지요? 기도입니다. 우리교회는 기도에 있어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교회엔 두 기둥이 있습니다. 교회가 튼튼하게 세워지기 위해서는 두 기둥이 받치고 있어야 합니다. 첫 번째 기둥은 말씀의 기둥입니다. 두 번째 기둥은 기도의 기둥입니다. 또 교회는 두 바퀴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두 바퀴로 굴러가야 제대로 갈 수 있습니다. 한 쪽의 바퀴는 말씀의 바퀴입니다. 다른 한 쪽의 바퀴는 기도의 바퀴입니다. 자전거가 두 바퀴입니다. 자전거가 넘어지지 않으려면 굴러가야 합니다. 이처럼 신앙도 말씀과 기도로 굴러가야 합니다. 지금 우리교회는 ‘111운동’을 합니다. ‘1달에 1일 1시간 교회 와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온 교우들이 함께 이 운동에 참여한다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갈수록 기도하는 숫자가 적어집니다. 내년에도 계속하지만 기도하다가 성경필사를 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과 기도가 잘 굴러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는 금요기도회, 중보기도회, 새벽기도회, 111운동을 우리교회에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중 제일 좋은 것은 새벽기도입니다. 새벽에 교회에 나와야 단 몇 십분이라도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새벽에 나오는 것이 쉽지 않음을 잘 압니다. 생활 패턴을 바꾸지 않는 한 새벽기도가 힘겨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새벽에 나오겠다는 확고한 의지만 있으면 못할 것도 없습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면 도와주십니다. 오늘은 늦게 자니까 내일 새벽엔 일어나기 힘들겠다고 자기암시를 하며 잠자리에 드니 일어날 수가 있나요? 일어났다가도 다시 눕지요. 새벽에 일찍 일어난다고 장수하는데 지장 없습니다. 며칠 새벽기도 하느라 잠 좀 부족하다고 쓰러지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달라고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전 재산을 달라고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새벽시간 좀 달라는데 그것도 못 드리면 어떡합니까? 일차적으로 살기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하면 비참해집니다. 성장하기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개인의 신앙성장을 원하는 그리스도인은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의 성장을 원하는 교인은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 없는 성장은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신앙적으로 성장하기를 진심으로 원한다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교회가 성장하기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루도 빠지지 말고 꾸준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해야 하는데, 새벽을 깨워야 하는데’ 하며 말만 하지 말고 실제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겨자씨를 심으면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든다고 했습니다. 왜 새들이 다른 나무도 없지 않을 텐데 하필 겨자나무에 앉을까요? 그늘이 되기 때문이기도 할 겁니다. 쉴만한 곳이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겨자씨를 먹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새에게 그늘이 되어주는 겨자나무, 새에게 쉬어갈 수 있게 해주는 겨자나무, 새에게 먹이를 주는 겨자나무에서 저는 교회가 어떤 곳이 되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나라의 모형인 교회는, 피곤한 인생들이 와서 쉼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와서 쉬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복잡한 마음을 가진 자들이 와서 평안히 쉴 수 있어야 합니다. 허기진 인생들이 와서 삶의 재충전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 아파 우는 인생들이 와서 그 마음을 달랠 수 있어야 합니다. 외롭게 사는 인생들이 와서 그 외로움을 털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다음은 누룩과 같은 하나님나라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20-21절 ‘또 이르시되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주님은 겨자씨에 이어서 누룩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누룩과 겨자씨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작다는 것입니다. 겨자씨뿐 아니라 누룩도 작습니다. 또한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다른 점은 겨자씨는 외적으로 성장하고, 누룩은 내적으로 성장합니다. 겨자씨는 외형적으로 성장하고 누룩은 내면적으로 성장합니다. 교회는 외형적인 성장과 함께 내적인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겉으로 성장할 뿐만 아니라 속으로 성숙해져야 합니다. 무조건 성장제일주의로 나가면 안 됩니다. 성숙을 함께 추구해야 합니다. 오동나무는 1년이면 몇 미터나 자랍니다. 그런데 바람이 불면 힘없이 넘어집니다. 나무속을 보면 비어있습니다. 꽉 차 있지 않습니다. 오동나무는 가볍고 질이 좋아 악기나 좋은 가구를 만드는데 쓰입니다. 그러나 속이 텅 비어있는 상태로는 아무데도 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속이 꽉 찰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외형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자라가야 합니다. 커나가야 합니다. 발전해가야 합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 성숙해가야 합니다.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우리교회는 겨자씨의 역사와 누룩의 역사가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 누룩엔 크게 두 가지 능력이 있습니다. 첫째, 정복의 능력입니다. 둘째, 변화의 능력입니다. 먼저 누룩의 정복의 능력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누룩은 자발적으로 역사합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닙니다. 누룩이 밀가루 반죽이나 술 재료에 들어가면, 거기가 어디든지 간에 상관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스스로 밀가루 반죽을 부풀게 하고 술 재료를 발효시킵니다. 때문에 이 누룩에 대하여 어떠한 특별한 조치나 감시, 독촉이 필요 없습니다. 스스로 알아서 합니다. 자발적으로 역사합니다. 하나님나라는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자들을 필요로 합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원하여 충성해야 합니다. 교회 봉사를 해도 자원해서 해야 합니다. 어느 누가 보든지 안 보든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일꾼들을 기뻐하시고 함께 하셔서 더 크게 역사하십니다. 누룩은 계속하여 역사합니다. 어디든지 한 번 투입되면 쉬지 않고 역사합니다. 어떠한 이유로든지 활동을 멈추거나 미루는 일이 없습니다. 게으름을 피우거나 쉬는 일도 없습니다. 밀가루 반죽이 다 부풀 때까지 술 재료가 완전히 발효될 때까지 그렇게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자기 기분에 따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충성은 자기감정에 따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하는 것입니다. 형편과 사정이 되든지 안 되든지 하는 것입니다. 누가 알아주든지 알아주지 않든지 하는 것입니다. 우리 호흡이 멈출 때까지 계속하는 것입니다. 밀가루의 반죽이 전부 부풀 때까지 주위가 예수로 충만해질 때까지 하는 것입니다. 술 재료가 완전히 발효될 때까지 주위가 예수로 전염될 때까지 하는 것입니다. 복음엔 퍼져나가는 확산력이 있습니다. 말씀은 정복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이 한 사람 안에 들어가면 삶의 전 분야에 확산되어 갑니다. 여러분의 삶의 전 영역으로 복음을 확산시키기를 바랍니다. 말씀이 한 사람 안에 들어가면 그의 삶은 정복당하게 됩니다. 인격과 품격과 성격이 말씀에 지배당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삶의 모든 부분에서 말씀의 지배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능력인 누룩의 변화시키는 능력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누룩은 질을 변화시킵니다. 누룩이 밀가루 반죽에 들어가면 질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아주 부드럽게 되어 빵을 쉽게 만들 수 있게 됩니다. 누룩을 넣지 않으면 금방 굳어지고 딱딱하여 만들기도 힘들고 빵을 만들어도 질이 좋지 않습니다. 누룩이 술 재료에 들어가면 질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술 재료를 발효시켜서 다른 성분의 물질로 변화시켜 버립니다. 누룩을 넣지 않으면 술 자체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의 백성이 되면 삶의 질이 변화됩니다. 질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의식구조에, 품행에, 가치관에 있어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집니다. 주님처럼 변화되기를 소망하게 됩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가정과 이웃 그리고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살아야겠습니다. 누룩은 맛을 변화시킵니다. 누룩이 들어간 빵의 맛과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빵의 맛은 완전히 다릅니다.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은 팍팍하고 맛이 없지만, 누룩이 들어간 빵은 부드럽고 맛이 있습니다. 또 제 아무리 좋은 술의 재료를 준비했다고 하더라도 누룩을 넣지 않고는 그대로 마실 수 없습니다. 맛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저주와 멸망에서 구원받아 영생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는 맛이 변화됩니다. 맛있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하여 갖가지 이유들로 인하여 살맛을 잃어버리고 하루하루를 마지못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살맛을 제공하고 살맛나는 인생을 살 수 있도록 영향력을 끼쳐야겠습니다. 누룩은 모습을 변화시킵니다. 누룩을 밀가루 반죽에 넣으면 커다랗게 부풀어 오릅니다. 그래서 누룩을 넣은 반죽과 그렇지 않은 반죽을 누구나 쉽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누룩을 술의 재료에 넣으면 부글부글 거리면서 발효시킵니다. 때문에 누룩을 넣은 술 재료와 넣지 않은 재료를 쉽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사람은 모습에 변화가 옵니다. 모습이 변화되는 것이 보입니다. 언행심사와 삶의 모습이 언제나 생동력이 있고, 꿈에 부풀어 있는 변화된 모습으로 살아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만들어야겠습니다. 변화의 능력이신 예수님으로 인해 자신이 변화를 체험하고 이어서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고 더 나아가 주위를 변화시키는데 귀히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암 케리의 이야기를 하면서 말씀을 맺겠습니다. 윌리암 케리는 구두 수선공으로 일하면서 독학을 했습니다. 독학을 하면서도 그는 여러 나라의 언어를 꾸준히 공부하여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능력까지 키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케리의 친척동생이 자신이 들어가기로 한 옥스퍼드의 단과대학에 케리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들은 단과 대학의 한 유명한 어학교수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대화 중에 그 교수는 케리의 어학 실력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그 교수는 케리에게 "당신이 이 학교에 들어오면 이 나라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오. 그리고 이 나라의 여왕께서도 당신을 기뻐하실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분의 말에 케리는 이렇게 거절하였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영국이라는 나라의 여왕을 말씀하셨는데, 제게는 이미 저의 전 생애를 건 나라가 있습니다. 그 나라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저는 여왕보다 더 높으신 분의 부름을 받았고, 그분을 향한 저의 충성은 변할 수 없습니다." 결국 케리는 그 교수의 제의를 거절하고 세계 선교를 위해서 인도로 떠났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속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변덕스럽지 않는 충성을 해야 합니다. 윌리암 케리처럼 말입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말이 아닌 삶으로 보이시기 바랍니다. 겨자씨처럼 성장하시기를 바랍니다. 눈에 띄게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누룩처럼 주위를 변화시키시기를 바랍니다. 영향을 끼치시기 바랍니다. 우리 때문에 주님이 행복해하시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맛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가정과 교회에, 그리고 이 땅에 겨자씨와 누룩 같은 질적이고 양적인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하옵소서. 아무리 지금 형편이 힘들다 할지라도 겨자씨나 누룩보다 더한 우리 하나님과 그 나라의 힘을 믿고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 눅 13:22-30
세상에는 정말 많은 문들이 있습니다. 문의 종류는 아주 다양하고, 그리고 그 문들은 각각 자기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도성 한양으로 들어가는 4개의 큰 문이 있었습니다. 정동의 흥인문(동대문), 정서의 돈의문(서대문), 정남의 숭례문(남대문), 그리고 정북의 숙청문입니다. 그리고 이 문들 안에 사는 사람들과 문 밖에 사는 사람들의 삶은 차이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궁성과 왕궁의 정문은 광화문입니다. 현대에 와서는 큰 건물 등의 입구인 정문이 있고, 큰 집의 대문이 있고, 시골 마을의 사립문, 삽짝문도 있습니다. 물론 아파트 현관문이나 가게의 셔터문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추억의 “개구멍”이라는 문도 있습니다. 개구멍이란 개가 담장 밖으로 머리를 내밀 수 있는 문이 아닙니다. 학교의 담장이나 울타리 밑으로 누군가가 만들고 다른 사람들이 그리로 다니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곳으로 등하교를 하고, 누군가는 수업 시간에 몰래 도망을 다니기도 했었습니다. 혹시 여러분에게도 이런 문을 드나든 경험이 있습니까? 문의 형태만 다양한 것이 아닙니다. 문을 여는 방법 또한 아주 다양합니다. 빗장을 풀고 ‘끼익’하고 여는 문, 손잡이를 잡고 빙글 돌려 여는 문, 미는 문, 당기는 문, 자기 혼자 빙글빙글 돌아가는 자동문이나 사람이 다가가면 열리는 자동문, 디지털 키나 번호로 여는 문, 카드로 여는 문 등, 여는 방법도 아주 다양합니다. 그런가 하면 ‘문’이라는 말은 진학의 문, 취업의 문, 결혼의 문 등의 표현에도 쓰입니다. 등용문(登龍門)이 어느 건물의 문이 아니라 ‘입신출세의 관문’을 비유하는 말인 것처럼요. 이쯤하면 여러분들은 오늘 설교의 주제가 무엇인지 감을 잡으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나라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나라를 두 가지로 비유했습니다. 그건 겨자씨와 누룩입니다. 겨자씨와 누룩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작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장하는 형태는 다릅니다. 겨자씨는 외적으로 성장하고 누룩은 내적으로 성장합니다. 하나님나라의 성장은 교회를 통해서 이뤄지니까, 겨자씨의 자람은 교회의 외형적인 성장을 말하고, 누룩의 번짐은 교회의 내면적인 성숙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양적으로 성장하고 동시에 질적으로도 성장해야 합니다. 양적인 성장이 없는 질적 성장이 있을 수 있을까요? 글쎄요, 이론적으로는 가능할지 모르겠으나 실제로는 힘듭니다. 질적 성장이 없는 양적인 성장은 혹 있을 수 있어도 무의미합니다. 교회의 외형적 성장과 내면적 성숙은 함께 추구해야 합니다. 교회의 양적 성장과 질적 성장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은 오늘도 그런 교회를 원하십니다. 갈보리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하나님나라는 이 땅에서 이뤄지는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오늘 우리가 살펴볼 하나님나라는 다분히 종말적인 나라입니다. 미래의 나라입니다. 장차 들어가게 될 나라입니다. 다시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종말적인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가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바꿔 쓸 수 있는 말이 있습니다. 본문 23절에 나오는 “구원을 받는”이란 말입니다. 또 성경에서 구원과 같은 개념으로 쓰인 단어들이 있습니다. 생명, 영생, 천국 등입니다. 사실 이들 개념은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이 개념들을 제외하면 기독교가 지탱될 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은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말씀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22절 ‘예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여행 중이셨습니다. 한 번 가시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여행입니다.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예수님은 오늘도 한 발자국씩 걸어가셨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계셨기에 걸음은 무겁고 마음은 착잡하셨을 겁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자신의 사명임을 아셨기에 내색하지 않고 걷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고개를 떨구거나 힘없이 걸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고개를 쳐들고 앞만 응시하고 걸으신 것이 아닙니다. 각 성과 각 마을에 다니사 가르치시며 걸으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제 몸 하나 추스르기 어려운 상황이었을 텐데도, 예수님은 각 성과 각 마을에서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위대한 사명자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나라의 사명을 띠고 앞으로 나아가는 주님의 삶을 보게 됩니다. 사명자는 사명을 가슴에 품고 사명을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사명자의 앞길에도 장애물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장애물도 사명자를 가로막을 수는 없습니다. 사명자는 그 장애물을 뛰어넘어 앞으로 나아갑니다. 뛰어넘기가 곤란하면 장애물을 우회해서라도 앞으로 나아갑니다. 우리는 사명을 너무 가볍게 여깁니다. 주께로부터 받은 사명이 얼마나 귀한지를 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좀 하다가 안 되면 중간에 그만 두어버립니다. 다분히 감정적입니다. 기분 좋으면 밤을 새워가며 합니다. 기분 나쁘면 연락두절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는지를 보세요. 예수님에겐 전 인류의 구속을 위한 십자가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사명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각 성과 각 마을에 있는 영혼들에게 복음 전하고 하나님나라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셨습니다. 우리는 엄청난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큰일을 하여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크게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사명은 꼭 엄청난 일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교회로부터 받은 일 전부를 사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일이 아무리 작아 보여도 귀한 사명인 줄 믿습니다. 볼품없어 보이는 일일지라도 귀한 사명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니까 남과 비교하지 마세요. 남이 하는 일을 부러워하지 마세요. ‘올해는 접고 내년에 잘해야지’ 하고 쉬겠다고 하지 마세요. 하루를 감당해도 성실하게 하세요. 무슨 일이든지 믿고 맡길 수 있도록 믿음을 심어주세요. 의지를 강하게 가지세요. 육체의 게으름과 나태에 스스로를 맡기지 마세요. 우리 육체는 뛰면 걷고 싶어지고, 걸으면 서고 싶어지고, 서면 앉고 싶어지고,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어집니다. 끝없이 편한 것을 찾는 것이 육체입니다. 육체에 지배당하지 마세요. 육체를 다스리세요. 육체적 한계를 뛰어넘으세요. 무엇보다 생활습관을 고쳐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는 생활방식으로 조정하세요. 환경적인 제약이 있겠지만 환경 탓으로만 돌리지 마세요. 습관을 단시일에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의지를 갖고 서서히 조정해 나가세요.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고쳐나가세요. 여러분, 신앙생활 하루 이틀하고 말 것 아니잖아요? 일생이 달린 문제입니다. 아니 영원이 걸린 문제입니다. 좋은 생활습관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좋은 신앙생활을 해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신앙생활을 하기에 유리하게 생활습관을 고쳐나가시기 바랍니다. 23절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예수님과 함께 길을 걷고 있는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이 질문을 했습니다. 참으로 심각한 질문이 심각한 자리가 아닌 곳에서 나왔습니다. 특별한 자리를 만들어 놓고 “자, 지금부터 질문을 하라”고 할 때 나온 질문이 아닙니다. 함께 길을 걸으면서 자연스럽게 나온 질문입니다. 일상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유대인들은 특별한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상적인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특별히 안식일을 중요시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뿐 아니라 6일도 중요시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특별한 것에 강한 성도가 아니라 일상적인 것에 강한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벤트성 제자가 아니라 일상적인 삶의 자리에서 제자로 살기 바랍니다. 훗날 우리가 주님 앞에서 주일날 어떻게 살았느냐로 평가받을 것 같습니까? 나머지 6일을 어떻게 살았느냐로 평가받을 것 같습니까? 제가 주일성수를 강조하지만 그게 기본이란 말이지, 그게 전부란 말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주일성수를 하는 목적은 주일성수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머지 6일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거룩성에 있어서 주일과 평일이 차이가 나는 것 같습니다. 주일의 삶과 평일의 삶을 다르게 사는 것 같습니다. 24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주님은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하는 질문에 구원을 얻는 자가 많다, 적다고 답하시지 않고 평소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원받는 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구원 받는 방법이 중요하다고 하신 겁니다. 여호와의 증인이나 신천지에서 말하는 144,000처럼, 또는 대학의 입학 정원제처럼 정원을 미리 정해 놓고 해당되는 숫자만큼 채워 넣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사실 하나님나라는 숫자와 상관없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천국이나 지옥은 아무리 많은 사람도 다 수용할 수 있는 크기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천국과 지옥은 공간적 개념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지옥은 만원일 테니까 나는 대충 믿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지 않겠나?’ 하고 생각하는 것은 위대한 착각입니다. 주님은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하나님나라는 들어가기를 힘쓰는 자에게 열려있다는 말입니다. 사실 이 땅위에 존재하는 정상적인 사람 중에 천국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을 부인하는 사람들조차도 지옥 가란 말을 듣고 기분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듣고 있자니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것 아닙니까? 천국에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들어가지 못할 자가 많다고 하십니다. 예수는 대충 믿으면서도 천국은 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겐 참 달갑지 않은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듣고 제대로 못 믿을 것 같으면 일찌감치 천국을 포기하란 말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의도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쉽게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리고 들어가기 위해서 힘쓰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해서라도 천국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겁니다. 천국은 있는 힘을 다 해서라도 꼭 들어가야만 합니다. 천국은 들어가도 되고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곳이 아닙니다.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들어가야 할 곳입니다.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꼭 들어가야 할 곳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문을 좁은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좁은 문은 신약성서에서 본문 외에 딱 한군데 나옵니다. 마태복음 7:13-14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좁은 문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지만 사람들이 찾고 선호하는 문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좁은 문보다 넓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숫자적으로도 적습니다. 주위를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아니 자기 입으로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도 넓은 문을 기웃거리거나 좁은 문과 넓은 문을 오락가락하거나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럼 왜 좁은 문입니까? 첫째, 거듭나야만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3:5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아무리 교회에 나온 지 오래 되었어도, 아무리 착하게 살았어도, 아무리 선행을 많이 했어도, 거듭나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으니 좁은 문 아닙니까? 둘째,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7:21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도,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도,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고도,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으니 좁은 문 아닙니까? 셋째, 자기 목숨을 잃어야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9:24절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예수님은 아무나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이용하여 자기 목숨을 연장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기로 하는 자를 구원하시니 좁은 문 아닙니까? 이걸 잘 알고 있었던 주기철 목사님은 이 노래를 부르며 순교했습니다. 1. 눈물 없이 못 가는 길 피 없이 못 가는 길 영문 밖에 좁은 길이 골고다의 길이라네 영생 복락 얻으려면 이 길만을 걸어야 해 배고파도 올라가고 죽더라도 올라가세 2. 십자가의 고개턱이 제 아무리 어려워도 주님 가신 길이오니 내가 어찌 못 가오랴 주님 제자 베드로는 거꾸로도 갔사오니 고생이라 못 가오며 죽음이라 못가오리 넷째, 나중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0:22절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한두 번 성령 충만 체험했다고 구원 얻는 것이 아니고, 한두 번 헌신했다고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 나중까지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으니 좁은 문 아닙니까? 24절을 다시 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들어가기를 힘쓰라”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나라는 구한다고 다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단순히 구하기만 해서는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 어떤 자가 들어갈 수 있습니까? 힘쓰는 자입니다. 여기서 “힘쓰라”는 말의 원어 ‘아고니조마이’는 문자적으로 ‘상을 위해 싸우다’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는 ‘무엇을 이루려고 노력하다’는 뜻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했으니까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는 걸 말씀하신 겁니다. 우리가 생각해온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5절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이제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그날 겪게 되는 장면입니다. 이 땅에서 구하면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날 구하면 이미 때가 늦습니다. 무엇이든지 때가 있습니다. 문 열릴 때가 있고 문 닫힐 때가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기회가 있습니다.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있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주일성수 할 수 있는 기회가 있고, 헌금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먼저 될 수 있는 기회가 있고, 제자 훈련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언제까지 그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그 기회가 무한정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가운데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야생 거위 떼가 겨울철을 따뜻한 곳에서 나기 위해서 남쪽으로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거위 떼 중에 어느 한 마리가 고개를 삐쭉 내리고 땅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어느 농가 뒤뜰에 날곡식들이 흩어져 있는 것을 보고 무리에서 이탈하여 혼자 내려와 곡식을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이 거위는 공중을 애써서 날아다니지 않아도 쉽게 곡식을 먹을 수가 있었기 때문에 농가에서 겨울을 지내고 내년 봄철에 자기 동료들이 북쪽으로 올라갈 때 그때 친구들을 따라가기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해 겨울철에 농가에서 먹을 것을 실컷 먹으며 편히 지냈습니다. 이듬해 봄철 어느 날, 친구 거위들이 소리를 지르며 북쪽 하늘로 날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거위는 날개를 펴서 날아가려고 했지만 겨우 내내 풍족하게 먹어서 몸이 뚱뚱해졌고 날개 운동을 몇 달 동안 안 해선지 날개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마음은 원인데 육신이 말을 듣지 않은 거지요. 그러자 이 거위는 생각을 달리 했습니다. ‘어차피 지금 북쪽으로 가면 가을철에 남쪽으로 다시 내려와야 하니까 이곳에 좀 더 있다가 가을철에 친구들이 남쪽으로 내려갈 때에 같이 가야지.’ 그러는 동안 거위는 나는 것을 잊어버렸고 농가에서 편히 주인이 주는 먹이를 먹고 살다가 자기가 하늘을 나는 거위인 것도 잊어버렸습니다. 그는 친구들이 가을철에 남쪽으로 날아갈 때에 하늘도 쳐다보지 않고 땅의 모이만 바라보며 닭처럼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얼마 있지 않아서 그 거위는 주인에게 잡혀서 식탁에 요리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기회를 놓쳐버린 거위의 최후를 보여준 이야기입니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저는 이 말씀을 대하면서 작시자가 알려져 있지 않은 찬송가 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오늘 예배찬송으로 부른 521장입니다. ‘구원의 문 닫힌 후엔 들어가고 싶으나 한번 닫힌 구원의 문 또 열려지지 않으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회가 항상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세요. 기회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여러분이 기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순종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전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헌신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바랍니다. 26절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계속해서 구원 얻지 못한 자들의 하소연을 들어보겠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항변했습니다.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성도들 간의 친교를 나눴다는 겁니다. 성도들끼리 서로 가까이 지냈다는 겁니다. 목회자 대접도 잘하고 어려운 믿음의 식구들도 잘 도와주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 가지고는 부족하다고 하십니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식구들 간의 교제가 중요합니다. 큰 일이 있을 때 서로를 돌아보는 것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영생을 가져다주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라는 말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라는 말에 비해 어딘지 좀 미치지 못한 것 같지 않습니까?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이 말은 주님의 가르침을 받은 것을 말합니다. 말씀을 들었다는 겁니다. 성경공부를 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교육받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공부 하는 재미에 빠지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배우는 재미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보세요. 주님은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까? 27절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구원의 문은 매우 좁습니다. 편하게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아닙니다. 줄만 잘 서면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아닙니다. 고통을 감수하고야 들어갈 수 있는 문입니다. 주님은 넓은 문으로 들어온 자들에게 매정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주님의 시선은 좁은 문을 통과하는 자들에게 있습니다. 주님의 시선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힘쓰는 자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좁은 문을 통과하는 여러분 위에 주님의 시선이 머물러 있기를 소원합니다. 28-29절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예수님은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손쉬운 구원을 생각하는 자들에게 직격탄을 날리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내세워 무조건 구원받게 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것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달리 말씀하십니다.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그들이 구원의 반열에서 탈락하게 되고 동서남북으로부터 온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동서남북으로부터 온 사람들이란 유대인들이 사람취급도 하지 않는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날 그들은 생각지도 못한 일을 당하고 침통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슬피 울며”의 원어 ‘클라우드모스’는 ‘위로할 길 없는 비참과 영원한 절망에 대한 울음’입니다. “이를 간다”의 원어 ‘브리그모스’는 ‘증오에 떠는 몸부림’을 말합니다. 한쪽에서는 통한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반면에 다른 한 쪽에서 하늘나라 잔치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이 두 경우 중의 하나에 처해지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가 택하는 것이 아니라 처해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천국을 잔치에 비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 22:2절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마 25:10절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눅 14:16절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계 19:9절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하늘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이라고 다 같은 게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3:15절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겨우 구원만 받은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지옥형벌은 면하였으나 부끄러운 구원을 받은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그는 좁은 문을 통과하긴 했으나 좁은 길을 걷지 못한 사람일 겁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라가긴 했으나 평생을 멀찍이 따랐던 사람일 겁니다. 그는 주의 몸 된 교회에 속하긴 했으나 헌신은 꺼려했던 사람일 겁니다. 그런 사람은 그날 면류관을 쓰고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과는 크게 대비될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죽어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천사가 그의 집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앞장 서 갔습니다. 천사는 좋은 집을 수없이 지나쳐 갔습니다. 그러더니 변두리에 있는 허름한 집으로 자기를 안내하였습니다. 그는 당황하며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이게 제 집입니까?” 그러자 천사가 대답하였습니다. “당신이 올려 보내준 것으로 그나마 이것도 어렵게 지었습니다.” 마 6:20절상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는 지혜로운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엔 면류관이 몇 종류 나옵니다. 저는 그중에서 그날에 생명의 관 쓸 수 있는 방법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10절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생명의 관은 주님께 죽도록 충성하는 자의 차지가 됩니다. 주님께 죽도록 충성하는 자 안에 저와 여러분이 들어가기를 바랍니다. 우리교회 성도들 중에 단 한 사람도 불 가운데서 얻는 것 같은 그런 부끄러운 구원을 얻지 않기를 바랍니다. 야고보서 1:12절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생명의 면류관은 주님께 죽도록 충성하는 자에게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도 약속하셨습니다. 사실 충성보다 앞서야 할 것은 사랑입니다. 주님께 충성하는 것보다 더 우선되어야 할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베드로에게 어떻게 하셨는지를 생각해 보세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사랑을 확인하신 후에 “내 양을 먹이라” 하고 충성을 요구하셨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이 여러분의 차지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30절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된 자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된 자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우리 중에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는 행복한 사람이 나오길 바랍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는 불행한 사람은 없길 바랍니다. 먼저 된 자가 먼저 되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먼저 된 자가 뒤쳐지지 않기 위해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경주를 먼저 출발하셨으면 먼저 도착하시기 바랍니다. 이솝 우화에 나온 토끼처럼 중간에 역전당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실 먼저 믿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다가 나중 믿는 자에게 추월당하는 것은 바람직한 모습은 아닙니다. 먼저 믿은 자가 먼저 되는 것이 바람직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교회 안을 들여다보면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는 자가 없지 않습니다. 먼저 믿어서 직분까지 받았지만 나중 믿은 사람에게 추월당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교회 성도 여러분, 모태 신앙인인 여러분, 교회 출석한지 오래되신 여러분, 이 시간 진지하게 주의 말씀 앞에 서 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혹 내가 거기에 해당되는 건 아닌지 스스로 진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낮잠을 자고 있었다면 깨어 다시 뛰기 바랍니다. 느지막하게 신앙생활을 시작하신 여러분,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의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지금은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종말적인 하나님나라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임한 하나님나라와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나라 사이에 있습니다. 그런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를 예수님이 가르쳐주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좁은 문을 통과하여 좁은 길을 끝까지 걸어가므로,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쓰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힘들고 고단한 현재만 보고 누구를 부러워하거나 시기하지 않게 하옵소서. 최후에 승리하는 자가 진짜 승리자인줄 믿고, 현재의 모습이 부족해도 매일 자신의 할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최후의 승리자를 꿈꾸며 나아가게 하옵소서. 이 땅에서도 의미 있게 살고,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들으며,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쓰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 눅 13:31-35
추석 명절을 잘 보내셨습니까? 추석 명절에 쫄쫄 굶은 조상귀신들이 모여 서로 신세를 한탄했습니다. 씩씩거리며 한 조상귀신이 말했습니다. “추석날 제사 음식 먹으러 후손 집에 가보니, 아, 글쎄 이 녀석들이 교통체증 때문에 처갓집에 갈 때 차 막힌다고, 벌써 지들끼리 편한 시간에 차례를 지내버렸지 뭔가? 가보니 설거지도 끝나고 다 가버리고 없었어.” 두 번째 분통터진 조상귀신이 말했습니다. “자넨 그래도 나은 편이여, 나는 후손 집에 가보니 집이 텅 비었더라구. 알고 보니 해외여행 가서 거기서 제사를 지냈다는 거야. 거길 내가 어떻게 알고 찾아가누?” 처음부터 찡그리고 앉은 다른 조상귀신, “상은 잘 받았는데 택배로 온 음식이 죄다 상해서 그냥 물만 한 그릇 먹고 왔어." 뿔난 또 다른 귀신, "나쁜 놈들! 호텔에서 지낸다기에 거기까지 따라 갔더니, 전부 플라스틱 음식으로 차려서 이빨만 다치고 왔네." 열 받은 다른 조상귀신이 힘없이 말했습니다. “난 말이야, 아예 후손 집에 가지도 않았어. 후손들이 인터넷인가 뭔가로 제사를 지낸다고 해서, 나도 힘들게 후손 집에 갈 필요 없이 편하게 근처 PC방으로 갔었지.” “그래, 인터넷으로라도 차례 상을 받았나?”“먼저 카페에 회원가입을 해야 된다잖아. 귀신이 어떻게 회원가입을 하노? 귀신이라고 가입을 시켜 줘야지! 에이 망할 놈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을 사는 형태를 따라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되는 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둘째, 자기 이익을 따라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셋째로, 사명을 따라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되는 대로 사는 사람은 아무런 생각 없이 살고 특별한 목적 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이런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자기 이익을 따라 사는 사람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하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하지 않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도 제법 많습니다. 사명을 따라 사는 사람은 사명에 따라 살고 사명에 따라 죽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사람이 가장 위대한 순간이 언제입니까? 어떤 것을 이루었을 때가 아닙니다. 자기 사명을 발견하는 순간입니다. 카를 힐티는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라는 책에서 행복의 원천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발견하는 날이다.”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22세 때 그의 일기에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온 세계가 무너진다 해도 내가 꽉 붙들고 놓을 수 없는 이념, 내가 그것을 위해서 살고 그것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사명을 나는 찾아야 한다.”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공하는 인간이 되기보다는 가치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사명을 깨달아야 한다.” 사람은 사명으로 삽니다. 사람은 사명이 살아있는 한 죽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아직도 살아있다는 것은 여러분에게 사명이 살아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사명이 무엇입니까? 영어로 사명을 미션(mission)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미씨오(missio)라는 라틴어에서 나왔습니다. missio는 보낸다는 뜻입니다. 사명이란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입니다. 나의 생애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사명입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소원이 사명입니다.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을 깨달은 사람은 존귀한 삶을 살 수 있지만, 그걸 깨닫지 못한 사람은 비천한 삶에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생애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소원이 무엇인지를 발견한 사람은 위대한 생애를 살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초라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에게 주신 사명을 발견해야 합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루라도 빨리 발견해야, 빨리 깨달아야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명을 빨리 발견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왜요? 인생이 길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명에 집중해서 살아도 인생은 길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명을 따라 살아도 인생은 짧기 때문입니다. 사명은 소명에서 나옵니다. 소명을 심으면 사명이 잉태됩니다. 그러니까 소명이 사명을 낳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소명을 떠나서 사명을 발견하려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그럼 소명이 무엇입니까? 소명이란 말 그대로 부르심입니다.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이 소명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 자리에 나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은 구원의 부르심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명의 부르심으로 연결됩니다. 곧 사역의 부르심이지요. 예수님은 그물질을 하는 베드로를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라 오라.” 이 첫 번째 부르심은 구원의 부르심입니다. 이어서 두 번째 부르심이 있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이게 사명의 부르심입니다. 이 사명의 부르심은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다시 한 번 확인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베드로가 사명자로 살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사명을 위하여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비록 무수한 어려움이 앞길에 진치고 있어도 내가 가야 할 길을 가겠다는 굳은 의지가 표현되고 있습니다. 작은 일에도 흔들리는 우리와 얼마나 대조되는지를 보세요.
31절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본문은 일단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나와서 헤롯왕의 음모를 알려주면서 헤롯의 영지를 벗어나 떠나라고 권고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바리새인들의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지를 좀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지금 취하고 있는 행위에 어떤 동기가 작용하고 있는지 몇 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를 초대한 바리새인들도 있었던 것에 비추어 볼 때 이 바리새인들은 선의로 예수를 염려하여 피신을 종용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중립적인 입장에서 헤롯의 의사를 간접적으로 전달해 주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곧 헤롯은 세례 요한을 죽인 경험도 있고 해서 예수를 죽일 의사는 없었으나, 헤롯 자신이 관할하는 지방의 사회적 안정을 원했고, 예수로 인하여 소요가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리새인들로 하여금 위협용 정보를 알리게 하여 예수님 스스로 그 지역에서 떠나게 하려 하였다는 것입니다. 셋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 대한 적극적인 악의를 가지고 헤롯과 합세하여 예수를 쫓아내려는 의도에서 정보를 제공해 주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실제로 어느 것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헤롯이 예수님을 고운 시각으로 보지 않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세례요한이 죽고 나서 이제 성가신 존재가 없어졌나 싶었는데, 또 예수란 사람이 나타나 심기가 편하지 않았을 겁니다. 32절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말을 듣고 거친 표현을 사용하여 말씀하십니다. 헤롯에 대해 뭐라고 하셨어요? “저 여우”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여우는 간교하고 교활한 짐승입니다. 그래서 고대 랍비들의 문헌에도 여우를 간교함의 대명사로 기록했습니다. 사실 헤롯은 교활하고 간사한 사람입니다. 그는 에돔 사람이면서 사마리아인 사이에서 태어났고, 유대교인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이교도의 생활을 하는 자였습니다. 로마 황제에게 가서 온갖 아첨과 아부를 떨어 정권을 잡았고, 용병의 후원으로 통치하는 자였습니다. 춤추는 탕녀를 즐겁게 하기 위하여 가장 훌륭한 선지자를 죽였던 자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동생의 아내를 꾀어 자기 아내를 삼은 못된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헤롯에게 직격탄을 날리신 셈입니다. “아 그래요, 생각해줘서 고마워요” 하고 조용히 넘어갈 법도 한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헤롯에게 일부러 빌미를 제공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건 설사 헤롯이 그렇게 나온다고 해도, 나는 헤롯의 협박에 굴하지 않고 담대히 내 길을 가겠다고 하는 주님의 엄숙한 선언입니다. 헤롯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보세요.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여기서 오늘과 내일, 그리고 제삼일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문자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과 내일, 제 삼일을 오늘, 내일 그리고 모레, 곧 3일 간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이 제3일에는 헤롯의 관내를 떠나신다는 뜻이 됩니다. 다음은 상징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현재를 말하고 내일은 그곳을 떠나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를 말하고, 제3일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후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자신의 생애를 완료하실 것을 말씀하신 겁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역을 오늘과 내일 마치신 후에 제삼일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공생애가 완성될 것을 미리 보고 있습니다. 미리 보는 것을 비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눈앞에는 당장에 십자가 죽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를 넘어서 부활의 비전을 보고 계십니다. 십자가의 치욕을 넘어서 부활의 영광의 비전을 보고 계십니다. 사명자에게 비전이 중요합니다. 아니 사명자에게 비전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사명자가 갖추어야 할 첫 번째가 비전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어떤 사람인 줄 아세요? 죽음을 초월한 사람입니다. 죽고 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무서운 사람이 또 있습니다. 비전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비전은 보는 것입니다. 남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다른 시각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전은 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능력이 있습니다. 비전은 한 사람의 엄청난 잠재력을 폭발시키는 도화선이 됩니다. 백여 년 전 미국 시카고에 대화재가 있었습니다. 모두가 비탄에 빠져 있을 때, 한 가게에 이런 공고가 나붙었습니다. “우리 가게가 이번에 몽땅 불에 타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비전은 아직 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일부터 정상 영업을 하겠습니다.” 현재의 상황이 어떠하냐는 것과 비전이 있느냐 없느냐는 것은 다릅니다. 어려운 때일수록 비전이 필요합니다. 비록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고 오막살이가 다 쓰러져 가더라도 비전이 있다면 그 집엔 희망이 있습니다. 그 비전으로 어려움을 이겨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틴루터 킹 목사님에 대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의 생일은 미국에서 경축일로 지켜지고 있습니다. 개인의 생일이 경축일로 지정되기는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 이후 두 번째입니다. 그만큼 킹 목사님의 위치가 미국민들에게 높이 평가된 것입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역사적 위인의 자리를 차지하게 만들었을까요? 그가 꿈과 비전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킹 목사님이 살던 시대는 미국의 흑인들이 사람대우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흑인들이 가는 식당과 백인들이 가는 식당이 따로 있었고, 버스를 타도 백인 좌석과 흑인 좌석이 따로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차별이 있는 힘든 상황에서 흑인인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꿈과 비전을 가졌습니다. 그의 유명한 연설 중의 일부를 인용하겠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현재나 미래에도 여전히 어려움을 겪어야만 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여러분들과 나눌 수 있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절망의 골짜기에서 빈둥거리지 맙시다. 나는 언젠가는 피 묻은 조지아주 언덕위에서, 옛적 노예의 아들들과 옛적 노예 소유주의 아들들이 형제애에 넘치는 밥상을 함께 앉아 있으리라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킹 목사님은 이 꿈을 이루기 위하여 비폭력투쟁을 하였습니다. 그는 언젠가는 피 묻은 조지아주 언덕위에서, 옛적 노예의 아들들과 옛적 노예 소유주의 아들들이 형제애에 넘치는 밥상을 함께 앉아 있으리라는 비전을 보았기에, 총에 맞아서 죽는 순간까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한 가난한 집의 다락방에서 밤하늘의 별을 보며 동화를 쓰던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일곱 살 때 구두수선공인 아버지를 잃고 나서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며 컸으나, 그의 가슴은 꿈과 비전으로 가득 차 그 어떤 환경도 이 젊은이를 불행하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비록 가난한 고학생이었으나 어린이들에게 ‘꿈과 세상의 아름다움’을 들려주는 것이 자기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글을 썼습니다. 이 사람이 그 유명한 동화 작가 안데르센입니다. 이처럼 꿈과 비전을 가진 사람은 어떤 악천후 속에서도 일어설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비전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누굽니까? 꿈이 없는 사람입니다. 미국 기독교계의 탁월한 지도자 존 맥스웰은 성공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의 차이점을 이렇게 간단하게 대비시켰습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삶의 목적이 있고 비전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꿈에 자극을 받아 그 꿈을 달성하기 위해 계속 앞으로 나가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보다 큰 꿈을 품고 그 꿈을 달성하기 위하여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현재만 보고 지금만 보는 사람들입니다. 오늘에 의해서만 자극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현실에 급급한 사람들입니다. 오늘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당장 필요한 것에만 심취하여 살아갈 뿐입니다.” 33절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지금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정치 지도자인 헤롯이 한편이 되어 예수님을 위협해오고 있습니다. 그건 단순한 위협이 아닙니다.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위협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담대하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라는 말씀에서 예수님이 오직 사명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이게 진정한 사명자의 모습입니다. 아무리 헤롯이 위협해도 예수님은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하십니다. 사명자의 앞에도 위험은 있습니다. 위협은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명자는 그 위험으로 인해 멈춰 서지 않습니다. 그 위협으로 인해 중도에 포기하지 않습니다. 비전이 사명을 이끌고 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할 것을 아셨습니다. 33절 뒷부분을 다시 보세요.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34-35절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그럼에도 예수님은 자기 사명의 길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명은 자신이 평생동안 꿈꾸어 왔던 사명이고 아버지께로부터 부여받은 평생사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것은 마지못해 지신 것이 아닙니다. 요한 10:18절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보세요.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 지신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을 자신이 해야 할 것으로 확신하셨기에 자발적으로 순종하신 것입니다.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에서 “이 계명”이란 자신이 하나님으로 받은 사명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그 길을 가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33절 앞부분을 보세요.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여기서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를 영어성경인 RSV에서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I must go on my way” 영어공부 조금 하겠습니다. “must”는 의무와 명령 그리고 필요를 나타내는 조동사입니다. “must”가 의무와 명령을 나타내는 조동사로 쓰이면 그 뜻은 ‘...하지 않으면 안 된다.’가 됩니다. “must”가 필요를 나타내는 조동사로 쓰이면 그 뜻은 ‘....해야 한다’가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무감을 가지셨고, 그래서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야할 필요를 느끼셨던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말고, 말이 아니면 탓하지 말라.”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고 한 것은 바른 길로 가라는 말입니다. 제대로 된 길로 가라는 말입니다. ‘바른 길’과 ‘제대로 된 길’을 말하는 것은 그릇된 길이 있다는 말입니다. 잘못된 길이 있다는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세상에는 길이 많습니다. 바른 길도 있지만 그릇된 길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길을 잘못 들어서 고생하고 허송세월을 보내지 않습니까? 길이란 목적지는 아닙니다. 목적지로 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길은 지나가야 하는 곳이지 머물 곳은 아닙니다. 길은 목표를 향하여 가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표와 길은 결코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영어에서 길을 “Way”라고 합니다. “Way”란 ‘길’이란 뜻 외에도 ‘방법, 행동, 풍습, 방향’ 등 여러 가지 뜻으로 쓰입니다. 그래서 길을 삶으로 바꾸어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성경에서는 길과 삶을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2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 너는 이 백성에게 전하라 하셨느니라.’ 사는 길이 있고 죽는 길이 있다는 말입니다. 축복의 길이 있고 저주의 길이 있다는 말입니다. 행복의 길이 있고 불행의 길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어떤 길이든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선택한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 길의 종착점에 이르러서는 후회해봤자 소용없습니다. 신앙의 위인들은 길을 잘 간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들이 가는 길에서 최선을 다한 사람들입니다. 비록 그 길이 힘들고 어렵다고 하여도 주저앉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욥을 보세요. 23:10절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은 자신이 가는 길을 오직 하나님이 아신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고통당함을 하나님이 아시기에 그 엄청난 역경 속에서, 친구의 비방에서,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아내의 독설에서도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순금같이 되어 나올 수 있었습니다. 바울을 보세요. 사도행전 20:24절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는 자기가 가야할 길을 발견하고 걸어가지 않았습니다. 걸어갈 수 없었겠죠. 부지런히 달려갔습니다. 그는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의 길을 전력 질주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길에 서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길을 걷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길을 달려가고 있습니까? 당연히 생명의 길이어야 합니다. 생명의 길이 어떤 길입니까? 주님이 가신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이요, 좁은 길입니다. 우리들 앞에 여러 개의 길이 있어도 우리는 하나의 길만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한번 선택하고 나면 쉽게 바꿀 수 없습니다. 오늘 선택했으면 내일도 그 길을 가야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을 살아가는 것으로 내일을 살고 내일을 살아가는 것으로 제3일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길에서 머무르지 말고 그 길을 계속 가야합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좁은 길이기에 세상에 한 눈 팔 수 없습니다. 자칫 한 눈 팔다가 천리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오직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만 바라보며 걸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먼저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발자국을 따라 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가야 합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의 친구가 경험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어릴 때 높은 산에 올라갔다가 그만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로키산맥에서 길을 잃는다는 것은 잘못하면 목숨을 잃는다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는 힘을 다하여 길을 찾다가 다행히 산 속의 오두막집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오두막집에는 한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노인이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젊은이, 산에서 길을 잃으면 사람들은 보통 아래로 내려가서 동리나 길을 찾겠다고 하는데 그것은 죽는 길입니다. 반대로 산 위로 올라가야만 사는 길이라오. 산꼭대기에서 자기가 서있는 위치를 파악하고 어디에 길이 있는지, 어느 쪽에 마을이 있는지 확인하고 내려가야 합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아가다가 순간적으로 길을 잃고 해매일 수 있습니다. 이리저리 방황할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이 무엇입니까? 눈을 들어 위를 보는 것입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입니다. 바로 보좌에 앉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한쪽 다리가 불편한 어머니 밑에서 자란 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시장 구석진 자리에서 나물을 팔아 그것으로 자신의 학비와 생계비를 벌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런 어머니가 싫었습니다. 그리고 가난을 증오했습니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학교로 왔습니다. 지난 밤 연락도 없이 친구 집에서 자고 학교로 바로 와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를 보고 친구들이 놀리기 시작했습니다. “야! 이민석 니네 엄마 병신이었냐?” 그러면서 어머니의 걸음걸이를 흉내 냈습니다. 그걸 본 다른 아이들은 신나게 웃어댔습니다. 화가 난 그는 친구를 정신없이 두들겨 패주고는 학교를 나와 버렸습니다. 그 날 저녁, 집에 갔더니 집 앞에서 낮에 자기에게 맞은 친구 엄마가 어머니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애비 없는 자식은 이래도 되는 거야? 못 배우고 없는 티내는 거야, 뭐야? 자식 교육 좀 제대로 시켜, 어디 남의 집 귀한 자식을 이렇게 만들어 놔. 엄마가 병신이니까 자식이 저렇지!” 그런 말을 듣고 있던 어머니는 시종일관 죄송하다는 말만 했습니다. 아들은 그러는 어머니의 모습이 죽도록 싫었습니다. 그래서 한마디 했습니다. “다시는 학교에 오지 마 알았어? 창피해서 죽는 줄 알았단 말이야.” 그러고는 한 마디를 덧붙였습니다. “차라리 엄마가 없었으면 좋겠어.” 이후 더욱 더 죽도록 공부했습니다. 그러고는 17년 후 그는 의사가 되었고, 처갓집에서 병원도 차려주었습니다. 그 동안 어머니에게 꼬박꼬박 생활비는 보냈지만 찾아가지는 않았습니다. 어머니라는 존재를 잊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길에 집 앞에서 어머니와 도우미 아주머니가 싸우는 것을 봤습니다. 전보다 훨씬 더 야윈 얼굴, 허름한 옷차림, 그리고 여전히 절뚝거리는 다리! 어머니는 아들을 보자 환히 웃으며 말했습니다. “민석아.” 그러자 그는 매정하게 말했습니다.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그러고는 돌아섰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매월 보낸 생활비가 모자라서 찾아온 것인가?” 하면서 괘씸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어머니를 보낸 후 밤에 잠이 오지를 않았습니다. 꿈에 어머니가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퇴근길에 어머니 계신 시장으로 갔습니다. 어머니는 한결같이 그 자리에서 채소를 팔고 계셨습니다. 그때 채소를 사려던 사람이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할머니는 자식이 없나요?” “아니요. 우리 아이는 큰 병원의 의사예요. 나보고 같이 살자 하고 일하지 말라는데, 내가 싫다고 했어요. 아직 건강한데 왜 자식 신세를 져요? 우리 아들 같은 사람은 세상에 둘도 없어요. 얼마나 효자인지 몰라.” 그것을 보고는 그냥 돌아섰습니다. 그러고 꼭 1년이 흘렀습니다. 그때 고교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어머니가 사망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급히 장례식장으로 갔더니 텅 빈 장례식장은 선생님이 혼자 지키고 계셨습니다. 그를 본 선생님은 보자기를 하나 내밀었습니다. 그 안에는 제법 많은 돈이 들어있었습니다. “돈 아닙니까?” “네 어머니가 너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어머니가 버신 돈, 네가 보낸 준 생활비를 다 모아둔 것이다. 어머니는 항상 너에게 미안해 하셨다. 나는 가끔 네 어머니의 말동무가 되어 드렸는데, 네게 전할 유언을 하시더구나.” 하면서 선생님은 아주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결혼 후 자식이 없던 부모님은 어느 날 버려진 작은 아이를 발견하고는 데려다가 키웠습니다. 그러면서 ‘늦게 얻은 자식’이라며 정말 기뻐했습니다. 당시 부모님은 공사 현장에서 일을 했는데,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서 항상 데리고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노는 위로 철근이 무너지는 사고가 일어났고, 그것을 본 부모는 동시에 아이에게 몸을 던졌습니다. 그 일로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한쪽 다리를 잃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아버지의 목숨과 어머니의 다리 때문에 살아남은 것이죠. 장애를 입은 채로 혼자가 된 어머니에게 사람들은 ‘아이를 고아원에 보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미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해진 아들을 버릴 수 없어서 끝까지 키웠습니다. 어머니는 암으로 사망했는데요. 사실 아들은 그 분야의 전문가였습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이 ‘아들에게 가서 치료를 받으라.’ 했지만 어머니는 행여나 아들에게 짐이 될까하여 가지 않았고, 그러다가 1년 전 잠시 아들을 찾은 이유는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줄 알고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 어머니에게 ‘사람 잘 못 봤다’고 말하면서 매정하게 돌아섰으니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어머니는 자신이 낳은 자식도 아닌데 아들을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기셨던 것입니다. 그 모든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어머니의 영정 사진을 보았습니다. 어머니는 여전히 잔잔한 미소로 웃고 계셨습니다. 아직도 자신을 사랑하신다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수도 없이 어머니를 버렸는데 어머니는 단 한 번도 나를 버린 적이 없으시구나!’하며 흐느껴 울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자신을 버린 자들을 사랑하여 그들을 대신하여 죽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오르시는 주님! 그 어떤 장애물도, 그 어떤 죽음의 구덩이라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가시는 주님! 사랑이 아니고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모습이지 않습니까?
34절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자신의 사랑을 몰라주고 오히려 죽이려 드는 예루살렘을 도저히 미워할 수 없어하시는 주님의 마음, 불러도 대답 없는 그들을 끊임없이 부르는 주님의 모습이 이 말씀 속에 있습니다. 지금 주님은 자기를 사랑해 주는 자들을 위하여 바삐 길을 가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배신자들, 그 사역에 장애만 되는 자들, 그리고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을 사랑하셔서 그 길을 가고 계십니다. 사랑으로 증오와 살해로 되갚는 자들 속으로 들어가고 계신 것이죠. 그들에게 죽어야, 비록 자신은 죽을지언정 그들과 우리를 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주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이 알고 느끼는 것보다 더 훨씬 크고 놀랍습니다! 이 놀라운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 사랑에 보답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인생길이 열릴 것입니다. 모든 장애물들이 사라질 것입니다. 혹시 요즘 신앙생활을 하면서 힘든 일을 겪고 있지 않습니까? 성가대를 감당하면서 실망스런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새벽기도를 계속 하면서도 침체의 자리에 머무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기독교는 일어나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일으키시는 분입니다. 죽은 지 나흘 째 되는 나사로를 일으키시고 38년 된 중풍병자를 향해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 5:8)하신 분입니다. 그 모든 낙담과 퇴보의 자리에서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불행의 자리에서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묶고 있는 결박을 풀고 힘차게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사명자로서 가야 할 길을 오늘, 내일, 그리고 제 3일까지 지치지 않고 힘 있게 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의 갈 길을 끝까지 가야 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포기하지 않고 우리의 길을 가야 합니다! “나는 내 길을 가리라!” 이것이 오늘 여러분의 결단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저희를 지금까지 사랑과 은혜로 보호하여 주시고 인도하여 주셨음을 감사드립니다. 이 은혜를 우리 모두가 다시 한 번 발견하고 우리 역시 내가 가야할 길을 바로 가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제자로, 예수 믿는 성도로, 예수님같이 인격을 갖추고,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